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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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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장수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위구르 고창 출신이다. 원나라에서 고려로 피난 온 아버지 설손을 따라 고려에 정착하여, 공민왕 때 관직에 진출했다. 우왕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기여하여 충의군에 봉해졌다. 조선 개국 후에는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정종 즉위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홍무제의 죽음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진향사로 다시 파견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9년 사망했으며, 문집으로 《운재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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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
기본 정보
한글설장수
한자偰長壽
일본어せつ ちょうじゅ
로마자 표기Seol Jangsu

2. 생애

설장수의 선조는 위구르 고창 사람이다.[2] 아버지 설손은 원의 숭문감승(崇文監丞)을 지낸 인물로[4] 1358년(공민왕 7년)에 가족을 이끌고 고려로 피난해왔고, 공민왕은 예전 알고 지냈던 적이 있는 그에게 전택(田宅)을 주고 부원후(富原侯)로 봉하였다.[5][6] 설장수는 고려에 올 당시에 한국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7]

1360년(공민왕 9년) 경순부사인(慶順府舍人)으로 있던 중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공민왕이 특별히 상복을 벗고 기복시켜 과거를 보게 했다.[8]

설장수는 성품이 곧고 민첩하면서 굳세고 말을 잘하여 칭송받았다. 1361년(공민왕 10년) 22세로 동진사과(同進士科)에 합격하여[8]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오른 뒤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냈으며, 1366년(공민왕 15년)에는 그때의 경험으로 해안을 침범하는 왜구(倭寇)를 방비하기 위한 계책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2]

우왕(禑王) 13년(1387년) 2월에 지밀직사로서 표문을 받들고 명에 가서, 고려의 관복(冠服)을 명의 제도대로 사모(紗帽)-단령(團領)으로 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이후 사모 - 단령은 정몽주(鄭夢周) 등의 주장으로 고려의 관복으로 보급되었다.[8] 우왕 14년(1388년) 2월에 명에서 돌아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귀속시키라고 한 홍무제(洪武帝)의 말을 전했다.[8]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昌王)이 즉위하게 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명에 가서 우왕이 창왕에게 손위하였음을 알리는 표문을 전했다.[8]

공양왕을 세우는 모의에 참여한 공으로 공양왕 원년(1389년) 여름에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9] 다음 해(1390년)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승진하였다.[10] 그 다음 해(1391년)에는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다.[11] 공양왕 4년(1392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게 되었다.[12] 한편 이성계와는 즉위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뒤 정몽주의 도당으로 몰려 이성계가 즉위한 해에 우현보, 이색 등과 함께 바닷섬으로 유배되지만[13] 이듬해 다시 수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14] 이때 입조하여 자신을 용서해준 은혜를 왕에게 사례하였다.[15]

조선 태조 3년(1394년)에는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로서 사역원의 시험 자격과 선발 액수 등에 대한 진언을 올렸고,[16] 태조 5년(1396년) 판삼사사가 되었다.[17] 같은 해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제수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2] 11월에 계림(鷄林, 경주)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경주 설씨 집안을 열었고,[18]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19]

태조 6년(1397년) 권근과 함께 원종공신에 녹권되지만,[20] 종묘 납향제(臘享祭)의 헌관으로서 삼사(三司)의 서약 의식에 지각한 죄를 물어 파면되었다.[21]

태조 7년(1398년) 3월에는 태조의 어진을 경주에 봉안하는 임무를 맡았다.[22]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자,[23] 11월에 계품사(啓稟使)로서 이를 고하는 임무를 띠고 예조전서(禮曹典書) 김을상(金乙祥)과 함께 파견되었는데,[24] 사신의 행차가 요동의 첨수참(甛水站) 파사포(婆娑鋪)에 이르렀을 때 명에서 홍무제가 붕어하고, 요동도사(遼東都司)로부터 "3년에 한 번 조빙하기로 한 것과는 어긋난다"며 저지당했다.[2] 의주로 돌아온 설장수는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에게 "매년 조빙할 것을 청하여 다시 아뢰든지 아니면 진향사(進香使)로 뽑아 보내자."고 보고하여, 다시 정종 1년(1399년) 1월에 진향사(進香使)에 임명되어 김사형, 하륜과 함께 명의 서울에 갈 수 있었다.[25] 6월에 명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귀국하여 태평관에서 이를 치하하는 연회를 받았으며,[26] 10월 19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2] 향년 쉰아홉 살이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권근은 그를 애도하는 제문을 썼다.[27]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설장수의 선조는 위구르 고창 사람이다.[2] 아버지 설손은 원의 숭문감승(崇文監丞)을 지낸 인물로[4] 1358년(공민왕 7년)에 가족을 이끌고 고려로 피난해왔고, 공민왕은 예전 알고 지냈던 적이 있는 그에게 전택(田宅)을 주고 부원후(富原侯)로 봉하였다.[5][6] 설장수는 고려에 올 당시에 한국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7]

