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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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진산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제1공화국부터 제4공화국 시대까지 활동한 정치인이다. 1905년 전라북도 진산군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고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다. 해방 후 우익 청년 운동을 주도하며 반공 활동을 펼쳤으며,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7번 역임했다. 민주당, 신민당 등 야당에서 요직을 맡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온건한 노선으로 인해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으며, 1974년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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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유진산 |
본명 | 유영필 |
호 | 옥계 |
출생일 | 1905년 10월 18일 |
출생지 | 진산군 전라북도, 대한제국 |
사망일 | 1974년 4월 28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
사망 원인 | 결장암 |
본관 | 문화 류씨 |
배우자 | 김현신 |
자녀 | 아들 유한열 |
이름 (한국어) | |
한글 | 유진산 |
한자 | 柳珍山 |
한글 (본명) | 유영필 |
한자 (본명) | 柳永弼 |
한글 (호) | 옥계 |
한자 (호) | 玉溪 |
로마자 표기 | Yu Jinsan |
로마자 표기 (본명) | Yu Yeongpil |
로마자 표기 (호) | Okgye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신민당 |
당내 직책 | 대표최고위원 겸 명예고문위원 |
의원 선수 | 7 |
주요 경력 |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민주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신민당 총재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신민당 명예고문위원 |
학력 | |
학력 |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중퇴 |
가족 관계 | |
부 | 유경덕 |
모 | 김경하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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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유진산(柳珍山, 1905년 10월 18일 ~ 1974년 4월 28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옥계(玉溪)이다.
1905년 10월 18일 금산군에서 태어나[1] 3.1 운동 참여 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1] 이후 농민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 활동 등으로 수차례 투옥되어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1][5]
광복 후에는 우익 청년 운동을 이끌며 반공주의 노선을 걸었고,[1][5] 1949년 반민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다.[1][2]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을 시작으로 총 7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1][2] 민주당, 신민당, 신민당 등 주요 야당의 창당과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5][12]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온건 노선으로 인해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5] 두 차례의 진산 파동을 겪었다. 신민당 총재를 두 차례 역임하고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갖기도 했으며,[5] 말년에는 유신헌법 개헌 투쟁을 선언했으나[5] 1974년 4월 28일 대장암으로 사망했다.[5]
연도 | 주요 활동 |
---|---|
1905년 | 10월 18일 전라북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출생 |
1919년 | 3.1 운동 참여 |
1923년 | 보성고등학교 졸업 |
1924년 | 일본 와세다 대학 제일고등학원 입학 |
1929년 |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입학 |
1932년 | 학내 신흥과학연구회 활동으로 투옥 후 대학 중퇴, 귀국 후 쌍엽농민회 조직 |
1933년 | 중화민국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 활동 |
1934년 |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수감 |
1935년 | 『농민독본』 편집 참여, 농민운동 전개 |
1945년 | 광복 후 흥국사 조직, 백의사 가입, 대한혁신청년회 위원장,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부위원장 |
1946년 | 대한민주청년동맹 회장 |
1947년 | 청년조선총동맹 회장 |
1948년 |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 |
1949년 | 반민특위 위원 |
1951년 | 민주국민당 총무부장 |
1954년 | 제3대 국회의원 당선 (금산, 무소속) |
1955년 | 민주당 창당 참여, 초대 노동부장 |
1958년 | 제4대 국회의원 당선 (금산, 민주당), 민주당 원내총무 |
1960년 | 제5대 국회의원 당선 (금산, 민주당) |
1961년 | 신민당 창당, 간사장 취임 |
1963년 | 민정당 창당 참여, 제6대 국회의원 당선 (전국구, 민정당) |
1964년 | 제1차 진산 파동 (언론윤리위원회법 관련) |
1965년 | 민중당 창당 참여, 부총재 |
1967년 | 신민당 창당 참여, 부총재, 제7대 국회의원 당선 (영등포 갑, 신민당) |
1970년 | 신민당 총재 선출,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 회담 |
1971년 | 제8대 국회의원 당선 (전국구, 신민당), 제2차 진산 파동 (전국구 출마 관련)으로 총재직 사임 |
1972년 | 신민당 총재 재선출 |
