슌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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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슌텐은 16세기부터 실존 인물로 알려진 류큐의 군주로, 류큐 왕국의 공식 역사서인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1187년 류큐를 통일하고 왕위에 올랐다. 슌텐은 일본인 사무라이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의 아들로, 아버지의 유배 또는 표류로 인해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슌텐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텐손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며, 1237년 사망할 때까지 51년간 통치했다. 슌텐의 역사적 실존 여부는 논란이 있으며, 그의 이름은 일류동조론과 관련되어 일본과 류큐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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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슌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신성한 이름 | 손톤 (尊敦) |
| 거주 성 | 우라소에 성 |
![]() | |
| 왕조 정보 | |
| 왕국 | 추잔 (전설) |
| 왕조 | 슌텐 왕조 |
| 재위 기간 | 1187년–1237년 |
| 이전 통치자 | 불명 |
| 후임 통치자 | 슌바준키 |
| 개인 정보 | |
| 출생 | 기원전 1165년경, 우라소에, 오키나와 |
| 사망 | 1237년 |
| 부모 |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아버지), 오자토 아지의 여동생 (어머니) |
| 배우자 | 불명 |
| 자녀 | 슌바준키 |
2. 역사적 배경
류큐 왕국의 공식 역사서인 《주잔세이칸(中山世鑑)》에 따르면, 오키나와섬에는 천제(天帝)의 명으로 하계에 내려온 신 아마미키요(アマミキヨ)의 자손인 ‘텐손씨(天孫氏)’라 불리는 왕통이 25대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텐손씨는 신하에 의해 멸망당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때 우라소에의 안사(按司, 지방 호족)였던 슌텐이 선정을 펼쳐 천하를 통일하고 왕위에 올랐다.[1]
슌텐은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류큐 왕국의 공식 역사서에서는 슌텐을 추잔의 첫 번째 군주로 명명하고 있으며, 그의 기원과 통치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추잔 세이칸''에 담겨 있다. 역사서에 따르면 슌텐은 1165년경에 일본인 사무라이 미나모토노 타메토모(1139–1170)의 아들로 태어났다. 타메토모는 규슈 출신의 역사적 인물로 호겐의 난에 참전했으며, 미나모토 씨(源氏)가 다이라(平氏)가 지배하는 교토를 공격하는 데 실패한 후 이즈 국으로 유배되었다. 류큐 역사서는 타메토모가 유배를 갔거나 폭풍에 휩쓸려 오키나와 섬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잠시 동안 섬을 다스렸다. 오자토의 족장은 그의 딸을 타메토모에게 시집보냈고, 타메토모는 1165년경에 그의 아들 슌텐을 낳았다. 슌텐이 태어난 직후, 타메토모는 일본으로 돌아가 싸우기 위해 가족을 떠났고,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했다.
2. 1. 슌텐 왕조 성립 이전의 류큐
지금의 오키나와섬에는 천제(天帝)의 명으로 하계에 내려온 신 아마미키요(アマミキヨ)의 자손으로 ‘텐손씨(天孫氏)’라 불리는 왕통이 25대에 걸쳐 계속되다가 신하에 의해 멸망당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졌다.[68] 슌텐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슌텐 왕조를 열었다.2. 2. 슌텐 왕조의 성립 (1187년)
류큐 왕국의 공식 역사서인 《주잔세이칸(中山世鑑)》에 따르면, 오키나와섬에는 천제(天帝)의 명으로 하계에 내려온 신 아마미키요(アマミキヨ)의 자손인 ‘텐손씨(天孫氏)’라 불리는 왕통이 25대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텐손씨는 신하에 의해 멸망당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때 우라소에의 안사(按司, 지방 호족)였던 슌텐이 선정을 펼쳐 천하를 통일하고 왕위에 올랐다.[1]슌텐은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류큐 왕국의 공식 역사서에서는 슌텐을 추잔의 첫 번째 군주로 명명하고 있으며, 그의 기원과 통치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추잔 세이칸''에 담겨 있다. 역사서에 따르면 슌텐은 1165년경에 일본인 사무라이 미나모토노 타메토모(1139–1170)의 아들로 태어났다. 타메토모는 규슈 출신의 역사적 인물로 호겐의 난에 참전했으며, 미나모토 씨(源氏)가 다이라(平氏)가 지배하는 교토를 공격하는 데 실패한 후 이즈 국으로 유배되었다. 류큐 역사서는 타메토모가 유배를 갔거나 폭풍에 휩쓸려 오키나와 섬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잠시 동안 섬을 다스렸다. 오자토의 족장은 그의 딸을 타메토모에게 시집보냈고, 타메토모는 1165년경에 그의 아들 슌텐을 낳았다. 슌텐이 태어난 직후, 타메토모는 일본으로 돌아가 싸우기 위해 가족을 떠났고,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했다.
