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S. 패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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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S. 패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미국의 장군으로, 뛰어난 기갑 부대 운용 능력을 보여주며 전격전 개념을 완성했다. 그는 강렬한 리더십과 공격적인 전술로 명성을 얻었지만, 흑인 병사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 병사 구타 사건, 나치 협력자 옹호 등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패튼은 시칠리아와 서부 전선에서 제7군과 제3군을 지휘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종전 후 군정 총독으로서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해임되었다. 그는 독특한 군장과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군사 전략과 리더십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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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S. 패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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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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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Bandito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85년 11월 11일 |
출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게이브리얼 |
사망일 | 1945년 12월 21일 |
사망지 | 연합군 점령하 독일 하이델베르크 |
묻힌 곳 | 룩셈부르크 미국 군인 묘지 |
자녀 | Beatrice Smith Ruth Ellen 조지 패튼 4세 |
친척 | 조지 스미스 패튼 2세 (아버지) 조지 스미스 패튼 1세 (할아버지) 벤저민 데이비스 윌슨 (외할아버지) 존 K. 워터스 (사위) 윌리 (개) |
군 복무 | |
소속 | 미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9년 – 1945년 |
최종 계급 | [[파일:US-O10 insignia.svg|100px]] 미국 육군 대장 |
군번 | 0-2605 |
병과 | 기병과 |
지휘 | 제15군 제3군 제7군 제2군단 사막 훈련 센터 제1기갑군단 제2기갑사단 제2기갑여단 제3기병연대 제5기병연대 제3기갑기병연대 3대대 304 전차여단 |
참전 전투 | 국경 전쟁 판초 비야 원정 제1차 세계 대전 생미엘 전역 뫼즈-아르곤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지중해 전역 토치 작전 북아프리카 전역 포트 료테 전투 엘 게타르 전투 튀니지 전역 시칠리아 침공 젤라 전투 (1943년) 이탈리아 전역 서부 전선 프랑스 침공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팔레즈 포위전 샹부아 전투 라인란트 전역 로렌 전역 메츠 전투 아라코트 전투 벌지 전투 바스토뉴 포위전 독일 침공 바움 특수임무부대 |
상훈 | 수훈 십자장 (2회) 육군 공로 훈장 (3회) 은성훈장 (2회) 레지옹 오브 메리트 브론즈 스타 메달 퍼플 하트 전체 훈장 목록 |
학력 | |
출신 학교 | 미국 육군사관학교 버지니아 군사학교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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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 1. 유년기와 청년기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는 1885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산 가브리엘에서 조지 S. 패튼 시니어와 그의 아내 루스 윌슨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집안은 스코틀랜드계열로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다. 그의 증조모는 군사적 배경이 풍부한 글래모건의 많은 웨일스 영주들의 후손인 귀족적인 웨일스 가문 출신이었다.[11][12][13] 패튼은 자신이 과거에 군인으로 살았다고 믿었고 자신의 조상들과의 신비로운 관계에 자부심을 느꼈다.[15]그의 할아버지 조지 S. 패튼 시니어는 남북 전쟁 당시 남군 기병대의 대령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윈체스터 전투에서 사망했다.[16] 패튼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장하였고, 유복하게 지냈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에서 싸운 휴 머서 준장의 혈통을 이어받아, 미국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군인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패튼 본인도 이를 매우 의식했다.
패튼에게는 "니타"라는 애칭을 가진 여동생 앤이 있었다.[2]

어린 시절 패튼은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열렬한 독서가로 알려졌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어려움이 진단되지 않은 난독증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3] 그는 11세까지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그 후 6년 동안 파사데나에 있는 사립학교인 스티븐 커터 클라크에 입학했다.[4] 패튼은 지적인 소년으로 묘사되었으며 고전 군사사에 대한 폭넓은 독서를 했는데, 특히 한니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잔 다르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업적을 읽었다.[3] 그는 또한 헌신적인 승마를 즐겼다.[3]
패튼은 군대 이외의 다른 직업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다.[5] 17세의 나이에 그는 뉴욕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버지니아 군사학교 (VMI)를 선택했다.[5] 그는 1903년부터 1904년까지 학교에 다녔으며,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복 착용 및 외관 검사, 군사 훈련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가 VMI에 다니는 동안 토마스 R. 바드 상원의원은 그를 웨스트포인트에 추천했다.[6] 웨스트포인트의 1학년(신입생) 시절, 패튼은 쉽게 일과에 적응했다. 그러나 그의 학업 성적은 너무 저조해서 수학에서 낙제하여 1학년을 다시 반복해야 했다.[7] 그는 군사 훈련에서 뛰어났지만, 학업 성적은 평균 수준을 유지했다. 그는 3학년 때 생도 상사였고, 4학년 때 생도 부관이었다. 그는 또한 미식축구팀에 합류했지만, 팔을 다쳐 여러 번 경기를 중단했다. 대신 그는 펜싱 팀과 육상에 참가하여 근대5종을 전문으로 했다.[7] 그는 1912년 하계 올림픽 스톡홀름에서 이 스포츠에 참가하여 5위를 기록했다.[7]
패튼은 1909년 6월 11일 웨스트포인트에서 103명의 생도 중 46위로 졸업했으며, 미국 기병대의 미국 육군 준위로 임관되었다.[7]
24세의 패튼은 1910년 5월 26일 매사추세츠주 베벌리 팜스에서 보스턴의 사업가 프레데릭 에이어의 딸인 베아트리체 배닝 에이어와 결혼했다. 그들은 세 자녀를 두었는데, 베아트리체 스미스(1911년 3월 출생), 루스 엘렌(1915년 2월 출생) 그리고 조지 패튼 4세 (1923년 12월 출생)였다.[8]
2. 2. 군 경력
1909년 소위로 정규 육군에 임관했다. 1916년 5월 23일 대위로 진급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가 육군에서 1918년 1월 26일 소령, 1918년 3월 30일 중령, 1918년 10월 17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920년 6월 30일 영구 계급 대위로 복귀했으나, 다음 날인 1920년 7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934년 3월 1일 중령으로, 1938년 7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 육군에서 1940년 10월 2일 준장, 1941년 4월 4일 소장, 1943년 3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4년 8월 16일 준장 및 소장으로 정규 육군에 임명되었고, 1944년 12월 4일에 정규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패튼은 다음과 같은 부대를 지휘했다.
