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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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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천강 전투는 1950년 11월, 한국 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유엔군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맞서 중공군은 제2차 공세를 계획, 대한민국 제2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미군을 청천강 일대로 후퇴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유엔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38선 이남으로 후퇴했으며, 한국 전쟁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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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6.25 전쟁
날짜1950년 11월 25일 - 12월 2일
장소청천강
결과중국인민지원군 승리
결과 상세유엔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
중국인민지원군이 38도선 이북 지역 회복
교전 세력
교전국 1유엔
참가국 1미국
영국
튀르키예
대한민국
교전국 2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지휘관 1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존 B. 콜터
로렌스 B. 카이저
백선엽
유재흥
배질 오브리 코드
타흐신 야즈즈
지휘관 2마오쩌둥
펑더화이
한셴추
부대 정보
군대 1제1군단
제1기병사단
제24보병사단
제1보병사단
제9군단
제2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27보병여단
터키 여단
제2군단
제6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8보병사단
제5공군
군대 2제38집단군
제112사단
제113사단
제114사단
제39집단군
제115사단
제116사단
제117사단
제40집단군
제118사단
제119사단
제120사단
제42집단군
제124사단
제125사단
제126사단
제50집단군
제148사단
제149사단
제150사단
제66집단군
제196사단
제197사단
제198사단
병력 규모
병력 1254,571명
병력 2230,000명
사상자 규모
사상자 1 (총합)11,000명 이상
미국 사상자사망: 676명
부상: 3,034명
포로: 2,055명
실종: 813명
터키 사상자사망: 218명
부상: 455명
실종: 94명
사상자 1 (중국 측 추정)23,000명
사상자 2 (총합)45,000명
사상자 2 (중국 측 추정, 전투)20,000명
기타 정보
중국어 표기 (간체)清川江战役
중국어 표기 (병음)Qīngchuānjiāng Zhànyì
관련 전투 (중국)第二次战役西线
관련 전투 (중국, 병음)Dì'èrcì Zhànyì Xīxiàn
다른 뜻살수대첩: 고구려와 수나라의 청천강 싸움
6.25 전쟁 당시 유엔군과 중공군의 전투

2. 배경

인천 상륙 작전낙동강 대공세로 1950년 9월 조선인민군이 격멸되고, 미 제8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며 한중 국경지대로 빠르게 진격했다.[281] 이에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참전 및 유엔군 대상 1차 공세를 명령했다.[282]

1950년 10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중국인민지원군의 제1차 공세


1950년 10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중국인민지원군 제13군은 온정리 전투운산 전투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미국 제1기병사단을 기습, 격퇴했다. 이로써 미 제8군 우익이 붕괴되고 유엔군은 청천강으로 후퇴했다.[283] 중국인민지원군은 유엔군 방어선을 돌파했으나, 보급 문제로 11월 5일 철수했다.[284]

1차 공세 성공에도 불구, 유엔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규모 개입을 예상하지 못했다.[285]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중국인민지원군 약 30,000명이 북한 산악 지형에 은거 중이라 가정, 압록강 일대 교량 폭격으로 병력 지원 차단을 지시했다.[287][288]

그러나 실제로는 18만 명의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주둔, 추가 병력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290] 1951년 3월 소련 무기 도착 전까지 방어 태세 유지 명령에도 불구,[291] 1차 전역 성공으로 중국 지도부는 유엔군 공세 저지 가능성을 확신했다.[292]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은 유엔군의 병력 오판을 인지, 유엔군을 청천강과 평양 사이로 격퇴하는 2차 공세를 1950년 11월 22일 승인했다.[293][295]

2. 1.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1950년 11월 24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낙동강 대공세의 성공으로 조선인민군이 궤멸되고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면서,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종결짓겠다는 목표로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했다.[281][289]

