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하르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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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하르 작전은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일본 관동군이 중화민국의 차하르성을 점령하기 위해 전개한 군사 작전이다. 일본은 만주국의 안정을 위해 차하르성을 세력 하에 두려 했으며, 내몽골의 독립 및 자치 요구를 이용하려 했다.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차하르 작전을 개시, 장가구 등을 점령하고 몽골 연합 자치 정부를 수립하여 내몽골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양고 사건과 같은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고, 일본군의 병력 분산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구전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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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하르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분쟁 명칭 | 차하르 작전 |
| 일본어 명칭 | チャハル作戦 (Chaharu Sakusen) |
| 중국어 명칭 | 南口戰役 (Nánkoǔ Zhànyì) |
| 일부 | 제2차 중일 전쟁 |
| 기간 | 1937년 8월 8일 – 1937년 10월 17일 |
| 장소 | 베이핑 및 차하르 성 – 수이위안 성 인근 |
| 결과 | 일본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몽강 연합 자치 정부 만주국 |
| 교전국 2 | 중화민국 |
| 지휘관 | |
| 지휘관 1 | 가츠키 기요시 스즈키 시게야스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조 히데키 데므치그돈로브 |
| 지휘관 2 | 탕언보 장제스 옌시산 푸쭤이 |
| 병력 규모 | |
| 병력 규모 1 | 90,000명 관동군 병력, 60,000명 몽골 및 만주군 병력 |
| 병력 규모 2 | 알 수 없음 |
| 사상자 | |
| 사상자 1 | 알 수 없음 |
| 사상자 2 | 26,000명 또는 37,090명 |
| 기타 | |
![]() | |
2. 배경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나라가 멸망하고 한족 중심의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6] 중화민국은 삼민주의를 내걸고 청나라의 모든 영토를 계승하려 했으며,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 만주족 등 각 민족의 독립 요구를 인정하지 않았다.[6]
이후 외몽골 지역은 1921년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아 복드 칸을 추대하여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했다.[6] 1924년 복드 칸 사후,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라 몽골 인민 혁명당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동구권에 속하는 위성 국가가 되었다.[6] 중화민국은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나,[7] 소련의 군사력으로 독립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내몽골 지역의 몽골족은 중일 전쟁 이전에도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외몽골 흡수를 통한 대몽골 건국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당시 관동군은 만주국의 안정을 위해 서쪽 국경을 접하는 차하르성을 세력 하에 두려 했다. 이를 위해 내몽골의 독립 및 자치 요구 움직임을 이용하려 했고, 1936년 5월 이타가키 세이시로 참모부장 등이 데므치그돈로브(더왕) 등과 회견하여 몽골 자치 정부 위원회 지원을 약속했다.
같은 해 6월 5일, 관동군 특무 기관원이 쑹저위안에게 체포되자(차하얼 사건),[8] 6월 23일 도이하라 겐지 소장은 친더춘에게 탕구 정전 협정에 따른 정전 지대 확대 등을 요구하여, 6월 27일 도이하라-친더춘 협정이 조인되었다.[8]
3. 전개

=== 수원사건 이전 ===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에서 삼민주의를 내걸고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 왕조를 타도하여 한족의 독립 및 각 민족의 평등을 부르짖으며 중화민국을 건국했다. 중화민국은 청나라의 지배 지역 전부를 계승하는 것으로 하여 한족과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 만주족의 원래 영토 전부를 중화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청 왕조 해체 후의 각 민족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외몽골 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으로 1921년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24년에는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라 몽골 인민 혁명당에 의한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18] 중화민국은 소련의 괴뢰 국가로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19], 소련의 군사력에 의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일 전쟁 전에도 내몽골 지역의 몽골족은 국민당으로부터의 독립과 외몽골 지역을 흡수하여 대몽골 건국을 목표로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관동군은 만주국의 안정을 위해 서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차하르성을 자신의 세력 하에 두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내몽골의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이용할 것을 꾀하여, 1936년 5월에는 관동군의 이타가키 세이시로 참모부장 등이 우젬친 왕부에서 데므치그돈로브(덕왕) 및 다른 유력자와 회견하여, 몽골 자치 정부 위원회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같은 해 6월 5일, 관동군의 특무 기관원이 차하르성에서, 국민당이 창설한 기찰정무위원회의 위원장인 쑹저위안에게 체포되자 (차하르 사건), 6월 23일에 특무 기관장인 도이하라 겐지 소장은 차하르성 대리 주석인 친더춘에게, 탕구 정전 협정에 따른 정전 지대의 차하얼성까지의 확대 및 합법 활동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6월 27일에는 도히하라•진덕순협정이 조인되어, 내몽골의 분리 공작이 진행되어 갔다. 11월에는 몽골 자치 정부군이 관동군의 계획에 따라 수원을 공격했으나, 중국군의 반격에 의해 패퇴했다.[20]
=== 노구교 사건과 차하르 작전 ===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관동군은 차하르성 점령을 목표로 하는 차하르 작전을 개시했다.[21] 관동군은 참모본부에 작전 승인을 계속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 그러나 명확한 장기 전략 없이 8월 8일 참모본부의 작전 승인을 얻어냈다.[21]
