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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2세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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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2세는 1633년 런던에서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잉글랜드 내전 중 망명 생활을 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에서 복무하며 군인으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요크 공작 지위를 재확인받고 해군 제독으로 활동했으며, 로열 아프리칸 컴퍼니의 총독을 맡아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1685년 형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 되었으나, 가톨릭 친화 정책으로 인해 잉글랜드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명예혁명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의 아들과 손자들에 의해 왕위 복위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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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2세 (잉글랜드)
지도
기본 정보
이름제임스 2세 / 제임스 7세
로마자 표기James II / James VII
다른 이름아일랜드 왕
그레이트브리튼 왕 (비공식)
노르망디 공작
출생일1633년 10월 24일
출생지세인트 제임스 궁, 웨스트민스터, 잉글랜드
사망일1701년 9월 16일
사망지생제르맹앙레 성, 프랑스
매장지파리 영국 베네딕트회 교회
서명
통치
왕위 계승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
재위 기간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23일
대관식1685년 4월 23일
대관식 종류제임스 2세와 7세 및 메리의 대관식
이전 군주찰스 2세
후임 군주메리 2세, 윌리엄 3세 & 2세
후임 종류후계자
가문
왕가스튜어트 가문
아버지찰스 1세
어머니헨리에타 마리아
종교
종교개신교 (1633–1668)
로마 가톨릭교회 (1668–1701)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앤 하이드 (1660년 결혼, 1671년 사망)
모데나의 메리 (1673년 결혼)
자녀케임브리지 공작 찰스 스튜어트 (1660–1661)
메리 2세
케임브리지 공작 제임스 스튜어트
앤 여왕
켄달 공작 찰스 스튜어트
케임브리지 공작 에드거 스튜어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루이사 마리아 스튜어트
서자갈모이 여백작 헨리에타 피츠제임스
제1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헨리 피츠제임스
버킹엄과 노먼비 공작부인 캐서린 셰필드

2. 내전과 망명으로 보낸 성장기

1640년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자, 제임스는 7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왕당파의 거점 옥스퍼드로 이동했다. 1644년 11세에 요크 공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내전은 왕당파의 패배로 끝났고, 1646년 옥스퍼드도 함락되었다. 제임스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유폐되었지만,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한 끝에 1648년 15세에 장로파 대령 범프필드의 도움으로 여장을 하고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망명했다.[65]

1649년 아버지 찰스 1세는 의회파에 의해 처형되었고, 왕당파는 제임스의 형 찰스 2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서 국왕으로 인정받아 1651년 스코틀랜드 스쿤에서 즉위했으나, 잉글랜드 공화정의 반대로 잉글랜드 왕위는 얻지 못했다. 올리버 크롬웰에게 스코틀랜드마저 정복당하자, 스튜어트 왕족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 시기 제임스의 상관이었던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프랑스에서 제임스는 형 찰스와 함께 튀렌느 장군 휘하에서 군인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프롱드의 난에 참전하여 첫 실전을 경험했다. 당시 제임스는 "어떤 임무이든 용감히 돌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5] 1656년, 23세에는 스페인군 지휘관 콩데 공을 따라 프랑스-스페인 전쟁에 참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고, 1658년 사구 전투에서 콩데 공의 군대에 참가하여 튀렌느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싸웠다. 튀렌느와 콩데 공은 제임스의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찰스 2세는 복위 가능성을 찾아 열강을 순회했지만, 30년 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유럽 국가들은 형제를 도울 여력이 없었고, 오히려 영국 연방 공화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피레네 조약으로 화친하자, 스페인은 제임스에게 해군 제독 자리를 제안하며 귀화를 권했다. 형 찰스 2세가 이미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여 왕위 계승이 불투명했기에 제임스는 이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65], 결국 거절했다.

