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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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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리목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어려서부터 형 종리인의 칭찬을 받았으나 말수가 적고 둔한 성격이었다. 영흥에서 토지 분쟁으로 선량한 면모를 보였고, 육손 휘하에서 파양을 토벌하는 등 군사적 활동을 시작했다. 황룡 3년에는 오계만 토벌에 참여했으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남해 태수, 승상 장사, 중서령을 거쳐 건안, 파양, 신도 삼군 반란을 진압하고 진정후에 봉해졌다. 촉한 멸망 후 무릉 오계만을 평정하고 안현독, 양무장군, 도형후에 임명되었으며, 유수독을 지내며 위나라 침공을 계획했다. 종리목은 청렴한 성품으로 존경받았으며, 사후에는 재산이 남지 않았고 아들 종리의가 작위를 이었다.

2. 생애

종리목은 후한 관료(노국상) 종리의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누선도위였고 형은 상계리였다.[2] 어릴 적부터 말주변이 없고 둔한 성격이었으나, 형은 종리목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주변에 말했다.[2]

젊은 시절 영흥에서 토지 분쟁이 있었으나, 항변하지 않고 토지와 수확물을 양보했다. 현장이 분쟁 상대를 처벌하려 하자 이를 비호하며 산음으로 돌아가려 했고, 이 일로 이름을 알렸다.

건안 21년(216년), 육손파양을 토벌할 때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종군했다.[2] 황룡 3년(231년)에는 반준과 함께 무릉만을 정벌했는데, 조정에서는 병력이 적어 증원하지 않고 버리려 했지만, 손권은 종리목을 버리지 않았다.[2]

적오 5년(242년), 낭중에서 태자보의교위로 임명되어 손화를 섬겼고, 남해 태수로 승진하여 오랫동안 반란을 일으켜 온 자들을 토벌하거나 복종시켰다. 4년 후 병으로 벼슬을 사임했다.[2]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 장리가 되었고, 사직·중서령으로 승진했다. 태평 2년(257년) 8월, 건안·파양·신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토벌하여 우두머리를 항복시키고 병사를 휘하에 편입시켰다. 이 공적으로 진정후에 봉해졌으며, 월기교위가 되었다.

영안 6년(263년), 촉한 멸망 직후 무릉의 오계만이 모반 기미를 보이자, 평위장군·무릉태수를 겸임하여 토벌했다. 는 곽순을 파견하여 반란을 유도하려 했으나, 종리목은 적극적인 무단 정책으로 신속하게 평정했다. 이로 인해 안현독·양무장군이 되었고, 도형후에 봉해졌다.

후에 유수독으로 전임했고, 위나라에 대한 침공 작전을 계획했지만, 과거 무릉만 정벌에서 버려질 뻔했던 경험 때문에 동향의 주육에게 "상주할 수는 없다"고 심중을 토로했다.[2]

전장군·가절에 이르렀고, 다시 무릉태수를 겸임했지만, 재관으로 있다가 사망했다. 사후 집에는 재산도 남지 않았고, 주변에서 유덕을 기렸다. 진수는 종리목이 옛 사람의 전례를 잘 지킨 점을 평가했다.

2. 1. 초기의 행적

어렸을 때, 형 종리인이 항상 종리목이 자신보다 낫다고 주변에 말했다.[4]

젊은 시절 영흥에 머물면서 빈 땅을 개간하였는데, 수확할 즈음에 현의 백성이 이 곳이 본래 자신의 땅이었다고 주장하자, 얻은 벼를 모두 그 사람에게 주었다.[5] 현의 관리가 그 사람을 법에 따라 옥에 가두려 하자 종리목은 다시 말하였다. "나는 잠시 이 곳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적은 양의 벼로 백성을 처벌한다면 어떻게 더 머물 수 있겠습니까?" 현리는 그 사람을 풀어 주었다.[5] 한편 그 백성은 풀려나온 뒤 부끄러워하여 종리목에게 도정한 쌀을 주었으나, 종리목은 이를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5]

의 관료(노국상) 종리의의 7대손이다. 아버지는 누선도위였고, 형은 상계리였다.[2]

형은 어릴 적부터 회계의 사찬이나 오군의 고담과 동등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종리목은 어릴 때부터 말주변이 없고 둔한 성격이었다. 형은 종리목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주변에 말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2]

젊은 시절에 영흥으로 이주하여 광범위한 토지 개간에 종사했다. 그러나 수확 시기에 현지 주민들 중에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 분쟁이 일어났다. 종리목은 항변하지 않고 그 자에게 토지와 수확물을 양보했다. 후에 현장이 그 주민을 수감하고 법에 따른 처벌을 하려 했지만, 종리목은 굳이 그 주민을 비호하며 산음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 때문에 현장은 종리목을 붙잡아두고 주민을 석방했다. 그 주민이 이전에 횡령한 수확물을 종리목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종리목은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종리목은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2. 2. 동오의 신하로서의 삶