관동군은 도조 히데키가 지휘하는 3개 여단 규모의 차하르파견병단(일명 '도조병단')을 편성하여 차하르성을 침공, 장가구를 점령했다.[21] 중국군은 도히하라•진덕순 협정으로 인해 거의 대비하지 못했다.[21]
이후 1개 독립혼성여단이 베이징 방면에서 만리장성 인근 허베이성 남구(南口)와 차하르성 거용관 공략을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거용관은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중국군의 저항이 완강했다. 이에 일본은 제5사단(第五師團) 일부를 증원, 사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중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제5사단의 활약으로 거용관을 함락하고 장가구까지 진격하여 차하르파견병단과 합류했다.[21]
당초 작전 지역은 장가구 이동 지역이었으나, 차하르파견병단과 제5사단은 참모본부의 허가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작전 지역을 확대했다. 9월 13일 산서성 경계의 대동(大同)을 점령하고, 10월 14일 수원을 점령, 10월 17일 포두(包頭)를 점령한 후에야 진격을 멈추었다. 이 작전으로 차하르파견병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보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21]
이 전투 중 몽고자치정부군은 차하르파견병단을 따라 수원성 각 기관을 흡수했고, 10월 27일 덕왕 등은 후허하오터에서 몽고연맹자치정부(蒙古連盟自治政府)를 수립했다.[22] 이후 자치정부 방위를 위해 주몽군(駐蒙軍)이 장가구에 배치되었다.[22]
3. 1. 수원사건 이전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에서 삼민주의를 내걸고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 왕조를 타도하여 한족의 독립 및 각 민족의 평등을 부르짖으며 중화민국을 건국했다. 중화민국은 청나라의 지배 지역 전부를 계승하는 것으로 하여 한족과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 만주족의 원래 영토 전부를 중화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청 왕조 해체 후의 각 민족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외몽골 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으로 1921년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24년에는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라 몽골 인민 혁명당에 의한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18] 중화민국은 소련의 괴뢰 국가로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19], 소련의 군사력에 의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일 전쟁 전에도 내몽골 지역의 몽골족은 국민당으로부터의 독립과 외몽골 지역을 흡수하여 대몽골 건국을 목표로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관동군은 만주국의 안정을 위해 서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차하르성을 자신의 세력 하에 두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내몽골의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이용할 것을 꾀하여, 1936년 5월에는 관동군의 이타가키 세이시로 참모부장 등이 우젬친 왕부에서 데므치그돈로브(덕왕) 및 다른 유력자와 회견하여, 몽골 자치 정부 위원회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같은 해 6월 5일, 관동군의 특무 기관원이 차하르성에서, 국민당이 창설한 기찰정무위원회의 위원장인 쑹저위안에게 체포되자 (차하르 사건), 6월 23일에 특무 기관장인 도이하라 겐지 소장은 차하르성 대리 주석인 친더춘에게, 탕구 정전 협정에 따른 정전 지대의 차하얼성까지의 확대 및 합법 활동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6월 27일에는 도히하라•진덕순협정이 조인되어, 내몽골의 분리 공작이 진행되어 갔다. 11월에는 몽골 자치 정부군이 관동군의 계획에 따라 수원을 공격했으나, 중국군의 반격에 의해 패퇴했다.[20]
3. 2. 노구교 사건과 차하르 작전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관동군은 차하르성 점령을 목표로 하는 차하르 작전을 개시했다.[21] 관동군은 참모본부에 작전 승인을 계속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 그러나 명확한 장기 전략 없이 8월 8일 참모본부의 작전 승인을 얻어냈다.[21]
관동군은 도조 히데키가 지휘하는 3개 여단 규모의 차하르파견병단(일명 '도조병단')을 편성하여 차하르성을 침공, 장가구를 점령했다.[21] 중국군은 도히하라•진덕순 협정으로 인해 거의 대비하지 못했다.[21]
이후 1개 독립혼성여단이 베이징 방면에서 만리장성 인근 허베이성 남구(南口)와 차하르성 거용관 공략을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거용관은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중국군의 저항이 완강했다. 이에 일본은 제5사단(第五師團) 일부를 증원, 사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중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제5사단의 활약으로 거용관을 함락하고 장가구까지 진격하여 차하르파견병단과 합류했다.[21]
당초 작전 지역은 장가구 이동 지역이었으나, 차하르파견병단과 제5사단은 참모본부의 허가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작전 지역을 확대했다. 9월 13일 산서성 경계의 대동(大同)을 점령하고, 10월 14일 수원을 점령, 10월 17일 포두(包頭)를 점령한 후에야 진격을 멈추었다. 이 작전으로 차하르파견병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보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21]
이 전투 중 몽고자치정부군은 차하르파견병단을 따라 수원성 각 기관을 흡수했고, 10월 27일 덕왕 등은 후허하오터에서 몽고연맹자치정부(蒙古連盟自治政府)를 수립했다.[22] 이후 자치정부 방위를 위해 주몽군(駐蒙軍)이 장가구에 배치되었다.[22]
3. 3. 몽강연합자치정부 수립
4. 전투 서열
4. 1. 일본군
일본군의 차하르 파견군은 도조 히데키 중장이 지휘하였고, 제5사단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중장이 지휘하였다.4. 2. 중화민국군
옌 시산 휘하의 수이위안 평정 사령부의 중국군은 푸쭤이가 지휘하는 제7집단군이었다. 차하르 지사인 류루밍은 제143사단과 2개 여단을 이끌고 차하르를 방어했다. 장제스는 탕언보를 제13군과 제17군의 최전선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자오청서우의 제1기병군은 차하르로 보내져 데무치거둥루부의 몽골군에 맞섰다.베이징-수이위안 철도를 따라 탕언보의 제13군은 난커우와 쥐융관(거용관)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가오의 제17군은 츠청, 옌칭, 룽관에 배치되어 제13군의 측면을 방어했다. 제21사단은 화이라이에 배치되었고, 자오청서우의 제1기병군, 류루밍의 제143사단, 그리고 두 개의 평화유지여단은 차하얼 북부의 몽골군을 공격했다.