2. 1. 출생

제임스와 아버지 찰스 1세. 1647년 피터 렐리의 작품.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 사이에는 1629년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찰스 2세는 둘의 차남, 제임스 2세는 삼남이 되지만, 보통은 찰스 2세를 장남으로 제임스 2세를 차남으로 본다. 제임스 2세는 1633년 10월 14일 런던세인트제임스궁에서 태어났고[62]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로드가 세례식을 집전하였다.[63] 제임스는 형인 찰스, 버킹엄 공작의 두 아들 조지 빌리어스와 프란시스 빌리어스 등과 함께 가정 교육을 받았다.[63] 세살 때 잉글랜드 해군의 총사령관직인 제독경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린 당시에는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훗날 왕정복고 이후에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62] 태어나면서부터 잉글랜드 왕실의 전통에 따라 국왕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요크공작으로 인정되었으며[63] 1642년에 가터 훈장을 받았고,[63] 1644년 1월 정식으로 요크공작에 책봉되었다.[64]

2. 2. 내전과 망명

1640년, 7세 때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자, 가족과 함께 왕당파의 거점 옥스퍼드로 이동했고, 그 와중인 1644년, 11세에 요크 공에 서임되었다. 내전은 왕당파의 패배로 끝나고, 옥스퍼드도 1646년에 함락되었다. 제임스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감시를 받으며 유폐되었지만,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1648년, 15세의 제임스는 장로파의 한 사람인 대령 범프필드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하고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도망쳤다.[65]

1649년에 아버지는 의회파에 의해 처형되었고, 왕당파는 제임스의 형 찰스 2세를 차기 국왕으로 추대했다. 찰스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서는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스코틀랜드의 스쿤에서 1651년에 즉위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공화정은 스튜어트 왕가를 적대했기에, 잉글랜드 왕위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스코틀랜드가 정복되었고, 스튜어트 왕족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로 건너간 후 스튜어트 가족은 유럽 각지를 전전했다. 찰스와 제임스 형제는 먼저 프랑스에서 튀렌느 장군 휘하에서 군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제임스는 프롱드의 난에서 튀렌느의 군대에 합류하여 반란군과 싸웠다. 이때 제임스는 첫 실전을 경험하였는데, 함께 전투에 참여한 사람은 제임스가 "어떤 임무이든 용감히 돌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65] 이어 1656년, 23세의 제임스는 생계를 위해 스페인군 지휘관인 콩데 공을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고, 1658년 사구 전투에서 콩데 공의 군대에 참가하여 튀렌느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싸웠다. 튀렌느와 콩데 공은 제임스의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형제는 복위의 가능성을 찾아 열강의 여러 나라를 순회했지만, 30년 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유럽 여러 나라는 형제를 돕는 여력이 없었고, 오히려 영국 연방 공화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도 했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피레네 조약으로 화친을 맺게 된 뒤 스페인은 제임스에게 해군 제독 자리를 제시하며 귀화를 권하였다. 형인 찰스 2세가 이미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왕위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제임스는 이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였지만[65], 결국 거절하였다.

3. 왕정 복고 시기

1660년 잉글랜드 연방이 붕괴되자 왕정복고로 찰스 2세가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되었다. 제임스는 왕위 계승권자였지만, 찰스 2세는 아직 젊어 충분히 왕자가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가 왕위를 이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였다.[66] 왕정복고와 함께 제임스의 요크 공작 작위도 실효를 지니게 되었고, 1660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의 올버니 공작 작위도 부여받았다.[66]

제임스는 왕정 복고 직후 총리인 에드워드 하이드의 딸 앤 하이드와 결혼하였다. 찰스 2세는 제임스를 보호하기 위해 1679년에 이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네덜란드 브뤼셀로 피신시켰고, 더 나아가 소란이 미치지 않은 스코틀랜드로 옮겨 존 메이트랜드를 대신하여 왕실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왕위 계승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한편 장로교의 코브넌터를 탄압했다 (피의 시대).