타메토모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슌텐과 그의 어머니는 우라소에에 정착했다. 그는 젊은 시절 재능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15세에 할아버지를 이어 우라소에의 ''안지''로 선택되었다. 17,000년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텐손 왕조의 24대 왕은 타락했고, 1186년에 그의 가신 리유에 의해 폐위되었다. 슌텐은 이듬해 리유에 대항하는 대중 봉기를 이끌었고, 오키나와의 모든 ''안지''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우라소에 성에서 통치했다고 전해지며, 그곳은 나중에 에이소와 삿토의 거주지가 되었다.

슌텐 왕통의 지배력에 대해서는 오키나와 제도(諸島) 전체에 미쳤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슌텐은 사실 지금의 우라소에 성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본도(本島)를 중심으로 한 많은 ‘안사’(즉 호족)을 거느린 안사주(按司主)였을 것으로 추측된다.[1]
2. 3. 슌텐 왕조의 멸망 (1260년경)
슌텐의 손자 기혼(義本) 대에 이르러 에이소(英祖)에게 양위하면서 3대 만에 막을 내렸다.[1]3. 슌텐의 생애와 업적
슌텐은 1166년 일본 헤이안 시대 무장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와 오키나와 오자토 안지(大里按司)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15] 슌텐의 아버지는 규슈 출신의 미나모토노 타메토모로 호겐의 난에 참전했으나, 미나모토 씨(源氏)가 다이라(平氏)가 지배하는 교토 공격에 실패한 후 이즈 국으로 유배되었다. 류큐 역사서는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유배를 갔거나 폭풍에 휩쓸려 오키나와 섬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자토 족장의 딸과 결혼하여 1165년경에 슌텐을 낳았다. 슌텐이 태어난 직후, 미나모토노 타메토모는 일본으로 돌아가 싸우기 위해 가족을 떠났고,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했다.
미나모토노 다메토모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슌텐과 그의 어머니는 우라소에에 정착했다. 슌텐은 젊은 시절 재능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15세에 할아버지를 이어 우라소에의 안지로 선택되었다.[27] 1186년, 텐손 왕조의 24대 왕은 가신 리유에 의해 폐위되었다. 슌텐은 이듬해 리유에 대항하는 대중 봉기를 이끌었고, 오키나와의 모든 안지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우라소에 성에서 통치했다고 전해지며, 그곳은 나중에 에이소와 삿토의 거주지가 되었다.
슌텐은 15세에 백성들의 추대로 우라소에(浦添)의 안지가 되었다.[27] 그 무렵, 슈리성에서 천손씨가 류큐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신하인 리유가 독이 든 술을 약이라고 속여 왕을 살해하고 스스로를 츄잔 왕이라 칭했다. 1187년, 슌텐은 22세에 이 사건을 알고 리유를 토벌하고 추잔 왕으로 즉위했다.[27]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슌텐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29] 『구양』에 의하면, 슌텐이 왕위에 오른 1187년경부터 하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30]
1237년, 슌텐은 재위 51년 만에 72세로 사망하고, 세자 슌바준키가 왕위를 계승했다.[41]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에는 슌텐과 그의 어머니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동굴(마키미나토 테라부의 가마)이 남아있다.[3]
3. 1. 출생과 성장
일본 역사서에 따르면, 슌텐은 1166년 일본 헤이안 시대 무장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와 오키나와 오자토 안지(大里按司)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15] 슌텐의 어머니는 "오자토 아지의 여동생"으로 전해지며,[15] "오자토"는 동쪽의 시마조에오자토(난조시 오자토) 혹은 서쪽의 시마지리오자토(이토만시 아자 오자토) 중 어느 지역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18][19]류큐 왕국의 공식 역사서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슌텐은 1165년경 일본인 사무라이 미나모토노 타메토모(1139–1170)의 아들로 태어났다. 규슈 출신의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헤이안 시대 말기 호겐의 난에 참전했으나, 미나모토 씨(源氏)가 다이라(平氏)가 지배하는 교토 공격에 실패한 후 이즈 국으로 유배되었다. 류큐 역사서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가 유배를 갔거나 폭풍에 휩쓸려 오키나와 섬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잠시 동안 섬을 다스렸다. 오자토의 족장은 그의 딸을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에게 시집보냈고, 1165년경에 슌텐을 낳았다. 슌텐이 태어난 직후,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일본으로 돌아가 싸우기 위해 가족을 떠났고,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했다.
