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심작전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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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심작전이론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소련 붉은 군대의 이론가들이 제1차 세계 대전, 소련-폴란드 전쟁, 러시아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한 군사 교리이다. 이 이론은 여러 부대가 동시 기동을 통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적의 작전 깊숙이 침투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종심작전이론은 1930년대 기계화의 발전과 함께 완성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이 널리 활용했다. 이 이론은 전격전과 유사하게 기동전을 강조하지만, 여러 돌파 지점과 예비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주요 제안자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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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작전이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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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20년대 러시아 내전을 경험한 소련에서는 레프 트로츠키 등이 군사 개혁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기동전 경험을 통해 육군 기계화를 주장했고, 미하일 프룬제는 병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1]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야전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예비대와 병참 정비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 종심 공격 이론의 원형이 되는 '''연속 작전 이론'''이 구축되었다. 1925년 소련은 '적군 야전 교범 초안'에서 기동전은 연속적이어야 하며, 공격 3배의 법칙에 기초한 돌파 전력 집중 사용을 제시했다.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는 1929년 보병 지원, 원거리 지원, 원거리 행동이라는 세 단계 기계화 부대 운용을 주장하며, 장래 전투에서 총 길이 70-75km에 달하는 종대로 2-3일간 반복 공격이 유효하다고 보았다.[62]
1930년대 제1차/제2차 5개년 계획으로 적군의 기계화가 실현되며 종심 전략 이론은 완성되었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지상군 기계화와 함께 세계 최초로 공수 부대를 창설, 공지 일체 대규모 기동 훈련을 성공시켰다. 1936년 투하체프스키 지휘 하에 작성된 '적군 야전 교범'으로 종심 전략 이론은 정식 교리가 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대숙청으로 처형되었지만, 종심 전략 이론은 '적군 야전 교범'으로 계승되었다.[63]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 적군은 종심 전략 이론에 기초한 공세를 실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이 그 집대성으로 평가된다.[64]
제2차 세계 대전 후, 종심 전략 이론은 소련군 지상 전투 교리에 계승되었다. 핵전쟁을 상정한 이론 발전과 전술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종심 돌파 거리는 300-500km를 목표로, 파이프라인 부설 등 병참 능력 향상을 위한 추진 보급 방식이 채용되었다.[65] 1980년대에는 제병 협동의 작전 기동 그룹(OMG)으로 발전했다. 소련군 구상은 제1 사단 기습으로 NATO군에 전술 핵무기 사용 틈을 주지 않고 돌파구를 형성, 제2 사단 돌입, 예비대와 공중 기동 부대 연계하는 현대판 종심 전략 이론이었다.[66]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군에도 종심 전략 이론의 사상과 장비 체계는 계승되는 것으로 추측된다.[66]
2. 1. 기원
1920~1930년대 소련 붉은 군대 이론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소련-폴란드 전쟁, 러시아 내전의 경험, 특히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기병의 기동력이 승패에 미친 영향을 바탕으로 "종심 돌파 작전" 개념을 만들었다.[5] 종심작전이론은 소련의 전선군(Front)과 군(Army) 단위 부대의 기동 시 형성하는 여러 배열과 진형을 포함하며, 한 번의 작전이 아닌 여러 방향의 복합된 연속 작전을 통해 승리를 추구한다.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혁명 정신을 반영하는 새로운 군사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1918년 창설된 붉은 군대는 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소련 중공업 개발과 함께 발전했다. 소련은 군사적 작전 기동성 문제 해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하일 프룬제는 레프 트로츠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군사 교리를 요구했다.[6] 폴란드-소련 전쟁 경험은 프룬제의 입장을 지지했고, 1925년 1월 프룬제는 트로츠키를 대체했다.

소련은 군대를 볼셰비키 이념과 융합하여 전쟁의 본질을 규정하고자 했다. 주요 논쟁은 소모전 전략을 옹호하는 알렉산드르 스베친과 적군 파괴 전략을 주장하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사이에 벌어졌다. 1928년까지 투하체프스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교훈을 고려하여 소모전을 예상했지만, 소련의 크기로 인해 기동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스베친은 이를 받아들여 초기 공세는 빠르지만 결국 진지전과 소모전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다.[9]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와 투하체프스키는 협력하여 1933년 ''종심 작전 조직을 위한 임시 지침'' 매뉴얼을 제작했다. 이것은 "종심 작전"이 공식적인 붉은 군대 문헌에 처음 언급된 사례였다.[12]
1920년대 러시아 내전을 경험한 소련에서는 레프 트로츠키 등이 군사 개혁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기동전 경험을 통해 육군 기계화를, 미하일 프룬제는 병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1]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투하체프스키는 예비대와 병참 정비에 의한 군의 연속 작전 능력 필요성을 깨달았다.
