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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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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광효는 명나라 영락제의 측근으로, 승려 출신으로 정난의 변에서 연왕 주체를 도와 영락제의 즉위에 기여한 인물이다. 음양술과 점술에 능했으며, 영락제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아 '흑의 재상'으로 불렸다. 영락제 치세 동안 태조실록과 영락대전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 서적을 저술했으나, 말년에는 고향에서 외면받았다. 사후 홍희제에 의해 재평가받아 영락제의 묘정에 배향되었지만, 가정제 때 불교 승려라는 이유로 태묘에서 대흥륭사로 위패가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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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광효
기본 정보
야오광샤오의 초상화
야오광샤오의 초상화
이름야오광샤오
본명시수(斯道)
속성(俗姓)왕(王)
칭암(清庵)
법명도연(道衍)
시호공정(恭靖)
출생1335년
사망1418년
출생지중국장쑤성쑤저우시
국적명나라
직업
직업승려, 정치인, 학자
주요 활동정난의 변 지원
관직태자소사
기타 정보
종교불교
사후숭효사(崇孝寺)에 모셔짐
관련 유적야오광샤오 탑

2. 생애

소주 장주현 출신이다. 의사 집안이었으나, 14세에 출가하여 밀교를 전수받은 후 임제종에 귀의하여 법명을 도연(道衍), 호를 독암(獨庵)으로 하여 “독암도연선사(獨庵道衍禪師)”라 불렸다. 또한 도사 석응진(石応真)에게서 음양술과 점술을 배웠다.[6] 홍무 중기, 조정에서는 유교 경전에 정통한 승려를 불러 예부에서 시험을 치르게 했다. 이때 도연은 관직을 받지 않고, 홍무제는 승려의 가사를 하사하고 돌려보냈다.[6] 홍무 18년(1385년) 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고승을 초청하여 여러 왕들을 시중들게 한 것을 계기로 도연은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朱棣)(후의 영락제)를 만나 그의 군사가 되었다. 이후 연왕의 봉지인 북평으로 이주하여 경수사(慶寿寺)의 주지였으나 연왕과 자주 은밀하게 모의를 나누었다.

홍무제 사후 즉위한 건문제는 여러 왕들에 대한 삭번을 강행하여, 이로 인해 주왕 주숙, 기왕 주부(朱榑), 상왕 주백(朱柏), 대왕 주계(朱桂), 민왕 주형(朱楩) 등이 연좌되어 서인으로 강등되거나 자결하는 등 상황이 험악해졌다. 도연은 연왕에게 거병을 건의했다. 이는 건문제가 연왕의 세력을 꺼렸고, 연왕 자신도 건문제의 즉위에 불만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가 거병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요광효는 군사로서의 지략으로 건문제 군을 격파하고 연왕을 영락제로 즉위시켰다(정난의 변).

즉위한 영락제에게 정난의 변에서 가장 큰 공신으로 칭찬받아 “광효(広孝)”라는 이름을 받고, 태자소사로 영락제에게 두터운 환대를 받았다. 영락제 시대에는 「태조실록」·「영락대전」 편찬에 참여하는 한편 「도여록(道余録)」 등 불교 옹호 및 정토 신앙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영락제 시대 내내 중용된 큰 공신이었으나, 정난의 변에서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영락제 밑에서도 권세를 휘둘렀던 제일인자였기에, 고향에서는 가족에서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요광효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2. 1. 출가

요광효는 대대로 장주(長洲)에서 의생(醫生)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14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6] 천태, 밀교 등을 배우고 최종적으로 선문(禪門)에 귀의해 임제종을 수지하고 법명을 도연(道衍), 호를 독암(獨庵)이라 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독암도연선사(獨庵道衍禪師)라 칭하였다.[6] 아울러 도사 석응진(石応真)을 스승으로 그로부터 음양, 점복 등의 술법을 배우기도 했다.[6]명사》(明史) 요광효열전에는 그가 일찍이 숭산사(嵩山寺)를 지나게 되었는데, 관상가 원홍(袁珙)이 그의 관상을 보고 "실로 기이한 승려로다! 눈은 삼각이고 생김새는 병든 범과 같고, 성정은 반드시 살륙하기를 좋아할 것이니, 이는 유병충과 같은 부류로구나!"라고 하였고, 도연은 이에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6]

2. 2. 흑의재상(黑衣宰相)

명 홍무(洪武) 중기에 홍무제가 조를 내려 유교 경전에 통달한 승려들을 불러 예부에서 시험 보게 하였는데, 도연은 이때 관직을 받지 않았고, 홍무제는 그에게 승려의 가사를 하사하고 돌려보냈다.[6] 소주 장주현 출신으로, 의사 집안이었으나 14세에 출가하여 밀교를 전수받은 후 임제종에 귀의하여 법명을 도연(道衍), 호를 독암(獨庵)으로 하여 “독암도연선사(獨庵道衍禪師)”라 불렸다. 또한 도사 석응진(石応真)에게서 음양술과 점술을 배웠다.