1360년(공민왕 9년) 경순부사인(慶順府舍人)으로 있던 중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공민왕이 특별히 상복을 벗고 기복시켜 과거를 보게 했다.[8]

2. 2. 고려에서의 관직 생활

설장수는 성품이 곧고 민첩하면서 굳세고 말을 잘하여 칭송받았다. 1361년(공민왕 10년) 22세로 동진사과(同進士科)에 합격하여[8]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오른 뒤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냈으며, 1366년(공민왕 15년)에는 그때의 경험으로 해안을 침범하는 왜구(倭寇)를 방비하기 위한 계책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2]

우왕(禑王) 13년(1387년) 2월에 지밀직사로서 표문을 받들고 명에 가서, 고려의 관복(冠服)을 명의 제도대로 사모(紗帽)-단령(團領)으로 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이후 사모 - 단령은 정몽주(鄭夢周) 등의 주장으로 고려의 관복으로 보급되었다.[8] 우왕 14년(1388년) 2월에 명에서 돌아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귀속시키라고 한 홍무제(洪武帝)의 말을 전했다.[8]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昌王)이 즉위하게 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명에 가서 우왕이 창왕에게 손위하였음을 알리는 표문을 전했다.[8]

공양왕을 세우는 모의에 참여한 공으로 공양왕 원년(1389년) 여름에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9] 다음 해(1390년)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승진하였다.[10] 그 다음 해(1391년)에는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다.[11]

2. 3. 조선 개국 이후

설장수는 공양왕을 세우는 모의에 참여한 공으로 공양왕 원년(1389년) 여름에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다음 해(1390년)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승진하였다. 그 다음 해(1391년)에는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 공양왕 4년(1392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게 되었다. 한편 이성계와는 즉위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뒤 정몽주의 도당으로 몰려 이성계가 즉위한 해에 우현보, 이색 등과 함께 바닷섬으로 유배되지만 이듬해 다시 수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입조하여 자신을 용서해준 은혜를 왕에게 사례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는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로서 사역원의 시험 자격과 선발 액수 등에 대한 진언을 올렸고, 태조 5년(1396년) 판삼사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제수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1월에 계림(鷄林, 경주)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경주 설씨 집안을 열었고,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태조 6년(1397년) 권근과 함께 원종공신에 녹권되지만, 종묘 납향제(臘享祭)의 헌관으로서 삼사(三司)의 서약 의식에 지각한 죄를 물어 파면되었다.

태조 7년(1398년) 3월에는 태조의 어진을 경주에 봉안하는 임무를 맡았다.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자, 11월에 계품사(啓稟使)로서 이를 고하는 임무를 띠고 예조전서(禮曹典書) 김을상(金乙祥)과 함께 파견되었는데, 사신의 행차가 요동의 첨수참(甛水站) 파사포(婆娑鋪)에 이르렀을 때 명에서 홍무제가 붕어하고, 요동도사(遼東都司)로부터 "3년에 한 번 조빙하기로 한 것과는 어긋난다"며 저지당했다. 의주로 돌아온 설장수는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에게 "매년 조빙할 것을 청하여 다시 아뢰든지 아니면 진향사(進香使)로 뽑아 보내자."고 보고하여, 다시 정종 1년(1399년) 1월에 진향사(進香使)에 임명되어 김사형, 하륜과 함께 명의 서울에 갈 수 있었다. 6월에 명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귀국하여 태평관에서 이를 치하하는 연회를 받았으며, 10월 19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2. 4. 외교 활동과 사망

설장수는 139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19] 1398년 태조의 어진경주에 봉안하는 임무를 맡았다.[22]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한 후[23], 계품사(啓稟使)로서 이를 알리는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나, 홍무제의 사망으로 인해 요동에서 저지당했다.[2] 이후 진향사(進香使)로 임명되어 김사형, 하륜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25] 1399년 병으로 사망했으며,[2] 시호는 문정(文貞)이다.[27]

3. 결혼과 자손

설장수는 두 번 결혼하여 세 아들 설내, 설도, 설진을 두었다.[30] 전처(前妻)의 신상 정보는 전해지지 않으며, 후처(後妻)는 최함의 손아랫누이이다.[31] 설내는 전처 소생,[31] 설도와 설진은 후처 소생으로 추정된다.[2]