1920년대 후반, '''연속 작전 이론'''이 구축되었다. 1925년 소련은 '적군 야전 교범 초안'에서 기동전은 연속적이어야 하며, 공격 3배의 법칙에 기초한 돌파 전력 집중 사용을 제시했다.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는 1929년 보병 지원, 원거리 지원, 원거리 행동의 세 단계 기계화 부대 운용을 주장했다. 또한, 장래 전투에서 총 길이 70-75km에 달하는 종대로 2-3일간 반복 공격의 유효성을 설파했다.[62]
1930년대 제1차/제2차 5개년 계획으로 적군 기계화가 실현되며 종심 전략 이론은 완성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공수 부대를 창설, 공지 일체 대규모 기동 훈련을 성공시켰다. 1936년 투하체프스키 지휘 하 작성된 '적군 야전 교범'이 발포되어 종심 전략 이론은 정식 교리가 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대숙청으로 처형되었지만, 종심 전략 이론은 '적군 야전 교범'으로 계승되었다.[63]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 적군은 종심 전략 이론 기반 공세를 실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이 그 집대성으로 평가된다.[64]
제2차 세계 대전 후, 종심 전략 이론은 소련군 지상 전투 교리에 계승되었다. 핵전쟁 상정 이론 발전, 전술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종심 돌파 거리는 300-500km를 목표로, 파이프라인 부설 등 병참 능력 향상 추진 보급 방식이 채용되었다.[65] 1980년대 작전 기동 그룹(Operational Maneuver Group, OMG)으로 결실을 맺었다. 소련군 구상은 제1 사단 기습으로 NATO군에 전술 핵무기 사용 틈을 주지 않고 돌파구 형성, 제2 사단 돌입, 예비대와 공중 기동 부대 연계 종심 전략 이론 현대판이었다.[66]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군에도 종심 전략 이론 사상과 장비 체계는 계승되는 것으로 추측된다.[66]
2. 2. 이론의 발전과정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혁명 정신을 반영하는 새로운 군사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붉은 군대는 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소련 중공업을 발전시켜 군사적 작전 기동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이러한 발전의 중심에는 알렉산드르 스베친, 미하일 프룬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군사 과학 협회의 발전을 장려하고 재능 있는 장교 그룹을 파악했다. 특히, 니콜라이 바르폴로메예프와 블라디미르 트리아안다필로프는 심층 공격 작전에서 기술 사용에 크게 기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소련-폴란드 전쟁, 러시아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련의 고위 사령관들은 통일된 군사 교리를 요구했다. 미하일 프룬제는 이러한 요구를 주도했고,[5] 레프 트로츠키의 반대를 받았지만,[6] 결국 프룬제의 입장이 지지를 얻어 1925년 1월 트로츠키를 대체했다.
새로운 교리는 볼셰비키 이념과 군대를 융합하여 소련의 전쟁 방식을 규정하고자 했다.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를 주요 적으로 간주하고, 다가올 전쟁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7]
- 다음 전쟁은 한 번의 결정적인 작전으로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간의 소모전이 될 것인가?
- 붉은 군대는 주로 공격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방어적이어야 하는가?
- 전투의 본질은 유동적일 것인가, 아니면 정적일 것인가?
- 기계화 부대와 보병 부대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 것인가?
이 논의는 알렉산드르 스베친과 투하체프스키 사이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스베친은 소모전 전략을 옹호한 반면, 투하체프스키는 적군의 결정적인 파괴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28년까지 투하체프스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교훈을 고려하여 다음 전쟁은 소모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소련의 광대한 크기로 인해 기동성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스베친은 이를 받아들여 초기 공세는 빠르고 유동적이지만, 결국 진지전과 소모전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다.[9]
스베친은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사용하는 이론을 주장하며, 전술과 전략 사이의 작전술의 이론적 구분을 제시했다. 그는 작전의 역할이 전술적 전투를 통해 ''스타프카''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929년,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와 투하체프스키는 스베친의 개념을 바탕으로 일관된 원칙 체계를 만들기 위해 협력했다. 투하체프스키는 종심 작전의 전술 및 작전 단계의 원칙을 상세히 설명했다.[11] 1933년에는 ''종심 작전 조직을 위한 임시 지침'' 매뉴얼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종심 작전"이 공식적인 붉은 군대 문헌에 처음 언급된 사례였다.[12]
1920년대 러시아 내전을 경험한 소련에서는 레프 트로츠키 등이 군사 개혁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기동전 경험을 통해 육군 기계화를 주장했고, 미하일 프룬제는 병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1]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투하체프스키는 예비대와 병참 정비를 통한 군의 연속 작전 능력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1920년대 후반, '''연속 작전 이론'''이 구축되었다. 1925년 소련은 '적군 야전 교범 초안'을 통해 기동전의 연속성과 공격 3배의 법칙에 기초한 돌파 전력 집중 사용을 제시했다.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는 1929년 보병 지원, 원거리 지원, 원거리 행동이라는 세 단계의 기계화 부대 운용을 주장하며, 장래 전투에서 반복적인 공격의 유효성을 강조했다.[62]
1930년대 제1차/제2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적군의 기계화가 실현되면서 종심 전략 이론이 완성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공수 부대를 창설하여 공지 일체 대규모 기동 훈련을 성공시켰다. 1936년 투하체프스키 지휘 하에 작성된 '적군 야전 교범'이 발포되어 종심 전략 이론은 정식 전투 교리가 되었다. 비록 투하체프스키는 대숙청으로 처형되었지만, 종심 전략 이론은 '적군 야전 교범'을 통해 계승되었다.[63]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 붉은 군대는 종심 전략 이론에 기초한 공세를 실시했고,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이 그 정점으로 평가된다.[6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종심 전략 이론은 소련군 지상 전투 교리에 계승되었다. 핵전쟁을 상정한 이론 발전이 이루어졌고, 전술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종심 돌파 거리는 300-500km를 목표로 했고, 파이프라인 부설 등을 통해 병참 능력을 높이는 추진 보급 방식이 채택되었다.[65] 1980년대에는 작전 기동 그룹(OMG)으로 발전하여 제병 협동을 이루었다. 소련군 구상은 제1 사단 기습으로 NATO군에 전술 핵무기 사용 틈을 주지 않고 돌파구를 형성한 후, 제2 사단이 깊숙이 돌입하고 예비대와 공중 기동 부대가 연계하는 현대판 종심 전략 이론이었다.[66]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군에도 종심 전략 이론의 사상과 장비 체계가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66]