샤프츠베리 백작은 제외법안 등을 제출하며 반가톨릭·반 제임스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휘그로 불린 이들 급진파는 가톨릭 음모 사건의 열기가 식어 정치적 공세를 펼칠 수 없게 되자, 합법적인 수단으로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당시에는 가톨릭이라 해도 혈통이 정통인 제임스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토리도 적지 않았다.

찰스 2세는 제외법안에 대항하여 두 차례에 걸쳐 의회를 해산했고, 그 후 찰스 2세 재위 중에 의회가 소집되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휘그는 라이하우스 음모 사건(1683년)을 일으켜 찰스 2세와 제임스 형제를 암살하려 했다. 이 계획은 미수에 그쳤고, 샤프츠베리 백작은 1682년에 다른 음모 발각으로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이듬해 1683년에 사망했다. 제임스는 1682년에 귀국하여 1684년에 해군 총사령관에 복직했다.

1/2크라운(1/8파운드). 제임스 즉위를 기념하여 1686년 주조됨. 각인에 ''IACOBUS II DEI GRATIA''(James II by the Grace of God)의 글자가 읽을 수 있다

3. 1. 결혼

1660년대 그려진 제임스와 앤 하이드의 초상


1660년 잉글랜드 왕정복고찰스 2세가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되었다. 제임스는 왕위 계승권자였지만, 찰스 2세는 아직 젊어 충분히 왕자가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가 왕위를 이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였다.[66] 왕정복고와 함께 제임스의 요크 공작 작위도 실효를 지니게 되었고, 1660년 12월 31일 스코틀랜드의 올버니 공작 작위도 부여받았다.[66] 잉글랜드로 귀환한 제임스는 즉각 총리인 에드워드 하이드의 딸 앤 하이드와 약혼하여 주위의 논란을 불렀다.[66]

사실 1659년 제임스가 먼저 앤에게 접근하며 결혼을 약속하였고[66] 1660년 왕정복고 무렵엔 이미 임신 중이었다. 에드워드 하이드는 찰스 2세와 제임스의 망명 시기 풍찬노숙을 함께한 왕당파의 오랜 충복이긴 하였으나 별다른 작위가 없는 평민이었기 때문에 딸의 결혼을 극구 말렸다.[66] 그러나 둘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면서 왕실과 하이드를 설득하였고 1660년 9월 3일 런던에서 공식적인 결혼식을 거행했다.[66] 찰스 2세는 둘의 격을 맞추기 위해 하이드에게 백작 작위를 부여하였다.

결혼식을 올린 지 두 달이 안되어 앤은 아들을 낳았다. 부부의 첫 째였던 찰스는 유아기에 사망하였다.[66] 앤은 모두 일곱의 자녀를 낳았지만 메리와 두 딸만이 장성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요절하였다.[67] 당시 유럽의 영아 사망율을 생각할 때 이러한 어린 자녀의 죽음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새뮤얼 피프스는 제임스가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과 함께 놀면서 아버지 역할을 즐겼다고 기록하였다.[67]

앤은 제임스에게 헌신하였고 그의 조언은 제임스의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67] 당대 유럽의 여느 왕가의 남성 귀족처럼 제임스 역시 여러 정부(情婦)들을 두어 "당대 최악의 바람둥이"로 불렸다.[67] 새뮤얼 피프스는 일기에 제임스가 "내 아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고 기록하였다.[67] 제임스의 여성 편력은 독특한 면이 있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당대 스코틀랜드 신학자였던 길버트 버넷은 제임스의 정부들을 "고행의 사제로서 그에게 주어진게 틀림없다"고 평가하였다.[67] 앤 하이드는 1671년 사망했다.