홍무 15년에 황후 마씨가 붕어하고, 홍무제가 고승들을 뽑아 여러 친왕들을 시봉하며 불경을 읽어서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때 도연은 당시 좌선세(左善世)를 맡고 있던 종륵(宗泐)과는 동문으로써 서로 잘 알고 지냈는데, 이때 선발된 자리에서 연왕(燕王)으로서 훗날 황제가 될 주체(朱棣)와 만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서로 기뻐하였으며, 연왕에게 그를 따라 연 땅으로 들어갈 것을 청했고 연왕은 이를 허락하였다.[6] 연왕의 봉지인 북평으로 이주하여 경수사(慶寿寺)의 주지였으나 연왕과 자주 은밀하게 모의를 나누었다.

홍무제가 붕어한 뒤, 황제로 즉위한 혜제(惠帝)가 친왕들이 거느리고 있던 번진에 대한 삭번(削藩)을 행했다. 주왕(周王)[7], 상왕(湘王), 제왕(齊王), 대왕(代王)[8] 및 민왕(岷王)이 저마다 죄에 연루되어 폐서인되거나 자결하기도 하는 등 정세가 험악해졌다. 도연은 이에 연왕 주체에게 은밀히 거사를 행할 것을 권했고, 연왕이 "민심이 모두 저 조정(혜제)을 지지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그것을 무슨 수로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도연은 "신하된 자로써 하늘의 도를 알았는데 어찌 민심이 어떤가를 토론하고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고, 이때 도연이 연왕에게 천거한 이들 가운데는 앞서 도연의 관상을 보았던 원홍이나 점치는 자 김충(金忠)도 있었다.[6] 이는 건문제가 연왕의 세력을 꺼렸고, 연왕 자신도 건문제의 즉위에 불만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가 거병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이에 연왕이 더욱 뜻을 정하게 되었다. 몰래 장교를 선발하고 병사들 가운데 재능이 있고 용감하고 유능한 자들을 모았다. 또한 연왕부의 번저는 옛 원의 궁터였는데, 도연은 후원에서 병사를 훈련시키면서 땅을 파서 지하에 공간을 만들고 두꺼운 담장을 둘러쳐서 그곳에서 밤낮으로 무기를 주조하면서, 주위에 오리와 거위를 많이 길러서 그 소리로 주조하는 소리를 감추게 하였다고 『명사』는 전하고 있다.[6]

건문(建文) 원년 6월에 연부호위백호(燕府護衛百戶) 예량(倪諒)의 고변으로 연왕의 관교(官校)인 우량(于諒), 주탁(周鐸) 등이 체포되어 처벌되었다. 병부상서 제태(齊泰)는 북평도지휘(北平都指揮) 장신(張信)을 시켜 연왕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장신은 오히려 이 명령을 연왕에게 고해바쳤고, 연왕은 이를 계기로 거병을 결정하였다. 이때 연왕이 일으킨 군사의 이름을 정난지사(靖難之師) 즉 "어지러운 것을 잠잠케 하는 군사"로 하였으며, 거병 명분은 제태와 황자징(黃子澄)을 주벌한다는 데에 있었다. 이때 도연은 북평에 남아, 연왕의 아들로 훗날 홍희제로 즉위하게 되는 세자 주고치(朱高熾)를 보좌하며 그곳을 지켰다.[6] 요광효는 군사로서의 지략으로 건문제 군을 격파하고 연왕을 영락제로 즉위시켰다(정난의 변).

