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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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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덕수 피살 사건은 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둘러싼 우익 진영의 분열, 암살 용의자들의 한국독립당 연루, 김구의 배후 연루 의혹 등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미군정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김구가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관련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우익 진영의 갈등 심화, 미군정의 정치 개입, 정치 테러의 악순환 등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및 경과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개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우익 진영은 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놓고 분열되었다. 특히 이승만한국민주당(한민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자 우익 진영은 참가 여부를 두고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가 문제로 방문한 한민당 장덕수에게 참가를 보류할 것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1] 6월 4일에는 반탁 진영 대표자 대회가 열렸는데, 참가와 불참 여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당시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다음과 같다.[2]

단체대표
한국민주당장덕수
대한노총전진한
청년총동맹유진산
전청(全靑)이성수(李成株)
전여총맹(全女總盟)황애덕(黃愛德)
독촉부인회박승호(朴承浩)
천도교보국당이진해(李鎭海)
기미독립(己未獨立)류홍
유도회(儒道會)이재억(李載億)
황해회(黃海會)함석훈(咸錫勳)



이승만은 5호 성명[3]에 서명하고 미소공위에 참가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하겠다는 것은 신의를 무시하는 행위라며 한민당을 비판하였다.[4] 6월 10일, 한민당은 다시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 진영의 참가를 권유하였다.[5] 6월 20일, 한민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권위를 앞세운 임정수립대책협의회(임대협)를 구성하여 우익 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독려했다.[6] 그러나 한국독립당 등 임시정부 측은 임대협 참여를 거부하였다.[7]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선언했으나, 6월 22일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내분이 발생하여 3당으로 분열되었다. 안재홍·박용희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분리 결성하고 임대협에 합류했다.[8][9] 결국 우익 진영은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임대협 가입 단체, 이승만·김구 계열, 유림 계열의 3파로 분립하였다.[9]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는 자택인 청설장(聽雪莊)을 방문한 박광옥(朴光玉), 배희범(裵熙範)에게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10] 박광옥은 종로경찰서 경사였고,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이자 초등학교 교사였으며,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2. 1. 당시 사회상 (1947년)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개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는 극심한 이념 대립과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특히 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놓고 우익 진영은 분열되었으며, 이승만한국민주당(한민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장덕수 암살의 정치적 동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2. 1. 1. 미소공위 참가 논쟁과 우익 분열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 진영은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방문한 한국민주당 장덕수에게 참가를 보류할 것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1] 6월 4일, 반탁 진영 대표자 대회가 열렸는데 참가와 불참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 이때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다음과 같다.[2]

단체대표
한국민주당장덕수
대한노총전진한
청년총동맹유진산
전청(全靑)이성수(李成株)
전여총맹(全女總盟)황애덕(黃愛德)
독촉부인회박승호(朴承浩)
천도교보국당이진해(李鎭海)
기미독립(己未獨立)류홍
유도회(儒道會)이재억(李載億)
황해회(黃海會)함석훈(咸錫勳)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3]해야 하는데,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하기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 서명해서 (신탁통치를) 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국민주당을 비판하였다.[4] 6월 10일, 한국민주당은 다시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 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권유하였다.[5] 6월 20일, 한국민주당은 우익 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권유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권위를 앞세운 임정수립대책협의회(임대협)를 구성하였다.[6] 한국독립당 등 임시정부 측은 임대협 참여를 거부하였다.[7] 그러자 6월 22일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한국독립당 내에 의견 차이가 생겨 3당으로 분열되었다. 즉 한국독립당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안재홍·박용희(朴容羲)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분리 결성하고 임정수립대책협의회에 합류했다.[8][9] 이렇게 우익 진영은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임대협 가입 단체, 이승만·김구 계열, 유림 계열의 3파로 분립하였다.[9]

2. 1. 2. 한국독립당(한독당) 내분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 진영은 분열되었다.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선언했으나, 이에 반발한 안재홍, 박용희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분리 결성하고 임정수립대책협의회에 합류했다.[8][9]

2. 2. 암살 사건 발생 (1947년 12월 2일)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가 자택인 청설장(聽雪莊)을 방문한 박광옥(朴光玉), 배희범(裵熙範)에게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10]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2. 3. 수사 및 재판 과정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피살 직후, 미군정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1947년 12월 23일 국민의회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애국자들이 검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12]

1948년 2월 26일, 윌리엄 F. 딘 군정장관은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을 장덕수 피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했다.[15]