3. 1. 가계

설문질을 증조부로, 설철독을 조부로, 설손을 아버지로 두었다.[30][31][2] 설연수, 설복수, 설경수, 설미수는 설장수의 아우들이고, 설순은 설장수의 조카이다. 설장수는 두 번 결혼해 세 아들 설내(偰耐), 설도(偰衜), 설진(偰振)을 두었는데, 전처(前妻)에게서는 설내를, 후처(後妻)에게서는 설도와 설진을 얻었다. 후처는 최함(崔咸)의 손아랫누이이다.

4. 저서 및 작품

문집으로 《운재집》(芸齋集)이 있었으나,[32]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지금은 《동문선》에 그의 시 9수가 《근사재일고》 발문과 함께 실려 있다. 글씨에 능했는데, 《용재총화》에 따르면 손수 《목은집(牧隱集)을 베껴 썼는데 필법이 굳세어 규범이 있었다[33]고 한다.

5. 평가

6. 기타

6. 1. 설장수가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明清と李朝の時代 "[[中央公論新社|中央公論社]]" 1998-04-01
[2] 실록 《정종실록》 권2, 정종 1년(1399년) 10월 19일(을묘) 3번째 기사
[3] 문서 이 호는 심의, 《대관재난고》 권4, 〈기몽(記夢)〉에 “芸齋偰長壽”라고 보인다.
[4] 실록 《태종실록》 권29, 태종 15년(1415년) 3월 4일(임인) 2번째 기사
[5] 문서 부원(富原)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과 [[마포구]]에 해당한다.
[6] 문서 이색, 《목은문고》 권7, 근사재일고 후서; 《고려사》 권112, 〈열전〉25, 설손. 〈졸기〉에는 부원군(富原君)으로 되어 있다.
[7] 실록 《세종실록》 권 27, 세종 7년(1425년) 1월 16일(정해) 1번째 기사
[8] 역사서 《고려사》 권112, 〈열전〉25, 설손 부 설장수
[9] 역사서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원년(1389년) 12월 29일(계해)
[10] 역사서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2년(1390년) 11월 6일(갑오)
[11] 역사서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3년(1391년) 12월 24일(병자)
[12] 역사서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 4년(1392년) 4월 6일(정사)
[13] 실록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1392년) 7월 28일(정미) 3번째 기사
[14] 실록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년) 1월 1일(정미) 2번째 기사
[15] 실록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년) 1월 24일(경오) 1번째 기사
[16] 실록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1394년) 11월 19일(을묘) 3번째 기사
[17] 실록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1396년) 7월 27일(임오) 1번째 기사
[18] 실록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1396년) 11월 23일(정축) 2번째 기사
[19] 실록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1396년) 11월 23일(정축) 4번째 기사; 《태조실록》 권11, 태조 6년(1397년) 4월 17일(기해) 1번째 기사
[20] 실록 《태조실록》 권12, 태조 6년(1397년) 12월 24일(임인) 2번째 기사
[21] 실록 《태조실록》 권12, 태조 6년(1397년) 12월 29일(정미) 2번째 기사
[22] 실록 《태조실록》 권13, 태조 7년(1398년) 3월 6일(계축) 3번째 기사
[23] 실록 《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1398년) 9월 5일(정축) 3번째 기사
[24] 실록 《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1398년) 11월 30일(임인) 1번째 기사
[25] 실록 《정종실록》 권1, 정종 1년(1399년) 1월 9일(경진) 7번째 기사
[26] 실록 《정종실록》 권1, 정종 1년(1399년) 6월 27일(병인) 2번째 기사; 7월 19일(정해) 2번째 기사
[27] 문서 권근, 《양촌집》 권23, 門下府祭判三司事偰公 長壽 文
[28] 문서 이색, 《목은문고》 권7, 근사재일고 후서
[29] 실록 《세종실록》 권93, 세종 23년(1441년) 8월 11일(을해) 3번째 기사
[30] 역사서 최함은 이미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1392년)에 설장수의 인척이라는 까닭으로 관직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 4년(1392년) 5월 20일(경자).
[31] 실록 《태종실록》 권2, 태종 1년(1401년) 9월 26일(임자) 2번째 기사
[32] 문서 《연려실기술》 권1, 〈태조조 고사본말〉, 태조조의 명신, 설장수에 《운재집》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운재집》이 이긍익 당시까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33] 문서 성현, 《용재총화》 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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