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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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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게르니카 폭격을 주제로 한 파블로 피카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전쟁의 참혹함과 민간인 희생을 고발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흑백의 강렬한 표현과 상징적인 인물, 동물 묘사를 통해 폭력과 고통을 전달하며, 전 세계적으로 반전과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르니카는 현재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에 전시되어 있으며,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사회,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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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피카소)
작품 정보
게르니카
게르니카
제목게르니카
원어 제목Guernica
화가파블로 피카소
제작 연도1937년
사조입체파
초현실주의
기법유화
재료캔버스
크기높이: 349.3 cm (137.4 in)
폭: 776.5 cm (305.5 in)
소장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소장 위치마드리드, 스페인
설명
주제반전

2. 역사적 배경

스페인 내전(1936년~1939년)은 《게르니카》 탄생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1936년 7월, 제2 공화국 정부(공화파)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던 스페인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공화 정부를 지지했으며, 1937년 1월에는 프랑코를 괴물로 묘사한 풍자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을 쓰고 동판화를 제작하여 공화 정부를 도왔다.[78][79]

같은 해 1월, 공화 정부는 피카소에게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할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80][104] 피카소는 처음에는 내전과 직접 관련 없는 개인적인 주제를 구상했으나,[81][79]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게르니카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소식은 『타임스』 등 여러 신문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피카소는 이를 계기로 벽화의 주제를 게르니카의 비극으로 바꾸어 작품 제작에 몰두하게 되었다.[82] 《게르니카》는 이렇게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탄생했다.

2. 1.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폭격

1936년 7월, 제2 공화국 시대의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여,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파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국민파(반란군)가 대립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다양한 목표를 가진 세력으로 구성된 공화파는 파시스트 독재를 수립하려던 프랑코 장군에 맞서 연합했다. 국민파는 바스크 지방의 비스카이 주에 있는 조용한 마을인 게르니카를 공화파 저항 운동의 북부 거점이자 바스크 문화의 중심지로 여겼다.[8]

1934년부터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던 스페인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공화 정부를 지지했다. 1937년 1월에는 프랑코를 풍자하는 내용의 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을 썼고, 이후 시에 덧붙일 동판화를 제작했다.[78] 이 동판화에서 프랑코는 괴물의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판매된 엽서의 수익은 공화 정부의 구호 자금이 되었다.[79]

스페인 내전 중이던 1937년 1월, 공화 정부는 프랑스 주재 스페인 대사관을 통해 피카소에게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장식할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80][104] 피카소는 처음에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고, 스페인 내전과는 무관한 초현실주의풍의 개인적인 세계를 묘사한 벽화를 구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81][79] 4월 중순에는 이 구상에 대한 소묘를 완성했다.

1937년 폐허가 된 게르니카


그러나 1937년 4월 26일 월요일, 상황은 급변했다. 나치 독일콘도르 군단이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대령의 지휘 아래 약 2시간 동안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다.[9][8] 폰 리히트호펜은 4월 30일 일기에서 폭격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비행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이전 공격으로 "사방에 연기가 자욱했다"고 언급하며, 도로, 다리, 교외를 식별할 수 없어 "모든 것을 바로 중심부에 떨어뜨렸다"고 썼다. 또한 "250kg 폭탄은 많은 집을 무너뜨리고 수도관을 파괴했다. 소이탄은 이제 퍼져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집의 재료인 기와 지붕, 나무 현관, 반목 구조는 완전한 파괴를 초래했다"고 덧붙였다.[10]

폭격이 있었던 월요일은 게르니카의 장날이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공화파를 위해 싸우러 떠났기 때문에, 마을에는 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남아 있었고,[11] 많은 이들이 마을 중심에 모여 있었다. 폭격으로 도로는 잔해로 가득 찼고 마을을 나가는 다리마저 파괴되어 주민들은 탈출할 수 없었다.

비스카이 주의 수도인 게르니카는 전선에서 10km 떨어져 있었으며, 빌바오로 향하는 공화파의 후퇴로나 진격로 상에 위치했다.[12] 리히트호펜은 4월 26일 일기에서 게르니카 폭격의 목적이 "여기서 통과해야 하는 적군의 철수를 막고 방해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했다.[13] 다음 날 그는 "게르니카가 불타고 있다"고 적었다. 게르니카 외곽에 있던 군수 공장은 공격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 폭격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14][15]

게르니카 폭격 소식은 4월 27일 석간 신문들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28일에는 『타임스』에 실린 조지 스티어 기자의 상세한 보도가 세계 각국 신문에 전재되었다. 파리에서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큰 충격을 받고, 파리 만국 박람회 벽화의 주제를 게르니카 폭격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전 몇 년간 개인적인 문제로 그림 작업이 뜸했던 피카소는 이 작품 제작에 열정적으로 몰두하게 된다.[82]

2. 2. 피카소와 스페인 공화국 정부

1936년 7월 제2공화국 시대의 스페인에서는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파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대립하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스페인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34년 스페인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이후 프랑스 파리의 그랑 오귀스탱 거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다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47] 그는 공화 정부를 지지했으며, 프라도 미술관의 명예 망명 이사직을 맡고 있었다.[47]

피카소는 1937년 1월, 프랑코를 풍자하는 내용의 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을 쓰고 이후 시에 덧붙일 동판화를 제작했다.[78] 이 동판화에서 프랑코는 괴물의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판매된 엽서의 수익은 공화 정부의 구호 자금이 되었다.[79]

