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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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덕술은 1899년 울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 광복 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다 월남하여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 등을 역임하며 반이승만 세력 숙청 및 좌익 검거를 주도했다. 1948년 박성근 고문치사 사건으로 체포 위기에 놓였으나 도주했고, 반민특위 간부 암살을 모의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승만의 비호로 무죄 석방되었으며, 이후 헌병 중령으로 활동하며 육군 범죄수사단장 등을 지냈다. 1955년 뇌물수수로 파면된 후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했으며, 1968년 사망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여러 드라마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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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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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노덕술 |
현지어 표기 | 盧德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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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1899년 6월 1일 ~ 1968년 4월 1일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 (現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
본관 | 교하(交河)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 |
별명 | 호(號)는 해촌(海村) |
일본식 이름 |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
기타 이력 | 경상남도 울산보통학교 중퇴 경찰 겸 헌병 군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지휘 | 육군 제2범죄수사전단 예하 헌병대대장 |
복무 기간 | 1949년 ~ 1955년 (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
참고 자료 |
2. 생애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현 울산광역시) 장생포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 홋카이도에서 잠시 체류했다. 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 1945년 8월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지내다 소련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후 월남했다. 1946년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반이승만 세력' 숙청과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로 풀려났다. 1950년 헌병 중령으로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을 지내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했고,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뇌물수뢰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파면되었다.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에서 칩거하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경상남도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8년 4월 1일 사망했다.[1]
2. 1. 일제 강점기 (1899년 ~ 1945년)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제국 홋카이도에서 잠시 체류한 경험이 있다. 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순사로 임명되어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1]1924년 12월 경부보로 승진하여 1924년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를 거쳐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에서 근무하며 주로 사법 업무를 담당했다.[1]
동래경찰서 재직 시절(1928년 ~ 1929년)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 박일형, 혁조회 관련자 김규직, 유진홍 등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관련 동맹휴학을 주도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체포, 고문했다.[1]
1932년 5월 통영경찰서 재직 시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1]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성부 본정경찰서,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등에서 근무했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 군사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 등 일제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1941년 3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1]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4년 6월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하며, 조선흥행협회 이사,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 이사 등을 겸임, 군수품 수송에 협력했다.[1]
2. 2. 광복 이후 (1945년 ~ 1968년)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다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45년 말에 월남했다.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1]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붙잡은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됐다가 도주했다. 도주 중이던 1948년 10월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등과 함께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했다.[1]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아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1]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1]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이후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때 경상남도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1968년 4월 1일 사망했다.[1]
3. 논란 및 비판
노덕술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경찰 간부로 활동하면서 여러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독립운동가와 노동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다. 1928년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일형을 체포, 고문했고, 같은 해 부산제이상업학교 동맹휴교사건 관련자 김규직, 유진홍 등을 체포, 고문하여 김규직은 옥사했다.[1] 1932년에는 노동 운동가 김재학을 체포하여 고문했다.[1] 중일 전쟁 당시에는 군사 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 등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1]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인권을 탄압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8년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와 함께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15명 암살을 모의했고, 청부업자 백민태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 암살을 지시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와 국회프락치 사건 등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풀려났다.
또한, 1948년 7월에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을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유기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도주하기도 했다.
3. 1. 친일 행적
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 후,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를 거쳤다. 1931년에는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근무했다.[1]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 유진홍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1932년 5월에는 노동 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1]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를 거쳐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에서 근무했다. 양주경찰서와 개성경찰서 경부로 재직 당시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을 비롯해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하기 위한 각종 시국좌담회에 참석하고 지도하는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1941년 3월에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그해 6월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로 근무했다.[1]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에 임명되어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6월 전시체제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이외에 징병, 운송, 방공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찰기구가 개편되어 기존의 보안과가 수송보안과로 확대 개편되자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영화와 연극 등의 보급을 통한 사상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흥행협회' 이사를 지냈다.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 시 자동차 수송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의 이사를 지내면서 여러 대의 화물자동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1]
3. 2. 반민특위 활동 방해
1948년 10월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등과 함께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비호를 받아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했다.
3. 3. 권력 남용 및 인권 탄압
광복 후, 노덕술은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다가 소련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뒤 월남했다. 1946년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을 숙청하고 '좌익분자'를 검거하는 일을 주도했다. 같은 해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붙잡힌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버린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됐다가 도주했다. 도주 중이던 1948년 10월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등과 함께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고,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밝혀졌다. 하지만 이틀 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며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로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했다.
이후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다.
4.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5.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명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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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5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경남 울산군 을 | 무소속 | 1,744표 (4.24%) | 6위 | 낙선 |
참조
[1]
문서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악랄한 방법으로 고문한 친일경찰의 대명사이다. 전국 곳곳에서 자행한 악행 때문에 해방 후 가장 먼저 붙잡아 처단해야 하는 인물 1순위로 손꼽혔다.
[2]
저널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의 고향 울산.. 독립운동가 예우에 앞장서야
https://news.naver.c[...]
파이낸셜뉴스
201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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