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로렌 공작 샤를 5세의 군대에 참여하여 부다 포위전에 참전했고, 1687년 제1대 베릭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명예 혁명으로 부왕과 함께 망명한 후 아일랜드 윌리엄 전쟁, 대동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에 참전하여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알만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사국 동맹 전쟁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1734년 필립스부르크 포위전에서 전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잉글랜드의 군주의 서자 -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
찰스 2세의 사생아로 몬머스 공작 등의 작위를 받고 뛰어난 외모와 군사적 재능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몬머스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다. - 스코트인의 왕의 서자 -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
찰스 2세의 사생아로 몬머스 공작 등의 작위를 받고 뛰어난 외모와 군사적 재능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몬머스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다. - 스튜어트가의 서가 -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
찰스 2세의 사생아로 몬머스 공작 등의 작위를 받고 뛰어난 외모와 군사적 재능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몬머스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다. - 스튜어트가의 서가 - 제2대 버클루 공작 프랜시스 스콧
영국의 귀족이자 정치인인 프랜시스 스콧은 제2대 버클루 공작으로서 몬머스 공작 작위를 소유하고 프리메이슨 활동을 했으며,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 활동, 학문 활동에 기여했고,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다.
제1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제임스 피츠제임스 |
다른 이름 | 베릭 공작 |
작위 | 초대 베릭 공 초대 리리아 이 세리카 공 초대 피츠-자메 공 |
기간 | 베릭 공: 1695년 – 1734년 리리아 이 세리카 공: 1707년 – 1734년 피츠-자메 공: 1710년 – 1734년 |
출생일 | 1670년 8월 21일 |
출생지 | 프랑스, 물랭 |
사망일 | 1734년 6월 12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필립스부르크 |
가족 | 피츠제임스 가문 |
아버지 | 제임스 2세 |
어머니 | 아라벨라 처칠 |
배우자 | 오노라 드 버 (1695년 결혼, 1698년 사망) 안 불클리 (1700년 결혼) |
자녀 | 목록 참조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프랑스 왕국 |
최종 계급 | 프랑스 원수 |
참전 전투 | 대튀르크 전쟁 부다 공방전 모하치 전투 9년 전쟁 잉글랜드 침공 데리 공방전 캐번 전투 보인 전투 오그림 전투 코크 공방전 스테인케르크 전투 란덴 전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네이메헌 공격 에케렌 전투 알만사 전투 릴 공방전 바르셀로나 공방전 4국 동맹 전쟁 산세바스티안 공방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켈 공방전 필립스부르크 공방전 |
서훈 | 보즈워스 남작, 티모스 백작, 베릭 공작 (1687년) 프랑스 원수 (1706년) 리리아 공작, 제리카 공작, 피츠제임스 공작 (1707년) |
기타 이력 | 포츠머스 총독 |
관련 가문 | 스튜어트 왕가 |
자녀 | |
자녀 목록 | 제임스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2대 베릭 공작 앙리 자크 피츠제임스, 2대 피츠-자메 공작 존 윌리엄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대령 앙리에트 드 피츠제임스 프랑수아 피츠제임스, 3대 피츠-자메 공작 앙리 피츠제임스 샤를 드 피츠제임스, 4대 피츠-자메 공작 로르 안 드 피츠제임스 마리 에밀리 드 피츠제임스 에두아르 드 피츠제임스 안 소피 드 피츠제임스 안 드 피츠제임스 |
2. 초기 생애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부왕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프랑스 물랭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에서 가톨릭교 신자로 자랐다. 그는 제임스 2세와 그의 정부 아라벨라 처칠 사이의 아들이었으며, 아라벨라는 유명한 잉글랜드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제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누이였다. 그는 스튜어트 가문의 지원을 받아 여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1]
젊은 시절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로렌 공작 카를 5세 휘하에서 대튀르크 전쟁에 참전, 부다 포위전과 모하치 전투 등에서 싸웠다. 1687년 아버지로부터 '''베릭 공작''', '''틴머스 백작''', '''보스워스 남작''' 작위를 받았다.[2] 잉글랜드로 돌아와 포츠머스 총독 및 가터 기사가 되었으나,[3]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아버지 제임스 2세가 폐위되자 그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4]
이후 아버지를 따라 아일랜드 윌리엄 전쟁에 참전하여 자코바이트 군대를 지휘했으나 보인 전투 등에서 패배하고, 리머릭 조약 이후 최종적으로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스 군인이 되었다. 그는 대동맹 전쟁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했으며, 1693년 네르윈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힌 잉글랜드의 오몬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와의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되었다. 군인으로서 베릭 공작은 뛰어난 능력과 용기, 고결함으로 존경받았다.