1973년 | 제9대 국회의원 당선 (금산·대덕·연기, 신민당),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 회담 |
1974년 | 유신헌법 개헌 투쟁 선언, 4월 28일 대장암으로 사망 |
2. 1. 생애 초기
1905년 10월 18일 금산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1]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3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1] 귀국 후 농민 운동에 잠시 참여하다가 1933년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활동했다.[1][5] 이듬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고, 이후 만주에서 활동하려다 다시 체포되는 등 수차례 투옥되어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1][5]2. 1. 1. 출생과 성장
1905년 10월 18일 전라북도 진산군 단산면 읍내리(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유경덕(柳敬德), 어머니는 김경하(金敬夏)이다. 아명은 유영필(柳永弼)이었고, 호는 옥계(玉溪)였다. 같은 고향 출신인 임영신과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으며, 소년기에는 김현신(金賢信)과 결혼하였다.1912년 금산군 진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을 위해 가족과 함께 경성(현 서울특별시)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2학년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교내에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의 벽보를 붙인 사건으로 인해 1920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제적당했다.[9][5]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1]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일고등학원(早稲田第一高等学院일본어)에 입학하였고,[5] 1926년 와세다 대학 예과에서 영어를 공부한 뒤[9] 1929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政経学部일본어)에 입학하였다.[5] 그러나 대학 재학 중 학내 동아리 "신흥과학연구회" 활동이 일본 경찰의 의심을 사 '독서회 사건'으로 번졌고, 이로 인해 이치가야 형무소(市ヶ谷刑務所일본어)에 투옥되었다. 결국 1932년, 3학년 때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야 했다.[9][5]
귀국 후에는 쌍엽농민회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 1933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활동했다.[1][5] 1934년 중국 장시성 난창(南昌중국어)에서 한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5] 이후 만주 지역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한국으로 추방되었고, 광복이 될 때까지 투옥되었다는 기록도 있다.[1]
2. 1. 2. 학창 시절과 3.1 운동 참여
전라북도 진산군 단산면 읍내리에서 아버지 유경덕(柳敬德)과 어머니 김경하(金敬夏) 사이에서 태어났다.[5] 아명은 유영필(柳永弼), 호는 옥계(玉溪)이다. 같은 고향 출신인 임영신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으며, 소년기에 김현신(金賢信)과 결혼하였다.1912년 금산군 진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을 위해 가족과 함께 경성(현 서울특별시)으로 이주하였다.[5]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9] 이듬해인 1920년,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의 독립 만세 벽보를 교내에 붙인 사건으로 인해[5] 학교에서 제적(다른 자료에서는 자퇴[9])당했다.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1][5][9]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일고등학원(早稲田第一高等学院jpn)에 입학하였고,[5] 1929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早稲田大学政経学部jpn)에 입학하였다.[5][9] 대학 재학 중 학내 동아리인 '신흥과학연구회' 활동이 일본 경찰의 의심을 사면서[5] 1932년 이치가야 형무소(市ヶ谷刑務所jpn)에 투옥되었다.[5][9] 이 사건으로 인해 3학년 때[9]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야 했다.[1][5] 귀국 후에는 쌍엽농민회를 조직하여 농민 운동을 펼쳤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5]
2. 1. 3. 농민 운동과 독립운동
1929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에 입학했으나, 1932년 학내 동아리 "신흥과학연구회" 활동이 일제 경찰의 의심을 받아 이치가야 형무소(市ヶ谷刑務所)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5] 귀국 후 같은 해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했고, <농민독본>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그러나 그의 활동은 조선총독부 당국의 주목을 받아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1933년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5] 망명 후 장시성 난창(南昌)에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충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1934년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로 송환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5]