2. 3. 1. 용의자 체포 및 신원

1947년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장덕수 암살 혐의로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11] 박광옥은 종로경찰서 경사였고, 배희범은 연대상과 2학년이자 초등학교 교사였다. 1948년 1월 16일 장택상 수도청장은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같은 혐의로 체포하였다.[13]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2. 3. 2. 김구 연루 의혹과 미군정 재판

1948년 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개 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 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했다.[16] 김구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17]

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 재판 위원회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의로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하였다.[18] 같은 날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며, "김 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라고 말했다.[19]

1948년 3월 12일 김구는 미군 군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심문을 받았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김구는 심문에서 "선생의 제자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라는 질문에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됩니다."라고 답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또한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요?"라는 질문에는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단체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라며 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20]

1948년 3월 15일 오전 공판에서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 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암살범 박광옥은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부려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21] 미군정 라만 검사의 "애국자로서의 선생은 장덕수씨를 애국자로 생각했오?"라는 질문에 김구는 "張 개인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적은 없지만 환국이래 나와 같이 일한 사람이면 모두 애국자로 보니까 장씨도 애국자로 봤겠지요"라고 답했다.[22]

2. 3. 3. 피고인 진술과 판결

1948년 3월 15일 공판에서 배희범은 장덕수를 암살한 이유로 미소공위 참가, 일본 헌병대의 촉탁 국민총연맹 고문으로 학생들의 학병 장려 등 친일 행적을 들었다.[22]

1948년 3월 17일 제11회 공판에서 최중하는 대한혁명단이 원래 안재홍, 배은희, 장덕수를 암살하려 했으나, 안재홍은 남북통일을 제창하여 용서했고 배은희는 정치적 실력이 크지 않아 장덕수만 암살하기로 했다고 진술했다.[23]

1948년 4월 1일 제21회(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조상항(趙尙恒), 신일준(辛一俊), 손정수(孫禎洙), 김중목(金重穆), 최중하(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조엽(趙燁), 박정덕(朴鼎悳)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24]

1948년 4월 22일 존 하지는 군사위원회의 판결을 검토 후 박광옥 및 배희범의 사형 집행은 보류하고, 김석황·신일준·김중목·최중하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조상항 및 손정수의 사형은 10년형으로, 조엽 및 박정덕의 10년형은 5년형으로 감형했다.[25]

3. 암살의 배후와 동기

(암살의 배후와 동기에 대한 내용은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출력하지 않습니다.)

3. 1. 미소공위 참가와 정권 투쟁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놓고 우익 진영은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방문한 한국민주당 장덕수에게 참가 보류를 강경하게 주장하였다.[1] 6월 4일, 반탁진영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참가와 불참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 이때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다음과 같다.

단체대표
한국민주당장덕수
대한노총전진한
청년총동맹유진산
전청(全靑)이성수(李成株)
전여총맹(全女總盟)황애덕(黃愛德)
독촉부인회박승호(朴承浩)
천도교보국당이진해(李鎭海)
기미독립(己未獨立)류홍
유도회(儒道會)이재억(李載億)
황해회(黃海會)함석훈(咸錫勳)

[2]

이승만은 '공위에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3]하기로 되었은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하기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 서명해서 (신탁통치를) 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국민주당을 비판하였다.[4] 6월 10일, 한국민주당은 재차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 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5] 6월 20일, 한국민주당은 우익 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권위를 앞세운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6] 한국독립당 등 임시정부 측은 임대협 참여를 거부하였다.[7] 그러자 6월 22일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한국독립당 내에 이견이 생겨 3당으로 분열되었다. 즉 한국독립당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안재홍·박용희(朴容羲)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분리 결성하고 임정수립대책협의회에 합류했다.[8][9] 이렇게 우익 진영은 미소공위 참가 여부 문제로 임대협 가입단체, 이승만·김구 계열, 유림 계열의 3파로 분립하였다.[9]

4. 사건의 영향과 역사적 의미

장덕수 암살 사건은 해방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장덕수한국민주당의 주요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정치적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사건은 반민특위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암살범 중 한 명인 박광옥은 친일 경찰 노덕술의 부하였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대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정치적 암살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다.

4. 1. 6.25 전쟁과 김석황의 죽음

김석황은 종신형으로 수감 중이었으나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북한군에게 살해되었다.