2. 1. 가톨릭 교육과 군인의 길
피츠제임스는 아버지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프랑스 물랭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에서 가톨릭교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제임스 2세와 그의 정부(情婦)였던 아라벨라 처칠 사이의 아들이었는데, 아라벨라는 잉글랜드의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가인 제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누이였다. 피츠제임스는 외삼촌인 말버러 공작과 비견될 만한 군사적 재능을 타고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스튜어트 가문의 지원을 받아 쥐이 대학교, 플레시 대학교, 그리고 라 플레슈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1]젊은 시절 그는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로렌 공작 카를 5세의 군대에 들어가 오스만 제국과의 대튀르크 전쟁에 참전, 1686년 헝가리의 부다 포위 공격에 참여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687년 아버지 제임스 2세로부터 '''베릭 공작''', '''틴머스 백작''', '''보스워스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2] 같은 해 그는 다시 헝가리로 돌아가 모하치 전투에 참전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베릭 공작은 포츠머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제임스 2세는 그를 가터 기사로 서임했으며, 당시 푸른색 기병대(the Blues)의 대령이었던 개신교도 제20대 옥스퍼드 백작 오브리 드 비어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가톨릭 신자인 베릭 공작을 임명했다.[3] 이 자리는 그의 외삼촌인 말버러 공작이 원했던 자리였으나,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를 중용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조카인 베릭 공작을 선택했다. 그러나 1688년 오렌지공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 침공으로 시작된 명예 혁명 때문에 이 임명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4] 베릭 공작은 1682년부터 복무했던 푸른색 기병대에서 계속 근무하는 것이 자신의 양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으며, 과거 자신을 후원했던 아버지 제임스 2세를 배신할 수 없다고 여겼다. 당시 장교들은 국왕이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고안한 소위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는데, 베릭 공작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부대가 솔즈베리에서 오렌지공에게 넘어가자 베릭 공작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1688년 12월 폐위되었고, 베릭 공작은 아버지를 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1689년 베릭 공작은 아버지를 따라 아일랜드로 건너가 아일랜드 윌리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자코바이트 군대의 일원으로 데리 포위전, 캐번 전투, 그리고 1690년 보인 전투에 참여했으며, 보인 전투에서는 직접 돌격을 지휘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백병전 중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보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자, 베릭 공작은 패트릭 사스필드 등 남은 자코바이트 아일랜드군과 함께 리머릭으로 후퇴했다.
1690년 8월, 그는 패트릭 사스필드, 프랑스 장군 부아슬로(Boisseleau)와 함께 리머릭의 방어선을 강화하며 윌리엄 3세 측 군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후 소수의 병력과 함께 섀넌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1691년 6월, 베릭 공작은 프랑스 장군 마르키 드 생뤼와 함께 오흐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약 18,000명의 윌리엄 3세 측 군대가 나타났다. 자코바이트 군은 한쪽은 토탄 습지, 다른 쪽은 킬코몬 언덕으로 보호받는 지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베릭 공작은 사스필드의 부대와 함께 아일랜드군 우익에 배치되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 3세 측의 푸른색 기병대가 아일랜드군 좌익을 돌파하여 아일랜드 용기병 부대를 무너뜨리면서 전선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지휘관 생뤼 장군이 날아온 포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사스필드와 베릭 공작이 예비대를 투입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그들은 8월 25일, 윌리엄 3세 측 장군 힝켈이 포위하고 있던 리머릭으로 후퇴했다. 1691년 10월 3일 리머릭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약 조건에 따라 아일랜드 군인들은 대륙으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후 '와일드 기스'(Wild Geese)로 알려지게 된다. 제임스 2세는 베릭 공작을 제1 와일드 기스 기병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했다. 베릭 공작은 이후 코크 포위전에 4,000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지원을 갔으나 너무 늦게 도착하여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 시기 그는 자코바이트 운동을 위해 여러 차례 비밀리에 잉글랜드를 방문하기도 했다.