2. 3. 대숙청과 그 이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소련에서 대숙청이 벌어져 붉은 군대 지휘관들이 숙청되었고, 종심작전이론의 핵심 인물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도 "트로츠키주의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었다.[63] 스페인 내전의 전훈으로 기갑부대 집중 운용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어 종심작전이론은 폐기되었고, 기갑부대는 보병 지원에 한정되는 소규모로 운용되었다.1939년 겨울 전쟁에서 소련군은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에 초반에 참패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이 전격전으로 큰 승리를 거두자, 소련군 지휘부는 종심 작전 이론을 다시 복원시켰다. 공식적인 복원 이전인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주코프는 종심 작전 이론으로 일본군을 격파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통신체계 기술 부족으로 종심 작전 실현이 어려웠으나, 미국의 랜드리스를 통해 통신 기기를 접수하면서 가능해졌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실전 경험을 통해 종심 작전 이론을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독소전쟁 후기의 바그라티온 작전,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일본을 상대로 한 만주 전략공세작전 등은 모두 이 작전의 규범으로 실행된 것이다.[64]1936년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지휘 아래 작성된 '적군 야전 교범'이 발포되어 종심 작전 이론은 정식으로 적군의 전투 교리가 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대숙청으로 처형되었지만, 종심 작전 이론은 '적군 야전 교범'에 의해 계승되었다.[63]
3. 원칙
종심작전이론은 소련군의 전선군 및 군 단위 부대가 기동할 때 형성하는 다양한 배열과 진형을 포함한다. 이 이론은 한 번의 작전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복합적인 연속 작전을 펼쳐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군의 전술에만 한정된 독일의 전격전 이론과는 달리, 소련의 생산력에 적합한 국가적 전략과 전술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종심 작전은 여러 소비에트 군대 전선 규모 부대가 동시에 기동하는 것을 포함하며, 각 작전은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주 목표를 숨겨 적이 강력한 기동 예비대를 파견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임무 | 작전 지역 | 행동 | 부대 할당 |
---|---|---|---|
전략적 목표 | 작전 극장 | 전략 작전 | 전략 부대 (전선) |
전략적 임무 | 전략적 방향 | 전선 작전 | 작전-전략 부대 (전선) |
작전 임무 | 작전 방향 | 군 규모 작전 전투 | 작전 부대 (충격군/군단) |
전술적 임무 | 전장 | 전투 | 작전-전술 부대 (충격군/군단/사단) |
종심 작전 개념은 공격뿐만 아니라 방어에도 적용되었다. 방어 단계에서는 중요한 전략적 목표를 식별하고 모든 방향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공격 방법과 마찬가지로 목표 지역을 작전 구역과 전술 구역으로 나누었다. 방어 시 목표 전방의 전술 구역은 포병과 보병 부대로 강화되었고, 외곽과 최전방 방어선에는 대규모 지뢰가 매설되었다. 전술 구역에는 주요 목표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여러 개의 방어선이 연이어 배치되었고, 주요 목표에서 1–3km 이내에는 소련 전투 부대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충격 부대가 배치되었다.[15]
종심 방어의 목표는 소련 방어선을 처음 돌파할 정예 적 부대의 공격을 여러 번 무력화하여 소진시키는 것이었다. 적이 소련 방어에 갇히면, 작전 예비대가 투입되어 기계화 보병, 보병, 기갑 부대 및 강력한 전술 항공 지원으로 구성된 신선한 기동 부대가 지친 적과 반격을 벌여 측면을 공격하거나, 소련 전술 구역 밖으로 몰아냈다.[16]
1920년대 러시아 내전을 경험한 소련에서는 레프 트로츠키 등이 군사 개혁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육군의 기계화를, 미하일 프룬제는 병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1]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싸운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예비대와 병참 정비에 의한 군의 연속 작전 능력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1930년대 제1차/제2차 5개년 계획으로 적군의 기계화가 실현되면서 종심 전략 이론은 완성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공지 일체에 의한 대규모 기동 훈련을 성공시켰고, 1936년에는 종심 전략 이론이 정식 전투 교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 소련군은 종심 전략 이론에 기초한 공세를 실시했으며,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이 그 집대성으로 평가된다.[64]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종심 전략 이론은 소련군 지상 전투 교리에 계승되었다. 핵전쟁을 상정한 이론 발전이 있었고, 전술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1980년대에는 작전 기동 그룹으로 발전했다.[66]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군에도 종심 전략 이론의 사상과 장비 체계는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66]
종심 공격의 전술적 특징은 주력 부대가 광범위한 정면에 동시 공격을 가하고, 목표로 하는 돌파 거리가 100km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사용하고, 미리 편성된 종심 대형을 유지해야 했다. 주력 부대는 적의 제1선을 돌파하는 제1제대와 돌파구로부터 파상 공격을 계속하는 제2제대로 나뉜다. 각 부대는 손해를 개의치 않고 주어진 목표 지점까지 돌파해야 하며, 후방 부대가 초월하여 다음 목표 지점까지 진출을 계속함으로써 연속적인 파상 공격이 실시된다. 광범위한 공격 정면에서 이러한 공격을 가함으로써 적군의 대처 능력을 넘어선 밀도와 속도로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적군 예비대 등에 의한 대응을 방해하기 위해 적 후방까지 동시에 화포나 항공기로 공격한다.
3. 1. 목표
종심작전이론의 목표는 동시 공격으로 적의 방어력을 돌파하여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작전은 매우 유동적인 구조를 가지며, 적의 종심(縱深)을 유린하여 방어 능력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13]작전 부대는 보통 두 개의 제대로 나뉜다. 제1제대는 주공(主攻)을 담당하여 전선 정면에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다. 제2제대는 이 돌파구를 유지하고 제1제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13]
심층 작전은 여러 소비에트 군대 전선 규모의 부대가 동시에 기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단일 작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전을 통해 적 방어 체계에 치명적인 실패를 유도하는 것이다. 각 작전은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주공과 주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방어자가 짐작하게 하여 강력한 기동 예비대를 해당 지역으로 보내는 것을 막는다. 이를 통해 군대는 방어자가 회복하기 전에 넓은 지역을 휩쓸 수 있다. 또한, 기만 작전은 탄력적 방어를 시도하는 적을 좌절시킨다. 지원 작전 자체도 상당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며, 지원 부대는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을 때까지 공세를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스타프카''가 결정한 주된/결정적인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었다.[13]
전략적 목표, 즉 임무는 주요 전략적 목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주요 목표는 대개 지리적 목표와 적 무력의 일부 파괴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각 작전의 전략적 임무는 소비에트 전선에 의해 수행되었다. 전선 자체에는 대개 여러 충격 군이 배속되어 목표 지점으로 수렴하여 포위하거나 공격하도록 했다. 이를 확보하는 수단은 사단과 그 전술적 구성 요소의 역할이었으며, 소비에트 심층 작전은 이를 전술적 임무라고 칭했다.[13]
종심 공격의 최종적인 목표는, 포위를 통해 적군을 섬멸하는 것이다. 이는, 우회를 통해 전략 목표 지점을 점령하거나 파괴하는 것을 중시하는 전격전과는 다르다.[67] 종심 공격에서는, 포위 섬멸을 위해, 공정 부대로 퇴로를 차단하거나, 예비대를 투입하여 추격전을 실시한다.
