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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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령 실론은 1796년부터 1948년까지 존재했던 영국의 식민지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지배를 거쳐 영국은 1796년 네덜란드령 실론을 점령하고, 1815년 캔디 왕국을 병합하여 스리랑카섬 전체를 지배했다. 영국은 홍차 생산을 시작하고 타밀족을 이주시키는 등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군에 대항하는 기지 역할을 했다. 독립 운동을 거쳐 1948년 영국 연방의 자치령 실론으로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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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실론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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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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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영국령 실론 (영어) (싱할라어) (타밀어) |
통칭 | 세일론 |
시대 | 영국령 세일론 시대 |
지위 | 회사 통치 (1795/96 – 1798년 10월 12일) 회사 및 왕실의 이중 통제 (1798년 10월 12일 – 1802년 1월 1일) 영국의 왕령 식민지 (1802년 3월 25일 – 1948년 2월 4일) |
제국 | 대영 제국 |
정치 체제 | 군주제 |
시작 연도 | 1796년 |
종료 연도 | 1948년 |
시작 사건 | 네덜란드령 세일론 점령 |
시작 날짜 | 3월 5일 |
종료 사건 | 독립 |
종료 날짜 | 2월 4일 |
이전 국가 | 캔디 왕국 네덜란드령 실론 반니 지도자령 |
다음 국가 | 세일론 자치령 |
수도 | 콜롬보 |
국가 | 하느님, 국왕을 지켜주소서 (1796–1837; 1901–1948), 하느님, 여왕을 지켜주소서 (1837–1901) |
공용어 | 영어 (공식어) 싱할라어 타밀어 |
통화 | 세일론 릭스달러 (1815–28) 영국 파운드 (1825–71) 세일론 루피 (1872–1948) |
정치 | |
군주 | 조지 3세 (1815–1820) 조지 4세 (1820–1830) 윌리엄 4세 (1830–1837) 빅토리아 여왕 (1837–1901) 에드워드 7세 (1901–1910) 조지 5세 (1910–1936) 에드워드 8세 (1936) 조지 6세 (1936–1948) |
총독 | 프레더릭 노스 (1798–1805) 헨리 몽크-메이슨 무어 (1944–1948) |
총리 | 돈 스테픈 세나나야케 (1947–1948) |
입법부 | 세일론 입법 위원회 (1833–1931) 세일론 국가평의회 (1931–47) 세일론 의회 (1947–48) |
인구 통계 | |
1827년 | 889,584 |
1901년 | 3,565,954 |
1946년 | 면적: 65,610 km² 인구: 6,657,339명 |
역사적 사건 | |
이중 행정 체제 설립 | 1798년 10월 12일 |
왕령 식민지 선포 | 1802년 3월 25일 |
캔디 조약 체결 | 1815년 3월 2일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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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스리랑카 |
2. 역사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네덜란드 본국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점령되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자, 영국은 해외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식민지를 공격했다. 네덜란드령 실론도 그 대상이 되어, 1796년 모든 거점이 함락되었고, 1802년 아미앵 조약과 1815년 빈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영국에 할양되었다(실론 정복).
시기 | 식민 형태 | 지역 |
---|---|---|
1796년 - 1798년 10월 12일 | 스리랑카섬 해안의 옛 네덜란드령 실론 지역 | |
1798년 10월 12일 - 1802년 1월 1일 | 스리랑카섬 해안의 식민 지역 | |
1802년 1월 1일 - 1815년 3월 2일 | -- 왕령식민지 | 스리랑카섬 해안의 식민 지역 |
1815년 3월 2일 - 1948년 2월 4일 | 스리랑카섬 전역 |
영국은 내륙의 캔디 왕국 정복을 시도하여 1815년 캔디 조약으로 보호령으로 삼았다. 1817년 우바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 후 캔디 왕국을 병합하여 스리랑카 전역에 대한 지배를 확립했다.
