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비도
1. 개요
조르주 비도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89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하고 역사 교사로 재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으며, 샤를 드 골 임시 정부에서 외무 장관을 역임했다. 제4공화국 시기에는 총리 및 여러 차례 외무 장관을 지냈으며, 인민 공화 운동(MRP)을 창설하고 이끌었다. 알제리 독립 문제와 관련하여 드골의 정책에 반대하며 극우 단체인 비밀 군사 조직(OAS)에 가담했다. 이후 망명 생활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198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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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이름 | Georges-Augustin Bidault |
|---|---|
| 출생일 | 1899년 10월 5일 |
| 출생지 | 프랑스 제3공화국 알리에현 물랭 |
| 사망일 | 1983년 1월 27일 |
| 사망지 | 캉보레뱅, 프랑스 |
| 국적 | 프랑스인 |
| 소속 정당 | 국민민주당 인민공화파(인민공화운동) 등 |
| 배우자 | 쉬잔 보렐 |
| 모교 | 소르본 대학교 |
| 직위 |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의장 |
|---|---|
| 임기 시작 | 1946년 6월 24일 |
| 임기 종료 | 1946년 12월 16일 |
| 총리 | 자신 |
| 이전 | 펠릭스 구앵 |
| 이후 | 뱅상 오리올 (프랑스 대통령) 레옹 블룸 (프랑스 총리) |
| 직위 | 프랑스 총리 |
| 임기 시작 | 1949년 10월 28일 |
| 임기 종료 | 1950년 7월 2일 |
| 대통령 | 뱅상 오리올 |
| 이전 | 앙리 Queuille |
| 이후 | 앙리 Queuille |
| 임기 시작 | 1946년 6월 24일 |
| 임기 종료 | 1946년 12월 16일 |
| 대통령 | 자신 |
| 이전 | 펠릭스 구앵 |
| 이후 | 레옹 블룸 |
| 직위 | |
| 내각 | 제1차 샤를 드 골 내각 제2차 샤를 드 골 내각 펠릭스 구앵 내각 제1차 조르주 비도 내각 제1차 폴 라마디에 내각 제2차 폴 라마디에 내각 제1차 로베르 쉬망 내각 르네 마예르 내각 제1차 조제프 라니엘 내각 제2차 조제프 라니엘 내각 |
| 임기 시작 | 1944년 9월 10일 – 1946년 12월 16일 1947년 1월 22일 – 1948년 7월 26일 1953년 1월 8일 – 1954년 6월 19일 |
| 대통령 | 샤를 드 골 펠릭스 구앵 조르주 비도 레옹 블룸 뱅상 오리올 르네 코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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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국가원수 -
필리프 페탱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 대전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프랑스 정권 수반으로서 나치 독일과 협력한 행위로 인해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
프랑스의 국가원수 -
프랑수아 아라고
프랑수아 아라고는 파리 자오선 호 측정에 참여하고 빛의 파동 이론을 옹호한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정치인으로, 전자기 유도 현상 연구와 공교육 발전, 노예제 폐지에 기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이름이 여러 곳에 붙여졌다. -
레지스탕스 관련자 -
조르주 퐁피두
조르주 퐁피두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파리 현대화와 퐁피두 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영국을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시키는 등 외교 정책에도 기여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
레지스탕스 관련자 -
모리스 메를로퐁티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20세기 프랑스의 현상학자이자 철학자로, 신체성과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신-신체 이원론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여 현상학, 인지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983년 사망 -
펠릭스 블로흐
펠릭스 블로흐는 고체 물리학과 핵자기 공명 분야에 기여하고, 블로흐 파를 이용한 고체 내 전자 이론을 정립했으며, 핵자기 공명 현상 연구를 통해 MRI 기술 개발의 기초를 마련하여 195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1983년 사망 -
함병춘
함병춘은 법학자, 외교관, 정치인으로서 연세대학교 법학과 교수, 박정희 정부의 외교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및 주미 한국 대사, 전두환 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하며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했으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조르주 비도는 1899년 10월 5일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 알리에주의 물랭에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1932년에는 프랑스 가톨릭 청년 연합과 함께 좌익 성향의 반파시스트 신문인 로브(L'Aube프랑스어) 창간에 참여했으며, 가톨릭계 신문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는 로브에 칼럼을 기고했으며, 특히 1938년 뮌헨 협정에 대해서는 협정에 반대하는 사설을 쓰는 등 명확한 반파시스트 입장을 보였다.
3. 언론 활동 및 반파시즘 운동
1932년 가톨릭 계열의 좌익 성향 반파시즘 신문인 L'Aube프랑스어 창간에 기여했으며, 이후 해당 신문의 기자가 되어 칼럼을 기고했다. 특히 1938년 뮌헨 협정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사설을 집필하며 명확한 반파시즘 입장을 드러냈다.