유엔군의 승리와 맞물려 중국인민지원군이 제1차 공세 후 갑작스럽게 철군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한반도에 대규모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엔군 사령부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285][286] 맥아더 장군은 중국인민지원군 약 30,000명이 북한의 산악 지형에 은둔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압록강 일대의 다리들을 폭격하여 병력 지원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287][288]

2. 2. 중국의 참전과 '제2차 공세'

마오쩌둥 주석은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껴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의 참전을 결정했다.[282] 1950년 10월, 중공군은 비밀리에 한반도에 진입하여 온정리 전투운산 전투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미국 제1기병사단을 기습 공격하여 '제1차 공세'를 감행했다.[282] 이로 인해 유엔군은 청천강 일대로 후퇴해야 했다.[283]

그러나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 규모를 과소평가했고, '제1차 공세' 이후 중공군의 철수를 오판했다.[285]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병력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압록강 일대의 다리들을 폭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288]

하지만 유엔군의 예상과는 달리, 이미 북한 지역에는 18만 명의 중공군이 주둔 중이었고, 더 많은 병력이 국경을 넘어 침투 중이었다.[290] 이에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유엔군의 허점을 파고들어 '제2차 공세'를 계획했다.[293] 이 공세는 유엔군을 청천강과 평양 사이 지역으로 격퇴하는 반격 작전이었다.[293] 펑더화이는 더 많은 병력을 참전시키기 위한 기만작전으로, 모든 부대에게 포로들을 내버려두고 더 북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1950년 11월 22일에 제2차 공세의 개시를 승인했다.[295]

2. 3. 지리 및 기후 조건

청천강 전투는 청천강 유역과 그 주변의 산악 지형에서 벌어졌다.[296] 청천강은 구장동 일대에서 유엔군 전선의 북쪽으로 흘렀다.[299] 청천강 북안의 언덕 지형은 중국군이 তাদের 존재를 은폐하고 유엔군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303]

전투 당시 한반도는 100년에 한 번 있는 혹한이 찾아왔는데,[304] 기온은 영하 34도까지 떨어졌다.[305] 이는 -30°C까지 떨어지는 추위였다.[72]

2. 4. 전략

1950년 11월 말 미국 제2보병사단의 병사들.


미국 제25보병사단을 밀어붙이는 중국 제39군집단의 병사들.


청천강 전투는 청천강과 그 지류 주변, 중·조 국경에서 남쪽으로 약 80.47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다.[63][64] 유엔군 전선은 한국 서해안에서 태백산맥까지 이어졌으며,[65] 청천강은 구장동에서 유엔군 전선의 북쪽으로 흘러 들어갔다.[66] 서쪽에서 동쪽으로 청주, 용산동, 입석, 구장동, 덕천, 영원 등의 마을이 전선을 따라 흩어져 있었고,[67] 신안주, 안주, 군우리, 북창리 등지에 도로 교차로가 있었다.[68]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뻗어 순천을 거쳐 평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전선 중앙에 주둔한 유엔군의 주요 후퇴 경로가 되었다.[69] 청천강 북쪽 기슭의 구릉 지형은 중국군이 존재를 숨기고 진격하는 유엔군을 분산시키는 방어 장벽을 형성했다.[70] 이 전투는 100년 만에 가장 추운 겨울 중 하나인 혹독한 추위 속에서 치러졌으며, 기온이 -30°F까지 떨어졌다.[71][72]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각기 다른 전략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2. 4. 1. 유엔군

월턴 워커 장군은 대한민국 제2군단을 우익에, 미 제1군단제9군단을 각각 서쪽과 중앙에 배치하여 1950년 11월 24일 10시에 공세를 시작했다.[306] 유엔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의 매복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진격했지만,[307] 병력 부족으로 전선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307] 11월 25일, 제8군은 정주-영원 선에 도달했다.[308]

