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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 (언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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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광은 대한민국의 언어학자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국민대학교에서 국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역학사 연구, 훈민정음 연구, 원대 중국어 연구 등을 진행했으며, 특히 조선 사역원에 관한 연구를 주로 했다. 2006년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2002년 동숭학술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몽고자운연구》, 《역주 원본노걸대》,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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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 (언어학자)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1940년 일본제국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1971년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오사카 대학과 교토대학에서 문학부 연구생으로 있다가 1988년 국민대학교에서 1호 국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고, 훗날 이를 어리석은 판단이었다고 회고했다.[1]

1983년부터 1993년까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을, 1999년에는 한국학술진흥재단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국제고려학회 제7대 회장 및 고문을 맡고 있다. 2002년 제6회 동숭학술상을 수상했고, 2006년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가 되었다.[3]

2. 1. 학력 및 학위

1940년 일본제국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1]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1971년에 취득했다.[1]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대학과 교토대학 문학부 연구생으로 있었다.[1] 1988년 국민대학교에서 국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는 국민대학교 1호 국어학 박사 학위였다.[1]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토대학의 야스다 아키라(安田章) 교수가 〈조선가〉(朝鮮歌) 연구로 정광에게 교토대학 박사 학위를 제안했으나, 정광은 이를 거절했다.[1] 훗날 정광은 이 결정을 어리석었다고 회고했다.[1]

2. 2. 주요 경력

기간직함
1983년 ~ 1989년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위원[1]
1990년 ~ 1993년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1]
1999년한국학술진흥재단 전문위원[1]
2006년 ~ 현재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3]
2007년 ~ 현재국제고려학회 제7대 회장 및 고문[1]


2. 3. 수상

2002년에 제6회 동숭학술상을 수상했다.[2] 수상작은 《역학사 연구》(2001년)이다.

3. 연구

정광은 한국의 고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역학사(譯學史)를 주로 연구했으며, 특히 조선 사역원에 관해 깊이 연구하였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며 기존 학설과는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1998년에는 서지학자 남권희 교수와 공동으로 원대 중국어를 연구했다.[5]

3. 1. 주요 연구 분야

1998년서지학자 남권희 교수가 대구[4]에서 발견한 원본 《노걸대》(老乞大)를 통해 정광 교수와 공동으로 원대 중국어를 연구했다.[5] 정광은 한국의 고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역학사(譯學史)가 주요 연구 분야였으며, 주로 조선 사역원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정광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동아시아 문자 교류를 통해 한글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조선 세종이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KBS역사스페셜 2019년 훈민정음 편을 보면 이 주장은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또한 신미대사인도싯담 문자에 의거해 훈민정음에 모음 11자를 추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언해본에 세종께서 새로 28자를 만들었다고 밝힌 것에 상반되는 황당한 주장으로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일반적인 관점과 달리, 정광은 《훈민정음》 서문을 “(한자의) 국어음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여 국지어음(國之語音)을 한자의 동음(東音)으로 규정하면서, 한자의 중국음과 동음의 규범을 정하기 위하여 발음 기호로서 창제된 것이 훈민정음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 연구의 기초를 무시하는 것으로, 문면에 없는 것을 자의적으로 삽입하는 것은 왜곡을 부르는 잘못된 방법이다.

정광은 위구르계 귀화인 설장수가 조선 사역원 설립에 관여한 사실과 여진학이 청학으로 개편된 과정 등을 근거로 당시 여진학 교재가 금에서 쓰이던 여진 문자가 아닌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여진학 교재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얼마 남지 않은 교재도 청학으로의 개편에 따라 소재가 불명해졌다. 때문에 당시에 여진학을 학습하기 위한 교재가 어떠한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6] 이처럼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기 위해 기존에 근거가 확립된 설에 반하는 주장을 자주 하기보다는 먼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3. 2. 훈민정음 연구 관련 주장

정광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한글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조선 세종이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KBS 역사스페셜 2019년 훈민정음 편에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신미대사인도싯담 문자를 바탕으로 훈민정음에 모음 11자를 추가했다고 주장했으나, 언해본에 세종이 새로 28자를 만들었다고 밝힌 것과 상반되어 이 역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정광은 《훈민정음》 서문을 “(한자의) 국어음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여 국지어음(國之語音)을 한자의 동음(東音)으로 규정하고, 한자의 중국음과 동음의 규범을 정하기 위해 발음 기호로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이는 학문 연구의 기초를 무시하고 문면에 없는 내용을 자의적으로 삽입한 것으로, 왜곡을 초래하는 잘못된 방법이다.

3. 3. 기타 연구

1998년 서지학자 남권희 교수가 대구에서 발견한[4] 원본 《노걸대》(老乞大)를 통해 정광 교수와 공동으로 원대 중국어를 연구했다.[5] 정광은 위구르계 귀화인 설장수가 조선 사역원 설립에 관여한 사실과 여진학이 청학으로 개편된 과정 등을 근거로 당시 여진학 교재가 금에서 쓰이던 여진 문자가 아닌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여진학 교재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얼마 남지 않은 교재도 청학으로의 개편에 따라 소재가 불명해졌다. 때문에 당시에 여진학을 학습하기 위한 교재가 어떠한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6]

4. 주요 저서

출판 연도제목출판사
2009년몽고자운연구박문사
2010년역주 원본노걸대박문사
2014년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김영사
2015년한글의 발명김영사
2017년역학서의 세계박문사
2019년동아시아 여러문자와 한글지식산업사


참조

[1] 서적 조선가 김영사 2020-08-15
[2] 뉴스 제 6회 동숭 학술상 정광 교수 http://www.kunews.ac[...] 2021-12-11
[3] 뉴스 학문에 停年은 없다… 퇴임후 책 100권 낸 '열혈 書生' https://www.chosun.c[...] 2021-12-11
[4] 뉴스 고려말 중국어회화책 ‘老乞大’ 원본 발견 https://www.hankooki[...] 2021-12-11
[5] 뉴스 의외로 우수했던 조선 어학교육의 비결 https://www.hani.co.[...] 2021-12-11
[6] 서적 역학서의 세계 박문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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