그 해 10월, 연왕이 대녕(大寧)을 공격하고 있을 때 이경륭(李景隆)이 이를 틈타 연왕부의 본거지인 북평을 포위했다. 도연은 몇 차례 이경륭의 공격에 잘 견디고 야간에도 장사를 보내 기습했다. 후에 연왕의 군사들이 돌아와 구원하자 안팎으로 협공해 크게 승리하였다. 이경륭과 평안(平安) 등은 전후로 패배하고 달아났다. 연왕은 곧장 제남(濟南)을 포위했으나 제남의 방어가 워낙 튼튼해 석 달을 공격하고도 이기지 못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연은 곧장 빠른 말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군사들이 피로하였으니 서둘러 군사를 돌리셔야 한다"고 전했고, 연왕은 이에 군사를 돌려 돌아오다가 조정군의 성용(盛庸)에게 요격당해서 동창(東昌) 전투에서 대패하고 장옥(張玉)을 잃었다. 이때 연왕은 군사들을 좀 쉬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도연은 이에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용맹한 군사를 더 모집해 성용을 패배시키고 또한 방소(房昭)가 지키고 있던 서수채(西水寨)를 부수었다.[6]

이때 도연이 연왕에게 "다른 성읍을 함락시킬 필요 없이 곧장 경사(남경)로 내달려야 합니다. 경사의 군은 약하니 그 세가 반드시 한 번의 거사로 결정될 것입니다."라고 진언했고, 연왕은 그의 의견을 따라 비수(淝水), 영벽(靈璧)에서 여러 차례 조정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장강(양쯔 강)을 넘어 경사를 함락시켰다. 연왕은 황제로 즉위했고, 도연은 승록사좌선세(僧錄司左善世)로 제수되었다.[6]

연왕이 번저에 있었을 때 그와 접촉하며 곁을 오가던 이들은 모두 무인이었는데, 도연만이 병사를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짰고, 또한 연왕이 산동(山東), 하북(河北)에서 3년여를 움직이며 조정군과 일진일퇴를 벌이는 동안 군사의 진퇴, 전략 등이 도연에 의해 결정되었다. 때문에 도연은 한 번도 전투에 임해 지휘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왕이 남경을 함락시킨 뒤에 논공에서 그 공이 제일이었다.[6] 영락 2년 4월, 도연은 자선대부(資善大夫)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제배되었으며, 속성인 요(姚)씨 성을 회복하고 아울러 광효(廣孝)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그 조부에게도 관직이 추증되었다.[6] 즉위한 영락제에게 정난의 변에서 가장 큰 공신으로 칭찬받아 “광효(広孝)”라는 이름을 받고, 태자소사로 영락제에게 두터운 환대를 받았다.

이후 요광효는 영락 9년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의 중수 작업의 감수를 맡기도 하였으며[9] 해진(解縉) 등과 함께 《영락대전》을 찬수하기도 하였다.[6] 영락제가 북경(北京)과 남경을 오가며 북쪽을 정벌하기에 이르렀을 때, 요광효는 모두 남경에 머무르면서 태자를 보좌하였고, 영락 5년 4월에 황태손이 출각(出閣)해서 태학으로 나아가자 요광효가 시독을 맡아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6] 영락제 시대에는 「태조실록」·「영락대전」 편찬에 참여하는 한편 「도여록(道余録)」 등 불교 옹호 및 정토 신앙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영락제 시대 내내 중용된 큰 공신이었으나, 정난의 변에서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영락제 밑에서도 권세를 휘둘렀던 제일인자였기에, 고향에서는 가족에서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요광효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2. 3. 영락제 치세

소주 장주현 출신으로, 의사 집안이었으나 14세에 출가하여 밀교를 전수받은 후 임제종에 귀의하였다. 법명은 도연(道衍), 호는 독암(獨庵)으로 “독암도연선사(獨庵道衍禪師)”라 불렸다. 도사 석응진(石応真)에게서 음양술과 점술을 배웠다. 홍무 중기, 조정에서 유교 경전에 정통한 승려를 불러 예부에서 시험을 치르게 했을 때 관직을 받지 않았다. 홍무제는 승려의 가사를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홍무 18년(1385년) 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고승을 초청하여 여러 왕들을 시중들게 한 것을 계기로, 도연은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朱棣)(후의 영락제)를 만나 그의 군사가 되었다. 이후 연왕의 봉지인 북평으로 이주하여 경수사(慶寿寺)의 주지였으나 연왕과 자주 은밀하게 모의를 나누었다.

홍무제 사후 즉위한 건문제가 여러 왕들에 대한 삭번을 강행하여, 주왕 주숙, 기왕 주부(朱榑), 상왕 주백(朱柏), 대왕 주계(朱桂), 민왕 주형(朱楩) 등이 연좌되어 서인으로 강등되거나 자결하는 상황에서 도연은 연왕에게 거병을 건의했다. 요광효는 군사로서의 지략으로 건문제 군을 격파하고 연왕을 영락제로 즉위시켰다(정난의 변).