3. 2. 군경력과 노예 무역

왕정복고 이후 제임스는 제독경 지위를 재확인받고, 포츠머스오항동맹 주지사의 보좌역을 맡았다.[68] 1660년 로열 아프리칸 컴퍼니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명예혁명으로 퇴위할 때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68]

1665년 제2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에서 영국 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네덜란드의 아프리카 해안 요새를 공격하여, 잉글랜드는 노예 무역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68] 1672년-1674년 제3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에서도 제독경으로서 아프리카 해역의 해전을 총괄하였다.[69] 잉글랜드는 니우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찰스 2세는 제임스를 기려 뉴욕으로 개명했다. 허드슨강의 포트 오린지는 제임스의 스코틀랜드 작위에서 비롯된 올버니로 개명되었다.[70]

1666년 런던 대화재 때, 제임스는 찰스 2세의 명으로 소방 업무를 맡았다.[71]

1672년 로열 아프리칸 컴퍼니는 노예 무역을 관장하는 식민기구로 확대되었고, 1680년대에는 연간 5천여 명의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팔았다. 노예의 가슴에는 "DY"(요크 공작)를 단근질로 새겼다.[72] 당시 로열 아프리칸 컴퍼니는 그 어떤 노예 무역 집단보다 더 많은 아프리카 여성과 어린이를 노예로 팔았다.[73]

3. 3. 개종과 재혼

제임스는 프랑스 망명 시기에 이미 가톨릭에 대한 호감이 있었고, 1668년에서 1669년 사이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1676년까지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며 이를 비밀로 했다.[75] 1673년 의회가 심사율을 제정하여 가톨릭 교도를 공직에서 배제하려 하자, 제임스는 제독경 지위에서 사퇴했다.[74] 이로써 제임스의 가톨릭 신앙은 공개되었다.

제임스 2세의 결혼식 의상, 1673년,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찰스 2세는 제임스의 두 딸 메리와 잉글랜드 교회가 양육하도록 조치했지만, 제임스가 모데나 레조 공국의 공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재혼하는 것은 허락했다. 잉글랜드는 제임스의 새 아내를 교황의 대리인 쯤으로 여겼지만, 제임스는 가톨릭을 위해 죽거나 추방되는 것을 순교로 여길 만큼 독실한 신앙을 드러냈다.

3. 4. 배척법 위기

배척법을 발의한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


제임스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반감이 커지자, 찰스 2세는 제임스의 장녀 메리를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빌럼과 결혼시켜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76] 찰스 2세에게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의회는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가 왕위를 이을 것을 우려했다. 티투스 오츠교황주의자들의 국왕 시해 음모를 거짓으로 선동하여 제임스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섀프츠베리 백작의 주도로 의회에서 배척법이 발의되어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막으려 했다. 일부 의원들은 찰스 2세의 사생아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에게 왕위를 물려주자는 의견도 냈다. 1679년 배척법 통과 위기 때,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했다.[77]

배척법 위기 정국에서 왕당파는 휘그당토리당으로 분열되었다. 찰스 2세의 반대로 제임스는 왕위계승권을 유지했지만, 위기 해소를 위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찰스 2세는 제임스를 잉글랜드 밖으로 보내 여론을 잠재우려 했고, 제임스는 브뤼셀, 에든버러홀리루드 궁전 등에서 머물렀다. 제임스는 찰스 2세의 병세가 위중해졌을 때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3. 5. 명망의 회복

1683년 라이 하우스 음모가 발각되면서 제임스에 대한 여론은 급반전되었다.[80] 이 사건은 가톨릭에 호의적인 국왕과 후계자를 모두 제거하고자 개신교도가 꾸민 음모였다. 찰스 2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임스를 다시 제독경으로 복권시켜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1683년, 찰스 2세와 그의 동생 제임스를 암살하고 공화국 혁명을 일으켜 크롬웰식 정부를 재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20] 라이 하우스 음모로 알려진 이 음모는 음모자들에게 역효과를 내었고 국왕 찰스 2세와 제임스에 대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휘그당의 저명한 인사들인 에식스 백작과 먼머스 공작을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연루되었다. 먼머스는 처음에 음모에 가담한 것을 자백하고 공모자들을 고발했지만, 나중에 번복했다. 에식스는 자살했고, 먼머스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유럽 대륙으로 망명해야 했다.