영국 통치하에 내륙부에 대한 측량과 도로, 철도 건설이 이루어져 농작물 수송과 군대 이동이 효율화되었다.[33] 홍차 생산(실론티)이 시작되었고, 인도 타밀인이 농장 노동력으로 유입되었다. 영국은 소수파인 타밀인을 우대하는 분할 통치를 시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 의식이 싹텄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8년 영국 연방의 자치령 실론으로 독립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왕국이 멸망한 뒤에도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였다. 가장 큰 규모의 봉기는 1817년 우바 대봉기였다. 영국은 우바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봉기를 초토화 작전으로 진압하였다.[37][38][39][40][41] 이 와중에 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되었다. 영국은 15세에서 60세 사이의 우바 남성을 닥치는 대로 처형하였다.[42][43]
1864년 스리랑카 철도가 도입된 이후[46] 식민 당국은 커피와 차 플랜테이션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차 재배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스리랑카산 홍차는 1873년 실론티라는 이름으로 런던에서 거래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론티는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홍차 브랜드 가운데 하나이다.[47]
스리랑카 독립 운동을 통해 더 큰 자치를 요구하기 위해 실론 국민회의(CNC)가 설립되었으나, 민족과 카스트 계층에 따라 분열되었다. 독립 운동은 "헌법주의자"와 급진적인 그룹으로 나뉘었다. 헌법주의자들은 실론의 지위를 점진적으로 수정하여 독립을 추구했고, 급진적인 그룹들은 자와할랄 네루 등 인도 지도자들의 실론 방문을 계기로 인도의 사례를 따라 완전한 독립을 외쳤다. 1935년 청년 연맹에서 성장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란카 사마 사마자당(LSSP)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솔버리 위원회는 1930년대 헌법 개혁을 위한 움직임의 가장 중요한 결과였다. 타밀 지도자 G. G. 폰남발람은 "실론인 정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자랑스러운 드라비다인"이라 선언하며 타밀인을 위한 독립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
D. S. 세나나야케 정부와 전시 영국 행정부의 긴밀한 협력은 마운트배튼 경의 지지를 얻게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리랑카는 일본군에 대항하는 영국의 최전선 기지였다.
D. S. 세나나야케(초대 총리)가 이끄는 헌법주의자들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2. 1. 배경
스리랑카섬에 최초로 침입한 유럽 제국은 포르투갈이었다. 1505년 포르투갈은 콜롬보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은 스리랑카 주요 항구를 점령하고 포르투갈령 실론으로 삼았다.[34]15세기 초 여러 나라로 분할되어 있던 스리랑카 내륙의 국가들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캔디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포르투갈령 실론과 캔디 왕국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으며 한때 포르투갈은 캔디의 수도를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포르투갈의 공격에 위기를 맞은 캔디는 당시 동남아시아의 여러 제도에서 식민 제국을 확장하고 있던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포르투갈을 축출하기 시작하였다. 네덜란드는 1640년 갈을 점령하여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1664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완전히 축출하고 네덜란드령 실론을 식민 지배하였고, 이후 캔디와는 전쟁과 평화를 오갔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지자 동남아시아에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이를 틈타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스리랑카의 식민지 역시 영국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당시 네덜란드령 실론은 계피 무역 독점으로 막대한 부를 생산하고 있었다. 영국은 네덜란드령 실론의 점령으로 당시 300000GBP에 달하는 계피를 독점하게 되었다.[35]
1669년, 영국 해군 선장 로버트 녹스(Robert Knox)는 우연히 실론(Ceylon)에 상륙하여 캔디(Kandy) 왕에게 붙잡혔다. 그는 19년 후에 탈출하여 자신의 체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영국인들의 관심을 섬으로 돌리는 데 기여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 본국이 프랑스에 점령당하고 그 지배하에 들어가자, 영국은 해외의 네덜란드 식민지를 공격했다. 스리랑카에 있던 네덜란드령 실론도 그 대상이 되어, 1796년에는 모든 거점이 함락되었고, 1802년의 아미앵 조약 및 1815년의 빈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영국에 할양되었다(실론 정복).
이어 영국은 내륙에 남은 캔디 왕국의 정복을 꾀하여, 1815년의 캔디 조약으로 이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1817년의 우바 지방에서 반란 진압 후 캔디 왕국은 영국에 병합되었고, 여기서 스리랑카 전토에 걸친 영국 지배가 확립되었다.