석방된 1935년부터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 《농민독본 農民讀本》 편집에 참여하면서 필명을 처음에는 진산(眞山)으로 사용하다가 이후 진산(珍山)으로 고쳤는데, 이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본명처럼 사용되었다. 이 시기 전진한(錢鎭漢), 김산(金山) 등과 함께 농민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조병옥(趙炳玉), 백관수(白寬洙), 장택상(張澤相) 등 민족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관계를 맺었다.[5]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1942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원으로 활동하였으나, 또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고, 일제 패망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2. 2.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후 석방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백의사에 가입하는 등 우익 청년 운동에 주력하며 여러 청년 단체를 이끌고 반공주의 활동에 앞장섰다. 이 시기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우익 청년 운동과 반공 활동 문단에서 다룬다.1949년에는 반민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청산에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친일 경찰 세력이 연루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음모사건의 암살 대상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10] 여러 차례 살해 위협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으나, 결국 이승만 정부의 방해와 압력 속에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되면서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자세한 내용은 반민특위 활동 문단에서 다룬다. 같은 해 3월 18일에는 고려역도구락부 창립에 참여하여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2] 1951년에는 민주국민당 총무부장을 맡았고, 1952년 6월에는 부산 정치 파동에 항의하는 '호헌구국선언대회'에 참가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산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2] 이후 제4대(금산, 민주당), 제5대(금산, 민주당), 제6대(전국구, 민정당), 제7대(영등포 갑, 신민당), 제8대(전국구, 신민당), 제9대(금산·대덕·연기,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내며 총 7선 의원이 되었다.
1955년 통합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초대 노동부장에 임명되었으며, 당내에서는 한민당 계열의 구파(舊派)에 속했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민주당 원내총무를 맡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총선에서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장면 정권 하에서 민주당 내 신구파 갈등이 격화되자, 1961년 2월 구파 동지들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고 간사장에 취임했다.[5] 하지만 5·16 군사 정변으로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고, 6월에는 정치자금 문제로 헌병대에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5] 1962년 3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군정 연장 선언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했다.[5]
1963년 정치 활동이 재개되자 민정당 창당에 참여했고, 같은 해 11월 제6대 총선에서 4선에 성공했다.[5] 1964년 8월 언론윤리위원회법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윤보선 등 당내 강경파와 충돌하여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법정 투쟁 끝에 11월 복당하는 파동을 겪었다(제1차 진산 파동). 1965년 5월에는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부총재를 지냈고,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여 창당된 신민당의 부총재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제7대 총선에서 5선에 성공했다.
1970년 1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유진오 등을 누르고 당 총재로 선출되어 제1야당을 이끌게 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가졌다.[5] 그러나 1971년 5월 제8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출마 대신 전국구 후보로 전환한 것이 당내 반발을 사면서 다시 파동을 겪었고(제2차 진산 파동), 선거 후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1972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다시 총재로 선출되었다. 1973년 2월 제9대 총선에서 7선에 성공했으며, 같은 해 박정희 대통령과 다시 단독 회담을 가졌다.[5] 1974년 유신헌법 개헌 투쟁을 선언하며[5] 정권과의 전면 대결을 예고했으나, 그해 4월 28일 대장암으로 사망했다.[5]
2. 2. 1. 우익 청년 운동과 반공 활동
1945년 광복 직후, 유진산은 우익 청년단체인 흥국사를 조직하여 당시 좌익 진영의 주요 단체였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해체시켰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대표자회의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데 관여했다.[5] 같은 해, 그는 우익 성향의 비밀결사 조직인 백의사에 가입했으며, 김일성과 강량욱 등을 제거하기 위해 청년 단원을 평양으로 파견하는 공작에도 참여했다.[5]1945년 10월에는 대한혁신청년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으며, 12월에는 이 단체를 이끌고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같은 해 12월, 김구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시작하자 유진산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전진한, 김두한 등과 함께 우익 성향의 노동운동 단체와 청년 단체에서 활동했다.