같은 해 1월, 스페인 공화 정부는 프랑스 주재 스페인 대사관을 통해 피카소에게 1937년 파리 국제 박람회(현대 생활 속 예술과 기술 국제 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할 대형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6][80][104] 피카소는 처음에는 의뢰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고, 1월부터 4월 말까지는 스페인 내전과 무관하게 자신이 늘 다루던 '화가의 작업실'이라는 주제[1] 또는 화가나 모델이 등장하는 개인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초현실주의풍의 벽화를 구상하며 다소 무심하게 초기 스케치 작업을 진행했다.[81] 1980년경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발견된 스케치에는 이후 『게르니카』에 포함될 태양이나 여성의 이미지가 이미 나타나 있었다.[79] 4월 중순에는 이 개인적인 세계를 다룬 그림의 소묘를 연필과 잉크로 완성했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 공군이 비스카이아 주의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게르니카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날인 27일 몇몇 석간 신문에 속보가 실렸고, 28일 아침에는 조지 스티어가 작성한 폭격 목격 기사가 영국의 『타임스』와 미국의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1] 이 기사는 세계 각국의 신문에 전재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들은 시인 후안 라레아는 피카소의 집을 방문하여 폭격을 그림의 주제로 삼도록 설득했다.[1] 며칠 뒤인 5월 1일, 피카소는 스티어의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아 기존의 구상을 포기하고 라레아의 제안대로 게르니카 폭격을 벽화의 주제로 삼기로 결정했다.[7] 그는 이전에 여성 문제 등으로 몇 년간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게르니카』 제작에는 열정적으로 임했다.[82]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위한 일련의 예비 드로잉을 시작했다.[7]

3. 제작 과정

파블로 피카소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접하고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 벽화 주제를 게르니카로 결정, 즉시 제작에 착수했다. 도라 마르는 그가 작업할 수 있는 파리 그랑-오귀스탱 거리의 큰 아틀리에를 찾아주었고,[18]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18][5]

1937년 5월 11일, 피카소는 거대한 캔버스에 밑그림 작업을 시작했으며,[17] 미국 화가 존 페렌이 캔버스 준비를 도왔다.[19] 피카소는 광택이 적은 무광 하우스 페인트를 사용하여[1] 약 35일간 작업에 몰두했다. 이 기간 동안 황소, 말, 쓰러진 병사 등 주요 형상의 위치와 형태는 여러 차례 수정되었고,[17] 피카소는 반파시즘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작품에 담고자 했다.[21] 그는 영향력 있는 방문객들이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1] 그림은 1937년 6월 4일에 완성되었다.[1]

3. 1. 초기 구상 및 습작

1937년 1월, 파리 그랑 오귀스탱 거리에 거주하던 파블로 피카소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로부터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 관에 전시할 대형 벽화 제작을 의뢰받았다.[6][80][104] 당시 피카소는 1934년 이후 스페인을 떠나 있었지만, 프라도 미술관의 명예 망명 이사직을 맡고 있었다.[47]

처음에 피카소는 이 의뢰에 대해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1월부터 4월 말까지 자신이 즐겨 다루던 주제인 '화가의 작업실'을 소재로 한 개인적인 내용의 초기 스케치 작업을 진행했다.[1][79][81] 1980년대 파리피카소 미술관에서 발견된 스케치를 보면, 이 초기 구상에는 화가와 모델이 등장하며, 이후 《게르니카》에 포함될 태양이나 여성의 이미지가 이미 나타나 있었다.[79]

그러나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 공군의 게르니카 폭격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시인 후안 라레아는 피카소를 찾아와 이 비극적인 사건을 작품의 주제로 삼도록 강력히 권유했다.[1] 며칠 후인 5월 1일, 피카소는 『타임스』와 『뉴욕 타임스』에 실린 조지 스티어의 생생한 폭격 목격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아 기존의 구상을 완전히 폐기하고,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리기로 최종 결심했다.[7][82]

피카소는 메이데이 며칠 후 "스페인 군부(프랑코 반란군 지칭)에 대한 혐오의 의미를 담은 '게르니카'를 제작 중"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88] 이는 스페인 내전 발발 초기에 피카소가 반란군을 지지한다는 헛소문을 반박하고, 공화 정부에 대한 자신의 지지 입장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89]

5월 1일부터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위한 예비 드로잉, 즉 습작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7] 총 45점의 습작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작 날짜와 순서 번호가 기록되어 있어 작품의 구상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77][83]

습작 첫날인 5월 1일에는 파란색 데생 용지에 연필로 6점의 스케치를 그렸는데, 이때 이미 상처 입은 말, 초연한 모습의 황소, 등불을 든 여인 등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들이 등장했다.[84][85] 흥미로운 점은 초기 구상 단계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폭탄이나 비행기 등 폭격의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요소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85][86]

다음 날인 5월 2일은 일요일이었지만, 피카소는 평소와 달리 딸 마야와의 외출 약속도 잊은 채 작업에 몰두했다.[87] 이날의 습작에서는 전날의 정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고통스럽게 머리를 숙인 말이나 경악하는 표정의 여인 등 인물들의 감정이 더욱 격렬하게 표현되고 구성에 역동성이 부여되었다.[85] 이틀 만에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는 거의 잡혔지만, 여전히 게르니카 폭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그 비극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85]

약 일주일간의 휴식 후 5월 8일 작업을 재개하면서, 죽은 아이를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음으로 등장했다.[90] 피카소는 공산당 계열 신문인 『유마니테』 등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내전 상황을 접하며 이를 습작에 반영해 나갔다.[90] 5월 9일에도 작업을 이어가며 아이를 안은 여인의 위치를 여러 번 바꾸고, 각 요소 간의 연관성을 부여하며 입체감과 명암 대비 효과를 탐구했다.[90] 특히 이날은 아이를 안은 여인의 모습을 펜으로 정교하게 그린 단독 습작도 제작했다.[86] 또한, 초기 정방형 종이 대신 최종 벽화의 비율과 유사한 가로로 긴 종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90], 황소의 얼굴이 인간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팔이 잘린 두 여인이 추가되는 등 최종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90] 밤을 배경으로 한다는 설정 역시 이 시기에 명확해졌다.[91]

3. 2. 캔버스 작업과 도라 마르의 역할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그랑-오귀스탱 거리 아틀리에 기념판


파블로 피카소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접한 후,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할 벽화의 주제를 게르니카로 결정하고 5월 1일부터 습작 제작에 몰두했다. 그의 연인이자 사진작가였던 도라 마르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릴 수 있도록 충분히 큰 작업실을 찾아주었다. 그녀는 좌익 커뮤니티와의 인맥을 통해 노트르담 근처 그랑-오귀스탱 거리에 있는, 과거 반파시스트 그룹 '대 반격(Contre-Attaque)'의 본부로 사용되었던 공간을 확보했다.[18] 마르는 이곳이 피카소의 기념비적인 항의 미술 작품을 위한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했다.[18]