3. 2. 기술적 요구
소련의 공업화 성공으로 붉은 군대는 공군과 기갑부대를 확충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종심작전이 요구하는 기동력과 돌파력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종심작전 개념 발전에 큰 영향을 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17]- 공군은 보병이나 포병과 같은 다른 병과의 공격 범위를 넘어서야 한다.
- 기갑부대는 돌파를 담당해야 한다.
- 최대한의 효과를 위해서 공군과 기갑부대는 대규모로 편제되어야 한다.
- 적의 중점을 일시에 타격해야 한다.
게오르기 사모일로비치 이세르손은 붉은 군대의 공격 제대(에셜론)가 100~120 km 종심을 가져야 한다고 계산했다. 그는 적의 전술적 방어가 2개의 전선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첫 번째 전선은 얕고 5~6 km까지 뻗어 있으며, 두 번째 전선은 그 뒤에 형성되어 12~15 km의 종심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너머에는 철도 종착역과 보급 기지를 포함하는 50~60 km 종심의 작전 종심이 있으며, 이곳에 주요 적 부대가 집중될 것이라고 보았다. 작전 종심 너머의 세 번째 구역은 전략 종심으로, 국가의 인력 자원과 산업 전력 공급 시설, 군사 작전 지역 간의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며, 야전군 수준을 포함하는 전략적 병력의 사령부가 위치한다고 하였다.[20]
이세르손은 공격 구역의 폭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70~80 km 전선에 걸친 공격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3~4개의 소총병단이 30 km 전선을 따라 돌파하며, 유리한 조건에서는 다른 소총병단과 함께 48~50 km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조건에서 소총병단은 10~12 km 전선을 따라 공격하고, 병단의 첫 번째 제대에 할당된 각 사단은 6 km 전선을 할당받는다고 하였다. 다섯 번째 지원 소총병단은 주요 공격의 측면에 대한 기만 공격을 수행하여 반격을 묶어두고, 적에게 주요 공격 지역에 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예비군이 도착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22]
4. 용어, 병력 할당 및 임무
임무 | 작전 지역 | 행동 | 부대 할당 |
---|---|---|---|
전략적 목표 | 작전 극장 | 전략 작전 | 전략 부대 (전선) |
전략적 임무 | 전략적 방향 | 전선 작전 | 작전-전략 부대 (전선) |
작전 임무 | 작전 방향 | 군 규모 작전 전투 | 작전 부대 (충격군/군단) |
전술적 임무 | 전장 | 전투 | 작전-전술 부대 (충격군/군단/사단) |
5. 전술적 종심 전투
소련 소총병단은 전술적 방법의 핵심으로, 전술적 심층 전투의 핵심 구성 요소를 형성했다.[23] 전투 서열은 3개 제대로 구성되었다. 제1제대는 부대의 첫 번째 계층으로 적과 접촉하여 전술 구역을 돌파한다. 제2제대는 돌파를 지원하고, 예비대는 이를 작전적으로 활용한다. 유지 부대는 적 증원을 분산 공격 또는 방어 차단 수단을 통해 묶어두기 위해 전투 구역 양 측면에 배치된다.[24]
방어에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유지 부대는 주 저항선 전방에 배치된다. 이 경우 유지 제대의 임무는 주요 적 부대를 약화시키거나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달성된다면, 적은 주요 방어선에서 붙잡히고 꿰뚫릴 정도로 충분히 약화될 것이다. 만약 실패하여 적이 유지 부대를 격파하고 여러 주요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 전차와 공격기를 포함한 기동 작전 예비대가 투입된다. 이러한 병력은 유지 부대와 충격 부대 모두에 할당되었으며, 종종 주요 방어선 뒤에 배치되어 전투에 지친 적의 공격과 교전했다.[25]
전술 임무를 수행하는 데 사용된 부대는 1933년부터 1943년까지 다양했다. 1943년, 붉은 군대가 심층 전투를 제대로 실행하기 시작한 해에, 한 전선 지휘하의 각 전술 부대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26]
'''소총군'''[26]
편제 | 구성 |
---|---|
소총병단 3개 | 소총 사단 7–12개 |
포병 연대 4개 | |
기타 |
편제 | 구성 |
---|---|
포병 사단 1–2개 | |
전차 또는 자주포 여단 3–4개 | |
전차 또는 자주포 연대 10개 | |
대공 사단 2개 | |
기계화군 1–2개 |
이 부대는 약 80,000–130,000명의 병력, 1,500–2,000문의 총과 박격포, 48-497문의 로켓 발사기, 그리고 30-226문의 자주포를 갖추고 있었다.[26]
'''소총병단'''[27]
편제 |
---|
소총 사단 3개 |
포병 연대 1개 |
신호 대대 1개 |
공병 대대 1개 |
편제 |
---|
소총 연대 3개 |
포병 연대 1개 |
대전차 대대 1개 |
공병 대대 1개 |
신호 중대 1개 |
정찰 중대 1개 |
사단은 약 9,380명의 병력(근위 소총 사단에서는 10,670명), 야포 44문, 박격포 160문, 대전차포 48문을 갖추고 있었다.[27]
6. 종심 작전
소련 분석가들은 적의 전술 지역을 돌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인식했다. 전술적 깊이 전투는 전선 너머, 적 전선의 작전적 및 전략적 깊이로 병력이 진격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1936년, 군대 또는 전선 수준의 작전에 맞춘 "깊이 작전"(''glubokaya operatsiya'') 개념이 등장했다.[31]
깊이 작전 단계에서 사용된 병력은 훨씬 더 컸다. 붉은 군대는 공군, 공수 부대 및 지상군의 노력을 사용하여 "적의 작전 방어 전체 깊이에 걸쳐 동시 공격"을 시작하여 작전 지역에 배치된 가장 강력한 병력을 세부적으로 격파하여 지연시키고, 전선(전술 구역)과 후방의 작전적 깊이를 점령하여 해당 부대를 포위하고 파괴하며, 방어자의 작전적 및 전략적 깊이로 공격을 계속할 것을 제안했다.[32]