찰스 2세는 이 음모에 대한 반응으로 휘그당과 비국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제임스의 인기가 회복되자 찰스는 1684년 그를 추밀원으로 다시 초청했다. 영국 의회의 일부 의원들은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국왕의 가능성을 경계했지만, 제임스를 왕위에서 배제하려는 위협은 사라졌다.

4. 재위 시기

군대 수장으로서 제임스 2세 (1685년)


제임스 2세는 찰스 2세가 사망한 1685년 2월 6일에 즉위하여,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1][2] 즉위 초기 의회는 제임스에게 호의적이었고, 무역세를 책정하여 재정적으로 지원했다.[3][4] 그러나 제임스는 의회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강했다.[5]

제임스 2세와 모데나의 메리 왕비의 대관식 행렬, 1685년


즉위 직후, 몬머스 공작과 아가일 백작이 각각 잉글랜드 남부와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81] 아가일의 반란은 스코틀랜드 내 확고한 왕가 지지 기반으로 인해 쉽게 제압되었고, 아가일은 처형되었다. 몬머스의 반란은 더 위협적이었으나, 세지무어 전투에서 패배하고 몬머스 역시 처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임스는 내부 반대 세력과 네덜란드의 배후 연관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제임스는 형벌법에 반대했지만, 초기에는 가톨릭 관용에 한정된 종교 정책을 추진했다.[82] 장로교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히 탄압했다.[83] 메리 1세 이후 단절됐던 교황 대사를 다시 맞이하고, 예수회 소속 에드워드 피터를 고해사제로 두는 등 가톨릭 친화적인 행보를 보였다.[85] 가톨릭 교도인 선덜랜드 백작을 국무장관으로 기용하자 의회의 반발을 샀다.[85]

1686년, 제임스는 판사들로부터 의회 법령 폐지 권한을 확인받으려다 실패하고 판사들을 해고했다.[86] 1687년 신교 자유령으로 형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잉글랜드 국교회 강당에서 이를 낭독하게 했다.[87] 같은 해 형벌법과 심사율 폐지를 시도하며 비국교도를 요직에 등용했다.[87] 1688년 선거교서를 통해 의회 구성을 시도했으나, 오라녜공 빌럼의 침공 소식에 철회했다.[87]

제임스는 상비군을 강화하고 가톨릭 교도를 장교로 채용하여 내부 통제를 강화하려 했으나, 이는 의회 반발을 불러 1685년 11월 의회를 해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85]

4. 1. 즉위

1685년 2월 6일 찰스 2세가 사망하자, 요크 공작 제임스가 잉글랜드아일랜드제임스 2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로 즉위했다.[1] 제임스는 4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2] 즉위 직후 소집된 의회는 제임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충성 의회"라는 이름을 얻었다.[3] 의회는 제임스에게 넉넉한 무역세를 책정하여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4] 제임스는 국정 실무에 적극 관여했지만, 의회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성향이 강했다.[5]

4. 2. 반란

배척법 위기 시기부터 제임스의 왕위 경쟁자였던 찰스 2세의 사생아 몬머스 공작은 제임스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켰다. 잉글랜드 남부에서 몬머스의 난이 일어나는 동안 스코틀랜드에서는 아가일 백작 아치볼트 캠벨이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다.[81] 몬머스 공작과 아가일 백작은 모두 제임스의 사위이기도 하였던 오라녜공 빌럼이 통치하고 있던 네덜란드에서 동조자를 구하였으나 오라녜공은 이들을 억압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아가일 백작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자신의 클랜에서 반란군을 모병하고 거병하였으나 쉽사리 제압되어 1685년 6월 18일 사로잡혔다. 스튜어트 왕가는 스코틀랜드에서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가일의 반란에 가담한 인원은 3백 명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던 아가일은 체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되었다.