즉위한 영락제에게 정난의 변에서 가장 큰 공신으로 칭찬받아 “광효(広孝)”라는 이름을 받고, 태자소사로 영락제에게 두터운 환대를 받았다. 영락제 시대에는 「태조실록」·「영락대전」 편찬에 참여하는 한편 「도여록(道余録)」 등 불교 옹호 및 정토 신앙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영락제 시대 내내 중용된 큰 공신이었으나, 정난의 변에서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영락제 밑에서도 권세를 휘둘렀던 제일인자였기에, 고향에서는 가족에서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요광효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2. 4. 죽음

요광효는 만년에 『도여록(道餘錄)』이라는 책을 지어[10] 당시 유학의 주류였던 정주성리학을 비판하였고, 이는 당시 사람들의 경멸을 샀다.[6] 《명사》에 따르면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를 방문하고, 장주로 가서 자신의 누나를 찾아뵈었을 때, 누나는 문을 닫아걸고 만나주지 않았으며, 친구 왕빈(王賓)을 찾아갔을 때 왕빈은 그대로 달아나면서 멀리서 「못된 중놈, 야 이 못된 중놈아」라고 외쳤다. 다시 누나를 만나러 갔으나 누나 또한 그를 욕하였다. 요광효는 자신과 가까웠던 옛 사람들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고 낙담하였다고 한다.[6]

1418년 3월, 요광효는 여든네 살의 고령으로 병이 중해져 조정에 나아갈 수 없었고, 주석했던 경수사에 머물렀다. 영락제는 자주 경수사에 행차해 요광효와 만나 서로 담소하기도 하였으며 아울러 금수호(金睡壺)를 하사하였다. 임종 직전 영락제에게 박흡화상(溥洽和尙)의 금고를 풀어줄 것을 요청했고, 영락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박흡은 건문제의 주록승(主錄僧)을 지냈던 승려로, 남경이 함락되었을 때 '건문제가 승려로 변장하고 달아났고 박흡이 그를 숨겨주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영락제가 박흡화상을 잡아 구금하고 급사중 호형(胡濙) 등을 시켜서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게 하였는데, 10여 년이 다 되도록 건문제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 박흡 또한 그 기간 동안 연금되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6] 영락제가 박흡을 석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18일에 요광효는 북경의 경수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락제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동안 조회를 파하였으며, 승려의 예로써 장사지내게 하였는데, 백관으로써 조문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또한 추증하여 추성보국협모선력문신(推誠輔國協謀宣力文臣) 특진영록대부(特進榮祿大夫) 상주국(上柱國) 영국공(榮國公)이라 하고,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하였다. 방산현(房山縣) 동북쪽에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이때 영락제 자신이 몸소 요광효의 신도비(神道碑)의 글을 써서 그 공을 기렸다. 또한 요광효의 양자인 요계(姚繼)에게 상보소경(尙寶少卿)의 관직을 주었다.[6]

요광효가 세상을 떠난 경수사(대경수사)는 금 세종(金世宗) 대정(大定) 26년(1186년)에 처음 세워졌고, 원 왕조 때에 이르러 대경수사(大慶壽寺)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칭기즈 칸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써 원 대덕 을사년(1305년)에 고려 충선왕이 불경을 시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왕조가 멸망한 뒤 (淸) 건륭 29년(1764년)까지도 중건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청 왕조 말기에 쇠락하여 중화민국(中華民國) 시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건축이 사라지고 쌍탑만이 남아 있었으며, 쌍탑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3. 평가 및 영향

홍희제영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정난의 변 와중에 자신을 보좌했던 요광효를 다시금 표창하였다.[6] 홍희 원년(1425년) 3월 20일, 요광효가 세상을 떠난 지 7주기가 되는 해를 기려서 홍희제는 직접 제문을 짓고 그 아들(양자) 요계(姚繼)에게 제를 올리게 했다.[6] 제문에서 홍희제는 요광효가 선황 영락제를 보좌하여 “서로가 덕을 합하고 모의를 함께하여,큰 환란을 평정하고 큰 공을 이루었다”고 칭송하며, “고금(古今)에 두루 통하는 규범”이라 칭하며 “살아서는 그 부귀를 함께 하였고 죽어서는 그 제향을 받는다”라고 호평하였다.[6] 또한 요광효에게 소사산관훈작(少師散官勳爵)을 추증하고(시호는 예전과 같았다) 영락제의 묘정에 배향하도록 하였다.[6]

