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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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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이다. 공양왕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선 건국 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태종 때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왔으며, 세종 대에는 전라도 관찰사, 형조 판서, 우의정 등을 지냈다. 야인 토벌을 주장하고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으며, 의정부 서사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이고 저서로는 《인재문집》이 있다.

2. 생애

신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자는 자격(子格), 호는 인재(寅齋)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1390년(공양왕 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선 건국 후인 1393년(태조 2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태종 대에는 우사간대부, 춘추관 편수관, 지제교, 공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세종 대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야인 정벌을 주장하고,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439년(세종 19년)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했고, 1442년(세종 24년) 권제와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했다. 1444년 궤장(廓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45년(세종 27년) 의정부좌의정에 올라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인재문집(寅齋文集)》이 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신개의 5대손이다.

2. 1. 가계와 출사

신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 자는 자격(子格), 호는 인재(寅齋)이다. 할아버지는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고려조 종2품) 신집이며, 아버지는 중정대부 종부시 영(宗簿寺令)(고려조 종3품) 신안(申晏)이고, 어머니는 문하찬성사 임세정(任世正)의 딸이다.

신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글을 잘 지었다. 1390년(공양왕 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감찰, 습유, 좌정언, 형조좌랑, 호조좌랑, 충청도도사, 사간원헌납,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예문관제학, 판승문원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413년(태종 13년) 우사간대부로 춘추관편수관과 지제교를 겸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공조참판을 거쳐 그해 공조판서가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2. 2. 조선 초기 관직 생활

조선 건국 후 태조 2년(1393)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감찰, 습유, 좌정언, 형조좌랑, 호조좌랑, 충청도도사, 사간원헌납,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예문관제학, 판승문원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태종 13년(1413) 우사간대부로 춘추관편수관과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 17년(1417년) 공조참판을 거쳐 그해 공조판서가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즉위 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의 관찰사를 거쳐 형조 참판, 진주 목사, 우군총제, 좌군총제, 예문관대제학, 전라도 관찰사, 중군도총제,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세종 15년(1433)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야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세종 16년(1434) 이조판서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이어 형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어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면서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18년(1436) 찬성으로 승진되어 세자 이사(世子貳師) 및 집현전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임금이 의논할 일이 있으면 매번 내전으로 불러 의논하였다.

2. 3. 세종 대의 활동

세종 즉위 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 참판, 진주 목사, 우군총제, 좌군총제, 예문관대제학, 전라도 관찰사, 중군도총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15년(1433)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야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세종 16년 이조판서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이어 형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어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면서 《고려사(高麗史)》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18년(1438) 찬성으로 승진되어 세자 이사(世子貳師) · 집현전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임금이 의논할 일이 있으면 매번 내전으로 불러 의논하였다.

세종 19년 염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며, 같은 해(1439년)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세종 24년(1442년)에는 감춘추관사로 권제와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였다. 1444년 궤장(廓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세종 27년(1445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자 공법과 축성 등에서 백성에게 불편한 점을 건의하여 시정토록 하였다.

2. 4. 사망과 평가

신개는 오랜 관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의정부 서사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여 실현한 것과 야인(野人) 토벌을 주장한 것은 대표적인 업적이다. 세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인재문집(寅齋文集)》이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신집(申諿)
아버지신안(申晏)
어머니임세종(任世宗)의 딸
형님신감(申鑑)
동생신효(申曉)
동생신건(申虔)
본처채원경(蔡元敬)의 딸
후처김가명(金可銘)의 딸 (선산 김씨)
장남신자준(申自準)
장남의 손자신숙평(申叔平), 신중평(申仲平), 신말평(申末平) (신립의 증조부)
차남신자승(申自繩) (대사성, 신사임당의 증조부)
차자부정선공주의 딸 의령 남씨
차남의 손자신숙권(申叔權) (신사임당의 조부)
차남의 증손자신명화
차남의 현손녀신사임당
삼남신자형(申自衡)


4. 평가와 의의

신개는 오랜 관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의정부 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의 폐지를 주장하여 실현했고, 야인(野人) 토벌을 주장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세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 《인재문집》이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신개는 오랜 관직 생활을 통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의정부서사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킨 것과 야인 토벌을 주장한 것은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인재문집》이 있다.

4. 2. 종합적 평가

신개는 오랜 관직 생활을 통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의정부서사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킨 것과 야인 토벌을 주장한 것은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인재문집》이 있다.

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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