5. 기타 일화



장덕수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허정조소앙을 찾아가 "왜 설산을 죽였소"라고 항의했으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했다.[26] 장택상김구를 체포하려 했으나, 존 하지가 이를 저지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27]

미군정이 수사하여 밝힌 사실에 의하면 암살 명단에는 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는 물론 김준연, 윤치영 등 27명이 있었다고 하였다.[28] 이들은 대부분 한국민주당이거나 그와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만약 김구를 체포한다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하지에게 선언했다.[28]

5. 1. 허정의 항의와 조소앙의 반응

허정조소앙을 찾아가 "왜 설산을 죽였소"라고 항의하였으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였다.[26]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지만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26]"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

5. 2. 장택상의 김구 체포 시도

장택상장덕수가 암살되자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27]

미군정이 수사하여 밝힌 사실에 의하면 암살 명단에는 고하 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는 물론 낭산 김준연, 윤치영 등 27명이 있었다고 하였다.[28] 이들은 대부분 한민당이거나 그와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그럼에도 만약 김구를 체포한다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하지에게 선언했다.[28]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 군정청 경찰은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27]

5. 3. 암살 명단과 이승만의 반응

허정조소앙을 찾아가 "왜 설산을 죽였소"라고 항의하였고,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였다.[26] 한민당에서는 장덕수 암살범을 한독당 내지는 김구로 보았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지만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26]"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

장택상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27]'고 했다.

미군정이 수사하여 밝힌 사실에 의하면 암살 명단에는 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는 물론 김준연, 윤치영 등 27명이 있었다고 하였다.[28] 이들은 대부분 한민당이거나 그와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만약 김구를 체포한다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하지에게 선언했다.[28] 이 일로 한민당은 김구를 두둔하는 이승만에게도 석연찮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28]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 군정청 경찰은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27]'라고 했다.

참조

[1] 웹인용 한민당 장덕수 등, 공위문제로 이승만 방문 http://db.history.go[...] 1947-05-30
[2] 웹인용 반탁진영 대표자대회,미소공위대책위원회를 구성 http://db.history.go[...] 1947-06-04
[3] 문서 찬탁에 동의하는 서명
[4] 웹인용 이승만,공위에 대해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1947-06-09
[5] 웹인용 한민당,공위참가에 대해 성명서 발표 http://db.history.go[...] 1947-06-10
[6] 웹인용 한민당선전부,남북총선거에 의한 임정수립 주장 담화 발표 http://db.history.go[...]
[7] 웹인용 임정수립대책협의회, 공위양측대표에게 서한 발송 http://db.history.go[...] 1947-07-28
[8] 웹인용 한독당, 공위 참가여부문제로 3당으로 분립 http://db.history.go[...] 1947-06-22
[9] 웹인용 우익진영 공위참·불참을 계기로 3파로 분립 http://db.history.go[...] 1947-06-18
[10] 웹인용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 http://db.history.go[...]
[11] 웹인용 장덕수살해범 朴光玉 일당 체포 http://db.history.go[...]
[12] 웹인용 국민의회, 장덕수피살사건과 관련 애국자의 검거에 대해 유감표시 http://db.history.go[...]
[13] 웹인용 장택상, 장덕수살해 관련혐의로 한독당중앙위원 김석황 체포 http://db.history.go[...]
[14] 웹인용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http://db.history.go[...]
[15] 웹인용 딘, 장덕수사건진상 등 제문제 문답 http://db.history.go[...]
[16] 웹인용 장덕수 암살사건 1회 공개재판 개정 http://db.history.go[...]
[1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8] 웹인용 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 http://db.history.go[...]
[19] 웹인용 이승만, 김구의 장덕수살해사건 관련설 일축 http://db.history.go[...]
[20] 웹인용 김구, 장덕수암살사건 8회 재판의 증인심문에서 관련성 부인 http://db.history.go[...]
[21] 서적인용 내일을 위한 證言 : 許政回顧錄 샘터사 1979
[22] 웹인용 장덕수 살해사건 9회 군률재판 개정 http://db.history.go[...]
[23] 웹인용 장덕수살해사건 11회 군률재판 개정 http://db.history.go[...]
[24] 웹인용 장덕수살해사건 피의자 8명에게 사형 언도 http://db.history.go[...]
[25] 웹인용 장덕수살해사건 군률재판에 대한 하지의 특별조치 발표 http://db.history.go[...]
[26] 서적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7] 서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 기념사업회 1993
[28] 저널 反共 · 建國 에 寧日없던 나날 , 李承晩 , 光復主役 들의 8·15前後<特輯> 東亞日報社 197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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