3. 군사 경력
가톨릭 신도로 성장하여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686년 로렌 공작샤를 5세 휘하에서 대터키 전쟁에 참전하여 헝가리의 부다 포위전에 참가했다. 이후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작위를 받았으나,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아버지 제임스 2세와 함께 망명길에 올라 모든 지위를 잃었다.
망명 후 아버지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윌리엄 전쟁에 자코바이트로 참전했으나 패배하고, 최종적으로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스 군인이 되었다. 대동맹 전쟁에 프랑스군으로 종군했으며, 1693년 네르윈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군인으로서 베릭 공작은 뛰어난 능력과 용기, 고결함으로 존경받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프랑스군 소속으로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초기에는 남네덜란드 전선에 참전했고, 1704년에는 스페인으로 파견되어 동맹군의 침공을 저지했다. 1706년 니스를 함락시킨 공로로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스페인에서 동맹군과 교전하며 마드리드를 탈환하는 등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1707년 알만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스페인과 프랑스 양국으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에도 툴롱 포위전 구원, 릴 포위전 참가, 1714년 바르셀로나 함락 등 전쟁의 주요 국면에서 활약하며 스페인 전선을 종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쟁 후 기옌의 군 사령관을 지내며 몽테스키외와 교류했다. 1718년 사국 동맹 전쟁에서는 프랑스 장군으로서 과거 자신이 옹립했던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와 싸웠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케흘 포위전에서 승리했으나, 이듬해 1734년 6월 12일 필립스부르크 포위전 중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3. 1. 잉글랜드 복귀와 명예 혁명
1686년 헝가리의 부다 포위전에 참가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다음 해인 1687년, 아버지 제임스 2세로부터 베릭 공작, 틴머스 백작, 보즈워스 남작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다시 헝가리로 건너가 모하치 전투에 참전했다. 잉글랜드로 귀국한 뒤에는 포츠머스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가터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1688년 명예 혁명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망명길에 오르면서 모든 지위를 잃게 되었다.3. 2. 아일랜드 윌리엄 전쟁 참전
1688년 잉글랜드에서 명예 혁명이 일어나 부친 제임스 2세가 왕위를 잃자, 베릭 공작 역시 포츠머스 총독 및 가터 기사 등의 지위를 모두 잃고 부친과 함께 대륙으로 망명했다.그는 부친을 따라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윌리엄 전쟁에 자코바이트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특히 1690년 보인 전투에서는 자코바이트 군대를 직접 지휘했으나, 윌리엄 3세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했다.
윌리엄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그는 최종적으로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스 군인이 되었다. 이후 대동맹 전쟁에 프랑스군으로 종군했으며, 1693년 네르윈덴 전투에서는 잉글랜드 측에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잉글랜드의 장군 오몬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와의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될 수 있었다.
3. 3. 프랑스 망명과 대동맹 전쟁 참전
아버지 제임스 2세가 명예 혁명으로 잉글랜드에서 쫓겨나 망명한 후,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그는 대동맹 전쟁 기간 동안 룩셈부르크 공작 휘하에서 복무했다.1692년 슈텐케르크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룩셈부르크 공작은 수적으로 우세한 오렌지공 윌리엄 군대의 기습을 받았으나, 프랑스군은 반격에 성공했다. 베릭은 영국군 진영을 돌파하는 부대를 지휘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1693년 네르윈덴 전투(랜드 전투)에서는 룩셈부르크 공작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전하여 잉글랜드 근위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외삼촌인 영국군 장군 찰스 처칠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몸값 3만 플로린을 지불하고 풀려났고, 이후 부상당해 포로가 된 제임스 버틀러와의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포로가 되었다는 비난이 일면서 영국 화이트홀 궁전과 의회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1695년, 아버지 제임스 2세를 지지하고 영국에 대항하여 프랑스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영국 의회법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그의 영국 귀족 작위(베릭 공작, 틴머스 백작, 보즈워스 남작)는 모두 몰수되었다.