1946년 4월 9일, 좌익 청년 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내세운 우익 청년 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을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대한민청의 명예회장은 이승만이었다. 유진산은 김두한을 감찰부장으로 임명하여 활동했으나, 대한민청은 미군정으로부터 포고령 위반으로 해산 명령을 받았다. 이에 1947년 7월, 단체의 이름을 '청년조선총동맹'으로 바꾸고 회장을 맡아 반공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이승만의 청년 단체 통합 지시에 따라, 1948년 12월 서북청년단 등 다른 우익 청년 단체들과 함께 통합된 대한청년단에 합류했으며,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2. 2. 2. 반민특위 활동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나, 해당 조직은 곧 해체되었다.[2]2. 3. 정치 활동
해방 이후 청년 운동을 통해 정계에 입문하여, 제1공화국부터 제4공화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주국민당, 민주당,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 등 주요 보수 야당에서 활동하며 총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2] 민주당 구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며[12], 1961년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는 등 야권의 분열과 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군정에 대해 물리적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통한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온건 노선 때문에 강경파로부터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0년과 1972년 두 차례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갖기도 했다.[5] 말년에는 유신헌법 개정 투쟁을 선언했으나[5], 1974년 4월 28일 사망했다.[5]
2. 3. 1. 정계 입문과 초기 활동
해방 직후 청년 운동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45년 석방된 후 우익 청년단체인 흥국사를 조직하였고, 백의사에도 가입했다.[5] 같은 해 10월 대한혁신청년회를 설립하여 위원장을 맡았으며, 12월에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1946년 4월 대한민주청년동맹 회장(명예회장 이승만), 1947년 7월 청년조선총동맹 회장, 1948년 12월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을 역임하며 우익 청년 운동에서 활동했다.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이 조직은 곧 해체되었다.[2]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금산군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2] 1951년 민주국민당 총무부장을 맡았고, 1952년 6월 부산정치파동에 항의하는 '호헌구국선언대회'에 참가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산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2] 1955년 통합 야당인 민주당 발족에 참여하여 초대 노동부장을 맡았고, 당내에서는 한민당 계열의 구파에 속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하고 원내총무에 취임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 하에서 민주당 신구파 분당을 주도하여, 1961년 2월 신민당을 창당하고 간사장에 취임했다.[5]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3선에 성공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그는 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보다는 야당으로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대결을 주장했다. 유진산은 "군인들이 시퍼런 칼을 들고 나섰으니, 우리들은 광목을 몇 필이고 풀어 그 시퍼런 칼을 둘둘 감아 무디게 해야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6월, 민주당 신파 오위영의 정치자금 관련 혐의로 헌병에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5]
1962년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정치활동정화법' 시행으로 정치활동 금지 대상이 되었으나, 같은 달 박정희의 3·22 군정 연장 성명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했다.[5] 1963년 5월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여 김병로를 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했고[5], 그해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4선에 성공했다.
2. 3. 2. 야당 정치인과 민주당 창당
해방 직후 청년 운동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제1공화국부터 제4공화국 시대까지 민주국민당, 민주당,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 등 보수 야당에서 활동하였다. 1951년 민주국민당 총무부장을 역임했고, 1952년 6월 부산정치파동에 항의하는 '호헌구국선언대회'에 참가했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금산군에서 무소속으로 처음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하였다. 1955년 통합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9월 18일 민주당 중앙상무위원과 초대 노동부장[11]에 선출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한민당 계열의 구파에 속해 활동하며 구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고, '구파의 대부'로 불렸다.[12] 그러나 유진산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타일을 보였다. 1956년에는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다.
