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피에르 라파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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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피에르 라파랭은 1948년 푸아티에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파리 고등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마케팅 분야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중소기업·무역·수공예부 장관을 거쳐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유럽 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반대 결과가 나오자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 이후 상원 의원과 국민운동연합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라파랭은 낙천적인 경구로 유명하며, 다카마쓰노미야 전하 기념 세계 문화상 국제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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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모루아는 릴 시장, 프랑스 총리, 상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주 40시간 근무제 단축 등 노동자 중심의 정책을 시행하고 사회당 제1서기 및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 프랑스의 유럽 의회 의원 - 자크 시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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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프랑스의 총리 - 폴 레노
폴 레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독일 배상금 문제에 관여했고, 세계 대공황 시기에는 영국과의 동맹을 지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독일의 침공으로 사임하고 수감되었다가 해방된 후 유럽 연합 구성을 지지했다.
장피에르 라파랭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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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48년 8월 3일 |
출생지 | 프랑스 푸아티에 |
배우자 | 안마리 페리에 (1980년 6월 29일 결혼) |
자녀 | 2명 |
정당 | 공화당 (2015년–현재) |
다른 정당 | 자유민주주의 (2002년 이전) UMP (2002년–2015년) |
모교 | 팡테옹-아사스 대학교 ESCP 경영대학원 |
프랑스 총리 | |
직위 | 프랑스 총리 |
임기 시작 | 2002년 5월 6일 |
임기 종료 | 2005년 5월 31일 |
대통령 | 자크 시라크 |
이전 총리 | 리오넬 조스팽 |
다음 총리 | 도미니크 드 빌팽 |
프랑스 상원 의원 | |
직위 | 상원 의원 |
임기 시작 | 2005년 9월 18일 |
임기 종료 | 2017년 10월 4일 |
선거구 | 비엔 |
임기 시작 | 2004년 10월 1일 |
임기 종료 | 2004년 11월 1일 |
선거구 | 비엔 |
임기 시작 | 1997년 9월 21일 |
임기 종료 | 2002년 6월 6일 |
선거구 | 비엔 |
임기 시작 | 1995년 10월 2일 |
임기 종료 | 1995년 10월 31일 |
선거구 | 비엔 |
프랑스 중소기업, 상업 및 수공예 담당 장관 | |
직위 | 중소기업, 상업 및 수공예 담당 장관 |
임기 시작 | 1995년 5월 18일 |
임기 종료 | 1997년 6월 4일 |
총리 | 알랭 쥐페 |
이전 장관 | 알랭 마들린 |
다음 장관 | 마릴리즈 르브랑슈 |
유럽 의회 의원 | |
직위 | 유럽 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989년 7월 25일 |
임기 종료 | 1995년 5월 18일 |
선거구 | 프랑스 |
푸아투-샤랑트 지역 의회 의장 | |
직위 | 푸아투-샤랑트 지역 의회 의장 |
임기 시작 | 1988년 12월 19일 |
임기 종료 | 2002년 5월 8일 |
이전 의장 | 루이 프뤼샤르 |
다음 의장 | 엘리자베트 모랭 |
2. 생애
푸아티에에서 1948년 8월 3일에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정부에서 농업 차관(1954-1955)을 지낸 장 라파랭이다.[1] 파리 팡테옹 아사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2] 파리 고등 상업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마케팅 분야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젊은 지지자 모임에서 정치에 참여했으며, "''지스카르디앵''"으로 불리며 리오넬 스톨레루와 공화당에 합류했다. 1980년대에 푸아투샤랑트 지역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르네 모노리의 지원을 받아 1988년 지역 의회 의장이 되었다. 7년 후, 비엔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하며 우파의 단결을 옹호했다. 시라크는 재선 후 정치적 쇄신을 위해 좌파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온건한 인물로 라파랭을 총리로 지명했다. 그는 국민운동연합 (UMP) 형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주도의 이라크 개입을 비판했다.[3]
그의 정치적 정책은 권위주의와 온건한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을 결합한 것이었다. 2003년 공공 퇴직 연금 제도 및 지방 분권 개혁을 시작했으나, 많은 파업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여름, 프랑스는 약 15,000명의 사망자를 낸 폭염을 겪었고, 정부의 늦은 대응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2004년에는 프랑스 국영 의료 시스템 개혁을 시작했다.