깊이 작전의 중심 구성은 충격군이었으며, 다른 부대와 협력하거나 전략적 전선 작전의 일부로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여러 충격군이 전략 전선에 종속될 것이다. 트리아안다필로프는 저서 ''현대 군대의 작전 특징''에서 깊이 작전을 위한 병력 할당 배치를 만들었으며, 이는 1930년대 내내 유용성을 유지했다. 트리아안다필로프는 충격군에 4~5개 군단으로 구성된 약 12~18개 소총 사단을 배정했다. 이러한 부대는 16~20개 포병 연대와 8~12개 전차 대대로 보완되었다. 1931년 사망 당시 트리아안다필로프는 항공 부대를 전선 부대에 배정하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병력 제안을 제출했다. 이것은 폭격기 항공기 2~3개 항공 여단과 전투기 항공기 6~8개 비행대로 구성되었다.[33]
니콜라이 에피모비치 바르폴로메예프는 깊이 전투의 정량적 지표를 개발하는 것보다 충격군의 임무의 기계적 측면에 더 관심이 있었으며, 이를 주 진격 축을 따라 "중단 없는, 깊고 파괴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칭했다.[34]
종심 공격의 최종적인 목표는 포위에 의한 적군의 섬멸이다. 이는 우회에 의한 전략 목표 지점의 탈취나 파괴를 주안점으로 하는 전격전과는 다르다.[67] 종심 공격에서는 포위 섬멸을 위해 공정 부대에 의한 퇴로 차단이나, 예비대 투입에 의한 추격전이 실시된다.
6. 1. 바르폴로메예프와 종심 작전의 구성
바르폴로메예프는 충격군을 두 개의 종심 부대로 편성하고자 했다. 첫 번째는 여러 소총 군단으로 구성된 전술 돌파 종심 부대(제1종심)였다. 이들은 진격 속도를 유지하고 적에게 지속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 예비대의 2선 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 부대는 적의 전방 및 예비 ''전술 부대''와 교전하기 위해 적 전술 방어선으로 15~20km 진격할 예정이었다. 적이 패배하면, 붉은 군대는 점령된 전술 구역을 통과하여 적 작전 구역을 공략하기 위해 투입되지 않은 새로운 작전 부대(제2종심)를 투입할 준비를 갖추었다.[36]제1종심은 강력한 화력과 대량 투입으로 겹겹이 구축된 적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제2종심 작전 예비대는 화력과 기동성을 결합했는데, 이는 전자가 부족한 점이었다. 작전 부대는 기계화, 기동화 및 기병 부대로 대거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돌파 지점의 측면에서 아직 교전하지 않은 적 전술 부대를 포위하고자 했다. 다른 부대는 작전 구역을 점령하고 적 작전 예비대가 후방을 통과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진격할 것이었다. 적의 작전 후방에서 통신 및 보급 기지는 소련군의 주요 목표였다. 전술 구역이 증원으로부터 격리되고 증원이 구원을 막히면서 전선은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방어자에게 작전 마비를 유발할 것이었다.[37]
공식 문헌에서 바르폴로메예프는 적 작전 깊이를 추격하는 부대는 하루에 20~25km를 진격해야 한다고 밝혔다. 적 전술 부대의 측면을 공격하는 부대는 적이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에 40~45km를 진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38]
7. 종심 작전의 교전
종심 부대는 공격 초기 며칠 동안 적 집결지의 측면을 공격하는 동시에 주 이동 부대가 따라붙도록 하였다. 이는 정면 충돌을 피하고 적군이 전술 지역에 도달하는 것을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예상되는 작전 범위는 150km에서 200km가 될 수 있었다.[41]
공격 성공 시, 기계화 부대가 측면을 돌파하여 보병과 함께 적을 포위하여 성공을 공고히 할 것이다. 방어군이 철수하면 기계화 기병대와 기동 부대가 철수하는 적 열을 괴롭히고, 차단하고, 파괴할 것이며, 이는 강력한 항공 부대의 공격도 받게 될 것이다.[42]
8. 병참
소련 종심작전의 발달은 육군 및 전선 집단군의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후방 지원 역할, 임무, 절차 및 자원의 복합체로, 전쟁 수행 방식을 공식화하거나 적용하려는 소련의 전반적인 노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소련의 군사 이론가와 계획가들은 병참 이론과 실천이 모든 수준에서 소련의 전쟁 수행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및 기술적 발전에 의해 형성된다고 강조했다.[61]
소련 이론은 전략, 종심작전술 및 전술의 다른 구성 요소와 일치하는 병참 이론과 실천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정치, 경제, 군사 환경의 많은 변화와 기술 변화의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병참 교리는 소련의 사고에서 중요한 특징이었다.
1920년대 러시아 내전을 경험한 소련에서는 레프 트로츠키 등이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내전에서의 기동전 경험을 통해 육군의 기계화를 주장했고, 미하일 프룬제는 군의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병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1]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야전군 사령관으로 싸운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적군의 공세가 좌절된 결과로부터 예비대와 병참 정비에 의한 군의 연속 작전 능력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후 프룬제와 투하체프스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 종심 공격 이론의 원형이 되는 '''연속 작전 이론'''이 구축되었다.