추수감사절 직후라 유엔군 장병들의 사기는 높았으나,[311] 지나치게 고양된 사기는 군기 문란으로 이어졌다. 많은 병사들이 전투 전에 무기와 탄약을 버렸고, 미 제9군단의 소총 중대는 군모와 총검을 버리고 1인당 수류탄 1개와 50발의 탄약만 소지한 채 전투에 임했다.[312] 또한, 유엔군 지휘부는 겨울까지 전쟁이 지속될 것을 예상하지 못해 동계 장비 부족 문제도 심각했다.[306]

2. 4. 2. 중공군

중공군은 유엔군의 진격을 예상하고 제8군을 유인하기 위한 반격을 계획했다. 제38군과 제42군은 대한민국 제2군단을 공격하여 유엔군의 우익을 무너뜨리고 후방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82] 이와 동시에 제39군과 제40군은 미 제9군단을 견제하여 대한민국 제2군단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했다.[83]

중공군 제13군은 명목상 23만 명의 병력이었으나, 실제 전투 병력은 15만 명 정도였다.[32][63] 예를 들어, 제66군은 전투 초기에 사단 당 6,600명의 병력만을 보유했는데,[84] 이는 일반적인 사단 병력 10,000명에 비해 부족한 수치였다.[85] 또한, 병사 3명 당 소총 1정만 보급되었고, 나머지는 수류탄 투척병으로 배치되었다.[77] 곡사포와 같은 중화기는 대부분 만주에 남겨두었기 때문에, 박격포가 중공군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포병 화력이었다.[77] 평균적으로 병사들은 5일 치 식량과 탄약만을 지급받았고, 재보급은 전장에서 노획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86]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중공군은 야간 공격과 침투 전술에 크게 의존했다.[87] 원시적인 군수 체계는 중공군이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동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를 통해 유엔군 방어선을 우회하거나 고립된 유엔군 진지를 포위할 수 있었다.[88][89] 중공군은 국공 내전에서 노획한 톰슨 기관단총, M1 개런드, M1918 브라우닝 자동 소총, 바주카, M2 박격포 등 미국제 소화기를 사용하기도 했다.[90]

펑더화이 중공군 사령관은 유엔군에게 중공군이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모든 부대에 신속하게 북쪽으로 후퇴하고 포로들을 석방하라는 기만 작전을 펼쳤다.[61]

3. 전투 경과

11월 25일부터 11월 28일까지의 청천강 전투 지도.


청천강 유역에 형성된 유엔군 전선은 한반도 중부에 위치하여 서해안과 태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선이었다.[298] 이 전선은 한중 국경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297] 청천강은 구장동 일대에서 유엔군 전선의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299] 정주, 영산동, 구장동, 덕천, 영원 등의 마을은 유엔군 전선 곳곳에 점처럼 흩어져 있었으며,[300] 이 마을들은 신안주, 안주, 군우리, 북창리 등으로 이어지는 도로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301] 특히 군우리에서 순천을 거쳐 평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전선의 중앙을 관통하는 중요한 경로였다.[302] 청천강 북안의 언덕 지형은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유엔군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303]

1950년 11월 24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했다.[306] 재편성된 대한민국 제2군단이 제8군의 우익을 맡았고, 제1군단이 서쪽, 제9군단이 중앙, 대한민국 제2군단이 동쪽을 맡아 진격했다.[307] 이들은 중공군의 매복 작전에 대비해 조심스럽게 진격했지만,[307] 병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307] 제8군은 대한민국 제2군단의 강력한 저항을 제외하면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고 11월 25일 정주-영원 선에 도달했다.[308]

미국 제8군은 병력은 열세였지만, 조선인민군이나 중공군에 비해 3.5배나 되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309] 제5공군의 공중 지원은 적의 대공 화기 부족으로 큰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310] 추수감사절 행사로 유엔군 장교들의 사기는 높았고, 병사들은 크리스마스에 귀향하거나 봄에 독일로 돌아갈 것을 기대했다.[311] 그러나 지나치게 높은 사기는 군율을 무너뜨렸고, 많은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버리고 전투에 임했다. 예를 들어, 미국 제9군단의 소총 중대는 군모와 총검을 버리고, 1인당 수류탄 1개와 탄약 50발만 소지한 채 전투를 시작했다.[312] 또한, 유엔군 계획 입안자들은 겨울까지 전쟁이 이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해 제8군 부대 대부분이 동계 장비 부족 상태로 공세에 참여했다.[306]