요광효는 명 태조(홍무제)와 명 태종(영락제) 두 황제의 묘정에 배향된 16위(位)의 배향 공신들 가운데 유일한 문신(文臣)이었다.[6] 그러나 가정제 때 요광효가 불교 승려라는 이유로 태묘에 배향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요광효의 위패는 태묘에서 대흥륭사(大興隆寺)로 옮겨졌다.[6] 이후 태상시(太常寺)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요광효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6]

3. 1. 홍희제의 재평가

태자영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홍희제정난의 변 와중에 자신을 보좌했던 요광효를 다시금 표창하였다. 홍희 원년(1425년) 3월 20일, 요광효가 세상을 떠난 지 7주기가 되는 해를 기려서 홍희제는 직접 제문을 짓고 그 아들(양자) 요계(姚繼)에게 제를 올리게 했다. 제문에서 홍희제는 요광효가 선황 영락제를 보좌하여 “서로가 덕을 합하고 모의를 함께하여,큰 환란을 평정하고 큰 공을 이루었다”고 칭송하며, “고금(古今)에 두루 통하는 규범”이라 칭하며 “살아서는 그 부귀를 함께 하였고 죽어서는 그 제향을 받는다”라고 호평하였다. 또한 요광효에게 소사산관훈작(少師散官勳爵)을 추증하고(시호는 예전과 같았다) 영락제의 묘정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요광효는 명 태조(홍무제)와 명 태종(영락제) 두 황제의 묘정에 배향된 16위(位)의 배향 공신들 가운데 유일한 문신(文臣)이었다. 그러나 가정제 때 요광효가 불교 승려라는 이유로 태묘에 배향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요광효의 위패는 태묘에서 대흥륭사(大興隆寺)로 옮겨졌다. 이후 태상시(太常寺)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요광효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3. 2. 가정제 시기 위상 변화

영락 22년(1424년)에 영락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였다. 요광효는 정난의 변 와중에 당시 세자였던 홍희제를 보좌하여 북평(北平)을 지켰고,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임명되었으며, 남경에서 유수하며 감국하였던 적이 있어 홍희제의 존숭이 두터웠다. 홍희제는 즉위 후 요광효를 표창하였고, 홍희 원년(1425년) 3월 20일에 요광효가 세상을 떠난 지 7주기가 되는 해를 기려서 직접 제문을 짓고 그 아들(양자) 요계(姚繼)에게 제를 올리게 했다. 제문에서 요광효가 선황 영락제를 보좌하여 “서로가 덕을 합하고 모의를 함께하여,큰 환란을 평정하고 큰 공을 이루었다”고 칭송하며, 소사산관훈작(少師散官勳爵)을 추증하고 영락제의 묘정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왕조 국가에서 군주의 묘정에 배향된다는 것은 그의 공적에 대한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였고, 당시 명 태조(홍무제)와 명 태종(영락제) 두 황제의 묘정에 배향된 16위의 배향 공신들 중 문신(文臣)은 요광효 한 사람 뿐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6]

그러나 가정제 때 요광효가 태묘에 배향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표문에서 "요광효는 성조께서 천하를 얻을 수 있게 보좌하였고 그 노고와 공렬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다만 돌이켜 보니 석씨(釋氏)의 무리를 연계시켜서 공신들과 함께 태묘에 배향하는 것은 조종(祖宗)을 숭경하는 뜻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이에 상서(尙書) 이시계(李時偕)와 대학사(大學士) 장총(張璁), 계악(桂萼) 등이 의논해 요광효의 위패를 태묘에서 빼어 그 제향을 대흥륭사(大興隆寺)로 이관하고, 태상시(太常寺)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요광효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가정제의 비준을 받았다.[6]

3. 3. 한국과의 관계

4. 일화

요광효가 홍무제로부터 가사를 하사받고 돌아가는 길에 북고산에 이르러 옛 일을 회고하는 내용의 시를 지었는데, 동문인 종륵이 그가 지은 시를 보고 "이런 것이 어찌 석자(釋子, 승려)가 할 말이겠느냐"고 지적했고, 이에 도연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6]

연왕이 거병을 결정할 당시, 폭우로 연왕부 지붕의 기왓장이 땅에 떨어졌다. 연왕이 이를 보고 놀라 떨었는데, 도연은 "이는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용이 날아올라 하늘에 이르면 뒤이어 비바람이 일며, 기와가 땅에 떨어졌으니 마땅히 황색(황제의 색깔) 기와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이에 연왕은 거병을 실행에 옮겼다.[6]

당시 천하의 대학자로 불리던 방효유를 구명하고자, 연왕에게 "성이 함락되는 날에도 그는 반드시 항복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그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효유를 죽이게 되면 천하에 독서의 씨(글 읽는 사람 즉 지식인)가 마를 것입니다"라고 미리 아뢰었다고 한다.[11] 그러나 요광효의 말대로 방효유는 연왕의 회유와 협박에도 '연 땅의 도적놈이 제위를 찬탈했다'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연왕은 방효유의 십족을 모두 몰살시켰다.