몬머스 공작의 반란은 보다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1685년 6월 11일 스스로를 잉글랜드의 국왕이라 선포한 몬머스 공작 역시 반란군 모병에 어려움을 겪어 제임스의 소규모 상비군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몬머스 공작은 세지무어 전투에서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야간 기습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국왕의 군대는 반란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체포된 몬머스는 7월 15일 런던탑에서 처형되었다. 조지 제프리스가 주심을 맡아 진행된 재판에서 반란군은 유배되거나 서인도 제도에 사실상 노예인 계약 하인으로 보내졌다. 가담자 가운데 250여 명이 처형되며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제임스는 내부의 반대 세력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고 이들의 배후에 네덜란드가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4. 3. 종교 정책

제임스는 형벌법에 반대했지만, 집권 초기에는 가톨릭에 대한 관용에 국한된 정책을 추진했다.[82]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탄압을 가했다.[83] 제임스는 메리 1세 이후 단절됐던 교황 대사를 새로 맞아들이고, 예수회 소속 에드워드 피터를 고해사제로 두었다.[85] 국무장관으로 가톨릭 교도인 선덜랜드 백작을 기용하자, 의회는 휘그당뿐만 아니라 토리당마저 등을 돌렸다.[85]

1686년 제임스는 판사들로부터 의회가 의결한 법령을 폐지할 권한이 있음을 확인받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판사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86] 1687년 신교 자유령을 통해 형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고, 잉글랜드 국교회 강당에서 신교 자유령을 낭독하도록 명령했다.[87] 같은 해 형벌법과 심사율 폐지를 시도하며 비국교도들을 요직에 등용했다.[87] 1688년 선거교서를 발부하여 자신의 뜻에 맞는 의회를 구성하고자 했으나, 오라녜공 빌럼의 잉글랜드 침공 소식에 계획을 철회했다.[87]

제임스는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자 상비군을 강화하고 가톨릭 교도를 장교로 채용했다. 이는 의회의 반발을 불렀고, 결국 1685년 11월 의회를 해산하고 더는 소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85]

5. 명예혁명

1688년 4월 제임스 2세가 성공회 교회 강단에서 신교 자유령을 낭독하라고 재차 명령하자,[88]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여섯 명의 주교들은 국왕의 종교 정책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하였다. 제임스 2세는 이들 일곱 명을 선동죄로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88] 그해 6월 10일 제임스 2세의 계비 마리아 베아트리체는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출산하였다. 이로써 제임스 2세는 형 찰스 2세와 달리 적장자를 두게 되었고, 잉글랜드 성공회와 의회는 가톨릭 국왕 부부의 적장자가 다시 가톨릭 신자로서 왕위를 이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89] 이전까지 제임스 2세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권자는 네덜란드로 출가한 메리였기 때문에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치세만을 인내하며 견디면 다시 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이제 왕가가 영구히 가톨릭을 신봉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90] 한편에서는 다른 이의 아이를 몰래 들여 마리아가 출산한 것으로 꾸몄다는 음모론이 나도는 가운데,[91] 의회 일각에서는 마리아 베아트리체의 임신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다.[92]

6월 30일 일곱 명으로 구성된 개신교 귀족 집단이 오라녜공 빌럼에게 잉글랜드 출정을 요청하였다. 오라녜공 빌럼은 이들의 요청을 명분으로 잉글랜드 침공을 계획하였고 9월이 되자 이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소식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프랑스까지 전해졌고 루이 14세는 제임스 2세에게 원군을 보내 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상비군이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훗날 프랑스의 내정간섭 빌미가 될 수도 있는 루이 14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1688년 11월 5일 오라녜공 빌럼이 잉글랜드에 상륙하자 상황은 매우 빠르게 전개되었다. 상비군에 있던 개신교도 상당수가 탈영하여 오히려 오라녜공의 편에 선 것이다. 잉글랜드의 상비군은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였지만, 탈영과 교전 거부로 사실상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2월 11일 제임스 2세는 국새를 템스강에 던지고 프랑스로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켄트주에서 붙잡혔다. 제임스 2세를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오라녜공은 12월 23일 제임스 2세의 망명을 허가하였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루이 14세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제임스 2세는 루이 14세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생활하였다.