"주요 목표로써, 부대 한 개는 빠르게 적 주변에서 싸우고, 적의 측면을 끊어내야 한다. 고속도로와 평지에서의 싸움은 전차와 포병이 공격 작전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산지에서의 야간전이 최고의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소규모의 정찰대들이 공격을 시작하여 징을 울린다. 다수의 아군은 조로 이동한다."
제2차 공세 당시 중국군의 작전 원칙[313][314]



제8군이 진격하는 동안, 중공군 제13집단군은 산지에 숨어 있었다. 제50집단군과 제66집단군은 서쪽에, 제39집단군과 제40집단군은 중앙에, 제38집단군과 제42집단군은 동쪽에 은폐해 있었다.[272] 중공군은 유엔군의 진격을 예상하고 제8군의 시선을 끌기 위한 반격을 계획했다.[293] 제1차 공세 때처럼 제38집단군과 제42집단군은 대한민국 제2군단을 공격해 유엔군의 우익을 격파하고 보급선을 차단하려 했다.[315] 동시에 제39집단군과 제40집단군은 미국 제9군단을 묶어 대한민국 제2군단을 지원하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다.[316] 제50집단군과 제66군집단은 후방에 남아 미국 제1군단의 진격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다.[316]

중공군 제13군의 병력은 230,000명이었지만,[272] 실제 전투 병력은 150,000명에 불과했다.[296] 예를 들어 제66집단군은 전투 초기에 사단당 6,600명만 보유했는데,[317] 유엔군은 사단당 10,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318] 화기는 병력의 3분의 1만 소지했고, 나머지는 수류탄 투척병으로 배치되었다.[310] 곡사포와 야포를 만주에 두고 왔기 때문에 중공군의 포병 지원은 박격포에 의존해야 했다.[310] 병사들은 평균 5일 치의 식량과 탄약을 배급받았고, 전장을 돌아다니며 재보급을 받아야 했다.[319]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공군은 야간 공격과 침투에 크게 의존했다.[320] 원시적인 군수 체계 덕분에 중공군은 거친 산지에서 기동하여 유엔군 방어 시설을 통과하거나 거점을 포위할 수 있었다.[321][322] 중공군은 국공내전에서 노획한 미국제 소화기(톰프슨 기관단총, M1 개런드, 브라우닝 자동소총, 바주카, M2 박격포 등)를 사용하기도 했다.[323]

1950년 11월 25일 오후, 미 제8군이 공세를 중지하자 중공군 제13집단군은 제2차 공세를 개시했다.[324] 용산동에서 영동리에 이르는 유엔군 전선 전역에서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졌다.[325] 이 반격으로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11월 26일 아침 완전히 중단되었다.[326]

전투의 상세한 경과는 다음과 같다.


  • '''영산동'''에서는 제1보병사단이 중공군 제66군단과 교전했다.
  • '''입석'''과 '''구장동'''에서는 미 제9군단이 중공군 제39군단 및 제40군단과 맞붙었다.
  • '''덕천'''과 '''영동리'''에서는 중공군 제38군단과 제42군단이 제2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3. 1. 덕천-용동리 전투

1950년 11월 25일 오후, 미 제8군이 진격을 멈추자 중공군 제13군은 2차 공세를 시작했다.[91] 용산동에서 영동리에 이르는 유엔군 전선에 대한 대규모 정면 공격이 감행되었으며, 동쪽에서는 중공군 제38군단과 제42군단이 덕천영동리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로써 크리스마스 귀향 작전은 11월 26일 아침에 완전히 중단되었다.[93]