1937년 5월 11일 아침, 피카소는 이 아틀리에에서 세로 349cm × 가로 777cm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에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93] 미국 화가 존 페렌이 기념비적인 캔버스 준비를 도왔고,[19] 피카소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가능한 한 광택이 적게 나도록 특별히 배합된 무광 하우스 페인트를 사용했다.[1]

도라 마르는 《게르니카》 제작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피카소의 작업 과정을 독점적으로 사진 촬영할 권리를 얻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각 단계를 총 8장의 사진으로 기록했다.[18][94] 이는 작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전까지 피카소는 모델 외에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타인에게 거의 공개하지 않았고, 제작 중인 작품을 촬영하게 한 적도 없었다.[93] 또한 마르는 피카소에게 영감을 주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정치적으로 더 창의적이 되도록 밀어붙였다"고 평가받는다.[5] 피카소의 요청으로 마르는 《게르니카》 속 죽어가는 말의 일부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5] 일부 학자들과 미술 평론가들은 《게르니카》 특유의 흑백 톤이 마르의 흑백 사진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미술사가 존 리처드슨은 마르의 사진이 "피카소가 색채를 피하고 사진의 흑백 즉시성을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했다.[1]

피카소는 반파시즘 선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영향력 있는 방문객들이 작업실을 찾아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허용했다.[1] 그러나 작업실에서는 피카소의 또 다른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와 도라 마르가 마주쳐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93]

캔버스 작업은 약 3주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빌렘 샌드버그에 따르면, 초기 구상은 있었지만 최종 형태를 갖추기까지 3주가 걸렸다. 황소의 머리는 초기 위치를 유지했지만 몸통은 왼쪽으로 돌아갔고, 5월 20일에는 말의 머리가 위로 들어 올려졌다. 바닥에 쓰러진 병사의 몸은 6월 4일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치가 바뀌고 머리와 손의 형태가 구체화되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배경이 불타는 집들이 있는 거리에서 안과 밖이 모호한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바뀌었고, 말 머리 위에는 눈처럼 생긴 램프가 추가되었다. 죽어가는 병사의 손에는 부러진 칼 옆에 작은 희망의 꽃이 그려졌다.[17]

도라 마르가 찍은 사진들은 이러한 변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5월 11일 첫 사진에서는 습작 단계에서 오른쪽에 있던 여인이 왼쪽으로 옮겨지고 오른쪽에 세 명의 여인이 추가되었다.[93] 13일 사진에서는 태양과 유사한 형상이 나타나고 화면이 검게 칠해지기 시작했다.[97] 16일에서 19일 사이 사진에서는 말의 얼굴과 병사의 방향이 바뀌고, 전경의 인물이 정리되었으며, 정치색을 약화시키기 위해 병사의 '올린 주먹'이 내려졌다.[97][98][100][101] 20일에서 24일 사이 사진에서는 고개를 숙였던 말이 머리를 들고 콧김을 내뿜는 모습으로 바뀌었고, 색과 무늬가 있는 콜라주가 시도되었다.[98][101] 이후 콜라주는 제거되었다가 다시 시도되기도 했으나, 6월 4일경 사진에서는 최종적으로 제거되었고 병사는 석고상처럼 비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몬드 모양의 광원 안에 전구가 그려졌다.[101][98][102]

피카소는 35일간의 작업 끝에 1937년 6월 4일 그림을 완성했다.[1] 그는 그림을 스페인 공화국에 무상으로 기증할 생각이었으나, 5월 28일 스페인 대사관 직원이 방문하여 재료비 명목으로 을 전달했다.[107] 그림이 거의 완성된 6월 6일, 피카소는 호세 베르가민, 후안 라레아, 알베르토 자코메티, 막스 에른스트,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롤랜드 펜로즈, 헨리 무어 등 여러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아틀리에로 초대하여 처음으로 작품을 선보였다.[103]

3. 3. 완성 및 공개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당시 스페인관 위치를 나타내는 스페인 제2공화국 국기. 《게르니카》가 이곳에 전시되었다.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 공화국 전시관의 복제품 (1992년 바르셀로나 건립). 원본 전시관에 《게르니카》가 걸렸다.


《게르니카》는 1937년 7월 파리 국제 박람회의 스페인관에서 처음 공개 및 전시되었다.[26] 당시 나치 독일소련은 거대한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스페인관은 스페인 내전 중인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으며, 박람회의 기술 주제와는 달리 스페인 정부의 생존 투쟁을 알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전시관 입구에는 공화국 군인들의 거대한 사진 벽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전시되었다.

: 우리는 스페인의 본질적 통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

: 우리는 스페인 토지의 완전성을 위해 싸우고 있다.

: 우리는 우리 조국의 독립과 스페인 국민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게르니카》 전시에는 폴 엘뤼아르의 시 "게르니카의 승리"가 함께했으며,[27] 전시관에는 호안 미로의 《수확자》와 알렉산더 칼더의 《머큐리 분수》도 전시되었는데, 이들 모두 공화국의 대의에 공감하여 제작된 작품이었다.[28][29][30] 또한 스페인관 3층에는 파괴된 게르니카의 사진들이 전시되었다.[104]

그림이 아틀리에에서 박람회장으로 옮겨진 정확한 날짜는 불분명하지만,[104] 1937년 6월 말에는 스페인관으로 옮겨져 입구 오른쪽 벽면 전체에 걸렸다.[104] 7월 12일 스페인관 완공 기념회에서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106]

파리 박람회에서 《게르니카》는 공개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대중의 반응은 엇갈렸다.[31] 전위 예술가나 일부 지식인을 제외하면 그림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116] 신문 등 언론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고,[107] 스페인관 개관이 늦어져 공식 팜플렛에도 실리지 못했다.[116]

