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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발라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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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튀르키예 이즈미르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정치인이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거쳐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다. 경제·재정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공기업 민영화, 부유세 폐지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으며, 1995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3위에 그쳤다. 르완다 대학살 연루 의혹과 카라치 사건 등 여러 논란에 휩싸였으며,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에 의해 헌법 개정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1929년 5월 2일 튀르키예 이즈미르에서 아르메니아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5년 그의 가족은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마르세유로 이주했다. 1957년 마리조제프 들라쿠르(Marie-Josèphe Delacour|마리조제프 들라쿠르프랑스어)와 결혼해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1964년 조르주 퐁피두 총리의 자문역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9년 퐁피두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발라뒤르는 대통령 부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으며, 1973년부터 1974년 퐁피두가 서거할 때까지 비서실장 직무를 수행했다.

1980년대 자크 시라크와 함께 정계에 복귀하여 신드골주의 정당인 공화국 연합에 참가하며 동거 정부의 이론적 배경을 마련했다. 그는 만약 우파가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사회주의 계열의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임 없이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3년 의회선거에서 패배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다시 동거 정부를 구성하였으나, 시라크는 총리직을 거절하여 발라뒤르가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다. 발라뒤르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직면했지만, 이전 동거 정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사회당1988년에 재도입한 부유세는 유지하는 등, 대통령과 적절한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다.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자크 시라크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1998년 일 드 프랑스 레지옹 지방선거, 2001년 파리 시장 선거, 2002년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 선거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국민의회 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발라뒤르를 개헌위원회 위원장에 위촉했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1929년 5월 2일 튀르키예 이즈미르에서 아르메니아계 가정에서 태어났다.[2] 1935년 그의 가족은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마르세유로 이주했다.[2] 그는 소년 시절 장바티스트 드 라 살 주교 대학교에 다녔고, 마르세유의 리세 티에르를 거쳐 엑스마르세유 대학교 법학부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1950년경 파리로 가서 파리 정치대학에서 공공정책 분야 디플롬을 취득하고, 1955년부터 1957년까지 프랑스 국립행정학교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9][10] 1957년, 발라뒤르는 마리조제프 들라쿠르(Marie-Josèphe Delacour|마리조제프 들라쿠르프랑스어)와 결혼해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2. 2. 초기 정치 경력

1964년 조르주 퐁피두 총리의 자문역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9년 퐁피두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발라뒤르는 대통령 부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으며, 1973년부터 1974년 퐁피두가 서거할 때까지 비서실장 직무를 수행했다.[9][10]

1980년대 자크 시라크와 함께 정계에 복귀하여 신드골주의 정당인 공화국 연합에 참가하며 동거 정부의 이론적 배경을 마련했다. 그는 만약 우파가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사회주의 계열의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임 없이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 3. 경제·재정부 장관 (1986-1988)

1986년 자크 시라크 내각이 출범하자,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경제·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맡아 공기업 매각을 통한 민영화부유세 폐지 등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했다. 이는 로널드 레이건마거릿 대처의 정책과 유사한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었다.[1] 그는 1945년과 1982년 국유화된 스에즈, 파리바, 소시에테 제네랄 등을 포함한 대규모 민영화 프로그램을 시행했고, TF1도 민영화했다.[1] 또한 공무원 수와 국가 예산을 감축했다.[1]

발라뒤르는 자크 시라크가 이끄는 내각에서 비공식적으로 부총리 역할을 했다.[2] 1988년 대선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승리하고 시라크가 패배하면서, 시라크 내각은 총사퇴하고 미셸 로카르 내각이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발라뒤르는 장관직에서 물러나 시라크와 함께 야당으로 돌아갔다.[3]

2. 4. 프랑스 총리 (1993-1995)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여러 스캔들로 인해 큰 패배를 겪었고, 제2차 동거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자크 시라크프랑수아 미테랑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발라뒤르에게 총리직이 돌아갔다. 발라뒤르 내각은 1993년 3월 29일부터 1995년 5월 17일까지 존속했다.

총리가 된 발라뒤르는 온건한 정치 자세와 착실한 정치 수완으로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었고, 점차 공화국 연합 총재인 시라크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더욱이, 당내 실력자이자 내무부 장관으로 입각했던 샤를 파스카의 지지를 얻어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2. 4. 1. 주요 정책

발라뒤르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1986년에 시작된 경제 정책을 이어가 로나-풀랑(Rhône-Poulenc), 파리 국립은행(Banque Nationale de Paris), 엘프(Elf) 등의 기업을 민영화했다.[3] 조용한 보수주의자 이미지를 보이며, 1988년 사회당이 재도입한 부유세는 문제 삼지 않았다.

발라뒤르는 프랑스의 억제력 유지를 위해 핵실험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점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의견 차이를 보였다.

일부 장관들의 부정부패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들의 사임을 강요하여 "발라뒤르 판례(Balladur jurisprudence)"를 남겼다. 또한 그는 언론의 지지를 받았다.

