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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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일순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운동으로 제적된 후 원주에서 대성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중립 평화 통일을 주장하다 5.16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이후 사회 운동과 농민 운동을 거쳐 한살림 운동을 시작했다.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생명 존중과 공동체적 삶을 추구했으며,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저서로는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등이 있으며, 1994년 위암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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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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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경성공업전문학교 재학 시절, 미군 대령을 총장으로 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에 반대하다 제적되었다. 그 후 원주에 정착하여 원주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미국이나 소련의 일방적인 입장에만 서는 통일안에 반대하는 중립평화통일안 때문에 1961년 5.16 군사정권에 의해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1] 1971년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을 하였다.[1] 이후 농민 운동을 하였으나, 김지하 등과 함께 운동을 반성해본 결과 기존의 농민운동이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도시와 농촌이 직거래를 하고 자연요법으로 농사를 짓는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다.[1] 그 후 장자와 같은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하다 1994년 5월 위암으로 별세하였다.[1]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에서 수학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존 R. 하지의 주한 미군정 수장 임명에 반대하여 퇴학당했다.[1] 1954년 안창호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원주에 대성학교를 설립, 세계일가운동에 참여하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의견을 교환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중립, 평화, 통일을 옹호하다 서대문형무소와 춘천교도소에 수감되었다.[1] 출소 후 감시를 받으며 은둔 생활을 하며 서예에 전념했다. 1973년 수해 복구를 위한 재해 대책 위원회 설립을 돕고 광부의 권리를 옹호했다. 1989년 정부군에 체포된 최시형 동학 2대 교주 기념비를 원주 호저면에 세웠다. 1993년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출판했다.[1]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장경호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생명 존중 사상을 익혔다. 또한,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박기정에게서 서예를 배웠다.[1] 1940년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이후 서울로 유학하여 1944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하였다.1945년,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다 제적당했다.[1]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50년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왔다.[1]
2. 2. 교육 및 사회 운동
1940년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서울로 유학을 떠나 1944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1945년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 파동)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되었다.[1]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했다. 1950년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왔으며, 이후부터 줄곧 원주에서 생활하였다.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5년간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1956년 무소속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강원도2대악법반대투쟁위원회'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와 춘천교도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3년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당했다.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1968년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1년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시위는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촉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부터는 민주화 운동을 막후에서 전개하였다.
1973년 전 해 여름에 닥친 큰 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하였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하였다.
2. 3. 한살림 운동과 생명 사상
1977년 장일순은 기존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서 벗어나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한다.[1] 1983년에는 민주 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민주통일 국민연합 결성에 참여하였다.[1] 1988년에는 한살림 운동 기금 마련을 위해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을 개최하였다.[1]1989년에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을 기리기 위해 원주시 호저면 송곡에 기념비를 세우고 비문을 직접 작성하였다.[1]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 고문으로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6월 14일 위암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1]
1993년에는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출간하였다.[1] 같은 해 9월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하였고, 11월 13일에는 민청학련 운동승계 사업회로부터 투옥 인사들의 인권 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1] 또한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해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하였다.[1] 1994년 5월 22일, 장일순은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1]
3. 사상
장일순은 어린 시절 조부와 차강 박기정으로부터 삶에 대한 존중과 서예를 배웠다. 배재고등학교 졸업 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존 R. 하지의 주한 미군정 수장 임명에 반대하여 퇴학당했다.[1]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중 고향으로 돌아갔다.
