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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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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여는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언변이 뛰어났으나, 《논어》에서 공자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3년 상복 기간에 의문을 제기하고 낮잠을 자는 등의 행동으로 비판받았으며, 공자는 그를 '썩은 나무'에 비유하기도 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가 제나라에서 반란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었으나, 《좌전》의 기록과 상이하여 논란이 있다. 사후에는 당나라송나라 황제로부터 작위와 칭호를 받았으며, 공자묘에 신주가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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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여
기본 정보
위대한 성인과 옛 현인의 반신 초상화 - 재여 자아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위대한 성인과 옛 현인의 반신 초상화》에 묘사된 재여"
자이
이름재여
자아
로마자 표기Jae Yeo
생애
출생기원전 522년
사망기원전 458년
정보
직업공자의 제자
기타 정보
관련 인물공자

2. 생애와 사상

초나라영윤 자서는 공자의 등용을 반대하면서 왕에게 공자의 제자들의 뛰어남을 언급했는데, 이때 재여를 유능한 관료의 예시로 들었다.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자서는 초 소왕에게 "왕의 관료 중에 재여와 같은 자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재여를 비롯한 공자의 제자들이 보좌한다면 초나라가 현재의 영토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재여가 비록 스승에게 비판받는 일화도 있지만, 당대에는 그의 정치적, 외교적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 1. 출신과 활동

재여(宰予)는 노나라 출신으로, 공자의 제자 중 언변이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논어》에는 주로 스승 공자로부터 비판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재여는 부모상(喪) 이후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삼년상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1년으로 단축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공자는 재여가 "인(仁)하지 못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공자는 자식이 태어나 3년은 부모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재여 역시 부모로부터 3년간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라며, 3년상을 치르는 것이 당연한 도리임을 강조했다. 또한 공자는 재여가 낮잠 자는 것을 보고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다(朽木不可雕也)"고 비유하며 그의 태도를 꾸짖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재여는 공자의 가까운 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사마천의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재여는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 벼슬을 하다가 진항이 일으킨 반란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고, 그의 일족까지 멸족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마천은 공자가 제자의 이러한 죽음을 부끄러워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오래전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 왔다. 《좌전》에는 진항의 난 때 살해된 인물이 간지(阚止)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간지의 자(字)가 재여와 같은 자아(子我)였기 때문에 사마천이 두 인물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2. 2. 3년상 논쟁

재여는 공자의 제자 중 언변에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1], 와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모의 삼년상에 대한 그의 문제 제기는 유명하다.

논어》 〈양화(陽貨)〉 편에 따르면, 재여는 3년상이 너무 길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 악을 행하지 않으면 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묵은 곡식이 없어지고 새 곡식이 자라며, 불씨를 얻는 나무를 바꾸는 주기(改燧)를 고려하면 1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2]

이에 공자는 재여에게 상중에 흰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편안한지를 물었다. 재여가 "편안합니다"라고 답하자, 공자는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어서 군자는 상을 치르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게 느끼지 못하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가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3년상을 지내는 동안 사치를 삼가는 것이지)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

재여가 나간 후, 공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재여는 인하지 못하다(予之不仁也)"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공자는 자식이 태어나 3년은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는 법이며, 3년상은 천하의 보편적인 상례(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재여 역시 부모로부터 3년간의 사랑을 받았을 터인데 어찌 3년상을 부정하느냐고 반문하며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2] 이 논쟁은 유교의 핵심 가치인 와 예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공자가 재여의 현실적이고 다소 형식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전통적인 상례의 정신과 중요성을 강조한 사례로 해석된다.

2. 3. 낮잠 사건

논어 공야장편에 따르면, 재여가 낮잠을 자는 것을 본 공자는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공자는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朽木不可雕也|후목불가조야중국어), 썩은 흙으로 만든 담장은 덧칠할 수 없다"고 비유하며, 재여에게는 꾸짖을 가치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공자는 이어서 "처음에는 사람을 대할 때 그 말을 듣고 행실을 믿었으나, 이제는 말을 듣고도 그 행실까지 살펴본다. 재여로 인해 내가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바꾸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재여의 행동이 공자에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2. 4. 사망에 대한 의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재여(宰予, 재아)가 제나라의 임치(臨菑)에서 대부(大夫) 벼슬을 하다가 진항(陳恆, 전상田常)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일족이 몰살당했으며 공자(孔子)가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당나라의 역사가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의 내용을 보충하고 바로잡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재여가 진항과 난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없다고 지적했다. 대신 감지(闞止)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자(字)가 재여와 같은 자아(子我)였으며, 그는 총애를 다투다가 진항에게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정은 아마도 자가 같았기 때문에 사마천이 두 사람을 혼동하여 잘못 기록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2]

실제로 『사기』의 해당 기록은 『춘추좌씨전』이나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또한, 당시 반란에 가담했던 인물 중에 재여와 같은 자를 쓴 다른 인물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청나라의 학자 장익(張翼) 등은 사마천이 혼동하여 잘못 기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좌전》에는 진항의 반란 때 죽은 인물로 감지(阚止)만이 언급되는데, 그의 자(字) 역시 자아(子我)로 재여와 같아, 사마천이 두 인물의 행적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3. 평가와 영향

(내용 없음)

3. 1. 후대의 추존

개원 27년에 당 현종은 재여에게 제후(齊侯)라는 작위를 추증하였다.[1] 이후 송나라 대중부(大中符) 2년(1009년)에는 임치공(臨淄公)으로 봉해졌고,[1] 남송 함순(咸淳) 3년(1267년)에는 다시 제공(齊公)으로 높여졌다.[1] 가정 9년에는 「선현(先賢) 재여」로 고쳐 불렀다.

공자묘에서 재여의 신주는 십철 중 서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4. 관련 작품

'''소설'''


  • 고바야시 세이시 『재여 1 - 공자에게 어질지 못하다고 불린 제자의 이야기』 사이타마 신문사, 2021년, ISBN 978-4-87889-528-9

참조

[1] 웹사이트 Zai Yu http://www.ct.taipei[...] Taipei Confucian Temple 2014-11-01
[2] 문서 宰我爲臨菑大夫,(○索隱按:謂仕齊。齊都臨淄,故云“爲臨淄大夫”也。)與田常作亂,以夷其族,孔子恥之。(○索隱按:左氏傳無宰我與田常作亂之文,然有闞止字子我,而因爭寵,遂爲陳恆所殺。恐字與宰予相涉,因誤云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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