4. 제2차 세계 대전과 레지스탕스 활동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프랑스 공방전 중 나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잠시 투옥되었다가 1941년 7월 석방되었다. 석방 후 리옹에 있는 파르크 고등학교( Lycée du Parc프랑스어 )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면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리베르테'(Liberté프랑스어) 그룹에 가입했으며, 이 그룹은 나중에 '콩바'(Combat프랑스어) 그룹과 합병되었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 Conseil National de la Résistance프랑스어, CNR)의 장 물랭 위원장은 비도를 주목하여 지하 출판 및 '콩바' 비밀 신문 편집을 맡겼다. 레지스탕스 활동 중 개인 비서 로르 디볼트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페인 프랑코 정권에 의해 다른 유명 인사들과 함께 미란다 데 에브로의 수용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비도는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CNR) 결성에 참여했으며, 1943년 게슈타포가 물랭을 체포하여 고문 끝에 살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의장이 되었다. 1944년에는 전후 사회 개혁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을 담은 레지스탕스 헌장을 작성했다. 파리 해방 이후 열린 승리 퍼레이드에서는 레지스탕스를 대표하여 참가했다.
5. 제4공화국 시절
1958년 4월, 비도는 다시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내각 구성에는 실패했다. 이후 보수적인 성향의 기독교 민주 운동 결성을 도왔다. 알제리 독립 전쟁 발발 후에는 샤를 드 골의 대통령직 복귀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드골 정부가 알제리의 독립을 추진하자 비도는 이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1961년에는 프랑스령 알제리 유지를 주장하는 '프랑스 알제리 집결 사회'의 집행 위원회 의장이 되었고, 극우 테러 조직인 비밀 군사 조직(OAS) 내부에 자신만의 '국민 저항 위원회'를 설립하며 드골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결국 1962년 6월, 그는 국가에 대한 음모 혐의로 기소되어 의원 면책 특권을 박탈당했고, 브라질로 망명했다. 1967년 벨기에로 거처를 옮겼다가, 1968년 사면 조치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도는 자신의 정치 회고록에서 OAS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며, 조직의 활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1972년 10월, 극우 정당인 국민 전선이 창설될 때 잠시 참여했으나, 며칠 만에 탈퇴했다.
비도는 1983년 1월 캉보레뱅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5.1. 임시 정부 참여 및 외무 장관 재직
파리 해방 이후 그는 승리 퍼레이드에서 레지스탕스를 대표했다. 샤를 드 골은 1944년 8월 25일 임시 정부의 외무 장관으로 그를 임명했다. 비도는 레지스탕스 참가자 중 진보적 온건 좌익을 결집하여 인민 공화 운동 (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프랑스어)을 창설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외무 장관으로서 비도는 드골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자주 외교 노선을 견지할 것을 주장했지만, 현실의 국제 정치를 감안하여 미국과의 협력 관계도 유지하려 했다. 그는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유엔을 창설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프랑스 대표단을 이끌었다. 회의에서 프랑스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5.2. 외교 정책 및 국제 관계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샤를 드골은 8월 25일 비도를 임시 정부의 외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유엔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프랑스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이 회의에서 프랑스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도는 드골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자주 외교 노선을 견지할 것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국제 정치 현실을 고려하여 미국과의 협력 관계 유지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외무 장관으로서 비도는 서독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며, 프랑스가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에 가입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프랑스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드골 대통령이 알제리 독립을 추진하자,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의 독립에 철저히 반대했던 비도는 알제리 독립 반대파에 동조하며 반 드골 노선을 명확히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우 단체인 비밀 군사 조직(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 OAS)에 가담하기도 했다.
5.3. 인민 공화 운동(MRP) 활동
비도는 레지스탕스 운동 참가자 중 진보적 성향의 온건 좌익 세력을 모아 인민 공화파(인민 공화 운동(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프랑스어, MRP))를 창설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5.4. 디엔비엔푸 전투와 외무 장관 재직
파리 해방 이후 그는 승리 퍼레이드에서 레지스탕스를 대표했다. 샤를 드 골은 1944년 8월 25일 임시 정부의 외무 장관으로 그를 임명했다. 그는 인민 공화 운동 (MRP)의 창립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그는 유엔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프랑스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프랑스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6. 제5공화국 시절과 알제리 문제
1958년 4월, 비도는 다시 총리가 될 기회를 얻었으나 내각 구성에는 실패했다. 대신 보수적인 단체인 기독교 민주 운동의 결성을 지원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이 시작된 후 초기에는 드골의 대통령직 복귀를 지지했다.