- 기병 학교 지휘관 (1937년 8월 – 1938년 7월)
- 제5 기병대 지휘관 (1938년 7월 – 12월)
- 제3 기병대 지휘관 (1938년 12월 – 1940년 7월)
- 제2 기갑 사단 제2 여단 지휘관 (1940년 7월 16일 – 1942년 1월 14일)
- 제1 기갑 군단 사령관 (1942년 1월 15일 – 8월 5일)
- 런던 기지 사령부 사령관 (1942년 8월 6일 – 11월 7일)
- 서부 기동 부대 사령관 (1942년 11월 8일 – 1943년 1월 8일)
- 제1 기갑 군단 사령관 (1943년 1월 9일 – 3월 3일)
- 제2 군단 사령관 (1943년 3월 4일 – 4월 14일)
- 제1 기갑 군단 사령관 (1943년 4월 15일 – 7월 9일)
- 제7 군 사령관 (1943년 7월 10일 – 1944년 1월 25일)
- 제3 군 사령관 (1944년 1월 26일 – 1945년 10월 6일)
- 제15 군 사령관 (1945년 10월 7일 – 12월 21일)
계급장 | 계급 | 소속 | 날짜 |
---|---|---|---|
1909년 소위 계급장 없음 | 소위 | 정규 육군 | 1909년 6월 11일 |
대위 | 정규 육군 | 1916년 5월 23일 | |
대위 | 정규 육군 | 1917년 5월 15일 | |
소령 | 국가 육군 | 1918년 1월 26일 | |
중령 | 국가 육군 | 1918년 3월 30일 | |
대령 | 국가 육군 | 1918년 10월 17일 | |
영구 계급 대위로 복귀 | 정규 육군 | 1920년 6월 30일 | |
소령 | 정규 육군 | 1920년 7월 1일 | |
중령 | 정규 육군 | 1934년 3월 1일 | |
대령 | 정규 육군 | 1938년 7월 1일 | |
준장 | 미국 육군 | 1940년 10월 2일 | |
소장 | 미국 육군 | 1941년 4월 4일 | |
중장 | 미국 육군 | 1943년 3월 12일 | |
준장 | 정규 육군 | 1944년 8월 16일 | |
소장 | 정규 육군 | 1944년 8월 16일 | |
중장 | 정규 육군 | 1944년 12월 4일 | |
대장 | 미국 육군 | 1945년 4월 14일 |
2. 2. 1. 초기 군 경력
패튼의 첫 부임지는 일리노이주 포트 셰리던의 제15기병연대였으며,[20] 그곳에서 상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부지런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21] 1911년 말, 패튼은 육군 고위 지휘관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던 버지니아주 포트 마이어로 전출되었다. 그는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L. 스팀슨과 친분을 맺었고, 그의 부대의 병참 장교로서 정규 업무 외에 사교 행사에서 보좌관 역할을 했다.[22] 패튼은 고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부하들에게 영감을 주는 데 어려움을 겪을까 봐 걱정했다.[22]
패튼은 달리기와 펜싱 실력으로 인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1912년 하계 올림픽에서 열린 최초의 근대 5종 경기에 육군 대표로 선발되었다.[23] 패튼은 42명의 근대 5종 선수 중 유일한 미국인이었으며, 선수들은 모두 장교였다.[23] 패튼은 사격에서 21위, 수영에서 7위, 펜싱에서 4위, 승마 경기에서 6위, 육상 경기에서 3위를 기록하며 종합 5위를 차지했고, 스웨덴 선수를 제외하고는 1위를 차지했다.
그의 사격 경기, 특히 대부분의 다른 선수들이 .22 구경 총기를 선택한 반면 그가 .38 구경 미 육군 제식 권총을 사용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그는 초탄의 종이 구멍이 너무 커서 나중에 쏜 총알이 그 구멍을 통과했다고 주장했지만, 심판들은 그의 총알 중 하나가 표적을 완전히 빗나갔다고 결정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옳았다면, 패튼은 이 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땄을 것이다. 심판의 판정은 유지되었다.
1912년 올림픽 이후 패튼은 프랑스 소뮈르로 건너가 프랑스 "무술의 대가"이자 현지 기병 학교의 펜싱 강사인 아쥬당 샤를 클레리로부터 펜싱 기술을 배웠다. 패튼은 이 교습을 포트 마이어로 가져와 미 육군 기병을 위한 검술 교리를 재설계했는데, 이는 표준적인 베기 동작보다 찌르기 공격을 선호하고 이러한 공격을 위한 새로운 검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임시로 미국 육군 참모총장실에 배속되었고, 1913년에는 널리 "패튼 검"으로 알려진 1913년형 기병도의 첫 2만 자루가 주문되었다.