9. 다른 방법론과의 차이점
1930년대 제3 제국 독일군의 방법론은 ''전격전''으로 불렸는데, 소련의 종심 작전과 유사하다는 오해가 있지만, 기동전과 공격적 자세 강조 외에는 차이가 있다.[44] ''전격전''은 ''슈베어푸크트(핵심 지점)''에 대한 단일 공격을 강조한 반면, 종심 작전은 여러 돌파 지점과 예비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소련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독일은 인구가 적지만 훈련된 군대가 우수했고, 소련은 인구가 많지만 훈련된 군대가 적었다. 그 결과, ''전격전''은 질이 중요한 좁은 전선 공격을, 종심 작전은 양이 효과적인 넓은 전선 공격을 강조했다.[45]
종심 작전은 적이 작전 방어를 수행하려는 의지를 잃게 만드는 조건을 조성하는 능력을 강조했다.[45] 이는 독일이 집착했던 클라우제비츠의 전장 파괴 및 적 야전군의 전멸 원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10. 숙청의 영향
대숙청으로 스베친, 바르폴로메예프,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한 붉은 군대의 주요 장교들이 제거되었다.[47] 소련 군대에 대한 숙청은 붉은 군대에게 종심 전투 전략, 작전 및 전술을 제공하고 소련군을 재건한 장교 세대를 제거했으며, 이들의 사상 또한 함께 제거되었다.[48] 약 35,000명의 병력, 즉 장교단의 약 50%가 숙청되었으며, 세부적으로는 5명의 원수 중 3명, 15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 13명, 85명의 군단 사령관 중 57명, 195명의 사단 사령관 중 110명, 406명의 여단 사령관 중 220명이 처형, 투옥 또는 해임되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붉은 군대에서 작전 및 전술 능력을 갖춘 인력의 핵심을 파괴했다.[49] 다른 자료에 따르면 67명의 군단 사령관 중 60명, 397명의 여단 사령관 중 221명, 연대 사령관의 79%, 연대 참모장의 88%, 모든 대대 사령관의 87%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대에서 제거되었다고 한다.[50]
종심 작전 개념은 이를 창안한 인물들이 비난받으면서 소련의 군사 전략에서 버려졌다.[47]
11. 제2차 세계 대전
대숙청으로 소련군 내 종심작전이론의 권위자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처형되고, 스페인 내전의 전훈으로 기갑부대 운용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면서 종심작전이론은 폐기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군은 겨울 전쟁에서 초반에 큰 피해를 입었다.[62]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이 전격전으로 큰 승리를 거두자, 소련군 지휘부는 종심 작전 이론을 다시 복원하였다. 할힌골 전투에서 주코프는 이미 이 이론을 활용해 일본군을 격파한 경험이 있었다.[63]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투하체프스키가 생존했더라도 종심 작전의 실현은 어려웠을 것이다. 대규모 기갑 전력과 항공 전력은 스탈린의 중공업 정책으로 어느 정도 준비되었지만, 통신 체계 기술 부족으로 인해 렌드리스를 통한 지원 이전까지는 완전한 실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다.[63]
소련군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실전 경험을 통해 종심 작전 이론을 발전시켰다. 바그라티온 작전,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만주 전략공세작전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64]
종심 작전의 포기는 소련 군사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겨울 전쟁 이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은 이 개념을 다시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붉은 군대는 초반에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생존, 부활, 성숙의 과정을 거쳐 독일군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52]
소련 군사 분석가들은 전쟁을 세 기간으로 나누었다. 1941년 6월부터 1942년 11월까지는 전략적 방어, 1942년 11월부터 1943년 12월까지는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과도기, 1944년부터 1945년까지는 전략적 주도권을 바탕으로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한 시기였다. 1942년 말까지 소련은 종심작전 개념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만큼 회복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략적 반격을 시작하여 쿠르스크 전투 이후 전략적 주도권을 확고히 했다.[52]
11. 1. 모스크바 공세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붉은 군대는 일련의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독일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남부 집단군은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점령했으며, 코카서스의 핵심인 로스토프나도누를 위협했고, 중부 집단군은 태풍 작전을 시작하여 모스크바에 접근하고 있었다. ''스타프카''는 북부 및 남부 집단군을 저지했지만, 소련 수도에 접근하는 독일군에 직면했다. 소련의 전략은 수도 방어와 가능하다면 중부 집단군의 격파 및 파괴였다. 11월 말까지 수도 양쪽의 독일군의 포위망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스타프카''는 반격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작전 목표는 적 작전 후방을 공격하여 모스크바 공격의 선봉에 선 독일군을 포위하거나 파괴하는 것이었다. 독일 후방 깊숙이 공격하면 중부 집단군이 붕괴될 것으로 기대했다.11. 2. 르제프-뱌즈마 공세
소련 최고 사령부(Ставка, Stavka)는 1942년 초, 붉은 군대가 지속적인 작전 기동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크고 일관된 기계화 및 장갑 부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2년 4월, 소련군은 새로운 전차 군단을 투입했다. 각 전차 군단은 168대의 전차로 구성된 3개의 전차 여단과 1개의 기계화 보병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최고 사령부는 이러한 군단을 육군 및 전선 사령관의 재량에 맡겨 이전 기병 군단과 함께 운영되는 기동 부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기병 군단은 이제 새로운 장갑 부대를 보충받았다. 최고 사령부는 1942년 초에 이러한 새로운 전차 군단을 처음으로 공격적인 역할에 투입했다.[53]이 기간 동안 독일군은 크렘린 작전이라는 기만 작전을 시작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소련 최고 사령부가 독일군의 주 공격이 여름에 모스크바를 겨냥할 것이라고 믿도록 오도하는 것이었다. 최고 사령부는 독일군의 공격이 모스크바를 보호하는 중앙 전선을 상대로 남부 집게의 역할을 하는 남부 집단군을 포함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군의 공격을 선제하기 위해 붉은 군대는 중앙 집단군에 대한 르제프-뱌즈마 전략 공세 작전과 남부 집단군에 대한 하르코프 공세 작전(공식적으로 바르벤코보-로조바 공세)을 시작했다. 두 작전은 모두 청색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독일 부대를 분산시키고 소모시키기 위한 방해 공세로 직접 연결되었다.[54]