미나모토노 다메토모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슌텐과 그의 어머니는 우라소에에 정착했다.
슌텐은 젊은 시절 재능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15세에 할아버지를 이어 우라소에의 ''안지''로 선택되었다.[27] 17,000년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텐손 왕조의 24대 왕은 타락했고, 1186년에 그의 가신 리유에 의해 폐위되었다. 슌텐은 이듬해 리유에 대항하는 대중 봉기를 이끌었고, 오키나와의 모든 ''안지''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우라소에 성에서 통치했다고 전해지며, 그곳은 나중에 에이소와 삿토의 거주지가 되었다.
3. 2. 슌텐의 통치 (1187년 ~ 1237년)
슌텐은 15세에 백성들의 추대로 우라소에(浦添)의 안지가 되었다.[27] 그 무렵, 슈리성에서 천손씨가 류큐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신하인 리유가 독이 든 술을 약이라고 속여 왕을 살해하고 스스로를 츄잔 왕이라 칭했다. 1187년(순희 14년), 슌텐은 22세에 이 사건을 알고 리유를 토벌하고 추잔 왕으로 즉위했다.[27]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슌텐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29] 『구양』에 의하면, 슌텐이 왕위에 오른 1187년경부터 하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30]
『중산세보』에서는 천손씨 왕통이 왕성을 슈리에 축조하고,[31] 슌텐과 그 후의 왕통도 슈리성을 거성으로 삼았다고 한다.[32] 그러나 슌텐 왕통은 우라소에 성을 거성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33] 슈리로 천도한 것은 삿토 왕통 혹은 삼산 통일 후의 제1쇼씨 왕통으로 보인다.[34]
슌텐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 오른쪽에 혹이 있어 오른쪽으로 머리를 묶었고, 즉위 후 백성들도 이를 본받아 기계(가타카시라)를 묶었다고 한다.[29] 이것이 류큐 남성의 머리 모양이 되었다.
1237년(가희 원년), 슌텐은 재위 51년 만에 72세로 사망하고, 세자 슌바준키가 왕위를 계승했다.[41]
3. 3. 슌텐 관련 유적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에는 슌텐과 그의 어머니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동굴(테라부 가마)이 남아있다.[3] 나하시에는 슌텐 왕조의 묘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3]4. 슌텐과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
《주잔세이칸》, 《오모로사우시》, 일본 측의 《진제이류큐기(鎮西琉球記)》, 소설 《진세쓰 유미하리즈키》 등에서는 슌텐이 호겐의 난 때 일본에서 쫓겨난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12] 스토쿠 상황 편에 섰다가 이즈로 유배당한 다메토모는 항해 도중에 풍랑을 맞아 지금의 오키나와섬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그곳에 정착해 호족이 되었다는 것이다.[12] 《주잔세이칸》에는 다메토모가 상륙한 곳에서 호족 오사토 안지(大里按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손톤(尊敦, 훗날의 슌텐)이며, 손톤은 15세에 우라소의 안지가 되어 천손씨 25세의 재위기에 모반을 일으켜 주잔왕이 된 리유를 토벌하고 22세에 제후들의 추대로 주잔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12] 이것이 류큐 왕국의 초대 국왕 슌텐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도 시대 작가 교쿠테이 바킨은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소설 《진세쓰 유미하리즈키》를 썼다.[45]
최근 유전자 연구를 통해 오키나와 주민과 규슈 북부 주민들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다카미야 히로시 삿포로 대학 교수는 조몬 시대 중기 후반부터 후기 이후로 10세기부터 12세기 무렵에 농경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했다고 지적하며(아사히 신문 2010년 4월 16일자), 근년의 고고학 등의 연구를 포함해 난세이 제도 주민들의 선조는 규슈 남부로부터 비교적 늦은 시기(10세기 전후)에 남하해 정주한 사람들이 주체가 되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키나와현 구니가미군 나키진촌의 운텐항은 타메토모가 '운을 하늘에 맡기고' 상륙한 장소라 하여 '운텐'이 되었다고 하며, 류큐를 떠난 타메토모를 슌텐과 그의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전해지는 우라소에시의 마키나토는 '기다리는 항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53] 그러나, '운텐'은 '쿠모케나(雲慶名)'에서, '마키나토'는 '마히나토(真比港)'에서 전음된 지명이며, 타메토모 전설에 의한 지명 유래설은 후세에 붙여진 것이다.[54]
4. 1. 일류동조론과 류큐 침략/병합