2. 2. 캔디 합병
네덜란드령 실론을 장악한 영국령 실론은 스리랑카 전역으로 식민 지배를 확대하고자 캔디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캔디는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1802년 수도가 함락되었고, 수도 함락 뒤에도 유격전을 계속하며 저항하던 마지막 국왕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는 1815년 영국에 사로잡혔다.[36]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는 인도로 보내져 평생 연금 상태로 살았다. 마지막 국왕이 퇴위된 뒤 영국은 캔디 협약을 통하여 캔디 왕국을 영국령 실론에 합병하였다. 이로써 수백 년 지속되었던 불교 왕국은 사라지고 영국이 스리랑카섬 전체를 왕령식민지로 삼게 되었다.
1803년,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실론 지역을 확보한 직후, 캔디 왕국을 보호령으로 만들어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 제안은 처음에는 거절되었으나, 1815년 제2차 캔디 전쟁에서 캔디가 함락되면서 실론의 독립은 종식되었다.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헤 왕의 통치는 그의 수장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남인도 혈통의 왕은 강력한 수장들과 대립했고, 백성들 사이에서 그들의 인기를 억누르기 위해 잔혹한 조치를 취했다. 신할라 수장들은 성공적인 쿠데타를 일으켜 영국 왕실을 새로운 군주로 받아들였다. 1815년에 체결된 캔디 조약은 캔디 사람들이 영국의 보호령으로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규정했다. 불교는 영국 왕실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통치 시대와 같이 기독교가 주민들에게 강요되지 않을 것이었다.
2. 3. 영국 통치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지자 동남아시아에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이를 틈타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스리랑카의 식민지 역시 영국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당시 네덜란드령 실론은 계피 무역 독점으로 막대한 부를 생산하고 있었다. 영국은 네덜란드령 실론의 점령으로 당시 300000GBP에 달하는 계피를 독점하게 되었다.[35]1815년 3월 2일부터 1948년 2월 4일까지 스리랑카섬 전역은 영국의 왕령식민지가 되었다.
네덜란드령 실론이 장악하고 있던 해안 지대를 지배하게 된 영국령 실론은 스리랑카 전역으로 식민 지배를 확대하고자 캔디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캔디는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1802년 수도가 함락되었고 수도 함락 뒤에도 유격전을 계속하며 저항하던 마지막 국왕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는 1815년 영국에 사로잡혔다.[36]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는 인도로 보내져 평생 연금 상태로 살았다. 마지막 국왕이 퇴위된 뒤 영국은 캔디 협약을 통하여 캔디 왕국을 영국령 실론에 합병하였다. 이로서 수백 년 지속 되었던 불교 왕국은 사라지고 영국이 스리랑카섬 전체를 왕령식민지로 삼게 되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왕국이 멸망한 뒤에도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였다. 크고 작은 봉기가 있었지만 가장 큰 규모의 봉기는 1817년 우바 대봉기였다. 영국은 우바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봉기를 초토화 작전으로 진압하였다.[37][38][39][40][41] 이 와중에 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되었다. 영국은 15세에서 60세 사이의 우바 남성을 닥치는 대로 처형하였다.[42][43]
영국은 기존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확보하고 있었던 해안 항구 지역을 벗어나 내륙 산간 지역으로 플랜테이션 농지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내륙 산간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이 확고하게 굳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더 지나야 하였고 플랜테이션 농지 개발은 군대의 투입과 함께 이루어져야만 하였다.[44]
당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앞 다투어 동남아시아에 향신료 플랜테이션을 설치하고 무역을 독점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다. 영국령 실론 초창기 스리랑카섬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대규모 계피 산지였다. 계피 산지로서 스리랑카섬의 명성은 18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45]
1864년 스리랑카 철도가 도입된 이후[46] 식민 당국은 커피와 차 플랜테이션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차 재배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스리랑카산 홍차는 1873년 실론티라는 이름으로 런던에서 거래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론티는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홍차 브랜드 가운데 하나이다.[47]
1796년에서 1946년 사이 영국령 실론은 왕령식민지였다. 왕령식민지에서 영국의 군주는 국가 원수였지만 실제 통치는 임명된 총독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1년 영국령 실론은 실질적 권한을 자치 정부에 넘기고 총독은 명예직에 불과한 영연방 내의 자치정부로 전환되었고, 1948년 스리랑카로 완전히 독립하였다.