패튼은 그 후 소뮈르로 돌아가 고급 기술을 배운 다음, 그의 기술을 캔자스주 포트 라일리에 있는 기병 학교로 가져가 학생이자 펜싱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검의 대가"로 지정된 최초의 육군 장교였으며, 이 칭호는 학교의 최고의 검술 강사에게 주어졌다. 1913년 9월에 도착한 그는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다른 기병 장교들에게 펜싱을 가르쳤다.

패튼은 1915년 6월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원래 필리핀으로 향하는 제15기병대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임명이 그의 경력을 망칠 것을 우려한 패튼은 11일간의 휴가 동안 워싱턴 D.C.로 가서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설득하여 그를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에 있는 제8기병대로 재배치하도록 주선했다. 그는 멕시코의 불안정이 전면적인 내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한편, 패튼은 1916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도록 선정되었지만, 그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올림픽에서 귀국한 후, 기병용 세이버에 관한 연구를 "기병 저널" 1913년 3월호를 시작으로 군의 잡지에 기고했고, 이것이 무기성의 눈에 띄어 M1913 기병도를 디자인했다. 이것은 1934년에 기병용 세이버가 폐지되었을 때 미군 최후의 세이버가 되었다.
1916년의 멕시코 국경 작전 중 패튼은 텍사스 제13 기병연대에 배속되어, 판초 비야 징벌 원정 당시 존 퍼싱준장의 부관이 되었다. 작전 중, 제6 보병 연대 병사 10명을 동반한 패튼은, 비야 개인 호위대 지휘관인 훌리오 카르데나스 장군을 살해했다. 귀국 후 패튼은 이 전공으로 평가를 높였다.
2. 2. 2. 멕시코 내전과 제1차 세계 대전
멕시코 내전 당시 토벌군 사령관 존 퍼싱의 부관으로 참전하여 판초 비야의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개선하는 활약으로 유명해졌다. 패튼은 처음 실전에서 극심한 공포를 느꼈으나, 조상들의 영혼을 보고 용기를 얻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24]1915년, 패튼 중위는 시에라 블랑카 주둔 제8 기병대 A 중대에서 국경 순찰 임무를 맡았다. 그는 콜트 .45를 허리띠에 착용했으나, 술집에서 오발 사고를 낸 후 상아 손잡이가 달린 콜트 싱글 액션 아미 리볼버로 교체했다. 이 총은 훗날 패튼의 상징이 되었다.
1916년 3월, 판초 비야 군대가 뉴멕시코 콜럼버스를 습격, 미국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은 판초 비야 원정을 시작했다. 패튼은 퍼싱에게 원정대 부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하여, 작전 조직에 참여하고 퍼싱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패튼은 퍼싱의 리더십 스타일을 따랐고, 부관으로서 운송 물류 감독 및 개인 통신원 역할을 했다.

4월 중순, 패튼은 퍼싱에게 부대 지휘를 요청하여 제13 기병대 C 중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5월 14일, 패튼은 미국 전쟁사 최초의 전동화 공격을 이끌었다. 제6 보병대의 세 대의 다지 투어링 카에 탑승한 10명의 병력과 함께 비야의 부하 3명을 기습, 훌리오 카르데나스와 그의 경호원 2명을 사살했다. 패튼은 이 사건으로 "강도 살인자"라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4] 1916년 5월 23일, 패튼은 제1 중위로 진급했다. 패튼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원정대가 멕시코 국경에 주둔하는 동안 멕시코에 머물렀다. 10월, 패튼은 가스등 폭발로 화상을 입고 캘리포니아로 휴가를 떠났다가 1917년 2월 복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퍼싱 장군은 패튼을 대위로 진급시켰다. 1917년 5월, 패튼은 퍼싱의 선발대 180명 중 한 명으로 유럽으로 떠나 미국 원정군(AEF) 훈련을 감독하고 쇼몽 기지 감독 본부 중대를 지휘했다. 패튼은 전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황달로 입원 중 폭스 코너 대령의 격려를 받았다.
1917년 11월 10일, 패튼은 AEF 경전차 학교 설립 임무를 맡았다. 그는 프랑스군 전차 훈련 학교에서 르노 FT 경전차를 운전했다. 1917년 11월 20일 영국군은 캉브레에서 전차를 이용한 공격을 시작했다. 패튼은 J. F. C. 풀러 대령에게 브리핑을 받고, 르노 공장을 방문했다. 1918년 1월 26일 소령으로 진급한 패튼은 1918년 3월 23일 부르에서 전차 10대를 받았다. 그는 전차 운전 경험이 있는 유일한 미군 병사로서 직접 전차를 조작, 보병 지원을 위한 전차 승무원을 훈련시켰다. 1918년 4월 3일, 패튼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8월, 패튼은 미국 제1 임시 전차 여단( 제304 전차 여단)의 지휘를 맡았다. 패튼의 경전차 여단은 새뮤얼 로크엔바흐 대령의 전차 군단의 일부로, 미국 제1군 소속이었다. 패튼은 생미에 전투에서 르노 FT 전차를 지휘, 9월 12일 공격 시작 후 전차를 앞에서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 점령 에세 마을로 전차 앞에서 걸어갔고, 판 공격 중 전차 위에 타 병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에세 마을 밖에서 패튼은 더글러스 맥아더 준장을 처음 만났다.