스페인관 책임자 중 한 명인 막스 오는 이 그림을 옹호해야 했다. 일부 스페인 관계자들은 벽화의 모더니즘 스타일에 반대하며, 박람회를 위해 의뢰된 더 전통적인 그림인 호라시오 페레르 데 모르가도의 《마드리드 1937 (검은 비행기)》로 교체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그림을 기대했던 이들 관계자들은 그림을 눈에 띄지 않는 위치로 옮기려 했으나, 피카소의 명성을 고려하여 만국 박람회 폐막까지 입구 홀에 걸려 있었다.[105]

일부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은 피카소의 그림이 정치적 메시지가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했으며,[32] "심각해지는 스페인의 위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거나 "나치의 끔찍한 범죄의 진상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그리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왔다.[107]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역시 《게르니카》에 비판적이었으며,[33] 나중에 "매끄럽지 못하고" "크기에 비해 너무 압축되었다"고 평가했다.[34] 만국 박람회 폐막 후 12월에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정치적 이유가 아닌 미학적 관점에서 "피카소의 벽화는 흉할 뿐이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킨다"고 비판했다.[107][108]

반면, 미술 평론가 장 카수와 시인 호세 베르가민은 이 그림이 전형적인 스페인 작품이며 조국의 본질을 구현한다고 칭찬했다.[35][107] 미셸 르리스는 《게르니카》에서 "고대 비극을 묘사한 흑백 캔버스에… 피카소는 또한 우리의 불행을 기록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라며 예감을 읽어냈다.[36] 장 콕토 역시 그림을 칭찬하며 "[프랑코] 장군이 항상 어깨에 짊어질 십자가"라고 말했다.[37] 크리스티앙 제르보스는 미술 잡지 『카이에 다르』 한 호 전체를 이 그림의 특집으로 다루었다.[116]

나치 독일은 《게르니카》에 대한 반발로 추정되는 움직임으로, 1937년 6월 또는 7월경 공식 전쟁 화가인 클라우스 베르겐에게 《'아드미랄 셰어'의 알메리아 폭격》이라는 애국적인 그림을 의뢰했다.[38][39]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1937년 뮌헨에서 열린 대독일 예술 전시회에 전시되었다.[40]

4. 작품 분석

《게르니카》는 파블로 피카소가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대형 벽화이다.[105] 세로 349cm, 가로 777cm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졌으며[105], 유화 물감 대신 건조가 빠른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하여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105] 이 페인트 사용은 이후 작품 보존에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작품은 게르니카 폭격의 참상을 고발하며 전쟁의 비극과 고통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당시 그림으로는 드물게 거의 흑백으로 그려졌는데, 무채색에 가까운 회색부터 자줏빛이나 푸른빛을 띤 회색까지 다양한 색조의 회색을 사용하여 빛과 어둠의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135]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은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되어 주제의 보편성을 더한다.[135]

화면 구성은 중앙의 큰 직사각형과 좌우의 작은 직사각형으로 나뉘어 중세 교회의 3폭 제단화 형식을 연상시킨다.[105][135] 또한 중앙의 주요 요소들은 거대한 삼각형 구도 안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 신전 건축의 페디먼트를 떠올리게 한다.[134][135] 이러한 고전적인 종교 미술 형식의 차용은 작품의 주제 의식을 더욱 심화시킨다.[135] 작품 속 공간은 실내와 실외가 혼재하고, 시간 역시 낮과 밤이 뒤섞여 표현되어[135] 특정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비극을 나타낸다.[102][142] 그림 속에는 의도적으로 숨겨진 형상들이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22]

4. 1. 구성 및 등장인물

게르니카


이 그림은 커다란 방 안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장면을 묘사한다. 화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중세 교회의 3폭 제단화 형식을 떠올리게 하며[105], 실내와 실외, 낮과 밤이 혼재된 초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135][102][142]
왼쪽 부분에는 눈을 부릅뜬 황소가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절규하는 여인 위에 서 있다. 황소의 꼬리는 마치 불꽃이나 연기처럼 표현되었고, 여인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고통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다. 황소는 마치 여인을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134] 황소와 울부짖는 여인의 혀는 비명을 상징하는 듯 단검 모양으로 그려졌다.
중앙 부분은 거대한 삼각형 구도를 이루며, 고통받는 인물들이 집중되어 있다.[134] 옆구리에 창이나 투창에 찔린 듯 큰 구멍이 난 말이 고통 속에 쓰러져 가며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134] 말은 사슬 갑옷처럼 보이는 것을 입고 있다. 말 아래에는 죽은 병사가 누워 있는데, 잘린 오른손에는 부러진 검과 그 위로 피어난 꽃 한 송이가 들려 있고, 왼손 손바닥에는 예수의 성흔을 연상시키는 순교의 상징, 즉 고통의 표식이 새겨져 있다.[134] 고통받는 말의 머리 위에는 전지전능한 눈처럼 생긴 전구가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다. 말의 혀 역시 단검 모양으로 그려져 고통스러운 절규를 나타낸다.
오른쪽 부분에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오른쪽 위 창문으로는 한 여인이 오른손에 등불을 들고 몸을 내밀어 이 참상을 목격하고 있다.[134] 그 아래에는 충격에 빠진 여인이 비틀거리며 중앙의 전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134] 가장 오른쪽에는 팔을 치켜든 채 공포에 질려 절규하는 네 번째 여인이 위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에 갇혀 있다. 이 여인의 모습은 왼편의 아이 잃은 여인의 절규와 유사하며, 오른손은 마치 비행기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그려졌다.[134] 황소 오른쪽의 금이 간 벽 틈으로는 밝은 빛과 함께 비둘기가 보인다. 방의 오른쪽 끝은 열린 문이 있는 어두운 벽으로 정의된다.

