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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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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충은 위, 서진 시대의 인물로, 청빈한 삶을 살며 학문에 정진했다. 위나라에서 상서랑, 진류태수, 사공, 사도를 거쳐 태보에 이르렀고, 서진 건국 후 태부와 수광공에 봉해졌다. 사마염의 선양을 도왔으며, 예법과 율령 정비에 참여했다. 274년에 사망하여 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서진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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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진의 태부 - 양준 (서진)
    양준은 서진 무제의 황후 양염의 사촌이자 혜제의 황후 양지의 아버지로, 딸이 황후가 되면서 권력을 잡았으나 혜제 즉위 후 섭정으로서 전횡을 일삼다가 가남풍에 의해 주살당하며 팔왕의 난의 서막을 알렸다.
정충
인물 정보
이름정충
왕조서진
칭호 및 직책태부 · 수광공
출생생년 미상
출신지사주 형양군 개봉현
사망태시 10년 윤1월 11일 (274년 3월 5일)
문화 (文和)
시호성공 (成公)
섬긴 군주조조
조비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사마염
특기 사항null

2. 생애

정충은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청빈한 삶을 살면서 경서와 사서 연구에 몰두하여 유학과 제자백가에 박식했다.[9] 조비가 위나라 태자가 되면서 관직에 나아가, 위 문제 때 태자문학, 상서랑, 진류태수를 역임했다.[9] 조상이 보정할 때는 종사중랑, 산기상시, 광록훈을 지냈다.[9] 가평 3년(251년) 12월 사공, 감로 원년(256년) 10월 사도, 경원 4년(263년) 12월 19일 태보에 오르는 등 위나라에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10] 그의 지위는 삼공보다 높았고, 수광후에 봉해졌다.[9]

조모 즉위 후 『상서』를 가르쳤고, 정원 2년(255년) 9월 그 공로로 하사품을 받았다.[10] 조환 시대, 대장군 사마소는 "진공에 봉건하고, 구석을 더하며, 상국으로 임명한다"는 칙명을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경원 4년(263년) 10월 정충이 여러 관료들을 이끌고 수락을 권하자 이에 따랐다.[6]

촉 평정 후, 진 문제는 가충, 양호 등에게 예의와 율령을 정하게 했는데, 이들은 먼저 정충에게 묻고 나서야 시행했다.[9] 함희 원년(264년) 7월, 여러 제도 개혁 시 순의가 예법, 가충이 법률, 배수가 관제를 고치고, 정충이 전체를 통괄했다.[6] 함희 2년(265년) 9월,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할 때, 그 책서를 기록했다.[8]

태시 원년(265년), 서진 건국 후 태부가 되었고, 작위는 수광공이었다.[9] 사례교위 이의와 어사중승 후사광이 정충과 하증, 순의가 질병을 이유로 조회에 나오지 않아 면직을 상주했으나, 무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9] 태시 9년(273년)에 은퇴를 요청했고, 이듬해(274년)에 죽었다.[9] 무제는 조당에서 슬퍼했고, 태부를 추증했으며, 시호를 성(成)이라 했다. 아들이 없어 조카 정휘(鄭徽)가 뒤를 이었고, 정휘가 죽고 아들 정간(鄭簡)이 이었다.[9] 함녕 원년(275년) 7월, 건국 공신으로 진 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8]

2. 1. 초기 생애와 경력

본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청빈하여 경사를 연구하기를 즐겼고 유학뿐 아니라 제자백가에도 박식했다.[9] 풍채가 뛰어나고 행실은 모두 예법에 준했지만, 자연스러운 태도로 지내며 향리에서의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초빙되지 않았다.

건안 22년(217년), 조비의 태자가 되자 문학으로 등용되었다.[9] 이후 위 문제가 되었을 때 태자문학이 되었고, 상서랑이 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진류군태수가 되었다.[9] 정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좋은 평판은 없었지만, 의식주를 검소하게 하고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조상대장군이 되자 종사중랑으로 등용되었고, 이어서 산기상시[2], 광록훈으로 옮겼다.[9] 이 시대에, 손옹, 조희, 순의, 하안과 공동으로 『논어집해』를 저술했다.[3]

2. 2. 조위에서의 관직 생활

정충은 본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청빈하여 경사를 연구하기를 즐겼고 유학뿐 아니라 제자백가에도 박식했다.[9] 위 문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태자문학이 되었고, 상서랑이 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진류태수가 되었다.[9] 조상이 보정할 때에는 종사중랑이 되었고 산기상시,[2] 광록훈으로 승진했다.[9] 가평 3년(251년) 12월, 사공이 되었다.[10] 감로 원년(256년) 10월에는 사도가 되었다.[10] 경원 4년(263년) 12월 19일에는 태보가 되었다.[10] 그 지위는 3공보다 높았으며, 수광후(壽光侯)에 봉해졌다.[9]

2. 3. 서진 건국과 이후

265년 사마염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하자, 정충은 태부·수광공이 되었다.[9] 그 후, 정충이 병을 앓게 되자, 사례교위 이희와 어사중승 호사광은 정충을 면관하도록 소송을 제기했다. 정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정충은 스스로 치사를 신청했지만, 사마염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태시 9년(273년), 정충은 다시 치사를 청원했다. 사마염은 정충을 "수광공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 지위는 태보·태부와 동등하며, 삼공의 오른쪽에 둔다"라고 하여, 비로소 이를 수락했다.[9] 이듬해(274년)에 사망했고, 성공으로 시호되었고, 다시 태부의 지위를 추증받았다. 자식은 없고, 종자 정휘가 뒤를 이었다.[9]

3. 가계

정충

참조

[1] 문서 後漢時代までは河南尹。魏の一時期、及び西晋時代に滎陽郡が分離された。
[2] 문서 『晋書』鄭沖伝によると散騎常侍となったのは曹芳の時代だが、『三国志 (歴史書)』盧毓伝ではその前の曹叡の時代に、「常侍の鄭沖」への言及がある。
[3] 문서 s:zh:論語集解/論語序 https://zh.wikisourc[...]
[4] 서적 斉王紀 https://zh.wikisourc[...] 裴松之注
[5] 서적 高貴郷公紀 https://zh.wikisourc[...]
[6] 서적 太祖文帝紀 https://zh.wikisourc[...]
[7] 서적 陳留王紀 https://zh.wikisourc[...]
[8] 서적 世祖武帝紀 https://zh.wikisourc[...]
[9] 서적 왕상정충하증석포전
[10] 서적 삼소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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