1954년 안창호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원주에 대성학교를 설립했으며, 세계일가운동에 참여하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의견을 교환했다. 1989년에는 정부군에 체포된 최시형 동학 2대 교주 기념비를 원주 호저면에 세웠다.[1]
3. 1. 무위자연과 생명 존중
장일순은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생명 존중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그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며, 생명 중심의 삶을 추구했다.[1] 1993년에는 이현주 목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에 대한 관점을 분석한 저서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장자와 같은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하던 그는 1994년 5월 위암으로 별세하였다.3. 2. 공동체적 삶
장일순은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번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한살림 운동을 통해 도시와 농촌 간의 직거래를 활성화하고, 협동조합 운동을 펼치는 등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실천했다.[1] 1983년에는 도시 소비자와 농민을 직접 연결하는 조직인 한살림을 설립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서울에서 6번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1]3. 3. 사회 참여와 민주주의
1961년 5.16 군사정권에 의해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옥살이를 했다.[1] 1971년 10월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을 했다.[1] 이후 농민 운동을 하였으나, 김지하 등과 함께 운동을 반성해본 결과 기존의 농민운동이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도시와 농촌이 직거래를 하고 자연요법으로 농사를 짓는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다.[1]1961년부터 1963년까지 중립, 평화, 통일을 옹호하다 서대문형무소와 춘천교도소에 수감되었다.[1] 출소 후 감시를 받으며 은둔 생활을 하며 서예에 전념했다. 1971년 사회 정의를 위한 거리 시위에 참여, 지학순 천주교 주교와 함께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싸웠다.[1] 1973년 수해 복구를 위한 재해 대책 위원회 설립을 돕고 광부의 권리를 옹호했다. 1977년 수공업자와 농민을 위한 활동에서 공생을 기반으로 한 삶을 옹호하는 활동으로 전환했다. 1983년 한살림을 설립하고, 도시 소비자에게 농민을 직접 연결하는 조직인 한살림을 홍보하기 위해 서울에서 6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4. 저서 및 관련 도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대담과 강연을 모아 펴낸 《나락 한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1997)가 있다. 이현주 목사와 함께 노자를 해설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가 있다. 전교조에서 꾸리는 우리교육에서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 이야기를 《나락 한알 속의 우주-무위당 장일순》으로 소개하기도 했다.[1] 1993년 이현주 목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에 대한 관점을 분석한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출판했다.
5. 연보
-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출생. 어린 시절 할아버지 장경호와 차강 박기정에게서 한학과 서화를 배움.
- 1940년 원주초등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 1944년 배재고등학교 졸업,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 입학.
- 1945년 국대안 파동에 참여하여 경성공업전문학교 제적.
-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 입학.
- 1950년 6.25 전쟁으로 학업 중단, 원주로 돌아옴.
- 1954년 대성학원 설립, 5년간 이사장 역임.
- 1955년 봉산동에 토담집을 짓고 생활.
- 1956년 무소속 국회의원 입후보, 낙선.
- 1957년 이인숙과 결혼, 슬하에 3남.
-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 출마, 낙선.
-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중립화 평화통일론 주창으로 3년간 옥고 (서대문 형무소, 춘천 형무소).
- 1963년 출소 후 대성학원 이사장 복귀, 한일기본조약 반대운동 연루로 이사장직 박탈. 정치활동 정화법, 사회안전법 등으로 감시받음.
- 1964년 포도농사에 전념.
- 1968년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 전개.
- 1971년 지학순 주교 등과 박정희 정부의 부정부패 폭로, 사회정의 촉구 가두시위 주도.
- 1973년 지학순 주교와 재해대책사업위원회 발족,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석방 위해 국제사회에 호소.
- 1977년 노동운동, 농민운동에서 생명운동으로 전환 결심.
- 1983년 민주통일 국민연합 발족에 일조.
- 1988년 한살림 운동 기금 조성을 위한 서화전 개최 (총 5회).
- 1989년 최시형 선생 기념비 건립 (원주시 호저면 송곡).
- 1991년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 고문 참여. 6월 14일 위암 수술 (원주기독병원).
- 1992년 생명사상 주제 강연 다수.
- 1993년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 출간. 11월 13일 민청학련 운동승계 사업회 감사패 수상.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결성 독려.
-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로 영면.
- 1997년 『나락 한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출간.
- 1998년 상지대학교 전시관에서 장일순 유작전 개최.
- 2001년 원주 시립박물관 주최 무위당 선생 기획전시회 개최 (2달간).
- 2004년 10주기 추모행사 (토지문화관, 원주가톨릭센터, 원주시립박물관). <좁쌀 한 알>(최성현),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최종덕) 출간.
- 2007년 <무위당 기념관> 개관 (원주밝음신협 건물 4층).
6.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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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무소속 | 2,144표 (7.41%) | 4위 | 낙선 | |
1960년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사회대중당 | 3,585표 (12.76%) | 5위 |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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