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마쓰카타 내각
1. 개요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은 1891년 5월 6일부터 1892년 8월 8일까지 461일 동안 재임한 일본의 내각이다.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내각총리대신과 대장대신을 겸임했으며, 오쓰 사건, 제2회 제국 의회에서의 중의원 해산, 선거 간섭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잦은 각료 교체와 '커튼 내각', '이류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의 대규모 선거 간섭은 일본 민주주의 역사에 오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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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각 명칭 | 제1차 마쓰카타 내각 |
|---|---|
| 내각 번호 | 4대 |
| 존속 기간 | 1891년 5월 6일 ~ 1892년 8월 8일 |
| 총 재임 기간 | 22개월 |
| 정치 체제 | 메이지 시대 |
| 국가 원수 | 메이지 |
| 총리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전임 총리 | 야마가타 아리토모 |
| 후임 총리 | 이토 히로부미 |
| 주요 정당 | 메이지 올리가르히 주오 클럽 도쿠리쓰 클럽 긴키 클럽 |
| 의회 | 1890–1892 1892–1894년 3월 |
| 선거 | 1892년 총선거 |
| 야당 | 자유당 입헌개진당 |
| 각료 명단 | 내각 각료 명단 (일본어) |
| 이전 내각 | 제1차 야마가타 내각 |
|---|---|
| 다음 내각 | 제2차 이토 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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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일본 -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892년 일본에서 정부와 민권파의 대립으로 중의원이 해산된 후 치러진 총선거에서 정부의 개입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했으며, 제한적 선거권 하에 43만여 명의 유권자가 300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
1892년 일본 -
제2차 이토 내각
이토 히로부미가 이끈 제2차 이토 내각은 불평등 조약 개정, 청일 전쟁 승리 등 성과에도 불구하고 삼국 간섭,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외교적 실패와 조선에서의 영향력 약화, 그리고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 정책 추진으로 비판을 받았다. -
1891년 일본 -
오쓰 사건
오쓰 사건은 1891년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가 시가현 경찰에게 습격당해 부상을 입은 사건으로,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사법부 독립성 논란, 범행 동기, 러일 전쟁 영향 등 다양한 해석과 함께 여러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
1891년 일본 -
제1차 야마가타 내각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총리대신으로 하는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은 내각관제 도입 후 대일본 제국 헌법 시행 및 제1회 제국의회 개원 등 격변기에 교육 칙어 반포와 지방 제도 개혁 등의 정책을 추진하며 근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
메이지 시대의 내각 -
제2차 마쓰카타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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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의 내각 -
제1차 오쿠마 내각
오쿠마 시게노부가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겸임하며 출범한 제1차 오쿠마 내각은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나, 헌정당 내부 갈등으로 단명했으며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 정책을 추진했다.
3. 내각 구성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은 잦은 개각으로 인해 내각 구성원의 변동이 잦았다.
1891년 5월 6일에 출범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은 사쓰마번 출신의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내각총리대신 겸 대장대신을 맡아 내각을 이끌었다. 초기 내각은 외무대신에 아오키 슈조, 내무대신에 사이고 주도, 육군대신에 오야마 이와오, 해군대신에 가바야마 스케노리, 사법대신에 야마다 아키요시, 문부대신에 요시카와 아키마사, 농상무대신에 무쓰 무네미쓰, 체신대신에 고토 쇼지로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내각 출범 직후부터 각료들의 사임과 임명이 반복되면서 내각 구성은 계속 변화하였다. 특히 내무대신의 경우 사이고 주도(1891년 6월 1일 사임), 시나가와 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를 거쳐 마쓰카타 마사요시 총리가 잠시 겸임했다가 고노 도가마로 이어지는 등 잦은 교체가 있었다. 외무대신 또한 아오키 슈조(1891년 5월 29일 사임)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로 교체되었다.
그 외 육군대신은 오야마 이와오에서 다카시마 도모노스케로, 사법대신은 야마다 아키요시에서 다나카 후지마로를 거쳐 고노 도가마로, 문부대신은 요시카와 아키마사에서 오키 다카토로, 농상무대신은 무쓰 무네미쓰에서 고노 도가마를 거쳐 사노 쓰네타미로 바뀌는 등 대부분의 각료가 교체되었다.
내각서기관장은 스후 고헤이에서 히라야마 나리노부로, 법제국 장관은 이노우에 고와시에서 오자키 사부로로 교체되었다.