2. 5. 총리 퇴임 이후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자크 시라크에게 패배한 후, 발라뒤르는 1998년 일 드 프랑스 지역 선거, 2001년 파리 시장 선거 공화국연합 후보 지명 선거, 2002년 하원 의장 선거에서 연이어 패배했다.[4] 그러나 1980년대부터 우파 정당들의 단일 정당 통합을 주장해 왔으며, 이는 2002년 자크 시라크대중운동연합을 창설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국민의회 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4]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이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발라뒤르를 제도 개혁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고,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2006년, 발라뒤르는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4]

2008년, 발라뒤르는 미국 워싱턴 D.C.의 싱크탱크인 스트라이트 위원회(Streit Council) 행사에서 "서구 연합" 개념을 제시한 자신의 저서를 발표했다.[4]

1999년 몽블랑 터널 화재 사고와 관련하여 2005년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안전 조치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항상 안전을 중시했지만, 터널 이탈리아 구간 운영 회사와의 합의가 어려웠다고 주장했다.[4]

프랑스 언론에서는 발라뒤르를 초연하고 귀족적이며 오만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발라뒤르 총리 재임 기간(1993~95) 동안 프랑스 정부 장관 중 르 시에클 회원 비율은 72%에 달했다.[5]

2024년 3월 현재, 발라뒤르는 생존해 있는 프랑스 총리 및 대통령 경험자 중 최고령이다.

2. 6. 제도 개혁 위원회 위원장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이후, 니콜라 사르코지는 발라뒤르를 제도 개혁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헌법 개정은 2008년 7월 의회에서 승인되었다.[4]

2. 7. 정계 은퇴

2006년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4]

2024년 3월 현재, 생존해 있는 프랑스 행정 수반(총리·대통령) 경험자 중 최고령이다(생존해 있는 대통령 경험자는 모두 21세기 이후 취임, 최고참은 제9대 총리인 로랑 파비우스).

3. 논란과 비판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연루 의혹과 파키스탄 무기 거래와 관련된 "회사 자산 남용 및 은폐 공모" 혐의, 1995년 선거 운동에서 "불법 자금" 사용 혐의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13][14][6][7][8]

3. 1. 르완다 대학살 연루 의혹

2008년 8월 5일, 르완다 정부는 에두아르 발라뒤르가 8십여 만명의 죽음을 불러온 1994년의 르완다 대학살에 연루되었다는 보고서를 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발라뒤르와 다른 프랑스 공직자들은 소수 민족이었던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를 참혹하게 살해한 후투족에게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법적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고발되었다.[13][14]

3. 2. 카라치 사건

'''카라치 사건'''(Affaire Karachi프랑스어)은 파나마 문서 유출로 가능해진 포렌식 회계 조사를 통해 여러 측면이 밝혀진 사건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이 지불한 무기 계약 수수료가 발라뒤르 또는 그의 후임 대통령이 된 자크 시라크의 1995년 대선 캠페인 자금으로 사용되었는지 프랑스 법무부가 조사했다.[6] 2017년 5월, 발라뒤르와 그의 전 국방장관 프랑수아 레오타르는 파키스탄 무기 거래와 관련하여 "회사 자산 남용 및 은폐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7] 2019년 6월, 발라뒤르의 전 선거 운동 매니저인 니콜라 바지르는 무기 거래와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6명 중 한 명이었으며, 발라뒤르의 1995년 선거 운동에서 "불법 자금"을 사용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7] 2021년 3월 4일,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직무 수행 중 저지른 행위에 대해 정부 구성원을 재판하는 특별 법원인 공화국 사법 재판소(Cour de Justice de la République프랑스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8]

4. 저서


  • 《서구 연합을 위하여》(For a Union of the West), 2009, 후버 연구소 출판부
  • 《유행과 신념 - 정치가의 조건》 (山口俊章 역, 사이말출판회, 1996년)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결과당락
1986년 선거하원의원 (파리 선거구)8대공화국연합35.01%321,459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1위--
1988년 선거하원의원 (파리 제12선거구)9대공화국연합57.25%24,286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1위--
1993년 선거하원의원 (파리 제12선거구)10대공화국연합58.00%24,478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1위--
1995년 선거대통령22대공화국연합18.58%5,658,796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3위낙선
1997년 선거하원의원 (파리 제12선거구)11대공화국연합49.34%19,175표65.21%25,575표1위--
2002년 선거하원의원 (파리 제12선거구)12대대중운동연합54.17%23,661표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1위--


참조

[1] 서적 Europe Since 1945: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0-12
[2] 서적 The Euro Yale University Press
[3] 학술지 Privatisation in France 1993–94: New departures, or a case of ''plus ça change''? https://www.research[...] 2018-01-27
[4] 웹사이트 {title} https://web.archive.[...] 2008-09-02
[5] 학술지 Elites, Thickets and Institutions: French Resistance Versus German Adaptation to Economic Change, 1945-2015 http://webspace.qmul[...] 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 Centre for Globalization Research 2018-01-27
[6] 뉴스 Les commissions de Karachi exhumées par les "Panama papers https://web.archive.[...] Le Monde 2016-04-05
[7] 뉴스 Karachi affair: Six men sentenced to prison over arms deal https://www.bbc.com/[...]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2019-06-15
[8] 웹사이트 Former French PM Balladur acquitted over arms kickbacks https://www.ft.com/c[...] Financial Times 2021-03-04
[9] 웹사이트 Edouard Balladur https://www.gouverne[...] 2020-05-19
[10] 웹사이트 Edouard BALLADUR https://www.economie[...] 2020-08-14
[11] 웹사이트 Le Mérite pour Balladur https://www.lesechos[...] 1993-10-15
[12] 뉴스 Dominique de Villepin privé de l'élévation dans la Légion d'honneur https://www.lemonde.[...] 2008-11-25
[13] 뉴스 프랑스, 르완다 대학살 적극 관여 http://www.afpbb.co.[...] AFPBB News 2009-10-22
[14] 뉴스 France accused in Rwanda genocide http://news.bbc.co.u[...] BBC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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