미나모토노 다메토모가 류큐 왕가의 시조라는 전설은 일본과 류큐의 기원이 같다는 일류동조론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었다. 이 이야기에 근거해 다이쇼 시대인 1922년에는 오키나와에 다메토모 상륙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1] 비석 겉면에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공 상륙지(源為朝公上陸之趾)'라고 새겨져 있고, 왼쪽 밑에는 이 비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탠 도고 헤이하치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1]1673년 류큐 왕국의 셋쇼(攝政)였던 하네지 츄슈는 자신의 저서에서 류큐인들의 조상이 일본에서 도래했다고 주장하며 일류동조론을 옹호했다.[1] 그는 류큐인과 일본인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언어가 다른 것은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
此国人生初は、日本より為レ渡儀疑無二御座一候。然れば末世の今に、天地山川五形五倫鳥獣草木の名に至る迄皆通達せり。雖レ然言葉の余相違は遠国の上久敷融通為レ絶故也|ko|이 나라 사람들의 시초는 일본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하여 말세(末世)의 지금에는 천지 산천의 오형오론(五形五倫)과 조수초목(鳥獣草木)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 통달한다. 오직 말의 나머지가 서로 다른 것은 먼 나라가 서로 오랫동안 통하지 못하여 끊어지게 된 까닭이다.일본어
이러한 일류동조론은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3]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는 역사 교과서에서 다메토모가 오키나와로 가서 슌텐이 섬을 통일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기록했다.[4] 1899년 역사학자 幣原坦|ko|타이라 시데하라일본어는 이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묘사했고, 1904년 시가 시게타카는 지리 교과서에서 쇼 왕조가 슌텐과 타메토모와 혈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지지했다.[4] 1922년 내무성은 슈리성 부지에 신토 오키나와 신사를 설립하도록 승인했다. 이 신사는 지역 신 대신 타메토모, 슌텐,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 왕인 쇼 타이에게 헌정되었다.[4]
그러나 1950년대에 주로 저술 활동을 한 역사학자 나카하라 젠추는 슌텐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그가 "오모로"에서 이름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카하라는 그의 이름이 "물에 잠긴 논"을 의미하는 일본어 ''수이덴''에서 파생되었다고 이론화했다.[5] 2020년 요시나리 나오키는 슌텐 전설이 1188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대의 침공 이후 키카이지마에 있던 일본 상인 집단이 오키나와로 이동한 기억을 나타낸다고 이론화했다.[5]
5. 슌텐에 대한 평가와 의문점
슌텐에 대한 이야기는 1400년경 규슈 남부와 서부에서 전해지던 민담에서 유래하여 오키나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1500년대 초에 처음으로 편찬된 오키나와 민요와 구전 설화 모음집인 오모로 소시에 등장한다. 오모로는 제2 쇼 왕조의 통일 류큐 왕국의 초기 왕인 쇼 신이 이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1520년대 후반, 겟슈 주케이를 포함한 류큐 사절단은 이 이야기를 일본에 다시 전파했다. 겟슈 주케이는 이 이야기를 기록했고, 이는 수십 년 동안 고잔 선 승려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침공 때, 난포 분시는 슌텐이 규슈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침공을 정당화했다.
에도 시대 소설가 타키자와 바킨의 椿説弓張月|친세쓰유미하리즈키일본어는 일본 전역에서 타메토모 전설을 대중화했고, 류큐에 대한 일본의 관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 역사 교과서는 타메토모가 오키나와로 가서 슌텐이 섬을 통일했다고 가르쳤다. 1899년 역사학자 幣原坦|다이라 시데하라일본어는 이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했고, 1904년 시가 시게타카는 지리 교과서에서 쇼 왕조가 슌텐 및 타메토모와 혈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906년 카토 산고는 이 이야기가 쇼 쇼켄이 추잔 세이칸에서 만들어낸 날조라고 비판했다. 1908년 역사학자 키쿠치 유호는 "류큐와 타메토모"에서 슌텐과 타메토모 관련 유적을 언급하며 반박했고, 이 전설이 조상 숭배 전통을 통해 살아남았으며 왕국의 일본 기원이 1879년 합병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내무성은 슈리성 부지에 오키나와 신사를 설립하도록 승인했다. 이 신사는 지역 신 대신 타메토모, 슌텐,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 왕 쇼 타이를 모셨다.