3.1. 국무대신
| 직책 | 대수 | 성명 | 출신 | 취임일 | 퇴임일 | 비고 | |
|---|---|---|---|---|---|---|---|
| 내각총리대신 | 4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사쓰마번 백작 | 1891년 5월 6일 | 1892년 8월 8일 | ||
| 외무대신 | 5 | 아오키 슈조 | 조슈번 자작 | 1891년 5월 6일 | 1891년 5월 29일 | ||
| 6 | 에노모토 다케아키 | 막신 자작 해군중장 | 1891년 5월 29일 | 1892년 8월 8일 | |||
| 내무대신 | 5 | 사이고 주도 | 사쓰마 번 백작 육군중장 | 1891년 5월 6일 | 1891년 6월 1일 | ||
| 6 | 시나가와 야지로 | 조슈 번 자작 | 1891년 6월 1일 | 1892년 3월 11일 | |||
| 7 | 소에지마 다네오미 | 비젠 번 백작 | 1892년 3월 11일 | 1892년 6월 8일 | |||
| 8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 사쓰마 번 백작 | 1892년 6월 8일 | 1892년 7월 14일 | 겸임 | ||||
| 9 | 고노 도가마 | 도사번 | 1892년 7월 14일 | 1892년 8월 8일 | 겸임 | ||
| 대장대신 | 4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 사쓰마 번 백작 | 1891년 5월 6일 | 1892년 8월 8일 | 겸임 | ||||
| 육군대신 | 4 | 오야마 이와오 | 사쓰마 번 백작 육군중장 | 1891년 5월 6일 | 1891년 5월 17일 | ||
| 5 |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 사쓰마 번 자작 | 1891년 5월 17일 | 1892년 8월 8일 | |||
| 해군대신 | 5 | 가바야마 스케노리 | 사쓰마 번 자작 해군중장 | 1891년 5월 6일 | 1892년 8월 8일 | ||
| 사법대신 | 4 | 야마다 아키요시 | 조슈 번 백작 육군중장 | 1891년 5월 6일 | 1891년 6월 1일 | ||
| 5 | 다나카 후지마로 | 오와리번 자작 | 1891년 6월 1일 | 1892년 6월 23일 | |||
| 6 | 고노 도가마 | 도사 번 | 1892년 6월 23일 | 1892년 8월 8일 | |||
| 문부대신 | 6 | 요시카와 아키마사 | 도쿠시마번 | 1891년 5월 6일 | 1892년 6월 1일 | ||
| 7 | 오키 다카토 | 비젠 번 백작 | 1892년 6월 1일 | 1892년 8월 8일 | |||
| 농상무대신 | 6 | 무쓰 무네미쓰 | 기슈번 | 1891년 5월 6일 | 1892년 3월 14일 | 중의원의원 겸임 | |
| 7 | 고노 도가마 | 도사 번 | 1892년 3월 14일 | 1892년 7월 14일 | |||
| 8 | 사노 쓰네타미 | 비젠 번 자작 | 1892년 7월 14일 | 1892년 8월 8일 | |||
| 체신대신 | 5 | 고토 쇼지로 | 도사 번 백작 | 1891년 5월 6일 | 1892년 8월 8일 | ||
| 반열 | - | 오키 다카토 | |||||
| 비젠 번 백작 | 1891년 5월 6일 | 1891년 6월 1일 | |||||
3.2. 기타
4. 주요 정책 및 사건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대장대신에서 총리로 승진하며 1891년 5월 6일 출범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은 초기에는 번벌 수뇌부 간의 전 각료 유임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오쓰 사건으로 인해 외무, 사법, 내무 대신 등이 사임하면서 해군, 농상무, 체신 대신을 제외한 모든 각료가 교체되었다. 마쓰카타를 제외하고는 원훈급 각료가 한 명도 없었고, 삿초 출신자가 절반을 밑돌아 "커튼 내각", "이류 내각", "흑막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내각 출범 초기 구성은 다음과 같다.
1891년 11월 21일 제2회 제국 의회에서는 민당이 정부 비용 절감을 요구하며 대립하였다. 가바야마 스케노리 해군대신의 "만용 연설"로 의회가 공전하자 12월 25일 중의원이 해산되었다.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과 시라네 센이치 차관 주도로 대규모 선거 간섭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제3회 제국 의회에서는 선거 간섭 책임 추궁이 이어졌고, 내각 내 불일치와 의회 대책 실패로 정권 운영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1892년 7월, 군부 대신과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 의장의 사표 제출로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4.1. 오쓰 사건 (1891년 5월 11일)
1891년 5월 11일,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니콜라이가 일본을 방문하던 중 오쓰 사건이 발생하여, 경호를 맡았던 순사 쓰다 산조에게 습격당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 사이고 주도 내무대신, 야마다 아키요시 사법대신 등이 사임하는 등 내각에 큰 타격을 주었다.
4.2. 제2회 제국 의회 (1891년 11월 21일 ~ 12월 25일)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은 제1회 제국 의회에서 예산 성립을 달성한 후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후 번벌 수뇌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으나, 이토는 의회 운영에 대한 부담으로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대장대신이었던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총리가 되어 내각이 출범하였다.
1891년 11월 21일에 열린 제2회 제국 의회에서 민당은 이전 내각이 약속했던 "정부 비용 절감" 공약 이행을 요구하며 정부와 다시 대립하였다. 정부는 별다른 매수 공작을 하지 않았고, 의회는 군함 제조비와 제강소 설립비 등을 삭감하였다. 이에 격분한 가바야마 스케노리 해군대신은 12월 22일 이른바 "만용 연설"을 통해 중의원을 자극했고, 의회는 공전을 거듭했다. 결국 마쓰카타는 12월 25일에 중의원 해산을 단행하였다.
4.3.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선거 간섭 (1892년 2월 15일)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1892년 2월 15일 투표)에서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과 시라네 센이치 내무차관 주도로 대규모 선거 간섭이 자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민당 지지자들에 대한 폭력, 매수, 협박 등이 발생하여 사망자 25명, 부상자 388명이 발생하였다. 무쓰 무네미쓰 농상무대신은 이에 항의하여 3월 14일에 사임하였고, 시나가와 내무대신도 3월 11일에 사임하였다. 시나가와는 이후 친정부 의원들을 결집하여 국민협회를 결성하였다.
4.4. 제3회 제국 의회 (1892년 5월 2일 ~)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1892년 2월 15일 투표)에서 벌어진 정부의 선거 간섭을 규탄하며, 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 친정부 성향이어야 할 귀족원조차도 마쓰카타 내각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무성 내에서는 선거 간섭 책임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여, 소에지마 다네오미 내무대신이 사임하는 등 내각은 붕괴 위기에 몰렸다.
5. 평가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은 잦은 개각과 의회와의 갈등, 특히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의 대규모 선거 간섭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각은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 인물들이 주도했다. 이러한 번벌 중심의 정치는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잦은 개각은 내각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며, 이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이 주도한 선거 간섭은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를 방해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훗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