1958년 6월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금산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재선되었고, 선거 후 당 원내총무에 취임하였다. 1959년 윤보선이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에서 구파 후보로 당선되자, 유진산은 조병옥 사후 구파의 새로운 리더로 윤보선을 적극적으로 추대하였다.[12] 당시 윤보선은 구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했다.[12]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진산은 같은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총리 서리로 지명되었던 김도연이 인준 부결로 낙마하자, 장면 내각 출범 과정에서 신파와 대립하며 민주당의 신구파 갈등을 심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5].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금산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3선에 성공하였다.
1961년 2월, 제2공화국 집권당인 민주당 내 구파 세력은 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유진산은 신민당 간사장에 취임하였다.
유진산은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대결 일변도였던 당시 정치 풍토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온건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 때문에 반정부 투쟁을 강조하던 강경파 정치인들로부터 종종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3. 3. 신민당 창당과 5.16 군사 정변
1960년 4·19 혁명 이후 출범한 장면 정권 하에서 유진산은 민주당 내 신구파 분열을 주도했다.[5] 1961년 2월, 제2공화국 여당인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 세력은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유진산은 이 당의 간사장으로 활동했다.그러나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면서 정치적 격변기를 맞았다. 같은 해 6월, 유진산은 민주당 신파의 실력자였던 오위영의 정치자금 문제와 연루되어 헌병에 연행되었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5] 1962년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 정치활동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산은 박정희의 3·22 군정 연장 선언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며 군정에 저항하는 입장을 보였다.[5]
2. 4. 생애 후반
1945년 광복 후 석방된 유진산은 우익 청년단체인 백의사에 가입하였다.[1] 그는 대한혁신청년회, 대한민주청년동맹 등 여러 우익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부위원장,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 등을 역임했다.[5]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위원회는 곧 해체되었다.[1]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1]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산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1][2] 제4대(민주당), 제5대(민주당), 제7대(신민당), 제9대(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2]
1955년 통합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초대 노동부장을 맡았으며, 당내에서는 한민당 계열의 구파에 속했다. 1958년 재선 후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내각 시기에는 민주당 신구파 갈등 속에서 구파를 이끌고 분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고 간사장을 맡았다.[5]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정치 활동이 규제되었으나,[5] 박정희의 군정 연장 방침에 반대하는 등 야당 활동을 이어갔다.[5]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했으며,[5] 이후 민중당, 신민당 등 통합 야당의 창당 과정에 참여하며 부총재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이 시기 윤보선과의 갈등으로 제1차 진산 파동을 겪기도 했다.[5]
1970년대에는 신민당 총재를 두 차례 역임하며 야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71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로 옮기면서 제2차 진산 파동을 겪고 총재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5] 유신 체제 하에서는 박정희 대통령과 두 차례 단독 회담을 가지며[5] 온건 노선을 취해 당내 강경파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1974년 초에는 유신헌법 개헌 투쟁을 선언하며 선명 야당 노선을 다시금 내세웠다.[5]
1974년 4월 28일 대장암으로 사망했다.[5]
2. 4. 1. 3공화국 시기 야당 활동
1964년 8월 윤보선과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민주당 구파는 둘로 나뉘었다.[13] 특히 신언론법안 제정을 둘러싸고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의 갈등이 겉으로 드러났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 통과를 돕는 대가로 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았다고 비난했다.[14]1967년에는 새로 창당된 신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으며, 구 민주당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당 지도부를 꾸렸다.