그림 속에는 숨겨진 이미지도 발견된다. 말의 콧구멍과 윗니는 왼쪽을 향한 인간의 해골 형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2] 또한, 말의 앞다리와 무릎 덮개가 황소의 머리와 코를 이루고, 말의 가슴 부분에 뿔이 그려져 마치 황소가 아래에서 말을 들이받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형식적 특징으로는 세로 349cm, 가로 777c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를 들 수 있다.[105] 캔버스유화 물감 대신 건조가 빠른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하여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으나, 이는 이후 그림 손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05] 그림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거의 흑백으로 그려졌는데, 무채색에 가까운 회색부터 자줏빛이나 푸른빛을 띤 회색까지 다양한 색조의 회색을 사용하여 빛과 어둠의 극적인 효과를 높였다.[135] 등장하는 요소들은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되어 주제의 보편성을 강조한다.[135]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3폭 제단화나 그리스 신전 건축과 같은 서양의 고전적인 종교 미술 형식을 차용하여[135] 전쟁의 비극과 고통이라는 주제를 강력하고 보편적인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4. 2. 상징 및 해석

《게르니카》에 담긴 상징과 그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때로는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특히 그림의 중심 요소인 황소와 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미술사학자 패트리샤 페일링은 "황소와 말은 스페인 문화에서 중요한 존재이며, 피카소 자신도 이들을 여러 역할로 사용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를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피카소 본인 역시 그림의 상징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림 속 요소들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이 황소는 황소이고 이 말은 말입니다... 제 그림에서 어떤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매우 사실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얻은 생각과 결론도 저 또한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얻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림을 위해 그립니다. 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립니다.[23]

하지만 1945년에는 화상 제롬 세클러에게 "황소는 파시즘이 아니라 인간의 잔혹함과 암흑면이다. (...) 말은 인민을 나타낸다 (...) '게르니카' 벽화는 상징적, 우의적인 것이므로 나는 말이나 황소 등을 사용했다"고 말하기도 해[116][139],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피카소가 게르니카 폭격 이전에 제작한 에칭 연작 《프랑코의 꿈과 거짓말》에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자신의 말을 삼키고 황소와 싸우는 괴물로 묘사되는데, 이는 《게르니카》의 상징 해석에 참고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게르니카》의 요소들이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고발한다고 해석한다.[9] 학자 베벌리 레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해석 목록은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합의를 반영한다:[9]

  • 뒤틀린 신체 형태와 자세는 항의를 표현한다.
  • 흑백 회색의 사용은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고통과 혼돈을 표현한다.
  • 불타는 건물과 무너지는 벽은 게르니카의 파괴뿐 아니라 내전의 파괴력을 반영한다.
  • 그림에 사용된 신문 인쇄 질감은 피카소가 학살 소식을 접한 방식을 암시한다.
  • 중앙의 전구는 태양을 상징한다.
  • 바닥의 부러진 칼은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 패배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알레한드로 에스칼로나는 그림의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 전개되는 혼돈은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 억압감을 심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악몽 같은 도시 풍경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색상의 부재는 당신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폭력적인 장면을 더욱 끔찍하게 만든다. 흑백 회색은 특히 당신이 전쟁 이미지를 생방송으로, 고화질로 거실에서 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한다.[3]

주요 요소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요소일반적/주요 해석기타 해석피카소 언급
황소와 아이의 시신을 안은 여인(왼쪽)
고통받는 인민[116][139], 희생자, 공화국 정부빈사 상태의 휴머니즘, 프랑코 파시즘 붕괴[140]"말은 말"[23], "인민"[116][139]
등불을 든 여인진리[84], 광명의 운반자(고틀리브)[137]사회주의 상징[140]-
부러진 칼과 꽃(하단 중앙)
(병사의) 부러진 칼패배[9], 파괴된 것, 부러진 마음--
(병사의) 꽃희망, 부활--
아이 안은 여인폭격 피해자, 고통피에타[86], 마리아 막달레나[140], 유아 학살 주제[140]-
달려가는 여인충격, 혼란위로하려는 이웃[137], 소련의 지원(고틀리브)[137]-
불타는 건물 속 여인(오른쪽)
태양/전구섭리의 눈, 신의 시선[142], 태양[9]현대 기술과 참극의 관련성[135], 자본주의, 기독교적 구원 상실[142]-
새 (비둘기)평화의 상징[142], 정령외부에서 비치는 빛 속의 모습-



또한 그림 속에는 의도적으로 숨겨진 형상들이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22] 예를 들어, 고통스러워하는 말의 콧구멍과 윗니는 인간의 해골 형상으로 보이며, 말의 앞다리와 몸통 부분에서는 아래에서 말을 찌르는 듯한 황소의 머리 형상이 나타난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미술사학자 미야시타 마코토는 《게르니카》를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 기독교적 묵시록의 비전, 죽음과 재생의 숨 막히는 드라마, 휴머니즘 구제의 희구,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의 시선, 그럼에도 반복되는 부조리한 싸움과 죽음, 인간의 어리석음과 현명함,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명암, 선과 악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결과[136]

Becht-Jördens와 Wehmeier는 이 그림을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와 같은 아틀리에 그림의 전통 속에서 해석하며, 피카소가 정치 권력과 폭력에 맞서 예술가로서 자신의 역할과 힘을 정의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즉, 《게르니카》는 단순한 정치적 그림을 넘어, 전쟁과 폭력이라는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하고 보호하는 데 예술이 기여할 수 있는 바에 대한 피카소의 성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25]

결론적으로 《게르니카》는 특정 상징에 대한 단일한 해석을 거부하며, 전쟁의 비극과 인간의 고통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피카소는 의도적으로 모호성을 남김으로써 관람객 각자가 작품과 대면하여 스스로 의미를 찾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5. 전시와 반향

《게르니카》는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제작 직후부터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페인 내전공화 정부의 의뢰로 탄생한 이 그림은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나, 당시에는 그 혁신적인 표현과 정치적 메시지로 인해 엇갈린 평가와 논란에 휩싸였다.[31][116]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후, 피카소는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그림의 반환을 거부했다. 이후 《게르니카》는 국제 순회 전시를 통해 유럽과 미국 등지를 돌며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반전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43][47]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 장기간 보관되면서 반전 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47]

1975년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림의 스페인 귀환이 이루어졌다. 오랜 협상 끝에 1981년 마침내 스페인 땅을 밟았으며,[50] 이는 스페인 민주주의 회복의 중요한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졌다.[127] 초기에는 프라도 미술관 별관에 전시되었으나,[125] 1992년부터는 마드리드의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에서 영구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52] 그림의 소장지를 둘러싼 논쟁, 특히 바스크 지방의 지속적인 반환 요구는 《게르니카》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정치적, 문화적 중요성을 보여준다.[54][132]

5. 1. 파리 만국 박람회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던 파블로 피카소공화 정부를 지지했다. 1937년 1월, 공화 정부는 피카소에게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장식할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80][104] 피카소는 처음에는 내전과 무관한 개인적인 주제를 구상했으나[81][79],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 공군의 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접하고 벽화의 주제를 게르니카로 결정했다.[82]

《게르니카》는 1937년 6월 말 완성되어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으로 옮겨졌고, 7월 12일에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104][106] 그림은 입구 홀 오른쪽 벽면 전체에 걸렸다.[104] 스페인관은 내전 중인 공화국 정부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알리기 위해 지어졌으며, 박람회의 기술적인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전시관 입구에는 공화국 군인들의 거대한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내걸렸다.