3. 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참전
아버지 제임스 2세가 명예 혁명으로 왕위를 잃고 망명한 후, 베릭 공작은 프랑스군에 들어가 룩셈부르크 원수 휘하에서 복무했다. 그는 대동맹 전쟁 중 1692년 슈텐케르크 전투와 1693년 네르윈덴 전투에 참전했다. 슈텐케르크에서는 영국군 진영을 돌파하는 부대를 지휘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다. 네르윈덴 전투에서는 격전 끝에 포로로 잡혔는데, 그를 사로잡은 것은 외삼촌인 찰스 처칠이었다. 그는 3만 플로린의 몸값을 내고 풀려났으며, 이후 부상당한 오르몬드 공작과의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었다.아버지를 지지하고 영국에 대항하여 프랑스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그는 1695년 영국 의회법에 의해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그의 영국 귀족 작위는 몰수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베릭 공작은 다시 전선에 나섰다. 초기에는 남네덜란드 전선에서 1702년 부플레르, 1703년 빌로와 공 밑에서 참전했으며, 에케렌 전투에도 참여했다. 1704년 2월에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지휘권을 받아 스페인으로 파견되어, 동맹 측 포르투갈을 공격하여 동맹군의 침공을 저지했다. 그러나 동맹군에게 빼앗긴 지브롤터 탈환을 주장하는 펠리페 5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프랑스로 소환되기도 했다. 이후 카미자르 반란 진압에 잠시 투입되었다가 1705년 10월 이탈리아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1706년 1월, 니스를 함락시킨 공로로 2월에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다. 다시 스페인으로 파견된 그는 동맹군과 교전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6월에는 잠시 마드리드를 동맹군에게 빼앗겨 펠리페 5세와 함께 부르고스로 후퇴하기도 했으나, 8월에 마드리드를 탈환하고 카르타헤나도 되찾으며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우위를 회복시켰다.
1707년에는 알만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툴롱이 프린츠 오이겐에게 포위당하자 구원에 나섰으나, 포위군이 먼저 철수하여 스페인으로 돌아가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2세와 함께 발렌시아, 하티바, 레리다 등 동맹 측 도시들을 함락시켰다(툴롱 포위전).
1708년에는 빌라르를 대신하여 라인강 전선을 담당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방돔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루이가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패배하자, 라인강에서 북상하여 두에에서 방돔 군과 합류했다. 이후 동맹군이 릴을 포위하자 요격에 나섰으나 릴 포위전에서 방돔과의 의견 충돌 등으로 인해 적극적인 개입은 어려웠고, 결국 릴은 함락되었다. 이후 전쟁 후반기에도 여러 전선에서 활약하며 1714년 바르셀로나 함락을 이끌며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기여했다.
