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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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로(子路, 기원전 542년 ~ 기원전 480년)는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용맹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공자와 14년간 천하를 주유하며 고난을 함께 겪었으며, 위나라에서 공씨 가문의 가신으로 활동하다가 왕실 계승 분쟁에 휘말려 전사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십사효에 선정되었으며,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에 작위와 칭호를 받았다. 자로의 강직함과 용기는 현대 사회에서도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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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중유 (仲由) |
| 자 | 자로 (子路) |
| 다른 자 | 계로 (季路) |
![]() | |
| 생애 | |
| 출생 | 기원전 542년 |
| 사망 | 기원전 480년 |
| 활동 시기 | 춘추 시대 |
| 사상과 학문 | |
| 직업 | 유교 사상가, 공자의 제자 |
| 기타 정보 | |
| 관련 인물 | 공자 |
2. 생애
공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인 자로는, 공자가 천하를 유랑할 때 끝까지 고난을 함께한 인물이다. 그는 공자가 살아있을 때 염구와 함께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 최연장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제자라기보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엄격한 비판자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공자가 문란한 진후(陳后) 남자(南子)와 회견하였을 때 분개하였으며, 공자가 두 번이나 읍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고 생각하였을 때도 항의하였다.
자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논어'' 안연편에는 약속을 다음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맹자''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는 용맹하고 직선적이며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달랐다. 그의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자로의 성급함 때문에, 공자는 그가 "자연사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고, 그의 죽음은 실제로 폭력적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몇몇 해석은 무의미하며 공자의 가르침의 실패로 간주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공자가 강조한 예의 고귀하고 엄격한 준수라고 본다.[4]
2. 1. 초기 생애
기원전 542년 노나라 변(卞)에서 태어났다. 변은 용맹함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4] 자로는 '야인' 출신이었다.[4]처음 공자를 만났을 때 자로는 공격적인 복장을 하고 무례하게 굴었다.[4] 그러나 공자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자로는 공자의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었다. 논어에서 자로는 용감하고 성급하며,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4] 공자는 자로에게 배움이 없으면 용기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4]
그는 공자의 제자 중 최연장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제자라기보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엄격한 비판자였다는 견해도 있다.[4]
2. 2. 공자와의 만남과 가르침
공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인 자로는, 공자가 천하를 유랑할 때 끝까지 고난을 함께한 인물이다. 그는 공자가 살아있을 때 염구와 함께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이기도 했다.자로는 처음 공자를 만났을 때 공격적인 복장을 하고 무례하게 굴었다. 그럼에도 공자는 그를 초기 제자 중 한 명으로 받아들였다.[4] 그는 스승의 가장 충성스럽고 가까운 제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논어''에 자주 등장한다. ''논어''에서 그는 용감하고 성급하며,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공자는 자로에게, 배움 없이 덕을 추구하면 오류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용기를 사랑하는 것은 배움이 없으면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가르쳤다.[5]
그는 처음에 수탉 깃털을 모자에 꽂고 돼지 가죽을 허리에 찬 칼에 매달고 공자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공자는 그를 차근차근 이끌었고, 그는 제자가 되었다. 공자는 그가 용감하고 대담한 것을 경계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자로가 "들은 것을 즉시 실행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신중하게 하라고 말했고, 염유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즉시 실행하라"고 말했다. 제자들이 이에 대해 묻자 "유(자로)는 남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이를 억제했다"고 답했다.
어느 날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차라리 바다로 나갈까, 따라올 사람은 유(자로)일 것이다"라며 그의 용감함을 언급하며 기뻐했지만, "하지만 너에게는 뗏목 재료가 없겠구나"라고 덧붙였다. 그의 거문고 소리를 공자가 비판했기 때문에 다른 문인들이 그를 얕보자, 공자는 "유(자로)는 이미 당에 올라섰다"고 말하며 그가 이미 높은 경지에 있음을 이야기했다.
또한, 공자는 "낡은 솜옷을 입고, 홑옷을 입고 서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그가 유(자로)인가"라고 하며 외모를 꾸미지 않는 그의 태도를 칭찬하기도 했다.