11. 3. 우라노스 작전과 제3차 하르코프 전투
1942년 10월까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에게 사건의 진행에 대한 더욱 강력한 통제력을 부여했다. 소련의 전략은 제6군을 제거하고 남부 집단군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44]작전적 측면에서,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 시로 유인함으로써, 소련은 독일군이 기동전에서 더 뛰어난 경험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했다. 붉은 군대는 적군이 도시의 지형에 의해 방해를 받아 제한된 지역에서 싸우도록 강요할 수 있었고, 개활지에서만큼 기동성이나 화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독일 제6군은 심각한 손실을 견뎌야 했고, 이로 인해 OKW는 중심부를 확보하기 위해 측면을 약화시켰다. 이는 제대로 장비를 갖추지 못한 추축국 동맹군이 작전적 중심—즉, 작전적 종심—을 방어하도록 남겨두었다. 소련 정보부가 추축국 전선이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 측면을 공격하여 독일군을 포위했다 (우라노스 작전). 붉은 군대의 임무는 고립된 독일군과 구원군 사이에 강력한 장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소련의 목표는 독일군이 겨울 조건에서 약화되도록 하고, 포위된 부대를 구원하려는 적의 시도에 마모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적이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판단되면, 강력한 공세로 적 야전군을 완전히 제거할 것이다. 이러한 포위 전술은 적군을 후방으로 제거할 것이다.[44]

적 전술 부대 (적 군단 및 사단)뿐만 아니라 작전 수단, 즉 이 경우 제6군 자체를 파괴하는 종심 전투 단계를 연습한 후, 하르코프를 발판으로 삼아 남서 방향으로 적의 종심으로 공격하는 종심 작전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전자를 점령하면 붉은 군대는 남부 집단군의 대부분을 코카서스에 가둘 수 있었다. 남은 유일한 탈출로인 케르치 반도를 거쳐 크림 반도로의 탈출이 다음 목표가 될 것이다. 이 작전으로 붉은 군대는 독일군의 남부 전선을 붕괴시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은 적군이 위협받는 지역에 시기적절하게 작전 예비대를 파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 및 북부 지역에서 기만 작전을 통해 지원을 받았다.

우라노스 작전은 전술적 깊이 전투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참모본부의 깊이 작전 계획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훼손되었다. 스탈린의 조급함은 ''스타프카''가 준비되기 전에 공격을 강요했다. 물류적으로 소련군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북쪽의 기만 작전 역시 아직 실행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명령은 유효했다. 조기에 행동을 취하도록 강요받은 붉은 군대는 하르코프를 향해 좁은 침투를 만들 만큼 충분한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물류적으로 지쳐 있었고 후방 지역으로 후퇴하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 기만 작전의 부재로 인해 독일군은 위험을 인지하고 강력한 기동 부대를 집중시키고 하르코프에 충분한 예비 병력을 파견할 수 있었다. 붉은 군대의 측면이 노출되자 독일군은 쉽게 돌출부를 차단하고 제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많은 소련군 부대를 파괴했다.
깊이 작전의 개념은 스탈린이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이 시점부터 군사적 의사 결정에서 대부분 물러섰다. 이 패배는 깊이 작전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했다. 제3차 하르코프 전투는 기만, 즉 ''마스키로프카'' 작전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만 및 속임수 기술은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소련 공격 작전의 특징이 되었다.
11. 4. 쿠르스크 전투
쿠르스크 전투는 종심작전의 방어와 공격 측면을 모두 결합했다. 1943년 여름 소련의 작전은 주도권을 확보하여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력 균형과 작전 절차에서 영구적인 우위를 달성하고 전장에서 주도권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57]소련의 전략은 1941년과 1942년에 잃어버린 소련 영토를 해방하기 위해 추가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방어 수단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기로 결정했다. 쿠르스크 주변의 돌출부는 독일군에게 명백하고 유혹적인 목표가 되었고, 독일군이 이 목표 지역을 먼저 공격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붉은 군대는 미리 준비된 진지에 대항하여 독일군 부대를 소모시켜 전력 비율을 적에게 불리하게 형성할 수 있었다. 주도권을 확보하고 적을 소모시킨 후, 전략 예비대는 남아있는 적군을 마무리하기 위해 투입될 것이다. 이 전략이 성공하면 붉은 군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적을 추격하고 1941년에 잃어버린 키예프와 같은 산업 지역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소련 전략가들은 우크라이나가 루마니아와 같은 독일의 동맹국, 즉 추축국 군사 작전에 필수적인 유전을 가진 루마니아에 도달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전 방법은 상대를 기동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붉은 군대는 독일군의 진격 축을 따라 강력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두 개의 소총 사단이 첫 번째 벨트를 방어하고, 하나가 두 번째 벨트를 방어했다. 첫 번째 벨트 사단은 폭 8~15km, 깊이 5~6km의 지역만 방어했다.[58] 연속적인 방어 벨트는 독일군의 속도를 늦추고 그들이 작전 깊이로 돌파하기 위해 느리고 소모적인 전투를 수행하도록 강요했다. 적의 작전 속도를 늦추는 것은 또한 소련 정보 분석가가 독일군 부대와 그들의 진격 방향을 추적할 수 있게 해주어 소련 예비 부대가 독일군의 선두 부대가 세 개의 주요 방어 벨트 각각을 돌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확하게 배치될 수 있도록 했다. 정보는 또한 독일군이 소련의 방어에 갇히면 자체 공세(쿠투조프 작전 및 폴코보데츠 루뱐체프 작전)를 시작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압도적인 규모의 소련 기갑 및 기계화 사단이 이 목적으로 작전 예비대로 투입되었다.[59]
전술적 수준은 보병과 포병으로 구성된 요새화되고 정적인 방어에 크게 의존했다. 대전차포가 방어 전체 깊이에 설치되었다. 전술 구역에는 소수의 전차가 투입되었으며, 방어의 특성상 전차의 기동성을 빼앗았을 것이다. 대신 소수의 전차와 자주포만이 방어에 약간의 기동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들은 국지적인 반격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소규모 그룹으로 분산되었다.[60] 이러한 전술은 독일군의 속도를 늦추고, 소련 전방 구역을 공격하는 데 힘과 탄약을 소모하도록 강요했다. 소련은 독일군이 전술 구역 내에서 저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방어에 대전차 지뢰와 대인 지뢰를 대량으로 배치했다.