패튼의 여단은 뫼즈-아르곤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I 군단으로 이동했다. 9월 26일, 패튼은 셰피 마을 근처에서 독일군 기관총 공격 중 부상을 입었다. 일등 상병 조 앤젤로가 패튼을 구했고,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 패튼은 포탄 구덩이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후송되었다. 패튼은 자신의 부하를 죽였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25]

패튼은 병원으로 가기 전 보고서를 제출했고, 세레노 E. 브레트가 여단 지휘를 맡았다. 패튼은 10월 17일 국가 육군 전차 군단에서 임시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11월 11일, 1918년 11월 11일 휴전으로 적대 행위가 종료되기 전까지 더 이상의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셰피에서의 행동으로 패튼은 은성 훈장을 받았고, 나중에 DSC로 격상되었다.[26] 그는 전차 여단과 전차 학교 지휘 공로로 육군 수훈 훈장을 받았다.[26] 또한, 전투 부상으로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다.
패튼은 뫼즈-아르곤에서의 경험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다.
2. 2. 3.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시 승진으로 대령으로 승진했지만, 대전 종결로 소령으로 강등되었다.
1919년 워싱턴 근무 중 아이젠하워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 일은 훗날 패튼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69] 1920년대 전반에는 미국 의회에 기갑 부대에 대한 예산 배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전차와 기계화 부대에 대한 기사를 쓰고, 이러한 병기에 대한 용법을 시사했다. 평시의 긴축된 군사 예산은 패튼의 승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본래 전쟁을 좋아했던 패튼에게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기간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고, 이 전간기는 패튼과 그 가족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기가 되어 버렸다.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불만 때문인지 패튼은 이 기간 동안 딸의 친구와 불륜을 저질러 이혼 직전까지 가거나, 빈번하게 신경질을 부려 딸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알코올에 빠지거나, 지나친 애주가가 되는 등 명백히 그 열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행동이 많았다. 다만 전쟁이 다가오면서 태도는 침착해졌고, 지금까지의 절망과 무궤도한 행동은 사라지고, 원래의 "군인다운" 패튼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1938년 대령으로 승진할 무렵에는 이미 미국의 참전을 기다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생기가 넘쳤고, 지금 당장이라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 후 독일의 전격전으로, 미국군에서도 기갑사단의 필요성이 인식되었다. 패튼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준장으로 승진하여 기갑 여단장으로 취임했다. 이 기갑 여단은 후에 미국 제2기갑사단이 되었고, 패튼도 소장으로 승진했다.
2. 2. 4. 제2차 세계 대전
1942년 11월, 패튼은 소장으로서 미국 제1기갑군단을 지휘하여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했다. 이어서 1943년 3월 6일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해임된 로이드 프레덴달 중장의 후임으로 미국 제2군단 사령관에 취임했다.[68] 해당 군단은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의해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 대패를 겪은 곳이었다. 패튼은 오마 브래들리 소장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많은 미군 장교와 영국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북아프리카에 주둔한 미군은 규율이 느슨하고 약했다고 한다. 패튼은 부임하자마자 장병들에게 엄격하게 규율을 준수하도록 명령하고, 군기를 지키지 않은 자에게는 용서 없이 벌을 내렸다.[68] 또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혹독한 훈련을 실시하여 북아프리카의 미군을 '개조'했다.패튼의 부대는 동쪽에서 공격해오는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군과 함께 북아프리카에 있는 독일군을 협격하여 1943년 5월까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몰아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전공으로 미국 제7군 사령관이 된 패튼은 1943년 7월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제7군의 역할은 섬의 북동쪽 끝에 있는 메시나로 진격하는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의 서쪽 측면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제8군이 에트나 산 남쪽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진격을 멈추자 패튼은 섬의 서부로 신속하게 진격하여 섬의 중심 도시인 팔레르모를 해방시켰고, 방향을 돌려 동쪽으로 진격하여 영국군 담당 구역이었던 메시나를 영국군보다 먼저 점령했다. 그러나 독일-이탈리아군은 메시나 해협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이탈리아군의 대부분은 중장비와 함께 이탈리아 본토로 철수해 버렸다.
시칠리아 섬에서의 작전 중 패튼은 야전 병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병사 구타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전혀 외상이 없는 병사를 발견하고, 겁쟁이라며 그 병사를 구타했다.[68] 그 병사는 포탄 신경증으로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여 입원해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한 사람이 중상자들과 함께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패튼은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패튼은 제7군 지휘에서 물러났고, 그 후 카이로에서 10개월 가까이 대기하게 되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간 중 패튼은 미국 제1군집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 부대는 실체가 없는 부대였으며, 연합군이 노르망디가 아닌 칼레에 상륙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만 작전(포티튜드 작전)의 일환이었다.[71] 노르망디 상륙 작전 실행 직후 아이젠하워에 의해 그 임무가 해제되어, 제3군 사령관으로 전선 지휘관으로 복귀했지만, 과거 그의 부하였던 오마 브래들리 제12군집단 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 후 노르망디 지방에서의 전투에서 제3군을 지휘하며 연합군 부대의 최서단을 담당했다. 여기서 독일군 전선 돌파 작전인 코브라 작전이 실행되었고, 패튼은 제3군으로 전선을 돌파하여 대진격을 시작한다. 노르망디 지방에서 일거에 남하한 후 동진을 시작하여 독일군의 후방을 단숨에 돌파했다.
