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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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의문은 1396년(태조 5년)에 완공된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해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폐쇄되기도 했으나,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이 통과한 문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년)에 재건되었으며, 1968년 김신조 사건 당시 순직한 최규식 총경의 기념비가 인근에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의 다른 문들에 비해 초기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문의 내부는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상징하는 봉황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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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 |
| 유형 | 보물 |
| 지정 번호 | 1881 |
| 지정일 | 2015년 12월 2일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 1-1번지 등 4필지 |
| 시대 | 조선 시대 |
| 소유 | 국유 |
| 명칭 | |
| 한글 | 창의문 |
| 한자 | 彰義門 |
| 로마자 표기 | Changuimun |
| 다른 이름 | 북소문 (北小門) 자하문 (紫霞門) |
| 상세 정보 |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
| 용도 | 도성의 북쪽 성문 |
| 특징 | 서울 사소문 중 하나 현존하는 유일한 사소문 |
| 문화재 정보 | |
| 문화재청 ID | 12,18810000,11 |
2. 역사
창의문은 1396년(태조 5년) 조선 건국 초기에 지어졌다. 혜화문과 함께 서울 성곽 도시였던 한양에서 북쪽으로 가는 주요 관문 역할을 했으며, 숙정문은 주로 의례적인 기능을 했다. 창의문 위의 나무 문루는 16세기 임진왜란 때 불에 탔지만,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에 재건되어 현재 서울 성곽의 사소문( 사소문|四小門한국어 ) 중 가장 오래된 문루로 남아있다.[1][14][15] 창의문이라는 이름은 "바른 것을 드러내는 문"이라는 뜻이다.[2]
2. 1. 조선 시대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8]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9]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1422년(세종 4년)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10]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년) 4월에 닫혔다.[11] 1469년(예종 1년)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12]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13],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14][15] 창의문은 원래 1396년에 지어졌으며, 혜화문 (동북문)과 함께 당시 한양( 한양|漢陽한국어 )으로 알려진 서울의 성곽 도시를 나가 북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요 관문 역할을 했다. (숙정문은 북문으로, 주로 의례적인 기능을 했다.) 창의문 위의 나무 문루는 16세기 임진왜란 때 불에 탔지만, 1740년 또는 1741년에 재건되었다. 현재 이 문루는 서울 성곽의 "사소문( 사소문한국어 )"에 있는 문루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1] 창의문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바른 것을 드러내는 문"을 의미한다.[2]
2. 2.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창의문은 원래 1396년에 지어졌다. 혜화문(동북문)과 함께 창의문은 당시 한양(한양|漢陽한국어)으로 알려진 서울의 성곽 도시를 나가 북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요 관문 역할을 했다. (숙정문은 북문으로, 주로 의례적인 기능을 했다.) 창의문 위의 나무 문루는 16세기 임진왜란 때 불에 탔지만, 1740년 또는 1741년에 재건되었다. 현재 이 문루는 서울 성곽의 "사소문"(사소문한국어)에 있는 문루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1] 창의문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바른 것을 드러내는 문"을 의미한다.[2]3. 보존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다.
3. 1. 건축적 특징
창의문은 종로구 부암동에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제일은행에서 7022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 터널에서 하차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현재 창의문을 방문하는 사람은 문의 앞면과 뒷면, 그리고 문 아래까지 접근할 수 있다. 방문객들은 문 위에 있는 나무 문루를 조심스럽게 볼 수 있지만,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으며, 레이저 경보 시스템 때문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도 안 된다.[3]서쪽에서 문으로 접근할 경우, 방문객들은 문으로 이어지는 문과 같은 터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나머지 7개의 문에 비해 보존 상태가 매우 초기 단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문의 내부에 있는 나무 서까래는 지네의 적인 닭으로 장식되어 있다.[4] 이는 작은 새의 적인 봉황으로 서까래가 장식된 혜화문과는 대조적이다.
창의문 근처에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최규식 총경과 정종수 경사의 기념비가 있다. 방문객들은 통로를 걸어 문을 볼 수 있고, 계단을 올라갈 수도 있다.[5]
4. 전해오는 이야기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 하여, 창의문 천장에는 지네의 천적인 닭을 닮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16] 평시에는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다만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 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하여 다시 개방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해 9월 3일 혜화문과 창의문을 그대로 닫아 두기로 한다는 것만이 나올 뿐이다.[17]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하문이라는 별칭은 인왕산 자락의 계곡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 이름을 본따서 상명대학교에는 '자하관'이라는 강의동 건물이 있으며, 대학은 자하(紫霞)라는 이름의 교지를 발행한다.
5. 현대의 창의문
(별도로 작성할 내용이 없으므로 이전 출력을 유지합니다.)
5. 1. 김신조 사건과 안보
창의문 근처에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최규식 총경과 정종수 경사의 기념비가 있다.[5]5. 2. 주변 명소
창의문 근처에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최규식 총경과 정종수 경사의 기념비가 있다.6.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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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참조
[1]
웹사이트
Changuimun (Gate)
http://218.145.29.41[...]
Visit Seoul
2013-09-27
[2]
웹사이트
The Gates and Walls of Seoul
http://www.koreaawar[...]
Korean News Today
2012-12-08
[3]
웹사이트
Changuimun (Gate)
http://218.145.29.41[...]
Visit Seoul
2013-09-27
[4]
웹사이트
Changuimun Gate (Jahamun Gate)
http://english.visit[...]
VisitKorea.or.kr
[5]
웹사이트
theseoulguide
http://www.theseoulg[...]
2014-12-01
[6]
문서
태조실록에 기록된 서울 성곽의 문 이름들
[7]
간행물
「서울 창의문」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5-12-02
[8]
서적
태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9]
서적
태종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0]
서적
세종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1]
서적
세종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2]
서적
예종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3]
서적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4]
서적
영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5]
문서
창의문 보수 당시 발견된 묵서
[16]
뉴스
창의문 천장에 봉황이 그려진 이유 알고보니
http://www.dailian.c[...]
데일리안
2013-05-18
[17]
서적
중종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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