독일군은 예상대로 1943년 7월 5일에 작전명 시타델(Operation Citadel)로 공세를 시작했다. 소련군은 진격을 늦추는 데 성공했다. 북쪽에서 독일 제9군이 오렐에서 남쪽으로 진격했으나, 주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여 3번째 벨트에서 멈췄다. 독일군은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기동 예비대를 투입해야 했고, 이것은 소련군이 쿠투조프 작전(Operation Kutuzov)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제2 기갑군을 공격하면서 소련의 기계화 부대는 독일 제9군을 차단할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기동 예비대를 투입하고 철수를 조직하여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남쪽에서 소련의 계획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고, 비상 계획이 시행되어야 했다. 독일군은 세 개의 소련 방어 벨트를 모두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소련군이 전술 방어 벨트에 묶어 유리한 조건에서 적과 교전하기 위해 작전 예비대를 투입할 기회를 박탈했다. 대신, 남부 반격을 위해 계획된 폴코보데츠 루뱐체프 작전(Operation Polkovodets Rumyantsev)을 위한 작전 부대는 프로호로프카와 그 인근 지역에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프로호로프카 전투로 이어졌다. 전술 배치와 작전 계획이 북쪽만큼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전략적 주도권은 여전히 얻었다.
12. 냉전
1920년대 러시아 내전을 경험한 소련에서는 레프 트로츠키 등이 군사 개혁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기동전 경험을 바탕으로 육군의 기계화를, 미하일 프룬제는 병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1]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참전했던 투하체프스키는 예비대와 병참 정비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 종심 공격 이론의 원형인 '''연속 작전 이론'''이 구축되었다. 1925년 소련은 '적군 야전 교범 초안'을 통해 기동전의 연속성과 공격 전력 집중을 제시했다.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는 1929년 기계화 부대 운용 방안과 종심 70-75km에 이르는 공격의 유효성을 주장했다.[62]
1930년대 제1차/제2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적군의 기계화가 실현되면서 종심 전략 이론이 완성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공수 부대를 창설하여 공지 일체 작전을 성공시켰다. 1936년 '적군 야전 교범'이 발간되어 종심 전략 이론은 정식 교리가 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대숙청으로 처형되었지만, 이론은 계승되었다.[63]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에서 소련군은 종심 전략 이론을 바탕으로 공세를 펼쳤고,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이 그 정점으로 평가받는다.[6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종심 전략 이론은 소련군 지상 전투 교리에 계승되었다. 핵전쟁을 상정한 이론 발전이 이루어졌고, 전술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종심 돌파 거리는 300-500km를 목표로 했고, 파이프라인 부설 등을 통한 추진 보급 방식이 채택되었다.[65] 1980년대에는 작전 기동 그룹(OMG)으로 발전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군에도 종심 전략 이론의 사상과 장비 체계가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6]
12. 1. 중앙 유럽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 동맹국들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와 종심 작전 개념을 활용하여 내독 경계에서 나토를 위협했다. 일부 서방 관측통들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속도와 기습을 혼합하여 약 48시간 만에 서유럽을 점령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61] 대규모 공습으로 나토의 기반 시설과 증원군을 파괴하는 한편, VDV (공수 부대), 스페츠나츠 (특수 부대), 해군 보병이 국경을 넘어 전차 및 기계화 보병 사단의 진격을 도울 것이었다. 이 전차 및 기계화 보병 사단의 선두 부대들은 적과의 교전을 피하고 가능한 한 멀리, 가능한 한 빠르게 진격하여, REFORGER 부대가 북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오기 전에 승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62]12. 2. 아시아
1960년대 중소 결렬로 소비에트 최고 사령부는 종심 작전을 통해 중국을 침공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들은 중국이 제대로 방어하거나 반격할 기회를 갖기 전에 주요 산업 중심지 깊숙이 진격하는 것을 구상했다.[61] 그러나 인민해방군의 엄청난 병력과 지형에 대한 이해, 그리고 당시 핵무기 보유는 소련의 진격을 극도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61] 1968년, 1969년, 1979년에 양측이 세 차례에 걸쳐 전쟁 직전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양측 모두 거대한 군대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침공하는 것을 다소 주저했다.[61]13. 21세기
1999년 봄, 코소보 위기와 NATO의 연합군 작전이 R2P 교리의 결과로 발생했다. 전투 작전에는 지상전이 없었으므로, 전선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세르비아 상공의 공중전은 공군이 전략적 목표와 야전 부대를 폭격하면서 "종심 전투"였다. 육군 소장 로버트 H. 스케일스는 미국이 "전략적 선제 공격"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초기에 도착하는 지상군이 적과 초기 작전 목표 사이에 위치할 수 있도록 적을 충분히 지연시키기 위한 공군력의 사용"으로 정의된다.[60]
14. 주요 제안자
-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야전군 사령관으로 참전, 적군의 공세 좌절 경험을 바탕으로 예비대와 병참 정비에 의한 군의 연속 작전 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61] 1936년에는 그의 지휘 아래 작성된 '적군 야전 교범'을 통해 종심 전략 이론을 정식으로 적군의 전투 교리로 확립했다.[63]
- 블라디미르 트리아다필로프: 1929년 보병에 대한 직접 지원, 원거리 지원, 원거리 행동이라는 세 단계의 기계화 부대 운용을 주장했다. 또한, 장래 전투에 대해 총 길이 70-75km에 달하는 종대로 2-3일 계속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공격의 유효성을 설파했다.[62]
- 게오르기 이세르손
- 니콜라이 예피모비치 바르폴로메예프
- 게오르기 주코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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