라파랭 내각은 여러 장관들이 공개적으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면서 내부 갈등으로 유명했으며, 언론은 총리의 권위 부족을 조롱했다. 2004년 지방 선거에서 집권 UMP는 프랑스 본토 22개 레지옹 중 21곳에서 패배했다. 2004년 3월 30일, 라파랭은 시라크 대통령에게 내각 사임을 제출했고, 시라크는 즉시 그를 총리로 재임명하고 새 내각을 구성하도록 위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존경하며, 폴 바라를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민 수용에 찬성하며, 차별, 우익,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애국심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협조를 목표로 한다. 취임 초에는 서민적인 이미지로 인기가 높았다. 2005년5월 31일 유럽 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과반수를 넘자 총리직을 사임했다.
영어를 어려워하는 듯하며, 회견에서 "Win the Yes need the No to win against the No"라는 연설을 하여, 카날 퓌의 정치 풍자 인형극 "기뇰"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2013년부터 다카마쓰노미야 전하 기념 세계 문화상 국제 고문을 맡고 있다.
2. 1. 초기 생애
푸아티에에서 1948년 8월 3일에 태어난 장피에르 라파랭은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정부에서 농업 차관(1954-1955)을 지낸 장 라파랭의 아들로, 같은 도시에서 성장했다.[1] 그는 파리 팡테옹 아사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2] 이후 파리 고등 상업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마케팅 분야에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1970년대에 그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젊은 지지자 모임에서 처음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자신을 "지스카르디앵"으로 칭하며, 수공업 노동자 및 이민 담당 국무장관 리오넬 스톨레루와 공화당 참모진에 합류했다. 공화당은 중도 우파 연합체인 프랑스 민주 연합 (UDF)의 자유 보수적 구성 요소였다.
2. 2. 정치 경력
1980년대에 푸아투샤랑트 지역에서 지방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르네 모노리의 지원을 받아 1988년 지역 의회 의장이 되었다. 7년 후, 비엔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정부, 의회, 정당에서의 주요 직위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직위 | 기간 | 비고 |
---|---|---|---|
정부 | 국무총리 | 2002년 ~ 2005년 | |
중소기업, 상업 및 수공예부 장관 | 1995년 ~ 1997년 | ||
의회 | |||
유럽 의회 의원 | 1989년 ~ 1995년 | 1994년 재선, 1995년 장관 임명 | |
비엔주 상원 의원 | 1995년 ~ 2002년, 2004년 ~ 현재 | 1995년, 2004년, 2008년 재선, 2002년 국무총리 임명 | |
푸아투샤랑트 지역 의회 의장 | 1988년 ~ 2002년 | 1992년, 1998년 재선, 사임 | |
푸아투샤랑트 지역 의회 부의장 | 2002년 ~ 2004년 | ||
푸아투샤랑트 지역 의원 | 1986년 ~ 2004년 | 1992년, 1998년 재선 | |
샤스뇌유뒤푸아투 부시장 | 1995년 ~ 2001년 | ||
샤스뇌유뒤푸아투 시의원 | 1995년 ~ 2001년 | ||
푸아티에 시의원 | 1977년 ~ 1995년 | 1983년, 1989년 재선 | |
정당 | 국민운동연합 부의장 | 2007년 이후 |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당시, 대부분의 UDF 정치인들이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지지했지만, 라파랭은 승리한 자크 시라크 후보를 선택했다. 그 보답으로 알랭 쥐페 내각(1995–1997)에서 중소기업, 상업 및 수공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시라크를 지지한 UDF 의원들은 프랑스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당을 창당했고, 이후 라파랭은 공화당으로 복귀하여 1997년 자유 민주주의 (DL)가 되었다. 그는 2002년까지 DL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2. 2. 1. 총리
2002년 대선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 라파랭은 국민운동연합 (UMP) 형성에 참여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정치적 쇄신을 위해 온건한 인물인 라파랭을 총리로 지명했다.[3] 그는 미국 주도의 이라크 개입을 비판했다.라파랭은 권위주의와 온건한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을 결합한 정책을 추진했다. 2003년에는 공공 퇴직 연금 제도와 지방 분권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는 많은 파업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여름, 프랑스는 이례적인 폭염으로 약 1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정부의 늦은 대응은 비판을 받았다. 2004년에는 프랑스 국영 의료 시스템 개혁을 시작했다.
라파랭 내각은 내부 갈등으로 유명했으며, 언론은 총리의 권위 부족을 지적했다.
2004년 지방 선거에서 집권 UMP는 프랑스 본토 22개 레지옹 중 21곳에서 패배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유권자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 신호"로 해석되었고, 2004년 3월 30일 라파랭은 시라크 대통령에게 내각 사임을 제출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즉시 그를 총리로 재임명하고 새 내각을 구성하도록 위임했으며, 이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던 장관들이 교체되었다.