그러나 드골을 대통령으로 하는 프랑스 제5공화국이 발족하고, 알제리 문제에 관해 드골이 알제리 독립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자, 알제리 현상 유지를 강력히 주장했던 비도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61년에는 프랑스 알제리 집결 사회의 집행 위원회 의장이 되어 드골의 알제리 독립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알제리의 프랑스 잔류를 주장하는 극우 단체 비밀 군사 조직(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 OAS)에 가담했으며, 이 조직 내에 자신의 국민 저항 위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결국 1962년 6월, 비도는 국가에 대한 음모 혐의로 기소되었고 의원 면책 특권마저 박탈당했다. 체포를 피해 그는 브라질로 망명길에 올랐다. 1967년에는 벨기에로 이주했으며, 1968년 사면 조치를 받은 후에야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은둔 생활을 보냈다.
비도는 훗날 자신의 정치 회고록에서 자신은 OAS와 결코 관련이 없으며, 그들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정확한 정보도 제공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7. 은퇴 이후
1962년 6월, 국가에 대한 음모 혐의로 기소되어 의원 면책 특권을 박탈당한 비도는 체포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다. 1967년에는 벨기에로 이주했고, 1968년 사면을 받은 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비도는 자신의 정치 회고록에서 자신은 OAS와 결코 관련이 없으며, 그들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정확한 정보도 제공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국민 전선이 누보 오르드르 회원들에 의해 1972년 10월에 창설되었을 때, 그는 잠시 참여했지만 며칠 후 조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은둔 생활을 보낸 비도는 1983년 1월 캉보레뱅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8. 역대 정부
조르주 비도는 프랑스 임시정부 의장 및 프랑스 제4공화국 총리로서 총 세 차례 정부를 이끌었다. 각 정부의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 제1차 정부: 1946년 6월 24일부터 12월 16일까지 존속한 프랑스 임시정부 내각이다.
* 제2차 정부: 1949년 10월 28일부터 1950년 2월 7일까지 이어진 프랑스 제4공화국 내각이다.
* 제3차 정부: 1950년 2월 7일부터 7월 2일까지 활동한 프랑스 제4공화국 내각이다.
8.1. 제1차 정부 (1946년 6월 24일 –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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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책 | 이름 |
|---|---|
| 임시 정부 의장 겸 외무부 장관 | 조르주 비도 |
| 부총리 | 모리스 토레즈 |
|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 | 펠릭스 구앵 |
| 병기부 장관 | 샤를 티용 |
| 내무부 장관 | 에두아르 드프뢰 |
| 재무부 장관 | 로베르 쉬망 |
| 국민 경제부 장관 | 프랑수아 드 멍통 |
| 산업 생산부 장관 | 마르셀 폴 |
| 노동 사회 보장부 장관 | 앙브루아즈 크로이자 |
| 법무부 장관 | 피에르-앙리 테이트겐 |
| 국민 교육부 장관 | 마르셀 에드몽 네젤렌 |
| 농업부 장관 | 프랑수아 탕기-프리장 |
| 보급부 장관 | 이브 파르주 |
| 해외 프랑스부 장관 | 마리우스 무테 |
| 공공 사업 및 운송부 장관 | 쥘 모크 |
| 인구부 장관 | 로베르 프리장 |
| 재건 및 도시 계획부 장관 | 프랑수아 빌루 |
| 우편부 장관 | 장 르투르노 |
| 국무부 장관 | 알렉상드르 바렌 |
| 국무부 장관 | 프랑시스크 게 |
8.2. 제2차 정부 (1949년 10월 28일 – 1950년 2월 7일)
변동 사항:
* 1949년 12월 2일 - 가브리엘 발레가 농업부 장관으로 피에르 플랭랭의 뒤를 이음.
8.3. 제3차 정부 (1950년 2월 7일 –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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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책 | 이름 |
|---|---|
| 의장 | 조르주 비도 |
| 부통령 겸 내무부 장관 | 앙리 케유 |
| 외무부 장관 | 로베르 슈만 |
| 국방부 장관 | 르네 플레뱅 |
| 재무 및 경제부 장관 | 모리스 페셰 |
| 상공부 장관 | 장-마리 루벨 |
| 노동 및 사회보장부 장관 | 폴 바콩 |
| 법무부 장관 | 르네 마이에 |
| 국민교육부 장관 | 이봉 델보 |
| 퇴역 군인 및 전쟁 피해자부 장관 | 루이 자키노 |
| 농업부 장관 | 가브리엘 발레 |
| 해외 프랑스부 장관 | 장 르투르노 |
| 공공사업, 운송 및 관광부 장관 | 자크 샤스텔랭 |
| 공중 보건 및 인구부 장관 | 피에르 슈네이테르 |
| 재건 및 도시 계획부 장관 | 외젠 클로드-프티 |
| 우체국 장관 | 샤를 브륀 |
| 국무 장관 | 피에르-앙리 테이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