: 우리는 스페인의 본질적 통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

: 우리는 스페인 토지의 완전성을 위해 싸우고 있다.

: 우리는 우리 조국의 독립과 스페인 국민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스페인관 3층에는 폭격으로 파괴된 게르니카의 사진들과 함께 폴 엘뤼아르가 쓴 시 "게르니카의 승리"가 전시되었다.[104][27] 또한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호안 미로의 《수확자》와 알렉산더 칼더의 《머큐리 분수》도 함께 전시되었다.[28][29][30]

그러나 《게르니카》는 공개 초기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대중과 평단의 반응은 엇갈렸다.[31][116] 신문 등 언론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고[107], 박람회 공식 팜플렛에도 실리지 못했다.[116] 스페인관 책임자 중 한 명인 막스 오는 그림의 모더니즘 양식에 불만을 품고 다른 그림으로 교체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일부 마르크스주의 그룹에서는 작품의 정치적 메시지가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32]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역시 《게르니카》를 "매끄럽지 못하고", "크기에 비해 너무 압축되었다"고 평가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3][34]

반면, 미술 평론가 장 카수와 시인 호세 베르가민은 《게르니카》가 스페인의 본질을 담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5][107] 미셸 르리스는 작품에서 "고대 비극을 묘사한 흑백 캔버스... 우리의 불행을 기록한다"는 예감을 읽어냈고[36], 장 콕토는 이 그림을 "[프랑코] 장군이 항상 어깨에 짊어질 십자가"라고 평했다.[37] 크리스티앙 제르보스(Christian Zervos)는 미술 잡지 『카이에 다르』(Cahiers d'art) 한 호 전체를 《게르니카》 특집으로 꾸미기도 했다.[116]

한편, 나치 독일은 《게르니카》에 대한 반발로 추정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1937년 6월 또는 7월, 공식 전쟁 화가인 클라우스 베르겐에게 《'아드미랄 셰어'의 알메리아 폭격》이라는 애국적인 그림 제작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져 뮌헨에서 열린 대독일 예술 전시회에 전시되었다.[38][39][40]

만국 박람회가 폐막한 후,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미학적인 관점에서 《게르니카》를 "흉할 뿐이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킨다"고 비판했다.[107][108] 그림은 공화국 정부의 소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으로 보내지지 않고, 피카소의 파리 아틀리에로 돌아왔다.[109] 이후 1938년 1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나 큰 반향은 없었고[110][112], 같은 해 10월에는 런던 전시회에 출품되어 수익금이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 전달되었다.[109][110] 런던 전시에서는 로저 힝크스(Roger Hinks)와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 등의 비판과 스티븐 스펜더, 허버트 리드 등의 옹호가 맞섰다. 특히 스펜더는 이 그림을 "걸작일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 중 하나이다.[113] 이 시기 스페인 내전은 공화국의 패색이 짙어졌고, 1939년 3월 31일 프랑코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5. 2. 국제 순회 전시와 미국 망명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가 승리하자,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대신 스페인 난민을 위한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1939년 미국으로 보냈다.[43] 미국으로 가기 전, 《게르니카》는 이미 국제적인 순회 전시를 시작했다. 피카소의 화상이자 친구인 폴 로젠버그는 1938년 1월부터 4월까지 《게르니카》를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 투어를 기획하여 오슬로, 코펜하겐, 스톡홀름, 예테보리에서 전시했다. 같은 해 9월 말에는 런던의 화이트채플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는데, 이는 롤랜드 페너로즈 경과 노동당 대표 클레멘트 애틀리가 조직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림이 런던에 도착한 9월 30일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나치 독일 지도자들이 뮌헨 협정에 서명한 날이었다. 이후 《게르니카》는 리즈, 리버풀을 거쳐 1939년 초 맨체스터로 옮겨져 스페인 구호품 전달을 위한 기금 마련 전시회에 사용되었다.[42]

미국에서는 1939년 5월 뉴욕 시의 발렌타인 갤러리를 시작으로, 같은 해 8월 샌프란시스코 미술관(현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에서 박물관 최초로 전시되었다.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은 1940년 11월 15일부터 1941년 1월 7일까지 "피카소: 그의 예술 40년"이라는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 《게르니카》와 관련 연구 작품들을 함께 선보였다.[44]

피카소는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며, 그 보관을 MoMA에 맡겼다.[47] 이에 따라 《게르니카》는 1939년부터 1952년까지 하버드 미술관포그 미술관을 포함하여 미국 전역을 순회했다.[45][46]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브라질, 이탈리아 밀라노, 그리고 다른 유럽 주요 도시들에서 전시되었다. 이후 피카소의 75세 생일을 기념하는 MoMA 회고전을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고, 시카고필라델피아에서도 전시되었다.[47]

잦은 이동으로 그림의 상태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한 곳에 보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MoMA 3층의 한 방에 피카소의 예비 연구 작품 몇 점과 도라 마르(Dora Maar)가 작업 과정을 촬영한 사진과 함께 전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게르니카》는 반전과 평화의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그림이 전시된 방이 반전 시위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47] 1974년 2월 28일에는 토니 샤프라지가 미라이 학살에 연루된 미군 장교 윌리엄 캘리 중위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그림 위에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KILL LIES ALL"이라고 낙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그림 표면의 니스 칠 덕분에 페인트는 비교적 쉽게 제거될 수 있었다.[48] 《게르니카》는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까지 MoMA에 보관되었다.[47]