2005년5월 31일 유럽 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과반수를 넘자 총리직을 사임했다.
2. 2. 2. 총리 이후
도미니크 드 빌팽이 2005년 5월 30일에 라파랭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교체했다.[4]2005년 9월 18일, 라파랭은 비엔주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니콜라 사르코지가 승리할 경우, 상원 의장이나 대중 운동 연합 의장이 되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2007년 대중 운동 연합의 부의장 중 한 명이 되었다. 2008년 9월, 상원 의장이 되기 위해 상원 대중 운동 연합 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구했지만 제라르 라셰르에게 패했다.
라파랭은 레지옹 도뇌르 그랜드 오피서이며, 국가 훈장 그랜드 크로스 훈장을 받았다.
2013년부터 다카마쓰노미야 전하 기념 세계 문화상 국제 고문을 맡고 있다.
3. 정치적 입장
권위주의와 온건한 경제 자유주의를 결합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을 지지한다. 2003년에는 공공 퇴직 연금 제도와 지방 분권 개혁을 추진하여 많은 파업을 초래했다. 또한 이민 수용에 찬성하며, 차별, 우익,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애국심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협조를 목표로 한다는 입장이다.[3]
4. 외교 정책
2005년 4월 21일 중국 국빈 방문 중에 라파랭은 대만 관련 "반분열법"에 반대하는 것을 피하며 프랑스가 '하나의 중국' 입장을 유지해왔다고 밝혔다. 또한, 무기 금수 조치 해제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5][6] 관례에 따라 외교는 총리가 아닌 대통령의 고유한 책임 중 하나이다.
4. 1. 중국과의 관계
2005년 4월 21일 중국 국빈 방문 중에 라파랭은 대만 관련 "반분열법"에 반대하는 것을 피하며 "반분열법은 프랑스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며", "프랑스는 항상 '하나의 중국' 입장을 유지해 왔으며, 이 입장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기 금수 조치에 대해서는 "프랑스는 금수 조치 해제를 계속 요구하고 있으며, 유럽 이사회가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꿀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5][6] 관례에 따라 외교는 총리가 아닌 대통령의 고유한 책임 중 하나이다.5. 평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존경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세나 폴 바라를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1] 이민 수용에 찬성하며, 차별, 우익,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애국심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협조를 목표로 한다.[1]
취임 초에는 서민적인 이미지로 인기가 높았다.[1] 그러나 2005년 5월 31일 유럽 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과반수를 넘자 총리직을 사임했다.[1]
영어를 어려워하는 듯하며, 회견에서 "Win the Yes need the No to win against the No"라는 연설을 하여, 유료 채널 텔레비전 방송국 카날 퓌의 정치 풍자 인형극 "기뇰" (les guignols de l'info)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1]
6. 어록
장피에르 라파랭은 낙천적인 경구로 종종 놀림을 받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아이러니하게도 "라파리나드(raffarinades)"라고 불렀다. 가장 유명한 것은 "La route est droite, mais la pente est forte"("길은 곧지만, 경사는 가파르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라파리나드"라는 단어가 다른 프랑스어 단어인 "마자린나드(mazarinade)"를 참조하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자린나드"는 앤 여왕(오스트리아 대공녀)의 섭정 시대와 마자랭 추기경의 재상 시대(루이 14세의 친정 전)에 프랑스 혁명가였던 "프롱되르(frondeurs)"들이 인기가 없었던 재상을 조롱하기 위해 부른 노래를 지칭한다.
라파랭은 유럽 헌법 초안에 대한 국민 투표에 앞서 영어 실력을 시험하려 했지만, 이 역시 현명하지 못한 생각으로 드러났다. 그의 연설에서 인용된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7] "예스(yes)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노(no)가 노(no)를 이겨야 한다." 국민 투표 자체는 결국 반대자들에 의해 "라파랭덤(le Raffarindum)"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노인 연대의 날(Journée de solidarité envers les personnes âgées)"은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에 의해 때때로 "생 라파랭(la Saint-Raffarin)"으로 불리기도 한다(라파랭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 노동자들은 성령 강림일에 무료로 일해야 하지만, 대중교통은 여전히 "일요일 및 공휴일" 시간표를 사용한다).