1689년 1월 22일 윌리엄 3세는 공회 의회를 소집하였다.[93] 의회는 제임스 2세가 템스강에 국새를 던졌을 때 스스로 왕위도 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왕좌의 궐위를 선언하면서 제임스 2세의 딸이자 오라녜공의 아내인 메리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메리 2세가 된 메리는 오라녜공과 함께 잉글랜드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689년 4월 11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왕위도 함께 버렸다고 선언하였고 메리와 오라녜공을 스코틀랜드의 군주로 인정하였다.[94]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무분별한 사법권 남용과 성공회 탄압을 단죄하고 의회의 권리들을 재확인한 권리선언을 발표하였다.[95] 1689년에 제정된 권리장전의 기초가 된 이 권리선언은 또한 가톨릭교도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될 수 없다는 배척법을 확인하고 아울러 잉글랜드의 국왕은 가톨릭 교도와 결혼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6. 복위 시도

보인 전투: 제임스 2세와 윌리엄 3세 사이에 벌어진 전투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의 도움으로 제임스는 군대를 모을 수 있었고,[95] 아일랜드 역시 인구 대다수가 가톨릭 교도이기 때문에 제임스를 지지하였다. 잉글랜드 의회의 제임스 퇴위 결의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윌리엄 3세 측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관련 인물에 대한 사권박탈법을 의결하였다.[96] 아일랜드 의회는 또한 제임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일랜드 전역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97]

제임스는 아일랜드에서 군대를 결성하고 윌리엄 3세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1690년 7월 1일 아일랜드 렌스터의 보인강 주변에서 벌어진 보인 전투에서 패배한 뒤[98] 프랑스로 도주하였고 이후 다시는 잉글랜드 땅을 밟을 수 없었다.[98] 제임스는 아일랜드의 추종자들을 사지에 버려둔 채 혼자 탈출하였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지지마저 잃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망할 놈의 제임스"라고 부르며 그의 비겁함을 비난하였다.[96]

보인 전투에서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평판이 하락하긴 하였지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제임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잔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임스라는 이름의 유래인 야곱의 라틴어형인 자코브를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자코바이트로 불렸다.[97] 여전히 형법과 심사율에 의해 억압받을 수밖에 없었던 아일랜드인들은 18세기 내내 스튜어트가의 제임스와 그 후계자를 자신의 처지를 구원해 줄 메시아적 인물로 받아들였다.[98]

1689년 3월,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왕위 탈환을 시도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던디 백작 존 그레이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전사했지만, 아일랜드에서는 티콘넬 백작 리처드 탈보트와 패트릭 서스필드 등이 제임스 2세를 도왔다. 아일랜드 의회는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제임스 2세를 왕으로 인정했으며, "신앙의 자유에 관한 법"을 제정했다. 이로써 제임스 2세(가톨릭 세력)와 윌리엄 3세(개신교 세력) 간의 윌리엄 왕조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보인강 전투에서 패한 제임스 2세는 잔여 병력을 버리고 프랑스로 도망쳤다. 버려진 병사들은 "더러운 제임스(Séamus á Chaca, "James the Shit")"라는 별명을 붙이며 불만을 터뜨렸다.