5. 3. 스페인 귀환과 현재

1968년, 프랑코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가져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47] 피카소는 스페인 국민이 공화국을 다시 누릴 때까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공공의 자유와 민주주의 제도"의 회복과 같은 조건을 추가했다. 피카소는 1973년에 사망했고, 프랑코는 2년 후인 1975년에 사망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가 사망하고,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민주화로의 이행기를 맞이하자, 그림의 스페인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23] 1977년 민주화 후 첫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후 성립된 스페인 국회는 그림의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123][124] 1978년에는 새 헌법이 비준되어 스페인은 민주적인 입헌 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은 소장품 중 최고 보물 중 하나인 《게르니카》를 포기하는 것을 꺼렸고, 군주제가 피카소의 유언장에 명시된 공화국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여러 관찰자들의 거센 압력과 스페인 및 미국 정부 간의 협의 끝에[123][124] MoMA는 마침내 1981년 스페인에 그림을 양도하기로 결정했다.[125] 이 과정에서 스페인 역사학자 하비에르 투셀 등이 협상에 참여했다.

스페인 내에서는 그림의 소장지를 두고 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 그림의 주제가 된 게르니카, 피카소의 출생지 말라가, 피카소가 청년 시절을 보낸 바르셀로나 등이 경쟁했다.[123][124] 각 도시 시장과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관장이 참여한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125] 특히 바스크 지방은 이 그림을 바스크의 수난과 해방의 상징으로 여기며[126] 열성적으로 전시를 희망했다.

스페인으로 반환된 후 초기 전시 장소였던 프라도 미술관 별관 카손 델 부엔 레티로가 속한 프라도 미술관 전경


1981년 9월 10일,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도착하여[50]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별관인 카손 델 부엔 레티로(Casón del Buen Retiroes)로 옮겨졌다.[125] 스페인에서는 이 그림을 "고국의 땅을 밟은 마지막 망명자"라고 불렀으며,[127] 보수적인 ABC 신문조차 사설에서 비슷한 논조를 보였다.[128] 그림 반입에 맞춰 별관에는 온도·습도 관리 장치, 폭발물 감지 장치, 감시 시스템 등 다양한 보안 설비가 추가되었고,[129][126] 그림은 방탄 유리 뒤에 전시되었다.[132] 그림은 밀폐된 작은 방에 설치되어 보안 카드를 가진 사람만 접근할 수 있었다.[129] 당시 프라도 미술관 관장이었던 호세 마누엘 피타 안드라데(José Manuel Pita Andradees)는 이러한 엄격한 보안 조치와 본관이 아닌 별관 전시에 불만을 품고 사임했다.[130] 10월 25일 피카소 탄생 10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방탄 유리 뒤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되었고,[49][50][128] 45점의 습작도 함께 전시되었다.[76] 첫 해에 거의 백만 명이 그림을 관람했다.[51]

1992년부터 《게르니카》가 전시되고 있는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


1992년 9월, 마드리드에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가 개관하면서 《게르니카》는 소장품의 핵심으로 이곳으로 옮겨졌다.[52][130] 이는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품 중 19세기 초 이후의 작품들을 공간 문제로 다른 건물로 이전하는 계획의 일부였다. 당시 프라도 미술관 관장 펠리페 가린(Felipe Garín Llombartes)은 "이 그림은 매우 중요한 작품이지만 프라도 미술관의 역사적인 컬렉션과는 반드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언급했다.[130] 그러나 이 이전은 피카소가 유언에서 프라도 미술관 전시를 명시했다는 점 때문에 논란이 되었으며, 그림 소장을 희망했던 바스크 지방에서도 불만을 표시했다.[130]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는 개관 초기에는 《게르니카》 외에는 평범한 소장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130] 1997년에는 프라도 미술관의 입장객 수를 넘어서며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미술관이 되었다.[131]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에서는 1995년 방탄 유리가 제거되었고,[131] 그림은 전시실 중앙에서 측벽으로 옮겨져 관람객들이 정면에서 전체를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혼잡은 완화되었다.[131] 현재 그림 양옆에는 비무장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관람객은 약 4m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다.[131]

게르니카 마을에 설치된 《게르니카》 타일 벽화. '"게르니카" 게르니카라'(, '게르니카(그림)를 게르니카로')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그림을 바스크 지방, 특히 1997년 개관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54][132] 그러나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 측은 캔버스가 너무 약해져 이동이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55] 구겐하임 미술관 측도 영구 이전은 어렵다고 보지만, 바스크 정부는 빌바오에서의 임시 전시 가능성을 계속 지지하고 있다.[53]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는 바르셀로나(1992), 일본(1995), 프랑스(1996),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1997), 뉴욕 현대 미술관(2000) 등 여러 기관의 대여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132]

6. 작품의 의의와 영향

《게르니카》는 20세기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을 고발하는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알레한드로 에스칼로나는 이 그림이 "회화에 있어서 베토벤교향곡 9번이 음악에 갖는 의미와 같다"고 평가하며, "전쟁뿐만 아니라 희망과 평화를 향해 인류에게 말하는 문화적 상징"이자 엘 모소테 학살이나 스레브레니차 학살 같은 집단 학살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특정 공격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어 메시지가 보편적이고 시대를 초월하며[3], 《게르니카》는 전쟁의 고통과 황폐함에 맞서 인류에게 경고하는 보편적이고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3]

스페인 내전 중이던 1937년, 공화 정부의 의뢰로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 벽화를 제작하게 된 파블로 피카소[80][104], 1937년 4월 26일 나치 독일 공군의 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이 사건을 주제로 삼았다.[82] 이 비극적인 사건은 《게르니카》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작품에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담게 만들었다.