7. 역대 정부
직함 | 이름 | 비고 |
---|---|---|
총리 | 장피에르 라파랭 | |
외무, 협력 및 프랑코포니부 장관 | 도미니크 드 빌팽 | |
국방 및 재향군인부 장관 | 미셸 알리오마리 | |
내무, 국내 보안 및 지방자치부 장관 | 니콜라 사르코지 | |
경제, 재정 및 산업부 장관 | 프랑시스 메르 | |
노동, 사회 문제 및 연대부 장관 | 프랑수아 피용 | |
법무부 장관 | 도미니크 페르뱅 | |
국민 교육, 청소년, 고등 교육 및 연구부 장관 | 뤽 페리 | |
문화 및 커뮤니케이션부 장관 | 장자크 아이야공 | |
농업, 식품 및 농촌 문제부 장관 | 에르베 게이마르 | |
생태 및 지속 가능한 개발부 장관 | 로즐린 바슐로 | |
지속 가능한 개발 담당 위임 장관 | 토키아 사이피 | |
스포츠부 장관 | 장프랑수아 라무르 | |
해외 영토부 장관 | 브리지트 지라르댕 | |
교통, 주택, 관광, 해양 및 장비부 장관 | 질 드 로비앙 | |
보건, 가족 및 장애인부 장관 | 장프랑수아 마테이 | |
공무, 국가 개혁 및 지역 계획부 장관 | 장폴 들르부아 | |
유럽 담당 장관 | 르노 도네듀 드 바브르[1] |
직함 | 이름 | 비고 |
---|---|---|
총리 | 장피에르 라파랭 | |
외무부 장관 | 미셸 바르니에 | |
국방부 장관 | 미셸 알리오마리 | |
내무부, 국내 보안, 지방 자치부 장관 | 도미니크 드 빌팽 | |
경제, 재정, 산업부 장관 | 니콜라 사르코지 | |
노동, 고용, 사회 연대부 장관 | 장루이 볼로 | |
법무부 장관 | 도미니크 페르뱅 | |
국민 교육, 고등 교육, 연구부 장관 | 프랑수아 피용 | |
연구 위임 장관 | 프랑수아 도베르 | |
문화, 통신부 장관 | 르노 도네디외 드 바브르 | |
농업, 식량, 어업, 농촌 문제부 장관 | 에르베 게이마르 | |
생태, 지속 가능한 개발부 장관 | 세르주 르펠티에 | |
청소년, 스포츠, 지역 사회부 장관 | 장프랑수아 라무르 | |
해외 영토부 장관 | 브리지트 지라르댕 | |
운송, 관광, 지역 계획, 해양, 설비부 장관 | 질 드 로비앙 | |
보건, 사회 보호부 장관 | 필리프 두스트블라지 | |
가족, 아동부 장관 | 마리조제 로이그 | |
공무원, 국가 개혁부 장관 | 르노 뒤트레이 | |
성 평등, 직업 평등부 장관 | 니콜 아멜린 |
2004년 11월 29일, 니콜라 사르코지가 UMP 대표가 되기 위해 사임하고, 에르베 게마르의 사임을 강요하는 스캔들이 발생했다.
- 경제, 재정 및 산업부 장관: 에르베 게마르 (니콜라 사르코지 교체)
- 농업, 식량, 어업 및 농촌부 장관: 도미니크 뷔세로 (에르베 게마르 교체)
2005년 2월 25일, 게마르의 사임을 강요한 스캔들 이후
- 경제, 재정 및 산업부 장관: 티에리 브르통
8. 수상
리본 막대 | 훈장 | 국가 | 서훈 날짜 |
---|---|---|---|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오피시에 | 프랑스 | 2008년 |
width=80px | 국가 공로 훈장 그랜드 크로스 | 프랑스 | 2002년 |
-- | 퀘벡 국가 훈장 기사 | 캐나다 | 2003년 |
-- | 루마니아의 별 훈장 그랜드 크로스 | 루마니아 | 2004년 |
우호 훈장 | 중국 | 2019년 |
참조
[1]
뉴스
Man in the News; A Leader to Lean On; Jean-Pierre Raffarin
https://www.nytimes.[...]
2002-05-07
[2]
서적
Images et souvenirs du Poitou-Charentes
Visualia
[3]
웹사이트
French PM:Iraq crisis not a game
http://www.cnn.com/2[...]
2003-02-07
[4]
웹사이트
De Villepin appointed French PM
http://news.bbc.co.u[...]
BBC News
2005-05-31
[5]
뉴스
http://sg.news.yahoo[...]
[6]
Webarchive
http://www.phayul.co[...]
2006-02-20
[7]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video.google.[...]
200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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