7. 망명과 사망

제임스 2세가 마지막 망명 생활을 보낸 생제르맹앙레 성


1828년 조지 4세가 교회 재건축 당시 제작 의뢰한 생제르맹앙레이 교구 교회 내 제임스 2세와 7세의 묘


루이 14세는 제임스가 생제르맹앙레 궁성에 머무르도록 배려했다.[99] 제임스 부부와 다수의 신하들이 함께 지냈으며, 이들 중 다수는 가톨릭 교도였다.[99] 1692년 부부의 막내인 루이자 마리아 스튜어트가 태어났다.[99] 1696년 제임스 복위를 시도하던 일부가 윌리엄 3세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00] 루이 14세는 제임스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권했지만, 제임스는 이를 수락할 경우 스스로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고 여겨 거절했다. 루이 14세는 잉글랜드와 화해가 필요했고, 결국 윌리엄 3세와 동맹을 맺어 제임스는 더 이상 프랑스 왕실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99]

말년에 제임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보속하는 삶을 살았다.[99] 그러나 제임스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잉글랜드의 정당한 군주라고 확신했고, 아들에게 왕위에 올랐을 때를 대비한 지침서를 남겼다.[101]

제임스는 1701년 9월 16일 생제르맹앙레성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였다.[101] 제임스의 심장은 은도금된 로켓에 담겨 샤일로의 수녀원에 안장되었고, 뇌와 장기 등도 각지의 대학과 수녀원에 보내졌다.[101] 시신의 나머지는 파리에 있는 잉글랜드계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99] 프랑스 왕실은 제임스의 무덤을 왕족의 예우로 관리했다. 1734년 파리 대주교는 제임스의 시성을 시도했으나, 교황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99] 프랑스 혁명 와중에 제임스의 무덤은 훼손되었다.[99]

8. 사후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제임스 2세의 1686년 동상


1701년 왕위계승법권리장전 이후의 배척법을 재확인하였다. 윌리엄 3세에게는 적장자가 없었고, 자코바이트의 난이 지속되어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왕위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왕위 계승법은 스튜어트가의 혈통을 이은 자로서 가톨릭교도가 아니어야 함을 명시하였다. 윌리엄 3세가 사망하자 왕위는 제임스 2세의 차녀인 에게 이어졌으며, 그 뒤는 제임스 1세의 손녀인 하노버의 소피아의 아들 조지 1세가 이었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 시대는 막을 내리고 하노버 왕가가 잉글랜드를 비롯한 영국의 새로운 왕가가 되었다.[1]

제임스를 정당한 국왕으로 여기던 자코바이트들은 제임스 사후 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잉글랜드의 제임스 3세 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8세로 부르며 스튜어트가 복위 시도를 계속하였다.[2] 이들은 조지 1세 즉위 직후인 1715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3] 1745년에는 제임스 2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지지하며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대패하였다.[4] 이로써 스튜어트가의 복위 시도는 대중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후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를 스튜어트 왕가의 후계로 주장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헨리 본인이 가톨릭 성직자였기 때문에 별다른 파급력이 없었다.[5]

제임스의 아들인 제임스 3세는 지지자들에게는 "제임스 3세 겸 8세"로, 적들에게는 "구 잠재 왕위 계승자(The Old Pretender)"로 알려졌다.

9. 가족 관계

찰스 1세 (잉글랜드 왕)조부:
제임스 1세 (잉글랜드 왕)
제임스 6세 (스코틀랜드 왕)증조부:
헨리 스튜어트[1]증조모:
메리 1세 (스코틀랜드 여왕)[2]조모:
앤 오브 덴마크증조부:
프레데리크 2세 (덴마크 왕)증조모:
소피아 메클렌부르크 공녀모:
헨리에타 마리아 (프랑스)조부:
앙리 4세 (프랑스 왕)증조부:
앙투안 드 부르봉 (방돔 공)증조모:
후아나 3세 (Jeanne d'Albret|장느 달브레프랑스어)[3]조모:
마리 드 메디시스증조부: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증조모:
조반나 다우스트리아

[1][2]는 튜더 왕조 초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를 외조모로 둔 사촌 관계이다. 이 혈통을 바탕으로 [3]이 스튜어트 왕조 초대 잉글랜드 왕이 되었고, 스코틀랜드와의 동군연합이 성립했다.[3]는 앙리 2세 (Henri d'Albret|앙리 달브레프랑스어)의 딸이다. 프랑스식 이름은 '''장느 달브레'''로 알려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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