그 결과, 프랑스 서부의 팔레즈 부근에서 영국군과 손을 잡고 독일군 포위에 성공한다. 이 팔레즈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 부대는 전멸했다. 적지 않은 수의 독일군 병사들이 장비를 버리고 흩어져 포위망 탈출에 성공했지만, 1만 명이 넘는 전사자 (부상자를 포함하면 6만 명)와 5만 명이 넘는 포로가 발생한 "서부의 스탈린그라드"라고도 불린 대패배였다. 하지만 영국의 진격이 늦었기 때문에 더 많은 독일군 병사를 놓쳤다고 생각했기에, 패튼 본인은 이 결과에 불만을 품었다.[68]
그 후 패튼은 "전격전"을 실시하여, 2주 만에 1000km (정확히는 600마일 정도)에 가까운 거리를 진격했다. 그는 적의 저항 거점을 발견했을 경우, 멈춰서 그 거점을 공략한 후 공격을 재개하기보다는, 기동력을 살려 적의 후방으로 우회하는 것을 선호했다.[72]
1944년 8월, 프랑스에서 독일군이 궤멸적인 상태에 이르자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여 독일 국경 부근까지 진격했다. 패튼이 이끄는 제3군도 프랑스 동부 로렌 지방으로 진격했다. 여기서 보급 물자(특히 휘발유) 부족으로 진격 속도가 둔화되었다. 결국 메츠를 점령한 것은 11월 23일이었다.
1944년 12월의 벌지 전투에서 패튼이 지휘하는 제3군은 북쪽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받았다. 독일군의 돌출부 중 남쪽에 있던 바스토뉴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미국 제101공수사단이 이곳을 사수하고 있었다. 벌지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독일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느낀 패튼은[73] 이를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급히 북쪽으로 이동시켜 과감한 진격으로 동 사단을 구출했다. 이는 패튼의 큰 공적 중 하나로 꼽힌다.
12월 19일 베르됭의 벙커에서 아이젠하워 등과 만났을 때, 패튼은 얼마나 시간이 있으면 군대를 북쪽으로 향하게 할 수 있는지 질문을 받고 "48시간 이내에 가능하다"라고 답했다. 아이젠하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며, 준비가 충분히 갖춰진 후에 해도 된다고 했지만, 사실 패튼은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북부에 반격할 준비를 하도록 부하에게 전해두었고, 질문을 받은 시점에서는 이미 국지적인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바스토뉴는 21일 시점에서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지만, 포위되기 전부터 이미 군대를 북쪽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은 패튼의 전략안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령부의 승인을 얻은 제3군은 북쪽으로 진격했고, 날씨 회복에도 도움을 받아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독일군의 측면을 강타했다. 독일군은 바스토뉴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고,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그 옆구리가 제3군에 의해 뚫리고 말았다. 12월 26일에는 제3군의 일부가 바스토뉴에 도착하여[74] 포위를 뚫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1월 13일에는 바스토뉴 주변에서 철수했고, 독일군은 1월 23일에 작전 중지를 결정했다.
그 후, 제3군은 독일군을 추격하여 자르란트와 서 보헤미아로 진출, 더 나아가 프라하로 진격할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독일은 항복하여 종전되었다.
2. 3. 종전 이후
패튼은 태평양 전구에서의 지휘관 자리를 요청하며 조지 마셜에게 자신을 그 전쟁에 투입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마셜은 중국이 주요 항구를 확보해야만 가능하다고 답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48] 5월 중순, 패튼은 휴식을 위해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6월 7일 매사추세츠주, 베드퍼드에 도착하여 수천 명의 환영을 받았고, 해치 기념 쉘에서 400명의 부상당한 제3군 참전용사를 포함해 약 2만 명에게 연설했다. 그는 전장에서 죽는 사람은 "자주 바보"라고 말해 골드 스타 어머니회 회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48] 보스턴에서 시간을 보낸 후 덴버를 방문하고 연설했으며,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여 기념 콜리세움에서 10만 명의 군중에게 연설했다. 1945년 6월 9일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환영 퍼레이드를 벌였다.[75] 1945년 6월 14일, 헨리 L. 스팀슨 전쟁 장관은 패튼을 태평양으로 보내지 않고 점령군 임무를 위해 유럽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했다.[48]
패튼은 바이에른의 군정 총독으로 임명되어 제3군을 이끌며 탈나치화 노력을 주도했다.[48]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 종결 소식에 분개하며, 일기에 "또 다른 전쟁이 끝났고, 세상에 대한 나의 쓸모도 함께 끝났다"라고 썼다.[48] 그의 직책에 불만과 전쟁에 다시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에 우울해진 패튼의 행동과 발언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꺼린다는 점에 대해 언론의 질문을 받자, 패튼은 기반 시설 관리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 중에 당에 가입해야 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나치를 민주당과 공화당에 비유하여 미국 내에서 부정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아이젠하워를 분노하게 만들었다.[48] 패튼은 나치는 히틀러 정권 하에서는 합법적이고 유일한 정당이었으며, 당시 당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범죄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입장을 설명했지만, 미국의 정당을 나치와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많은 미국 국민을 분노하게 하였다. 결국, 1945년 9월 28일, 탈나치화 논란과 관련하여 아이젠하워와 격렬한 설전을 벌인 후, 패튼은 군정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10월 7일 제3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모든 좋은 것은 끝나기 마련입니다. 지금까지 제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은 제3군을 지휘할 수 있었던 영광과 특권이었습니다."라는 작별 인사를 남겼다.[48] 앤서니 케이브 브라운(Anthony Cave Brown)은 ''거짓의 보디가드(Bodyguard of Lies)''에서 "패튼은 미국이 잘못된 적, 즉 러시아 대신 독일과 싸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직후 아이젠하워에 의해 제3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고 썼다.[56]