5. 결과 및 영향
일본군은 차하르성 대부분을 점령하고, 친일 몽골인 더무치거둥루브를 수장으로 하는 몽골 연합 자치 정부를 수립하여 내몽골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11] 이는 타임 지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아이치대학(愛知大学) 모리 히사오(森久男)는 일본군이 병력을 분산시킨 결과, 국민당 정부에 지구전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평가했다.[23][11]
장자커우가 함락되면서, 푸쭤이(傅作義) 장군의 부대는 수이위안으로 가는 철도를 방어하기 위해 서쪽으로 후퇴했다.
6. 논란
6. 1. 양고 사건
차하르 작전 중 일본군에 의해 발생한 양고사건(陽高事件)은 1937년 9월 양고에서 전투 종료 후, 일반 주민을 포함한 다수의 남성들이 강제 징발되어 살해된 사건이다.[24][25] 중국인 희생자 수는 350명에서 500명으로 추정되나 정확하지 않다.[28] 양고에서는 청장년 남성들이 일거에 사라져, 이후 남성들을 모집하여 미망인들과 집단결혼을 시켰다고 전해진다.[24] 학살 발생 이유에 관하여 일본군의 사상자도 140명으로 컸기에 일본군들이 고군분투한 결과로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28]전후 중국 측은 사건 당시 양고에 입성하여 함락시켰다고 전해진 두 부대의 부대장들을 전범으로 추궁하려 했으나 유야무야되었고, 실행 부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부대 관계자들이 대량 학살 사체를 목격하여 학살 자체는 확실하지만, 두 부대 관계자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이 되었다.[24][25][29]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1943년 2월 비서관과의 잡담에서 '불온한 지나인은 전부 목을 날렸다'고 언급하며,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28]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도쿄재판(東京裁判)에 제출된 도조 히데키의 이력서에 차하르병단장 이력이 기록되지 않아, 검찰단이 이 경력을 인지하지 못해 도조 히데키가 전범으로 소추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28]
한편, 일본군과 작전 행동을 함께 한 이수신(李守信) 장군의 전후 중국에서의 취조 증언에 따르면, 이 작전에서 각지에서 포로 학살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작전 종결 시기에도 일본군에 의한 주민 대량 학살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졌다.[26][27]
6. 2. 역사적 평가
아이치대학(愛知大学)의 모리 히사오(森久男)는 일본이 차하르와 상하이에 병력을 분산시킨 결과, 경한선(京漢線)을 남하하여 중국군에 타격을 가하는 기회를 놓쳤고, 국민당 정권에게 지구전 체제를 정비하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고 평가했다.[23][11] 차하르 작전은 중일 전쟁의 확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동아시아 정세를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7. 한국과의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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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서
1년 이내 단기간으로 소멸한 정권을 제외하면, 소련에 이어 성립된 사회주의국가는 몽골 북서쪽에 인접한 투바인민공화국('탄 투바', 1921년 8월 14일 독립선언, 1944년 10월 11일 소련 병합)이 된다. 그러나 이 나라는 몽골 이상으로 소련의 괴뢰색이 강하여 소련과 몽골 이외는 이 나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7]
문서
중화민국은 1946년 1월에 일단 몽골 독립을 인정했지만, 후원 중인 소련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것을 이유로 승인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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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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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년 이내 단기간으로 소멸한 정권을 제외하면, 소련에 이어 성립된 사회주의국가는 몽골 북서쪽에 인접한 투바인민공화국('탄 투바', 1921년 8월 14일 독립선언, 1944년 10월 11일 소련 병합)이 된다. 그러나 이 나라는 몽골 이상으로 소련의 괴뢰색이 강하여 소련과 몽골 이외는 이 나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19]
문서
중화민국은 1946년 1월에 일단 몽골 독립을 인정했지만, 후원 중인 소련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것을 이유로 승인을 취소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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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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