자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논어'' 안연편에는 약속을 다음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맹자''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는 용맹하고 직선적이며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달랐다. 그의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2. 3. 위나라에서의 활동과 최후
공자와 14년의 천하주유와 망명생활을 함께 한 자로는,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갈 때 위나라에 남아 공씨의 가신이 되었다.[4] 그러나 왕실 계승 분쟁에 휘말려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기원전 480년, 자로는 위나라에서 강력한 공씨 가문의 수장인 공괴()의 가신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공괴의 외삼촌인 쾌궤()가 쿠데타를 계획했고, 공괴에게 그를 돕도록 강요했다. 쾌궤는 자신의 아들인 위나라의 추공을 성공적으로 폐위시키고 위나라의 왕위에 올라 장공(莊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자로는 주군을 구하기 위해 급히 돌아왔다. 그는 소란에서 도망치고 있던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고시와 성문 밖에서 마주쳤다. 고시는 자로에게 돌아가라고 촉구했지만, 자로는 거절하고 쾌궤와 대면하기 위해 도시로 들어갔지만 쾌궤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기에 따르면, 전투 중에 자로의 모자를 묶은 끈이 잘렸다. 자신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자로는 군자의 예법에 따라 모자를 고쳐 썼다고 한다.
자로의 유해는 젓갈로 담가지는 수모를 당했다.[4]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크게 슬퍼하여 집안에 있는 젓갈(해; 醢)을 모두 내다 버렸으며, 이후에도 젓갈과 같은 종류의 음식만 보면, “젓갈로 담가지다니!”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3. 성격과 특징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개성이 강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용맹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때로는 경솔하게 행동하기도 했지만, 꾸밈없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자로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때로는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자로는 노나라의 변(卞)이라는 용맹한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한 지역 출신이었다. 그는 처음 공자를 만났을 때, 수탉 깃털을 모자에 꽂고 돼지 가죽을 허리에 찬 칼을 매단 무례한 차림이었다.[4] 하지만 공자는 자로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공자는 자로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로가 용기만 앞세우고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배움이 없으면 용기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고 경고하며, 자로에게 지혜를 갖출 것을 당부했다.[4]
이러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자로는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그는 여전히 성급하고 직선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맹자에 따르면,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다고 한다.[5]
공자는 자로의 이러한 솔직함과 꾸밈없는 성격을 사랑했다. 《논어》에는 자로가 공자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도 자주 등장하지만, 동시에 공자가 자로를 아끼고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구절도 많다. 예를 들어, 공자는 "낡은 솜옷을 입고, 홑옷을 입고 서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그가 유인가"라고 말하며 자로의 소박함을 칭찬하기도 했다.[4]
자로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괴외의 난에 휘말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공자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3. 1. 용맹함과 정의감
자로는 용맹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약속을 다음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고,[4]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했다.[5] 이러한 모습은 그가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논어''에서 자로는 용감하고 성급하며,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공자는 자로에게 배움이 없으면 용기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이질적인 존재였는데,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다른 제자들과 달리 거칠지만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을 지녔다. 이러한 자로의 성격은 때때로 경솔함으로 이어져 공자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그의 솔직함은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자로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중 괴외의 난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죽기 직전, 관이 벗겨지자 "군자는 관을 바르게 하고 죽는 것이다"라며 다시 묶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그의 용맹함과 예를 중시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3. 2. 공자와의 관계
공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인 자로는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고난을 함께한 인물이다. 자로는 공자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엄격한 비판자였으며, 때로는 스승의 행동에 대해 반박하기도 했다.[4]처음 자로는 공자를 만났을 때 공격적인 복장을 하고 무례하게 굴었으나, 공자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논어''에서 자로는 용감하고 성급하며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공자는 자로에게 배움 없이 덕을 추구하면 잘못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특히 용기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에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자로의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하여 부모에게 효도하였기에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논어》에는 자로가 경솔하여 공자에게 꾸짖음을 듣지만, 솔직함 때문에 사랑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자로의 용감함을 칭찬하면서도, 때로는 그의 경솔함을 경계하기도 했다.