1968년부터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금지하는 조항을 없애려는 개헌 논의가 시작되자, 유진산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69년에는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1월 21일에는 "한 정당이 영구히 집권하려 하면 부패와 부정으로 이어지고 결국 독재 정권으로 변질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비판했다.[15][16]
1970년 1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가졌다.[5]
'''진산 파동'''
1971년 대통령 선거 직후 치러진 5·25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큰 파문이 일었다. 총선 후보 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유진산은 돌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로 등록했다. 이 사건은 '제1차 진산 파동'으로 불리며 당내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21] 이 소식이 알려지자 중앙선관위 밖에 모여 있던 일부 신민당 청년 당원들이 거세게 항의했고,[21] 유진산은 자신을 따르는 청년 당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현장을 빠져나갔다.[21] 당내 소장파 의원들과 영등포 갑구 당원들은 유진산의 행동에 강력히 반발하며 당 대표직 사퇴를 요구했다. 당시 당내 비주류였던 김대중은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과 협의하여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겠다는 내용의 수습안을 발표했다.[21]
이에 유진산은 1971년 5월 8일 성명을 내고 "나는 이미 당수직 사퇴뿐 아니라 정계 은퇴까지 각오하고 있다. 하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빼앗으려는 행위부터 먼저 밝혀내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당수 권한대행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21] 결국 당내 중진인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이 중재에 나서면서 4일 만에 사태 수습 국면에 들어섰다.[22] 중재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 당수직 승계 순위에 있던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의 사퇴
# 총선 기간 동안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을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22]
김대중은 처음에는 이 중재안을 거부했으나, 다른 대안이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수용했다.[22] 신민당은 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유진산과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했다.[22]
이후 유진산은 1971년 제1차 진산 파동의 여파로 같은 구파 소속인 김영삼에게 총재직을 넘겨주고 물러났다가, 1972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다시 총재로 선출되었다.[5] 1973년에는 다시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가졌다.[5]
2. 4. 2.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신민당 총재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지냈다. 당시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다. 박정희 정권 역시 정치적 협상에 능하고 상대적으로 국민적 지지 기반이 약하다고 판단한 유진산을 대선 상대로 선호하여,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그를 지원하는 공작을 펼쳤다.[17][18]그러나 1970년 1월, 43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상황이 급변했다.[19] 곧이어 46세 김대중과 48세 이철승도 출마를 선언하며 경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17] 젊은 후보들의 돌풍에 유진산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에게 후보 지명권을 달라고 요구했다.[20] 김영삼과 이철승은 이를 수용했으나, 비주류였던 김대중은 반대하며 경선 실시를 주장했다. 결국 전당대회 경선이 결정되자 유진산은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영삼을 지지했다.[18] 하지만 경선 결과 김대중이 예상을 뒤엎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에게 약 94만 표 차이로 아쉽게 패배했다.
1970년 단일지도체제 신민당 총재가 되었을 때, 유진산은 당직 인선에서 자파 세력만 기용하지 않고 다른 계파나 외부 영입 인사들에게도 자리를 배분하는 등 타협과 안배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 노선은 윤보선 등 강경파로부터 오히려 개인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로 의심받기도 했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자 유신 반대 국민 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가을 박정희와 단독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 이후 여당에 대한 타협과 화합을 강조하는 발언을 하면서 윤보선 등 강경 노선의 야당 인사들로부터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1974년 초 유신헌법 개헌 투쟁을 선언하며 다시금 선명 야당의 기치를 들었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74년 4월 28일 결장암으로 사망하였고, 사후 5월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2. 4. 3. 진산 파동