3. 4. 1. 알만사 전투의 대승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군인으로서 베릭은 용기, 능력, 그리고 청렴함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706년까지 그는 스페인 북부에서 부르봉 왕가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니스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끈 공로로 그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다.루이 14세는 그의 원수들에게 상세한 명령을 내리곤 했는데, 1707년에는 베릭에게 유리한 수적 우위를 제공하며 라인 전선에 75개 대대와 140개 기병대를 할당했다.[6]

1707년 4월 25일, 베릭은 알만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이끌고, 프랑스 출신 망명 귀족인 루비니가 지휘하는 영국-포르투갈-네덜란드 연합군을 격파했다.[7] 이 전투에서 영국 연대 5개, 네덜란드 연대 6개, 포르투갈 연대 3개가 모든 대포와 연대 깃발을 빼앗긴 채 포로로 잡혔다. 알만사에서의 패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보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려는 동맹국의 희망을 사실상 끝내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토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베릭을 "프랑스군을 격파한 용감한 영국 장군"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알만사 전투에서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베릭은 1707년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부터 '''리리아 이 헤리카 공작'''(Duque de Liria y Xérica|리리아 이 헤리카 공작es) 작위를 받았고, 1710년에는 루이 14세로부터 프랑스 귀족 작위인 '''피츠제임스 공작'''(Duc de Fitz-James|피츠제임스 공작프랑스어) 작위를 받았다.
3. 4. 2. 릴 포위전과 이후 활약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방돔 공작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9,000명의 낙오병을 구출하여 두에에 주둔시킨 뒤 릴로 이동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먼저 도착하여 방어 시설을 해체한 상태였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1708년 8월 3일, 베릭은 포위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판단하고 20개 대대와 7개 기병대대의 용기병을 증원했다.[8] 릴은 루이 14세에게 중요한, 강력하게 방어되고 요새화된 도시였다. 베릭은 베르사유로부터 즉각적인 공격 명령이 계속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삼촌인 말버러 공작이 약화된 자신의 군대를 전투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10] 10월 22일, 부플레르 원수는 결국 항복하고 두에로 행진했지만, 결정적으로 베릭의 군대는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베릭은 말버러의 조카였으며, 릴 포위 공격 중에도 망명 중인 외삼촌 가족과 연락을 유지했다. 그는 기병을 보내 동맹군으로부터 말을 구입하기도 했다.[11]1709년에는 프랑스 남부의 도피네로 이동했으며, 말플라케 전투 후에는 네덜란드로 전임하여 빌라르와 함께 방어선을 구축했다. 1710년부터 1714년까지는 프랑스 남부에서 수비를 맡았다.
1714년 7월 스페인으로 이동하여, 9월 11일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켜 스페인 전선을 종결시켰다(제3차 바르셀로나 포위전). 같은 해 금양모 기사단 기사가 되었다. 이후 기엔의 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몽테스키외와 친분을 쌓았다.
1718년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스페인이 적대 관계가 되었고, 베릭 공작은 프랑스 장군으로서 카탈루냐에서 로자스 포위전 등에서 과거 자신이 옹립했던 펠리페 5세의 군대와 싸웠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초빙되어 라인란트 군을 이끌고 케흘 포위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다음 해 1734년 6월 12일, 필립스부르크 포위전 도중 적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베릭 공작위는 전처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가 계승했고, 피츠자메 공작위(Duc de Fitz-James|피츠자메 공작프랑스어)는 후처의 아들들이 각각 계승했다.
3. 5. 사국 동맹 전쟁 참전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기옌 지방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몽테스키외와 친분을 쌓았다.1718년 12월, 프랑스와 스페인이 적대 관계가 된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베릭 공작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과거 자신이 왕위를 지키도록 도왔던 펠리페 5세에 대항하여 스페인으로 진격했다. 그는 산 세바스티안을 폭격하고 기푸스코아와 비즈카이아 지역을 점령했으며, 카탈루냐에서 로자스 포위전 등을 치렀다. 이 작전은 1719년 3월에 종료되었고, 스페인 국왕은 결국 1720년 1월에 평화를 요청했다.
이후 수년간 평화가 이어졌고, 베릭은 1733년까지 다시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 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라인 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733년 켈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년 후인 1734년 6월 12일, 필립스부르크 공방전 중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4. 결혼과 자녀
제1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패트릭 사스필드, 루칸 백작의 미망인이었던 호노라 드 버크로, 1695년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이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피츠제임스 스튜어트는 스페인에서 리리아 및 제리카 공작 작위를 받았다.
1700년에는 앤 벌클리와 재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일부는 프랑스 귀족 작위인 피츠자메 공작위를 계승했다.
