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붕
1. 개요
정순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06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중종반정 이후 정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 활동하며 개혁을 시도했다. 이후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으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정치적 부침을 겪었고, 김안로 사후 복귀하여 윤원형 등과 가까이 지냈다. 명종 때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사후 직위가 추탈되었다. 처음에는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권력을 추구하며 변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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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
여인천하 (드라마)
《여인천하》는 조선 중종 시대를 배경으로 정난정, 문정왕후, 윤원형 등의 권력 투쟁과 몰락을 그린 SBS 대하 사극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으나 선정성, 폭력성 논란과 잦은 연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을사사화 -
여인천하 (소설)
박종화의 소설 《여인천하》는 연산군부터 중종 시대를 배경으로 몰락한 왕족의 딸 정난정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문정왕후, 윤원형 등 실존 인물들의 권력 투쟁을 묘사하며 드라마 등 다양한 미디어 믹스로 제작되었다. -
기묘사화 -
여인천하 (드라마)
《여인천하》는 조선 중종 시대를 배경으로 정난정, 문정왕후, 윤원형 등의 권력 투쟁과 몰락을 그린 SBS 대하 사극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으나 선정성, 폭력성 논란과 잦은 연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기묘사화 -
중종실록
중종실록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재위 기간인 1506년부터 1544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으로, 다른 실록에 비해 사론과 세주가 많이 수록되었으나, 편찬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과 내용 누락 및 왜곡에 대한 지적이 있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밀랍본 6책이 소장되어 있다. -
1484년 출생 -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의 사제이자 역사가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의 잔혹 행위를 목격한 후 원주민 옹호에 평생을 바쳤으며,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인디언 인권 옹호에 기여했지만 아프리카 노예제도를 옹호한 과거는 비판받고 있다. -
1484년 출생 -
류관 (충숙공)
류관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훈구파로 활동하며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된 후 선조 때 신원되었으며, 그의 삶은 조선 시대 당쟁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506년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가 되고, 1506년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그해 예조좌랑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의 일원이 되어 학문을 높이고 기풍을 짐작시켰다. 이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대신들을 탄핵하기도 했다. 이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바로 좌부승지에 초배되고 이후 다시 동부승지로 옮겼다가 다시 우부승지로 승진, 참찬관을 겸했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형조참의로 복귀했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이후 전주부윤이 되지만 신사무옥으로 또 파직되었다. 이후 17년 동안 야인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다가, 1538년 좌의정이던 김안로가 사약을 마시고 죽은 뒤 복권되어 경기도관찰사로 복직해 관압사를 겸하고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윤원형, 이기, 허자와 가깝게 지내게 되고 평양영위사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다시 외직에 나간다. 연이어서 병조참판과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한성부우윤으로 세자시강원부빈객을 겸하고 형조판서로 역시 특진관을 겸했다. 이후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우참찬이 되는데 우참찬 시절 윤원형 등과 소윤 일파가 되고 내의원제조를 겸하다가 이후 다시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는데 대사헌으로 동지성균관사를 겸하고 인종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내다가 형조판서, 우참찬, 대사헌을 거쳐 이후 명종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1등공신이 되며 바로 공조판서를 거쳐서 우찬성이 된다. 이후 정승의 반열에 올라 우의정이 되었다. 사후 선조 때 직위가 추탈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480년 ~ 1506년)
1506년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가 되고, 1506년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그해 예조좌랑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의 일원이 되어 학문을 높이고 기풍을 짐작시켰다. 이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대신들을 탄핵하기도 했다.