3. 3. 논어에 나타난 자로
공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자로는, 스승보다 9살 어렸다. 그는 노나라 변(卞) 출신으로, 남자들의 용맹함으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논어''에서 그는 용감하고 성급하며,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공자는 자로에게 배움 없이 덕을 추구하면 오류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배움이 없으면 용기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했다.[4]자로는 처음에 수탉 깃털을 모자에 꽂고 돼지 가죽을 허리에 찬 칼을 차고 공자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공자는 그를 차근차근 이끌었고, 그는 제자가 되었다. 공자는 그의 용감하고 대담한 것을 경계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자로가 "들은 것을 즉시 실행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신중하게 하라고 말했고, 염유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즉시 실행하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묻자 공자는 "유는 남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이를 억제했다"고 말했다(선진편).[4]
어느 날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차라리 바다로 나갈까, 따라올 사람은 유일 것이다"라며 그의 용감함을 언급하며 기뻐했지만, "너에게는 뗏목 재료가 없겠구나"라고 덧붙였다(공야장편). 한편, 그의 거문고 소리를 공자가 비판했기 때문에 다른 문인들이 그를 얕보자, 공자는 "유는 이미 당에 올라섰다"고 말하며 그가 이미 높은 경지에 있음을 이야기했다(선진편).[4]
또한, "낡은 솜옷을 입고, 홑옷을 입고 서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그가 유인가"라고 하며 외모를 꾸미지 않는 그의 태도를 칭찬했다(자한편).[4]
《논어》에는 자로의 성격이 경솔하여 공자에게 꾸짖음을 받지만, 솔직함 때문에 사랑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며,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4. 평가와 영향
자로는 공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으로,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가르침을 펼칠 때(천하주유)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하였다. 공자가 살아 있을 때 염구와 함께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였다.[1]
자로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젓갈(해, 醢)로 담가지는 형벌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크게 슬퍼하여 집에 있는 모든 젓갈을 버렸다고 한다.[1]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 최연장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제자라기보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공자가 문란한 진후(陳后) 남자(南子)와 만났을 때 분개하였고, 공자가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 할 때 항의하기도 했다.[1]
자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여, ''논어'' 안연편에는 약속을 다음 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맹자''에는 다른 사람이 자기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는 용맹스럽고 직선적이며 성급한 성격으로, 예의 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다른 제자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거칠지만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1]
당나라 현종은 중유에게 사후 위후()라는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하내공()과 위공()이라는 칭호가 추가로 수여되었다.[2]
중유의 후손들은 오경박사(五經博士중국어)라는 칭호를 받았다.[3]
나카지마 아츠시의 소설 『제자』는 공자에게 제자로 입문한 자로가 그의 곧은 성격과 유학의 큰 차이 속에서 고뇌하며 학문을 익혀가는 모습과, 자로를 꾸짖으면서도 그를 사랑한 공자를 정감 있게 그리고 있다.
4. 1. 역사적 평가
자로는 공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으로, 공자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펼칠 때(천하주유)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한 인물이다. 논어에는 용감하고 성급하지만, 배움이 부족하여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자로는 꾸밈없고 소박한 성격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용맹스럽고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 예의 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다. 공자가 문란한 진후(陳后) 남자(南子)와 만났을 때 분개하였고, 공자가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 할 때 항의하기도 했다.
자로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젓갈(해, 醢)로 담가지는 형벌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크게 슬퍼하여 집에 있는 모든 젓갈을 버렸다고 한다. 《공자가어》에는 공자가 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내가 어찌 이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4][5]
卞중국어 출신으로, 남자들의 용맹함으로 알려진 노나라 지역의 '야인'이었다.
일부에서는 자로의 죽음이 무의미하고 공자의 가르침이 실패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은 자로가 공자가 강조한 예를 고귀하고 엄격하게 지킨 것이라고 평가한다.
4. 2. 이십사효에 선정
자로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부모에게 효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들판에서 채소를 캐어 먹으면서도 부모를 위해서는 100여 리 떨어진 곳에서 쌀을 지고 왔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으로 자로는 이십사효에 선정되었다.[1]그가 관리가 되어 부유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에도, 부모를 위해 쌀을 지고 다니던 가난한 시절을 그리워하며 효를 다하지 못함을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4. 3. 현대적 의의
자로는 공자(孔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으로, 강직함과 용기로 유명했다.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으며, 특히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자로의 삶과 정신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닌다.자로의 용기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괴외의 난에서 보여준 그의 용기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1]
자로는 또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어'' 안연편에 따르면, 그는 약속을 다음 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1] 이러한 자로의 정직함과 신뢰성은 현대 사회에서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자로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맹자''에 따르면,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했다고 한다.[1] 이러한 자로의 겸손함과 자기 성찰은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한 자세이다.
자로의 삶은 비록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의 강직함, 용기, 정직함, 그리고 겸손함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특히 사회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자로는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참조
[1]
웹사이트
百里负米
http://www.todayonhi[...]
Today On History
2014-11-01
[2]
웹사이트
Zhong You
http://www.ct.taipei[...]
Taipei Confucian Temple
2014-11-01
[3]
서적
Present Day Political Organization of Chin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04-15
[4]
서적
孔子家語
明治書院
1996-10-10
[5]
서적
トマス・アクィナス
講談社
199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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