베릭의 후손들은 프랑스의 피츠제임스 공작과 스페인의 리리아 공작 작위를 이었으며, 후일 스페인의 알바 공작 작위까지 계승하게 되었다.
4. 1. 첫 번째 결혼: 호노라 드 버그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첫 번째로 Honora de Burgh|호노라 드 버그eng(또는 Honora Burke|호노라 버크eng, 1675년경 ~ 1698년 1월 16일)와 결혼했다. 그녀는 패트릭 사스필드, 루칸 백작 장군의 미망인이었으며, 제7대 클랜리카르데 백작 윌리엄 버크의 딸로 앵글로-아일랜드인 귀족이었다. 제임스는 사스필드가 1693년 7월 29일 란덴 전투에서 사망한 지 2년 후인 1695년 3월 26일 생제르맹앙레(이벨린)에서 호노라와 결혼했다.
베릭은 호노라와 사스필드 사이의 아들인 제2대 루칸 백작 제임스 사스필드가 1718년 자식 없이 사망할 때까지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키웠다.
베릭과 호노라 사이에는 아들 한 명을 두었다.
- 제임스 프랜시스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James Francis Fitz-James Stuarteng, 1696년 10월 21일 ~ 1738년 6월 2일): 스페인식 이름은 Jacobo Francisco Fitz-James Stuart|하코보 프란시스코 피츠하메스 스튜아르트spa이다. 아버지의 사망 후 베릭 공작 작위를 상속받았으며, 스페인에서는 제2대 리리아 및 제리카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후손인 Catalina Ventura Colón de Portugal|카탈리나 벤투라 콜론 데 포르투갈spa, 베라과 공작 및 라 베가 공작 부인과 결혼했다. 1714년 황금 양모 기사단 기사로 임명되었다.
호노라는 1698년 1월 16일 페제나스에서 사망했다.
4. 2. 두 번째 결혼: 앤 벌클리
첫 아내 호노라 드 버크가 1698년에 사망한 지 약 3년 후인 1700년 4월 18일,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파리에서 앤 벌클리(Anne Bulkeley, 1675년경 ~ 1751년 6월 12일)와 재혼했다. 앤은 제임스 2세의 시종장이었던 헨리 벌클리(Henry Bulkeley)의 딸이었다.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수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 기록에는 10명, 다른 기록에는 아들 8명과 딸 5명으로 총 13명이라고 전해진다. 알려진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 앙리 제임스 피츠제임스(Henry James Fitzjames, 1700년 ~ 1721년): 프랑스 작위인 제2대 피츠자메 공작(duc de Fitz-Jamesfra)
- 앙리에트 드 피츠제임스(Henriette de Fitzjames, 1705년 ~ 1739년)
- 프랑수아 피츠제임스(François Fitz-James, 1709년 ~ 1764년): 제3대 피츠자메 공작, 수아송 주교
- 앙리 피츠제임스(Henry Fitzjames, 1711년 ~ 1731년): 리무쟁 총독
- 샤를 드 피츠제임스(Charles de Fitzjames, 1712년 ~ 1787년): 제4대 피츠자메 공작, 프랑스 원수. 그의 후손들은 프랑스의 피츠자메 공작위를 계승했다.
- 로르 안 드 피츠제임스(Laure Anne de Fitzjames, 1713년 ~ 1766년)
- 마리 에밀리 드 피츠제임스(Marie Emilie de Fitzjames, 1715년 ~ 1770년)
- 에두아르 드 피츠제임스(Edouard de Fitzjames, 1716년 ~ 1758년)
- 안 소피 드 피츠제임스(Anne Sophie de Fitzjames, 1718년 ~ 1763년)
- 안 드 피츠제임스(Anne de Fitzjames, 1720년 ~ 1721년)
참조
[1]
인용
[2]
간행물
London Gazette
1686-03-10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인용
[7]
인용
[8]
인용
[9]
인용
[10]
인용
[11]
인용
[12]
서적
Burke's Peerage
[13]
간행물
LondonGazette
1686-03-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