2. 4. 독립 운동과 독립
스리랑카 독립 운동을 통해 더 큰 자치를 요구하기 위해 실론 국민회의(CNC)가 설립되었으나, 민족과 카스트 계층에 따라 분열되었다. 페라데니아 대학교 역사학자 K. M. 드 실바 교수는 실론 타밀인들이 소수 민족 지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 CNC 와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21] CNC는 독립이나 "스와라지"를 추구하지 않았다.독립 운동은 "헌법주의자"와 급진적인 그룹으로 나뉘었다. 헌법주의자들은 실론의 지위를 점진적으로 수정하여 독립을 추구했고, 도너모어 위원회 개혁(1931년)과 솔버리 위원회의 권고를 이끌어냈다. 이는 D. S. 세나나야케가 이끄는 장관회의의 1944년 헌법 초안을 옹호했다.[22]
콜롬보 청년 연맹, 구나싱헤의 노동 운동, 자프나 청년회의와 관련된 급진적인 그룹들은 1926년 자와할랄 네루, 사로지니 나이두 등 인도 지도자들의 실론 방문을 계기로 인도의 사례를 따라 스와라지(완전한 독립)를 외쳤다.[22] 1935년 청년 연맹에서 성장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란카 사마 사마자당(LSSP)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23] N.M. 페레라, 필립 구나워드나 등은 콜빈 R. 드 실바, 레슬리 구네워드나, 비비엔 구네워드나, 에드먼드 사마락코디, K. 나테사 아이예르의 도움을 받아 싱할라어와 타밀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 그룹의 운동은 영국 행정부의 심각한 의심을 받았으며, 영국 라즈에 대항하여 대중을 선동하려는 시도는 유혈 사태와 독립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1950년대에 공개된 영국 정부 문서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식민지청 정책 입안자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솔버리 위원회는 1930년대 헌법 개혁을 위한 움직임의 가장 중요한 결과였다. 타밀 지도자 G. G. 폰남발람은 "실론인 정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자랑스러운 드라비다인"이라 선언하며 타밀인을 위한 독립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24] 폰남발람은 보통선거제에 반대하고 카스트 제도를 지지했으며, 타밀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의회에서 "50-50"(균형 대표)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영국이 "전통적인 타밀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불교 사원 재산법에 따라 불교도들을 편애했다고 비난했다. 솔버리 위원회는 폰남발람의 주장을 거부하고, 그들의 용납할 수 없는 종파적 성격을 지적했다. 싱할라 작가들은 자프나-콜롬보 철도 개통 후 남부 도시 중심지로 타밀인의 대규모 이주를 지적했다. 세나나야케 등은 공식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솔버리 위원회에 로비를 벌였고, 비공식 제출에는 1944년 헌법 초안이 포함되었다.[22]
D. S. 세나나야케 정부와 전시 영국 행정부의 긴밀한 협력은 마운트배튼 경의 지지를 얻게 했다. 그의 보고서와 실론의 독립을 지지하는 식민지청에 보낸 전보는 역사가들이 세나나야케 정부가 스리랑카의 독립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리랑카는 일본군에 대항하는 영국의 최전선 기지였다. 스리랑카 내 반전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주도했다. 독립을 주장하는 LSSP 지도자들은 체포되었다. 1942년 4월 5일, 일본 해군은 콜롬보를 폭격했고, 이는 콜롬보 상업 부문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인도 상인들의 대거 이주를 가져왔다.[22]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인도로 망명하여 인도의 독립 투쟁에 참여했다.
세나나야케 정부는 전쟁을 이용하여 지배 엘리트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스리랑카는 전쟁에서 영국 제국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마운트배튼 경은 콜롬보를 동부 전선의 본부로 사용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있던 스리랑카인들은 인도 국민군의 '란카 연대'를 구성했다.
D. S. 세나나야케(초대 총리)가 이끄는 헌법주의자들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솔버리 헌법은 본질적으로 세나나야케 장관회의가 1944년에 초안을 작성한 것이었다. 자치령 지위와 독립 자체에 대한 약속은 식민지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8년 전년에 독립한 인도와 파키스탄에 이어, 영국 연방의 자치령(실질적인 독립국) 실론으로서 독립했다.