5. 1. 슌텐의 역사적 실존 여부
슌텐의 역사적 실존을 증명하는 확실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1] 슌텐 왕조 역시 실존하지 않는 전설상의 왕조로 여겨진다.[9][10] 하지만, 16세기 류큐 왕국의 공식 문서에 슌텐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577년에 류큐 왕조가 세운 국왕송덕비(國王頌德碑)나 우라소에성(浦添城) 앞에 1597년에 세워진 비문에 슌텐이라는 이름이 나타나, 16세기에는 이미 실존 인물로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1]이파 후유는 『오키나와 역사 이야기』에서 1522년 (가정 원년)의 "국왕 송덕비(석문지동지 비문)"의 비문을 실존하는 인물로 해석하고, 슌텐 왕조 성립부터 건립까지 약 3세기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슌텐의 사적이 전설화되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전승되었다고 보았다.[11]
기샤바 가즈타카에 따르면, 슌텐의 활동 시기가 오모로의 성행기인 13세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조의 시조가 오모로에서 성왕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슌텐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은 슌텐의 실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1543년 (가정 22년)의 "국왕 송덕비(카타노하나의 비)"에 "대 류큐국 중산왕 상청은, 손톤으로부터 이래 21대 왕의 어위를 계승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어, 실존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고 한다.[12]
1950년대에 주로 활동한 역사학자 나카하라 젠추는 슌텐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그가 "오모로"에서 이름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카하라는 그의 이름이 "물에 잠긴 논"을 의미하는 일본어 '수이덴'에서 파생되었다고 추정했다. 2020년, 요시나리 나오키는 슌텐 전설이 1188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대의 침공 이후 키카이지마에 있던 일본 상인 집단이 오키나와로 이동한 기억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 날짜는 슌텐의 섬 통일 날짜로 알려진 1187년과 거의 같다.
5. 2. 슌텐 전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
슌텐 전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12세기 후반 규슈 지역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영한다는 주장이 있다. 슌텐의 이름이 '물에 잠긴 논'을 의미하는 일본어 '스이덴(水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역사학자 나카하라 젠추는 슌텐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그가 "오모로 소시"에서 이름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카하라는 그의 이름이 "물에 잠긴 논"을 의미하는 일본어 ''수이덴''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했다. 2020년, 요시나리 나오키는 슌텐 전설이 1188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대의 침공 이후 키카이지마에 있던 일본 상인 집단이 오키나와로 이동한 기억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 날짜는 슌텐의 섬 통일 날짜로 알려진 1187년과 거의 동일하다.
「슌텐(舜天)」이라는 이름은 「슈리의 왕」이라는 의미의 「슈리텐(首里天)」에서 연상된 것으로 보이며, 신호인 「손톤(尊敦)」도 그와 비슷한 음으로 여겨진다.[3] 또한,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순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4]
6. 슌텐 관련 창작물
교쿠테이 바킨이 에도 시대에 쓴 소설 진세쓰 유미하리즈키는 미나모토노 다메토모가 류큐 왕국으로 건너가 슌텐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59][60]
6. 1. 소설 『진세쓰 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
에도 시대 작가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은 미나모토노 다메토모가 류큐 왕국으로 건너가 슌텐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소설 『진세쓰 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를 창작했다.[59][60] 바킨은 서보광의 『중산전신록』과 모리시마 추리ょう의 『류큐담』 등을 참고하여 류큐를 이국적인 정취가 있는 무대로 설정하고, 『수호전』의 이준이 샴에서 국왕이 된 이야기를 타메토모에 맞게 변형하여 슌텐마루가 류큐를 다스리는 내용을 구상했다.[60][61]『진세쓰 유미하리즈키』에서 슌텐마루는 타메토모와 아다 타다쿠니의 딸 시라누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타메토모의 신하인 키노 헤이지에게 양육되었다.[62][64] 슌텐마루는 10세에 이미 키노 헤이지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했으며,[65] 류큐 국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요승 모운을 물리치고,[64][67] 분지 3년(1187년) 음력 12월 15일 17세에 주산왕에 즉위하여 슌텐왕이라 칭했다.[56] 슌텐왕은 선정을 베풀어 류큐는 태평성대를 이루고 백성들은 번성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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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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