패튼의 마지막 임무는 바트 나우하임(Bad Nauheim)에 본부를 둔 미국 제15군(U.S. 15th Army)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15군은 유럽 전쟁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일하는 소규모 본부 참모진으로 구성되었다. 패튼은 역사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이 직책을 수락했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그는 파리, 렌(Rennes), 샤르트르(Chartres), 브뤼셀(Brussels), 메츠(Metz), 랭스(Reims), 룩셈부르크(Luxembourg), 베르됭(Verdun)을 방문하며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스톡홀름(Stockholm)으로 가서 1912년 올림픽에서 만났던 다른 운동선수들과 재회했다.[48] 패튼은 12월 10일 크리스마스(Christmas) 휴가를 떠난 후 제15군에서 사임하고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48]
1945년 11월 11일, 아이젠하워가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 된 후, 패튼은 유럽 및 아프리카 주둔 미국 육군(United States Army Europe and Africa)의 임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1월 26일 조지프 T. 맥나니(Joseph T. McNarney) 장군에게 해임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패튼의 참모장인 호바트 게이 소장은 1945년 12월 9일 패튼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독일 슈파이어 인근으로 꿩 사냥 여행을 제안했다. 길가에 방치된 차들을 보며 패튼은 "전쟁은 정말 끔찍하다. 낭비를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들을 태우고 가던 1938년형 캐딜락 리무진이 저속으로 미국 육군 트럭과 충돌했다.[57] 게이와 다른 사람들은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패튼은 앞좌석과 뒷좌석을 구분하는 유리 칸막이에 머리를 부딪혔다.[57] 하이델베르크의 병원으로 옮겨진 패튼은 셋째와 넷째 경추의 압박 골절과 탈구로 인해 목이 부러지고 경추 척수 손상을 입어 목 아래로 사지마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7]
패튼은 다음 12일 동안 대부분을 척추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이기 위해 척추 견인 상태로 보냈다. 다시는 말을 타거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패튼은 한때 "이런 식으로 죽는 건 정말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는 1945년 12월 21일 오후 6시경 잠자리에 들었다가 폐부종과 울혈성 심부전으로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8]

12월 24일, 패튼은 "내 병사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따라 제3군 소속의 일부 전쟁 사상자들과 함께 룩셈부르크 미국 군인 묘지 및 기념관의 룩셈부르크 시 햄 구역에 묻혔다. 처음에는 다른 모든 군인처럼 묘지 한가운데에 묻혔지만, 그의 무덤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 묘지가 훼손되었고, 그의 유해는 현재 묘지 앞쪽으로 옮겨졌다.[58]
3. 논란
패튼은 남부 연합에서 성장하고 가족 배경을 둔 전형적인 인종차별적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적으로 흑인 병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개별적으로 그들은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나는 당시 내 생각을 밝혔고, 흑인 병사는 기갑 부대에서 싸울 만큼 빠르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패튼은 인종이나 종교적 소속보다 성과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흑인이나 유대인일 수 있지만, 능력이 있고 자기 임무를 다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젠장! 나는 그를 사랑한다.
제761전차대대를 향해 패튼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 여러분, 여러분은 미국 육군에서 싸우는 최초의 흑인 전차병입니다. 여러분이 훌륭하지 않았다면 결코 여러분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내 군대에 최고의 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색깔이든 상관없습니다. 가서 저 독일 놈들을 죽이기만 한다면! 모두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으며 당신에게서 위대한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인종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말고, 젠장, 나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패튼은 그의 지휘 하에 있는 흑인 부대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역사가 휴 콜은 패튼이 흑인과 백인 병사를 동일한 소총 부대에 통합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패튼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은 그의 보좌관이자 개인 시종인 윌리엄 조지 믹스 상사였다. 믹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직업 군인이었고, 패튼 장군의 개인적인 측근으로 여겨졌다.[62]
시칠리아 전역 중 부하를 때린 두 건의 유명한 사건은 전역이 끝난 후 전국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43년 8월 3일, 패튼은 니코시아의 후송 병원에서 전투 피로를 앓고 있던 사병 찰스 H. 쿨에게 뺨을 때리고 언어 폭력을 가했다. 8월 10일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사병 폴 G. 베넷의 뺨을 때렸다. 패튼은 두 병사에게 모두 전선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하고, 비겁함을 비난하며 비슷한 불만을 제기하는 병사를 징계하라는 명령을 지휘관들에게 내렸다.
