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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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한호는 1783년에 생원이 되고 17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지냈다. 1800년 이조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했으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지지하다 파직되어 유배되기도 했다. 1804년 대사간에 복직하고 강원도관찰사,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빈객을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중추부판사 재임 시에는 서얼의 등용을 주장했다. 김조순과 함께 당대의 권력자로 칭송받았으며, 1827년에 사망하여 정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한호는 1783년에 생원이 되고, 17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지냈다. 1800년 이조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했다.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지지했다가 파직되어 안주에 유배되었으나,[1] 1804년 대왕대비의 동의하에 대사간에 복직,[2] 1805년 강원도관찰사,[3]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빈객을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중추부판사 시절에는 서얼 등용을 주장하여 서자도 조정에 출사할 수 있게 하였다.[4] 그는 인품이 소박하고 자손이 많아 복인(福人)으로 불렸다.[5]
임한호는 안동 김씨 세도가인 김조순과 함께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칭송받았으며, 사후 정간(正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6]
2. 생애
2. 1. 관직 생활
1783년에 생원이 되고, 17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지냈다.[1] 1800년 이조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주장하여 파직되어 안주에 유배되었다.[1] 1804년 대왕대비의 동의하에 대사간에 복직되었고,[2] 1805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3] 이후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빈객을 지내고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중추부판사에 제수된 후에는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여 서자도 조정에 출사할 수 있게 하였다.[4]
2. 2. 정치적 격변과 유배
1800년 이조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지지하는 주장을 하여 파직되고 안주로 유배되었다.[1] 1804년 대왕대비의 동의를 얻어 대사간에 복직하였고,[2] 1805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3]
2. 3. 서얼 등용 주장
1783년(정조 7)에 생원이 되고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를 지냈다. 중추부판사로 재직할 때 서얼 등용을 주장하여 서자도 조정에 출사할 수 있게 하였다.[4]
3. 사후 평가
3. 1. 당대 평가
김조순과 더불어 당대의 권력자로 칭송받았으며, 인품이 소박하고 자손이 많아 복인(福人)으로 불렸다.[5] 1827년에 죽고 정간(正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6]
참조
[1]
서적
조선왕조실록 순조 5권, 3년(1803 계해 / 청 가경(嘉慶) 8년) 6월 11일(갑술) 1번째기사
[2]
서적
조선왕조실록 순조 6권, 4년(1804 갑자 / 청 가경(嘉慶) 9년) 8월 24일(경진) 3번째기사
[3]
서적
조선왕조실록 순조 7권, 5년(1805 을축 / 청 가경(嘉慶) 10년) 4월 1일(갑인) 2번째기사
[4]
서적
조선왕조실록 순조 26권, 23년(1823 계미 / 청 도광(道光) 3년) 9월 9일(갑술) 1번째기사
[5]
서적
조선왕조실록 순조 29권, 27년(1827 정해 / 청 도광(道光) 7년) 10월 15일(정해) 1번째기사
[6]
서적
조선왕조실록 순조 32권, 32년(1832 임진 / 청 도광(道光) 12년) 4월 5일(신사)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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