대한민국 제2군단 예하 대한민국 제7보병사단 좌측에는 미 제9군단 예하 미 제2보병사단이 주요 중공군 보급로 경로에 배치되었다.[120] 크리스마스 공세 작전 중 미 제9보병연대는 사단의 북쪽으로 청천강을 따라 진격을 이끌었고, 미 제38보병연대는 사단의 우익에 배치되었다.[121] 11월 25일, 제9보병연대는 구장동 북쪽 219고지에서 중공군의 방어에 막혔다.[120] 다음 날 공세를 재개하기 위해 미 제23보병연대는 제9보병연대 후방으로 이동했다.[120] 동시에 제38보병연대는 구장동과 덕천 사이 도로의 솜인동에 도착했다.[122] 공중 정찰에서 중공군 활동 증가가 감지되자, 제38보병연대 A중대가 중공군 영토로 정찰을 보냈다.[122]

대한민국 제2군단에 대한 반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중공군 제40군단은 미 제2보병사단에 대한 중공군 제38군단의 측면을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108] 이를 위해 중공군 제40군단 예하 제119사단은 먼저 솜인동을 공격하여 미군이 한국군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다.[123] 그 후 제120사단은 청천강을 건너 미 제2보병사단의 주력을 묶어두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123] 마지막으로 제118사단은 미군의 측면을 돌아서 후방에서 구장동을 점령했다.[123]

반격이 시작된 밤, 중공군 제120사단은 청천강 북쪽 강둑에서 미 제9보병연대와 우연히 마주쳤다.[123][124] 양측의 갑작스러운 조우로 제9보병연대는 3개 소총 중대만 전투력을 유지하게 되었다.[125] 미 제23보병연대 제1대대가 미 제61야전포병대대 뒤에 배치된 것을 모른 채,[126] 중공군 제359연대 제120사단 소속 예도 4개 중대가 강을 건너 미군 포병 진지를 공격했다.[123] 제61대대는 기습으로 궤멸되었지만,[126] 미 제23보병연대는 중공군 중대 2개를 격파했다.[123][127] 살아남은 중공군 병사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Chinaman's Hat이라는 언덕을 점령, 제23보병연대 전체의 진지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123][128]

중공군 제120사단이 미 제2보병사단의 중앙을 공격하는 동안, 중공군 제119사단도 구장동과 덕천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123] 중공군 제119사단과 미 제38보병연대 간의 전투에서 정찰 중이던 제38보병연대 A중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분산되었다.[129] 중공군 정찰대는 미군을 유인하여 진지를 노출시켰고,[130] 이어진 중공군의 반격으로 제38보병연대 중앙의 G중대가 손실되었다.[131] 중공군은 또한 제38보병연대의 좌익을 돌파하여 연대의 퇴각로를 차단했다.[132] 11월 26일 아침, 중공군 병사들이 제38보병연대 주변에서 관측되었다.[133]

11월 26일 아침, 중공군은 철수했고 제38보병연대의 반격으로 후방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렸다.[132] 대한민국 제7보병사단 제3보병연대가 갑자기 제38보병연대 구역에 나타나자, 연대장 조지 B. 페플로(George B. Peploe) 대령은 미 제2보병사단의 우익과 제8군 전체가 붕괴되었음을 깨달았다.[134] 미 제2보병사단 사령관 로렌스 B. 케이저(Laurence B. Keiser) 소장의 명령에 따라 페플로 대령은 즉시 대한민국 제3보병연대를 지휘하면서 우익을 방어하려 했다.[134] 제23보병연대의 폴 L. 프리먼(Paul L. Freeman) 대령도 연대를 이끌고 Chinaman's Hat을 점령하려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135]