이 사건의 소식이 아이젠하워에게 전해졌고, 아이젠하워는 패튼을 개인적으로 질책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패튼은 두 병사에게 개별적으로 사과했고, 사건을 목격한 의사들에게도 사과했으며, 나중에는 여러 연설에서 지휘 하의 모든 병사들에게 사과했다. 아이젠하워는 언론에 이 사건을 은폐했지만, 11월에 언론인 드루 피어슨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폭로했다. 미국 내에서 패튼에 대한 비판은 거셌으며, 여기에는 의회 의원과 전직 장군, 특히 퍼싱이 포함되었다. 일반 대중의 견해는 이 문제에 대해 엇갈렸으며, 결국 육군 장관 헨리 L. 스팀슨은 "최종 승리 전에 있을 격렬한 전투에서 그의 공격적이고 승리하는 리더십"의 필요성 때문에 패튼을 지휘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패튼은 11개월 동안 전투에서 부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오버로드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에서 편성된 제1 미국 육군 지휘관으로 브래들리가 선택되었는데, 이 결정은 뺨을 때린 사건이 공개되기 전에 내려졌지만, 패튼은 지휘권을 박탈당한 것에 대해 그 사건들을 탓했다. 아이젠하워는 유럽 침공이 불확실성을 감수하기에는 너무 중요하며, 뺨을 때린 사건이 패튼이 규율과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와 마셜은 모두 패튼을 숙련된 전투 지휘관으로 여겼지만, 브래들리가 덜 충동적이고 실수를 덜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패튼은 군정 총독으로서 전직 나치당 당원들이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묵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49] 그는 독일인들을 존경하며 나치당원 축출에 저항했고, "우리가 독일을 탈나치화하기 위해 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언급하며, 독일 파괴는 러시아의 유럽 지배를 도울 뿐이라고 주장했다.[49]
패튼은 바이에른의 난민 수용소를 감독했는데, 이곳에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는 유대인 군종 장교를 두는 것을 거부했고,[50] 유대인들을 억류하고 독일인들을 집에서 쫓아내 유대인들을 수용하라는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저항했다.[52] 욤 키푸르 예배에 참석한 후, 패튼은 유대인들을 "악취 나는 인류의 덩어리"라고 칭하며 위생 상태를 비난했고,[53] "언론에 매우 유대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54] 그는 유대인들을 "메뚜기",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 "우리 시대의 문화적 또는 사회적 세련됨이 전혀 없는 하등 종족"이라고 폄하했다.[55]
패튼은 정치적 실체로서의 러시아를 존경했지만,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러시아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그들이 유럽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비뚤어진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패튼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러시아인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을 죽이는 데 필요한 납이나 철의 양을 알아내는 것 외에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욕망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러시아인이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며, 완전히 개자식이자 야만인이며 만성적인 술꾼이라고 평가했다.
3. 1. 병사 폭행 사건
시칠리아 전역 중 부하를 때린 두 건의 유명한 사건은 전역이 끝난 후 전국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43년 8월 3일, 패튼은 니코시아의 후송 병원에서 전투 피로를 앓고 있던 사병 찰스 H. 쿨에게 뺨을 때리고 언어 폭력을 가했다. 8월 10일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사병 폴 G. 베넷의 뺨을 때렸다. 패튼은 두 병사에게 모두 전선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하고, 비겁함을 비난하며 비슷한 불만을 제기하는 병사를 징계하라는 명령을 지휘관들에게 내렸다.이 사건의 소식이 아이젠하워에게 전해졌고, 아이젠하워는 패튼을 개인적으로 질책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패튼은 두 병사에게 개별적으로 사과했고, 사건을 목격한 의사들에게도 사과했으며, 나중에는 여러 연설에서 지휘 하의 모든 병사들에게 사과했다. 아이젠하워는 언론에 이 사건을 은폐했지만, 11월에 언론인 드루 피어슨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폭로했다. 미국 내에서 패튼에 대한 비판은 거셌으며, 여기에는 의회 의원과 전직 장군, 특히 퍼싱이 포함되었다. 일반 대중의 견해는 이 문제에 대해 엇갈렸으며, 결국 육군 장관 헨리 L. 스팀슨은 "최종 승리 전에 있을 격렬한 전투에서 그의 공격적이고 승리하는 리더십"의 필요성 때문에 패튼을 지휘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패튼은 11개월 동안 전투에서 부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오버로드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에서 편성된 제1 미국 육군 지휘관으로 브래들리가 선택되었는데, 이 결정은 뺨을 때린 사건이 공개되기 전에 내려졌지만, 패튼은 지휘권을 박탈당한 것에 대해 그 사건들을 탓했다. 아이젠하워는 유럽 침공이 불확실성을 감수하기에는 너무 중요하며, 뺨을 때린 사건이 패튼이 규율과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와 마셜은 모두 패튼을 숙련된 전투 지휘관으로 여겼지만, 브래들리가 덜 충동적이고 실수를 덜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3. 2. 반유대주의 및 탈나치화 관련 논란
패튼은 군정 총독으로서 전직 나치당 당원들이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묵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49] 그는 독일인들을 존경하며 나치당원 축출에 저항했고, "우리가 독일을 탈나치화하기 위해 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언급하며, 독일 파괴는 러시아의 유럽 지배를 도울 뿐이라고 주장했다.[49]패튼은 바이에른의 난민 수용소를 감독했는데, 이곳에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는 유대인 군종 장교를 두는 것을 거부했고,[50] 유대인들을 억류하고 독일인들을 집에서 쫓아내 유대인들을 수용하라는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저항했다.[52] 욤 키푸르 예배에 참석한 후, 패튼은 유대인들을 "악취 나는 인류의 덩어리"라고 칭하며 위생 상태를 비난했고,[53] "언론에 매우 유대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54] 그는 유대인들을 "메뚜기",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 "우리 시대의 문화적 또는 사회적 세련됨이 전혀 없는 하등 종족"이라고 폄하했다.[55]