유진산은 극히 대결적인 자세가 강했던 당시 야당 진영 내에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온건파적 입장을 취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강경 투쟁을 주장하던 정치인들로부터 종종 여당과 야합한다는 의미의 "사쿠라"라는 비판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5] 이러한 노선 갈등은 그의 정치 역정에서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했으며, 대표적으로 두 차례의 '진산 파동'을 겪게 된다.=== 제1차 진산 파동 ===
1964년 8월, 당시 민정당 소속이었던 유진산은 언론윤리위원회법의 국회 통과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 강경파였던 윤보선과 크게 대립했다. 이 갈등으로 인해 8월 23일 민정당 감찰위원회는 유진산에 대한 제명 처분을 결정했다. 그러나 유진산은 이에 불복하고 법정 투쟁을 벌였으며, 결국 같은 해 11월 26일에 민정당에 복당하는 데 성공했다.[5]
=== 제2차 진산 파동 ===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산은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구 갑 대신 전국구 후보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선거 직후 당내 갈등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유진산은 이 파동의 여파로 신민당 총재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5]
2. 4. 4. 사망
1974년 4월 28일 대장암으로 사망하였다.[5]3. 평가와 비판
민주당 신파였던 장면 등과 갈등하였으나, 나중에는 같은 구파였던 윤보선과도 야당 내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하여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평가도 있으며, 정적(政敵)과의 타협을 쉽게 하여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주의자라는 평도 있다. 같은 민주당 구파 계열 인사 중에서도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는 윤보선과 대조되어 '사쿠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생전 자신을 사쿠라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그는 '세상에서 나를 두고 흔히 권모술수의 능수로 악의에 찬 비난과 곡해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굳이 해명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권모술수라는 말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지만, 나로서는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면 항상 당당하게 꿋꿋하게 걸어 왔음을 자위해 본다. 나는 남에게 추파나 던지며 속중의 호감을 사려는 것을 극력 회피해왔다. 그러한 위선의 자행은 말할 수 없는 사회적인 해독을 초래하기 마련이다'라며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4. 상훈
- 197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5. 저서
- 《해뜨는 지평선》
6. 기타
- 해방 정국 당시 고향 친구였던 이현상을 여러 차례 설득하여 우익 진영으로 전향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 정치적으로는 정면 투쟁보다는 타협을, 공식 회의보다는 비공식 회의를, 대중 집회보다는 이른바 '사랑방 흥정'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 이러한 막후 정치에 능하다는 평가 이면에는 정적들과 일부 동지들로부터 '사쿠라'나 '소신 없는 인물'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7. 유진산을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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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작품 | 연도 | 매체 |
---|---|---|---|
심양홍 | 제1공화국 | 1981년 | MBC 드라마 |
심양홍 | 제2공화국 | 1989년 | MBC 드라마 |
심양홍 | 제3공화국 | 1993년 | MBC 드라마 |
박종관 | 제4공화국 | 1995년 | MBC 드라마 |
심양홍 | 삼김시대 | 1998년 | SBS 드라마 |
이효정 | 야인시대 | 2002년 | SBS 드라마[3] |
박인환 | 킹메이커 | 2022년 | 영화[24] |
8.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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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선거 종류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48 | 총선 | 1대 | 국회의원 | 서울 마포구 | 무소속 | 10,497 (18.81%) | 2위 | 낙선 | |
1950 | 총선 | 2대 | 국회의원 | 전북 금산군 | 무소속 | 7,236 (21.43%) | 2위 | 낙선 | |
1954 | 총선 | 3대 | 국회의원 | 전북 금산군 | 무소속 | 15,596 (44.38%) | 1위 | 당선 | 초선 |
1958 | 총선 | 4대 | 국회의원 | 전북 금산군 | 민주당 | 23,026 (59.04%) | 1위 | 당선 | 재선 |
1960 | 총선 | 5대 | 국회의원 | 전북 금산군 | 민주당 | 25,939 (66.07%) | 1위 | 당선 | 3선 |
1963 | 총선 | 6대 | 국회의원 | 전국구 | 민정당 | 1,870,976 (20.1%) | 전국구 3번 | 당선 | 4선 |
1967 | 총선 | 7대 | 국회의원 | 서울 영등포구 갑 | 신민당 | 66,227 (54.91%) | 1위 | 당선 | 5선 |
1971 | 총선 | 8대 | 국회의원 | 전국구 | 신민당 | 4,969,050 (44.4%) | 전국구 1번 | 당선 | 6선 |
1973 | 총선 | 9대 | 국회의원 | 금산군·대덕군·연기군 | 신민당 | 54,670 (43.42%) | 1위 | 당선 | 7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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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영화에서는 강인산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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