11월 26일 밤, 중공군은 공격을 재개했다. Chinaman's Hat으로부터의 반격으로 곧 제23보병연대의 지휘소가 점령되었다.[136] 제23보병연대의 좌측에서는 제9보병연대 G중대도 중공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찰스 C. 슬론 주니어(Charles C. Sloane Jr.) 대령은 연대 잔여 병력을 강 건너로 철수시켰다.[125] 후방에서 중공군의 매복 공격으로 제9보병연대 잔여 병력이 궤멸되었다.[137] 미 제2보병사단의 우익에서는 중공군 제40군단 지휘관 원유전(Wen Yuchen)이 제119사단에 유엔군의 우익 돌파를 막기 위해 제38보병연대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138] 치열한 전투로 인해 제38보병연대는 사단에 합류하기 위해 구장동으로 되돌아와야 했다.[139]

11월 27일, 워커(Walker)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취소하지 않았지만, 케이저는 사단에게 구장동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118] 11월 28일 케이저의 명령이 완료되기 전, 워커는 제9군단 소속 존 B. 쿨터(John B. Coulter) 소장에게 미 제2보병사단 남쪽 군우리(Kunu-ri)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140] 11월 27일 밤, 사단의 전면적인 철수가 시작되었고 중공군은 모든 곳에서 공격을 가했다.[141] 사단의 호송대가 남쪽으로 이동하려 할 때, 후방의 중공군 검문소에서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받았다.[142] 중공군 바주카포 부대는 차량을 격파했으며, 다른 차량들은 전차를 에워싸고 포탑에 수류탄을 던지려 했다.[143] 미 제2보병사단은 중공군 제118사단의 봉쇄를 돌파하고 11월 28일 밤에 군우리에 도착했다.[123][144]

3. 2. 구장동 전투

미 제9군단 소속 미 제2보병사단은 구장동 북쪽에서 중공군 제40군단과 격전을 벌였다. 1950년 11월 25일, 미 제9보병연대는 구장동 북쪽 219고지에서 중공군의 방어에 막혔다.[120] 다음 날, 미 제23보병연대가 제9보병연대 후방으로 이동하여 공세를 재개하려 했고, 제38보병연대는 구장동과 덕천 사이 도로의 솜인동에 도착했다.[122]

중공군 제40군단은 미 제2보병사단을 공격하여 중공군 제38군단의 측면을 보호하려 했다.[108] 이를 위해 제119사단은 솜인동을 공격하고, 제120사단은 청천강을 건너 미 제2보병사단 주력을 묶어두었으며, 제118사단은 후방에서 구장동을 점령하려 했다.[123]

11월 25일 밤, 중공군 제120사단은 청천강 북쪽에서 미 제9보병연대와 교전하여 3개 소총 중대만 전투력을 유지하게 만들었다.[123][124][125] 중공군 제359연대 예도 4개 중대는 미 제61야전포병대대를 기습했지만,[123][126] 미 제23보병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123][127] 살아남은 중공군은 Chinaman's Hat을 점령했다.[123][128]

중공군 제119사단은 미 제38보병연대와 전투를 벌여 A중대를 분산시키고 G중대를 손실시켰다.[129][131] 중공군은 제38보병연대의 퇴각로를 차단했고,[132] 11월 26일 아침, 중공군이 제38보병연대 주변에서 관측되었다.[133]

중공군은 11월 26일 아침 철수했고, 제38보병연대는 반격하여 후방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132] 미 제2보병사단장 로렌스 B. 케이저(Laurence B. Keiser) 소장은 제38보병연대에게 대한민국 제3보병연대를 지휘하여 우익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134] 제23보병연대는 Chinaman's Hat을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35]

11월 26일 밤, 중공군은 Chinaman's Hat에서 반격하여 제23보병연대 지휘소를 점령했다.[136] 제9보병연대 G중대는 함락되었고, 찰스 C. 슬론 주니어(Charles C. Sloane Jr.) 대령은 연대 잔여 병력을 강 건너로 철수시켰다.[125] 중공군의 매복으로 제9보병연대 잔여 병력은 궤멸되었다.[137] 중공군 제40군단 지휘관 원유전(Wen Yuchen)은 제119사단에 제38보병연대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138] 제38보병연대는 구장동으로 후퇴했다.[139]