2.2. 중종반정과 초기 정치 활동 (1506년 ~ 1519년)
1506년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가 되고, 같은 해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그해 예조좌랑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의 일원이 되어 학문을 높이고 기풍을 짐작시켰다. 이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대신들을 탄핵하기도 했다. 이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바로 좌부승지에 초배되고 이후 다시 동부승지로 옮겼다가 다시 우부승지로 승진, 참찬관을 겸했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형조참의로 복귀했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2.3. 기묘사화와 좌절 (1519년 ~ 1537년)
1506년 문과에 급제하고 주서가 되었으며,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그해 예조좌랑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의 일원이 되어 학문을 높이고 기풍을 짐작시켰다. 이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대신들을 탄핵하기도 했다. 이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바로 좌부승지에 초배되고 이후 다시 동부승지로 옮겼다가 다시 우부승지로 승진, 참찬관을 겸했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형조참의로 복귀했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이후 전주부윤이 되지만 신사무옥으로 또 파직되었다. 이후 17년 동안 야인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2.4. 김안로 사후 복귀와 관직 생활 (1537년 ~ 1545년)
1506년 중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가 되고, 1506년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그해 예조좌랑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의 일원이 되어 학문을 높이고 기풍을 진작시켰다. 이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대신들을 탄핵하기도 했다. 이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바로 좌부승지에 초배되고 이후 다시 동부승지로 옮겼다가 다시 우부승지로 승진, 참찬관을 겸했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형조참의로 복귀했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이후 전주부윤이 되지만 신사무옥으로 또 파직되었다. 이후 17년 동안 야인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다가, 1538년 좌의정이던 김안로가 사약을 마시고 죽은 뒤 복권되어 경기도관찰사로 복직해 관압사를 겸하고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윤원형, 이기, 허자와 가깝게 지내게 되고 평양영위사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다시 외직에 나간다. 연이어서 병조참판과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한성부우윤으로 세자시강원부빈객을 겸하고 형조판서로 역시 특진관을 겸했다. 이후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우참찬이 되는데 우참찬 시절 윤원형 등과 소윤 일파가 되고 내의원제조를 겸하다가 이후 다시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는데 대사헌으로 동지성균관사를 겸하고 인종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내다가 형조판서, 우참찬, 대사헌을 거쳤다.
2.5. 을사사화와 권력 장악 (1545년)
1506년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의 일원이 되어 학문을 높이고 기풍을 짐작시켰다. 이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대신들을 탄핵하기도 했다.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이후 1538년 김안로가 사약을 마시고 죽은 뒤 복권되어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윤원형, 이기, 허자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인종 때 형조판서, 우참찬, 대사헌을 거쳐 이후 명종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1등공신이 되었다.
2.6. 사망과 사후 평가 (1553년 ~ )
1553년 사망 이후 선조 때 직위가 추탈되었다.
3. 평가
처음에는 조광조와 함께 조정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을사사화를 일으키며 결국 좋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별탈없이 벼슬 생활을 계속 하게 된다.
학문에 뛰어나 명성이 높았지만, 결국 부패해진 대신이기도 했다.
3.1. 긍정적 평가
처음에는 조광조와 함께 조정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을사사화를 일으키며 결국 좋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별탈없이 벼슬 생활을 계속 하게 된다. 학문에 뛰어나 명성이 높았지만, 결국 부패해진 대신이기도 했다.
3.2. 부정적 평가
처음에는 조광조와 함께 조정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을사사화를 일으키며 결국 좋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별탈없이 벼슬 생활을 계속 하게 된다. 학문에 뛰어나 명성이 높았지만, 결국 부패해진 대신이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증조부는 고성군사(高城郡事)를 지낸 정포(鄭袍)이고, 할아버지는 지평(持平)과 증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정충기(鄭忠基)이다. 아버지는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정탁(鄭鐸)이며, 어머니는 사직(司直) 도진손(都震孫)의 딸이다.
동복 형으로는 위솔(衛率) 정수붕(鄭壽朋)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백붕(鄭百朋)이 있고, 이복 동생으로 진사(進士) 정귀붕(鄭龜朋)이 있다. 부인은 봉양수(鳳陽守) 이종남(李終南)의 딸이다.
장남은 포천현감(抱川縣監) 정렴(鄭𥖝)이고, 차남은 봉사(奉事) 정적(鄭磧)이다. 3남은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정담(鄭䃫)으로 정뇌경(鄭雷卿)의 증조부이다. 4남은 성천도호부사(成川都護府使) 정현(鄭礥)이며, 5남은 감목관(監牧官) 정작(鄭碏)이다.
첫째 사위는 보성군(寶城君) 이만년(李萬年)이고, 둘째 사위는 정린상(鄭麟祥)이다. 셋째 사위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신단(申湍)으로 신경락(申景洛)의 아버지이다. 넷째 사위는 송장(宋杖)이고, 다섯째 사위는 한문원(韓文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