3. 인구 통계
스리랑카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싱할라족이지만 오래 전부터 타밀족이 북부 해안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또한 해안에는 몇 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식민 지역에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국은 스리랑카섬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만들면서 남인도에서 다수의 타밀족을 스리랑카로 이주시켰다. 이 때문에 타밀족은 스리랑카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왔던 스리랑카 타밀족과 영국 식민지 시기 남인도에서 이주해 온 스리랑카의 인도계 타밀족의 두 부류가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니고 살게 되었다. 스리랑카 타밀족은 힌두교의 시바파이면서 불교 문화를 수용한 반면 인도계 타밀족은 무슬림이 많았다.[48] 19세기 중반 커피녹병이 광범위하게 번져 커피 플랜테이션이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영국은 작물을 커피에서 차와 고무로 바꾸었다.
영국령 실론의 인구 조사는 1871년 시작되었고 매 십년 마다 실시되었다. 영국은 처음엔 스리랑카 타밀족과 인도계 타밀족을 구분하지 않다가 1911년 조사부터 별도의 항목으로 구분하였다. 1921년 당시 약 410만 명의 인구 가운데 스리랑카 타밀족은 12.8%, 인도계 타밀족은 12.9%였다. 무슬림이었던 인도계 타밀족은 스리랑카 문화에 융화되지 못하였고 결국 독립 후인 1970년대에 절반이 넘는 수가 다시 인도로 귀환하였다.[50]
연도 | 1871년 | 1881년 | 1891년 | 1901년 | 1911년 | 1921년 | 1931년 | 1946년 |
---|---|---|---|---|---|---|---|---|
인구 | 2,400,380 | 2,759,700 | 3,007,800 | 3,566,000 | 4,106,400 | 4,498,600 | 5,306,000 | 6,657,300 |
188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총 인구는 280만 명으로, 싱할라인 180만 명, 실론 및 인도 타밀인 68만 7,000명, 무어인 18만 5,000명, 유럽인 4,800명, 버거 및 유라시아인 1만 7,900명, 말레이인 8,900명, 베다인 2,200명, 기타 7,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0]
1911년 조사에서 인도 타밀인은 전체 인구의 12.9%를, 스리랑카 타밀인은 12.8%를 차지했다. 1921년에는 각각 13.4%와 11.5%, 1931년에는 15.2%와 11.3%, 1946년에는 11.7%와 11.0%였다. 실론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인도 타밀인의 수가 스리랑카 타밀인보다 많았지만, 1971년과 1981년 사이에 인도 타밀인 인구의 50% 이상이 인도 시민으로서 인도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많은 인도 타밀인들은 스리랑카 시민권을 부여받고 스리랑카 타밀인으로 자신을 선언했다.[31]
4. 정치
1796년부터 1948년까지 실론은 영국의 왕관 식민지였다. 영국의 군주가 국가 원수였지만, 실제로는 런던의 영국 정부의 지시를 받는 식민지 총독이 식민지에서 군주의 직무를 수행했다.
자치와 독립을 향해 나아가면서, 도너모어 위원회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여러 공동체 간의 차이를 허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 중 하나인 도너모어 헌법을 권고했다. 이는 솔버리 위원회의 제안으로 대체되었고, 그 결과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실론 자치령이 되었으며, 그 후 자유롭고 주권이 있는 독립 공화국인 스리랑카가 수립되었다.[3]
5. 군사
실론 국방군은 1881년 민병대로 시작하여 1910년 정규군이 되었으며, 영국군의 실론 사령부 관할 아래 있었다. 이들은 제2차 보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독립 후 스리랑카군으로 재편되었다.[51]
실론 방위군(CDF)은 1881년 실론 자원군으로 창설되어 영국령 실론의 군사 예비대로서 역할을 했으며, 1910년에는 실론 방위군으로 성장하여 실론 방위를 책임지는 정규군이 되었다. CDF는 동원될 경우 실론 주둔 영국 육군의 실론 주둔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동원은 실론 총독의 명령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실론 방위군은 보어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활동했다. 이는 실론 육군의 전신이다.[32]
트린코말리 항은 1948년까지 영국 왕립 해군의 중요한 전략 기지였으며, 주로 인도양의 해상 항로를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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