육손에게 병사 2천 명을 받아 함께 파양을 토벌했으며, 황룡 3년(231년)에는 반준을 따라 3천 명을 가지고 오계만을 토벌했는데, 도중에 조정의 결의에 따라 적에게 버려졌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4]

적오 5년(242년), 낭중(郞中)에서 태자보의도위(太子輔義都尉)를 거쳐 남해 태수가 되었다.[5] 재임 중에 시흥태수(始興太守) 양도와 태상 등윤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4년 후 병으로 관직을 떠났다.[4] 승상장사·사직, 중서령(中書令)까지 승진하였다.[5] 이때 건안·파양·신도 세 군에서 산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고, 반란군의 수장 황란(黃亂)·상구(常俱) 등의 항복을 받아 그 수하를 흡수했다.[5] 그 공로로 진정후(秦亭侯)에 봉해지고, 월기교위(越騎校尉)가 되었다.[5]

영안 6년(263년), 촉한조위에 멸망하자 촉한 - 동오 국경의 소수민족들의 정정이 불안해졌다.[5] 이 때문에 종리목은 평위장군(平魏將軍)이 되고 무릉태수를 겸하였는데, 임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조위에서 파견한 임시 무릉태수 곽순(郭純)이 소수민족의 반란을 유도하는 한편 자신은 유양(酉陽)까지 진격한 상태였다.[5] 종리목은 231년 반준의 무릉만 진압 사례를 따른 고상(高尙)의 반대 등을 무릅쓰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험로를 넘어 빠르게 진격해 위나라에 붙으려 하는 소수민족들을 진압하고 곽순을 쫓아내 오계를 평정했다.[5]

이후 공안(公安)의 도독(都督)으로 전임되고, 양무장군(揚武將軍)이 되었으며, 작위가 도향후(都鄕侯)로 올라가고, 유수(濡須)의 도독으로 전임하였다.[5] 전장군이 되었고, 여전히 무릉태수를 겸임했다.[5]

종리목이 죽은 후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고, 백성들과 관리들이 그의 죽음을 모두 슬퍼하였다.[5] 아들 종리의(鍾離禕)가 작위를 이어 종리목의 군사를 통솔하였다.[5]

3. 가계

종리

4. 평가

진수는 종리목이 옛 사람의 전례를 잘 지켰다고 평가했다.

4. 1. 긍정적 평가

종리목은 젊은 시절 영흥으로 이주하여 토지 개간에 힘썼으나, 수확 시기에 토지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자 항변하지 않고 토지와 수확물을 양보했다. 현장이 분쟁 당사자를 처벌하려 하자 오히려 그를 비호하여 명성을 얻었다.[2]

건안 21년(216년), 육손파양 토벌에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종군했다.[2] 황룡 3년(231년)에는 반준무릉만 정벌에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는데, 손권이 그를 버리지 않아 간신히 생환했다.[2]

적오 5년(242년), 낭중에서 태자보의교위로 임명되어 태자 손화를 섬겼고, 이후 남해 태수로 승진했다. 부임지에서 오랫동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토벌하거나 복종시켰으며, 시흥 태수 양도는 등인에게 편지를 보내 종리목을 높이 평가했다.[2]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 장리, 사직, 중서령으로 승진했다. 태평 2년(257년) 8월에는 건안, 파양, 신도 삼군의 반란을 진압하여 진정후에 봉해지고 월기교위가 되었다.

영안 6년(263년), 촉한 멸망 직후 나라가 무릉의 오계만을 부추겨 반란을 유도하려 하자, 종리목은 적극적인 무단 정책으로 반란을 신속하게 평정했다. 이 공로로 안현독·양무장군이 되고, 도형후에 봉해졌다.

이후 유수독으로 전임하여 위나라 침공을 계획했으나, 과거 무릉만 정벌에서 버려질 뻔했던 경험 때문에 주육에게 "상주할 수는 없다"고 심중을 토로했다.[2]

전장군, 가절에 이르렀고, 다시 무릉태수를 겸임했지만 재임 중 사망했다. 사후 집에는 재산이 남지 않았고, 주변에서 그의 유덕을 기렸다. 진수는 종리목이 옛 사람의 전례를 잘 지킨 점을 높이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弁亡論
[2] 서적 会稽典録
[3] 서적 삼국지
[4] 서적 회계전록
[5]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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