패튼은 흑인 병사에 대해 "개별적으로 그들은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 흑인 병사는 기갑 부대에서 싸울 만큼 빠르게 생각할 수 없다"고 사적으로 언급했지만, 공개적으로는 인종이나 종교보다 성과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761전차대대에게는 "여러분이 훌륭하지 않았다면 결코 여러분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인종에 상관없이 임무 완수를 강조했다. 그는 흑인 부대에 대한 의지를 보였고, 흑인과 백인 병사를 통합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패튼의 보좌관이자 개인 시종인 윌리엄 조지 믹스 상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직업 군인이었다.[62]
3. 3. 반소련 감정
패튼은 정치적 실체로서의 러시아를 존경했지만,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러시아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그들이 유럽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비뚤어진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패튼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러시아인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을 죽이는 데 필요한 납이나 철의 양을 알아내는 것 외에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욕망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러시아인이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며, 완전히 개자식이자 야만인이며 만성적인 술꾼이라고 평가했다.4. 유산
조지 S. 패튼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미국의 군인이었다. 그는 특유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미군 병사들에게 적을 섬멸하려는 공격적인 열망을 불어넣었다.[59] 특히 전차, 기동 보병, 자주포를 결합하고 전술 항공기의 긴밀한 지원을 받는 장갑 부대 운용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며 전격전 개념을 완성했다.[59]
패튼은 다채로운 성격, 강력한 리더십 스타일, 그리고 사령관으로서의 성공으로 유명했지만, 빈번한 정치적 실책으로 인해 혼합되고 모순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역사가 테리 브라이튼은 패튼이 "오만하고,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지만... 전쟁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패튼이 장갑전과 리더십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으며, 미국 육군은 그의 사후 훈련 프로그램에 패튼의 공격적인 전략을 많이 채택했다. 많은 군 장교들이 그의 유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며, 전쟁 후 설계된 최초의 미국 전차는 M46 패튼으로 명명되었다.
패튼은 화려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추구했는데, 오른쪽 허리에는 상아 손잡이와 은도금된 콜트 싱글 액션 아미 .45구경 리볼버를, 왼쪽 허리에는 상아 손잡이가 달린 스미스 & 웨슨 모델 27 .357 매그넘을 휴대했다. 그는 광택이 나는 헬멧, 기병 바지, 높은 기병 부츠를 착용하고, "전쟁의 얼굴"이라고 부르는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지프는 앞뒤에 과도한 계급 표지판을 달았고, 클랙슨 경적을 장착하여 멀리서도 그의 접근을 알렸다.
패튼은 호레이쇼 넬슨 제독을 존경하며 용맹함을 중시했고, 전투에서 계급장을 눈에 띄게 착용했다. 그는 숙명론과 환생을 믿었으며, 자신이 한니발, 로마 군단병, 나폴레옹 군대의 지휘관으로 환생했다고 믿었다.
패튼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 능력을 갖췄으며, 연설에서 욕설을 자주 사용했다. 그의 연설은 부대원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브래들리를 포함한 다른 장군들에게는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벌지 전투에서 그는 "망할 놈들(독일군)을 파리까지 가게 놔두었다가, 그들을 잘라내고 포위하자"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패튼의 직설적인 태도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추축국에 동정적인 전 비시 정부 관리들과 가깝다는 우려를 샀고, 구타 사건으로 이미지가 손상되었다. 오버로드 작전 전에는 영국 환영 클럽에서 "영국인과 미국인, 물론 러시아인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분명한 운명"이라고 말했지만, 다음 날 뉴스 보도는 러시아인을 생략하여 패튼을 잘못 인용했다.
전쟁 후 귀국 연설에서는 부상병들을 "진정한 영웅"이라고 칭하며 전사자 가족들을 불쾌하게 했고, 1945년 9월에는 나치 제거에 대한 질문에 "사무실에 있거나, 사무실을 맡거나, 준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었던 모든 공화당원과 모든 민주당원을 제거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답해 아이젠하워가 패튼을 제3군 사령관에서 해임하게 만들었다.
패튼은 부하들을 엄격하게 대했지만, 성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상병에 대한 존경심이 컸고, 전장의 병사들을 위해 추가 보급품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패튼은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에서 조지 C. 스콧이 연기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배우들이 스크린에서 그를 연기했다.[60]
그는 기갑부대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쟁광과 같은 그의 생애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말은 자동차 사고 후 "(자동차 사고는) 군인의 죽음 방식이 아니군"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결점을 인식하고 "Too damn military (너무 군인답다)"라고 반성하기도 했지만,[68]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1935년 나치 독일이 제정한 뉘른베르크법 원본을 입수하여 고향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패튼 대전차 군단(''Patton'')은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1970년 미국 영화로,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델버트 만 감독의 "패튼 장군 마지막 날들"(The Last Days of Patton)이 제작되었다. 1989년에는 휴맥스 픽처스에서 『패튼 장군 (비디오그래피 세계를 움직인 사람들)』 비디오가 출시되었다. 브라스 타겟(''Brass Target'')은 존 허프 감독의 1978년 미국 영화로, 패튼 장군의 죽음을 암살로 설정한 서스펜스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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