영락제는 요광효와 이야기할 때면 꼭 '소사'(少師)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는 그에 대한 경의를 드러낸 것이었다. 요광효에게 머리를 길러 환속할 것을 명했지만 요광효는 따르지 않았고, 저택과 궁인 두 명을 하사했지만 이 또한 받지 않고 늘 사찰에 거하면서 조정에 입궐할 때만 관복을 입고 물러나와서는 승려의 납의로 갈아입었다.[6] 그 뒤 소(蘇), 호(湖) 등의 땅으로 나가서 현지를 진휼하면서, 고향 장주에 도착했을 때는 앞서 자신이 하사받은 금과 비단을 모두 요씨의 종족과 동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6]

연왕이 즉위한 뒤 요광효는 환관 정화에게 보살계를 주어 불제자로 삼고 법호를 복길상(福吉祥)이라 하였다.[12]

류병충의 사후 약 100년이 지나 영락제의 두뇌가 된 요광효는 그의 환생이라고까지 일컬어졌다.[5]

연왕 주체에게 처음 만났을 때, "당신에게 흰 모자를 씌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王)"자에 "흰(白)"자를 더하면 "황(皇)"자가 되므로, "당신을 왕에서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는 의미이다.

말년에 고향에 영광을 돌리려고 귀향했으나, 누이와 지인들이 모두 만남을 거절했기 때문에 체념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 집에서 뛰쳐나온 누이에게 "스님은 길을 그르쳤소"라며 꾸중을 듣고 실망하여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당시 민간에서 靖難の変(정난의 변)이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5. 저술

청대 《사고전서》 집부 별집류에는 요광효의 저작을 모은 문집으로 《도허자집》(逃虛子集, 전11권)과 《유고보유》(類稿補遺, 전8권)이 소개되어 있는데, 천일각(天一閣)에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전한다.[13] 요광효의 문집은 처음에는 《독암집》(獨菴集)이라 하였던 것을 요광효 사후에 오(吳) 땅 사람이 그의 다른 시문을 마저 합각하여 새로 《도허자집》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나아가 후대 사람들이 다시금 일실된 것을 수습하여 보유(補遺)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13]

《사고전서》에서는 "요광효의 시는 청신하고 완약하여 옛 정조를 많이 보존하고 있지만, 엄숭의 《검산당집》(鈐山堂集)과 함께 유학자들의 부끄러움으로 여겨져 왔다."고 평하고 있다.[13] 불교의 입장에서 정이주희를 비판한 《도여록》(道餘錄, 전2권)의 경우, 요광효와 생전에 친하게 알고 지냈던 장홍(張洪)조차도 《도여록》을 읽을 때마다 불로 태워 버렸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13]

6. 요광효가 등장하는 작품

두위루가 2009년 중국 TV 드라마 《정화의 대항해》에서 요광효 역을 맡았다. 류장은 2011년 홍콩 TV 드라마 《홍무 32년》에서 요광효 역을 연기했다. 2019년 중국 TV 드라마 《대명풍화》에서는 리호한이 요광효 역을 맡았다.

한국 무협소설에서도 요광효가 등장하는데, 일몽의 《학사 장문인》, 약선의 《백룡의 비상》, 서백호의 《공전절후》, 가온의 《환도제》, 날아오르기의 《철혈의 제국》 등이 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Ming
[2] 서적 Chinese History: A Manual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3] 웹사이트 Preface http://www.mam.gov.m[...] Civil and Municipal Affairs Bureau of Macao S.A.R.
[4] 웹사이트 明朝第一奇僧姚广孝:对联进言说服朱棣夺天下--文化--人民网 http://culture.peopl[...]
[5] 위키소스 明史/卷145
[6] 서적 명사
[7] 서적 명사
[8] 서적 명사
[9] 서적 만력야획편
[10] 웹사이트 도여록 http://taipei3.cbeta[...]
[11] 서적 명사
[12] 서적 불설마리지천경
[13] 서적 도허자집 http://ffr.kr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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