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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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사홍은 본명이 주능이며 자는 사홍인 인물로, 명나라 영락제 치세의 무관이다. 그는 홍무제 치세 말에 무관으로 관직에 나섰으며, 정난의 변에 참여하여 영락제의 즉위에 기여했다. 정난의 변에서 장옥이 전사한 후, 주사홍은 주체를 보좌하는 장군으로 활약하며 건문제 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영락제 즉위 후 성국공 동평무열왕에 봉해졌으나, 1406년 베트남 원정 중 병사했다. 그는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인망이 높았으며, 영락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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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사홍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주사홍 |
| 원래 이름 | 주능 |
| 휘 | 주능 (朱能, Zhū Néng) |
| 자 | 사홍 (士弘, Shì Hóng) |
| 작위 | 성국공 동평무열왕 (成國公 東平武烈王) |
| 출생일 | 1370년 8월 2일 |
| 출생지 | 명나라 안후이 성 화이위안 |
| 사망일 | 1406년 11월 12일 |
| 사망지 | 명나라 광시 성 룽저우 |
| 배우자 | 왕씨 부인 (王氏 夫人) |
| 자녀 | 아들 주용(朱勇) |
| 왕조 | 명나라 |
2. 별칭
본명(本名)은 '''주넝'''(朱能, 주능)이며, 자(字)는 스훙(士弘, 사홍)이다.
명나라 초기의 무장으로, 아버지는 홍무제의 중신이었던 주량이다. 아버지 주량 사후, 홍무제 치세 말기인 1394년 음서로 무관에 천거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연왕 주체를 섬겼다.
3. 생애
1399년 연왕 주체가 건문제를 상대로 정난의 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정난의 변에서 장옥 등과 함께 활약했으며, 장옥 사후에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 지속을 주장하며 군의 사기를 높였고, 1402년 남경 함락과 정난의 변 성공에 기여했다.
영락제가 즉위한 후, 주사홍은 정난의 변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생존한 공신 중 구복 다음 가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성국공 동평무열왕'''(成國公 東平武烈王)에 책봉되었다.
1406년 (영락 4년), 영락제의 명으로 베트남 호조의 호귀리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했으나, 도중 광서성 태평에서 향년 37세로 병사하였다. 그는 고위직에 올랐음에도 겸손하고 병사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등 인망이 높았으며, 영락제의 신임이 두터워 그의 요절 소식에 영락제가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홍희제 때인 1425년 명나라 태묘에 공신으로 배향되었다.
3. 1. 초기 생애 및 관직
홍무제 치세 말기인 1394년, 음서 제도를 통해 무관으로 천거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98년 홍무제가 사망하고 건문제가 즉위한 지 1년 뒤인 1399년, 당시 연왕 주체가 주도하여 일으킨 정난의 변에 가담하였다. 1402년 정난의 변이 성공하여 건문제가 축출되고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성국공 동평무열왕'''(成國公 東平武烈王)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책봉된 지 4년 만인 1406년에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2. 정난의 변
아버지 주량은 홍무제의 중신이었으나, 그가 사망한 후 주사홍은 당시 연왕이었던 주체를 섬겼다. 1398년 홍무제가 붕어하고 건문제가 즉위한 지 1년 후인 1399년, 연왕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키자 주사홍은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정난의 변 초기, 그는 장옥 등과 함께 건문제 군의 장수인 이경륭과 경병문을 격파하며 군공을 세웠다.
1400년 동창 전투에서 핵심 인물이었던 장옥이 전사하자, 주사홍은 주체를 보좌하는 중요한 장수가 되었다. 장옥의 죽음과 수적 열세로 인해 주체군 내에서는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주사홍은 "과거 한의 유방은 항우에게 여러 번 패했지만, 단 한 번의 승리로 천하를 얻은 것을 잊었는가"라고 반문하며 장수들을 설득하고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사기가 오른 주체군은 성용과 평안이 이끄는 건문제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1402년, 주체군은 남경을 함락시키고 건문제를 폐위시켰다. 영락제가 황제로 즉위한 후, 주사홍은 정난의 변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생존 인물 중 구복 다음 가는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성국공 동평무열왕'''(成國公 東平武烈王)에 책봉되었고, 특진영록대부(特進榮祿大夫)의 지위를 받았다.
3. 3. 영락제 즉위 이후
1402년 정난의 변으로 건문제가 축출되고 영락제가 즉위하자, 주사홍은 정난의 변에 가담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국공 동평무열왕'''(成國公 東平武烈王)에 책봉되었다. 그는 생존한 공신 중 구복 다음 가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특진영록대부(特進榮祿大夫)의 지위와 함께 성공공(成功公) 작위를 받았다.
1406년 (영락 4년), 영락제의 명으로 베트남 호조의 호귀리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였으나, 도중 태평에서 향년 37세로 병사하였다.
주사홍은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거만하지 않았고 재산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인망이 높았다. 영락제의 신임 또한 두터워, 그의 이른 죽음에 영락제가 크게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3. 4. 사후
1406년 (영락 4년), 영락제의 명으로 베트남 호조를 정벌하러 출진했으나, 도중 광서성 태평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37세였다.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교만하지 않고 재산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인망이 높았다. 영락제의 신임도 두터웠으며, 그의 요절 소식에 영락제가 크게 슬퍼하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홍희제 즉위 후인 1425년 (홍희 원년)에 하간충무왕 장옥, 영국효충공 왕진, 요광효 등과 함께 명나라 태묘에 공신으로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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