1970년대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정권 종식과 바스크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여겨졌으며, 바스크 좌파는 이 그림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했다.[67] 미술사적으로도 표현주의와 큐비즘을 결합한 독창성 등으로 중요한 평가를 받으며[17][68][69], 후대의 많은 예술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70][71]

6. 1. 예술적 영향

《게르니카》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전쟁의 참상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담은 강력한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알레한드로 에스칼로나는 이 그림이 "회화에 있어서 베토벤교향곡 9번이 음악에 갖는 의미와 같다"며, "전쟁뿐만 아니라 희망과 평화를 향해 인류에게 말하는 문화적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엘 모소테 학살이나 보스니아 등 집단 학살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143] 특정 사건에 대한 명확한 언급 없이 전쟁의 고통과 황폐함을 고발함으로써, 《게르니카》는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3]

1970년대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독재 정권의 종식과 바스크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여겨졌으며, 바스크 좌파는 이 그림의 이미지를 정치적 상징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체라트'라는 단체는 그림 속 램프의 반전된 이미지를 상징으로 사용했다.[67]

미술사학자 W. J. H. B. 상드베르흐는 피카소가 《게르니카》에서 표현주의와 큐비즘을 결합하여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작품이 공습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표현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대각선 등을 활용한 "큐비즘의 언어"를 통해 공간을 "모호하고, 비현실적이며, 안과 밖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했다고 설명했다.[17] 영국의 미술 평론가 조나단 존스는 이 그림을 "큐비즘적 종말"이라고 칭하며, 피카소가 "독재자 시대의 일상적인 거짓말을 능가할 수 있을 만큼 진실을 생생하고 영구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했다.[68][69]

『게르니카』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쉴라주


《게르니카》는 후대의 수많은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전후 프랑스의 앵포르멜 화가들, 특히 피에르 쉴라주나 조르주 마티유 등은 작품의 거대한 규모와 복합적인 의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144]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었을 때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스튜어트 데이비스, 로버트 머더웰, 아실 고르키, 빌렘 데 쿠닝, 잭슨 폴록 등이 대표적이다.[145][86]

이후에도 《게르니카》의 영향력은 계속되어, 1980년대 독일 안젤름 키퍼의 역사화, 영국 길버트 앤 조지의 작품, 1990년대 빌 비올라의 삼연화, 2000년대 독일의 네오 라우흐 등의 작품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144]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으로는 페이스 링골드의 1967년 그림 ''미국인 시리즈 #20: 죽다'', 고슈카 마쿠가의 ''야수의 본성''(2009–2010), ''케이즈카마 게르니카스''(2010–2017), 에리카 루커트의 연극 ''게르니카''(2011–2012) 등이 있다.[70][71]

일본에서는 오카모토 타로가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후지타 츠구하루의 전쟁화 『아츠 섬 옥쇄』 등에서도 《게르니카》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144] 음악 분야에서는 일본의 나카무라 카즈요시가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한 곡 「게르니카」를 자신의 앨범 『ERA』에 수록하기도 했다.[146]

6. 2. 사회적, 정치적 영향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단순한 미술 작품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작품은 반전과 평화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전쟁의 비극, 특히 민간인 학살의 잔혹함을 고발하며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3]

스페인 내에서는 1970년대 프랑코 사후, 독재 정권의 종식과 바스크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졌다. 바스크 좌파 단체들은 《게르니카》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활동에 활용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에체라트라는 단체는 그림 속 램프를 뒤집은 이미지를 상징으로 사용했다.[67]

《게르니카》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유엔 본부에 걸린 태피스트리 복제품이다. 자클린 드 라 봄 뒤르바흐가 제작한 이 태피스트리는[56] 뉴욕 유엔 본부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회의실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65] 넬슨 록펠러가 1955년에 의뢰하여 제작되었으며, 1985년 록펠러 재단이 유엔에 대여했다.[57][58] 이 태피스트리는 국제 분쟁 해결과 평화 유지를 논의하는 장소에서 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2003년 2월, 미국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이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할 때, 배경에 있던 이 태피스트리가 갑자기 파란색 커튼으로 가려지는 일이 있었다.[59] 유엔 관계자들은 방송사 측의 요청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당시 부시 행정부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연설의 배경으로 《게르니카》의 참혹한 이미지가 보이는 것을 꺼려 압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외교가에서 제기되었다.[60] 칼럼니스트 알레한드로 에스칼로나는 이 사건에 대해 《게르니카》의 "손상된 신체와 왜곡된 얼굴의 매력 없는 혼합"이 미국의 전쟁 명분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 작품을 "불편한 걸작"이라고 평했다.[3]

이 태피스트리는 유엔 본부 개보수 공사로 인해 2009년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61], 2012년 텍사스 샌안토니오 미술관[62] 등지로 잠시 옮겨졌다가 2015년 유엔으로 돌아왔다.[63] 2021년 소유주인 넬슨 A. 록펠러 주니어가 회수했으나[64], 2022년 2월 다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회의실 밖 벽에 설치되었다.[65]

알레한드로 에스칼로나는 《게르니카》를 "회화에 있어서 베토벤교향곡 9번이 음악에 갖는 의미와 같다"고 평가하며, "전쟁뿐만 아니라 희망과 평화를 향해 인류에게 말하는 문화적 상징"이자 엘살바도르나 보스니아의 집단 학살과 같은 비극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3] 이처럼 《게르니카》는 특정 사건에 대한 고발을 넘어, 시대를 초월하여 전쟁의 고통과 파괴에 맞서 인류에게 경고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3]

6. 3. 한국에의 시사점

《게르니카》는 특정 사건인 게르니카 폭격을 넘어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성 자체를 고발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알레한드로 에스칼로나는 이 작품을 "전쟁뿐만 아니라 희망과 평화를 향해 인류에게 말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평가하며, 엘 모소테 학살이나 스레브레니차 학살과 같은 집단 학살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67] 작품은 특정 시공간에 대한 명확한 묘사를 피함으로써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획득했으며[3], 전쟁의 고통과 파괴에 맞서 인류에게 경고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3]

특히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 공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폭격이었던 게르니카 폭격을 직접적인 계기로 탄생했다. 이는 전쟁이 군인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깊은 고통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러한 《게르니카》의 메시지는 한국전쟁과 같이 전쟁으로 인한 깊은 상처와 민간인 희생의 아픔을 직접 경험한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작품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반인륜성을 고발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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