미 제2보병사단은 11월 28일 밤 중공군 제118사단의 봉쇄를 돌파하고 군우리에 도착했다.[123][144]

3. 3. 입석리 전투

미 제25보병사단은 입석리 북쪽에서 중공군 제39군단과 교전했다. 중공군은 미군 부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고, 미 제25보병사단은 중공군의 압박에 밀려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했다.[123][144]

3. 4. 영산동 전투

1950년 11월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하는 미군 전차


운산 전투 이후 재정비를 마친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은 1950년 11월 20일, 미 제1군단의 우측인 영산동에 배치되었다.[408] 크리스마스 공세의 일환으로 제1보병사단은 북진하여 태천을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409] 미 제25보병사단 소속 제35보병연대는 제1보병사단의 우측에서 영산동에서 진격을 시작했고,[410] 미 제24보병사단은 제1보병사단의 좌측에서 정주를 향해 진격할 예정이었다.[409]

11월 24일 아침, 제1보병사단은 제11보병연대 및 제12보병연대와 함께 태천을 향해 진격했다.[409]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의 부비트랩과 박격포 사격으로 진격이 지연되었지만, 11월 24일 제1보병사단은 태천을 포위할 수 있었다.[409] 그러나 제1보병사단은 중공군의 집결 지역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태천 주변에서의 저항은 점차 거세졌다.[411] 11월 24일 밤, 중공군 제66군단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대한민국 국군에 역습을 가했고,[409][411] 11월 25일부터 26일까지 중공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였다.[411]

11월 26일, 태천 인근 전투는 제11보병연대가 무너지면서 결정적인 국면을 맞았다.[411] 백선엽 제1보병사단장은 제11보병연대를 구원하기 위해 제15보병연대에서 예비 부대를 차출했다.[411] 청천강을 넘어 미 제25보병사단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선엽은 중공군의 반격에 대비해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다.[409] 11월 27일 아침, 태천 주변의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습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이 공격으로 미 제24보병사단이 분단되었다.[412] 미 제24보병사단과 미 제35보병연대는 청천강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413]

11월 27일 오후 1시, 펑더화이는 중공군 제66군단에게 제1보병사단이 청천강으로 철수하기 전에 격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414] 11월 27일 저녁, 제66군단은 제1보병사단과 미 제5연대전투단, 미 제35보병연대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415] 자정을 넘어 중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전선을 돌파해 영산동을 점령했고, 제11보병연대, 제15보병연대, 미 제35보병연대의 지휘 본부를 파괴했다.[416] 제11보병연대와 제15보병연대는 곧 흩어졌고,[417] 후퇴하던 미 제35보병연대는 영산동에서 후방의 중공군에게 가로막혔다.[418] 중공군의 강력한 압박 속에서도 미 제35보병연대는 마을을 벗어나 11월 28일 오후 미 제25보병사단에 합류했다.[418] 한편, 백선엽은 대한민국 연대들을 이끌고 영산동을 탈환하였다.[417] 제1보병사단은 11월 29일 철수할 때까지 중공군에 맞서 마을을 사수했다.[419]

3. 5. 군우리 전투

군우리-순천 도로는 미 제9군단의 주요 철수 지점이었다. 청천강에서 중공군 제38군은 미 제2보병사단과 터키 여단을 공격하여 군우리를 점령하려 했다.[414] 11월 28일, 터키 여단은 중공군의 차단 공격에 걸려 처음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455]

11월 29일, 군우리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중공군의 도로 차단이 미 제2보병사단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456] 미 제2보병사단장 로렌스 B. 케이저(Laurence B. Keiser)는 정찰중대와 제9보병연대의 잔병들을 파견해 중공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전차 공격에도 불구하고 도로 차단은 더욱 강화되었다.[455] 11월 29일 밤, 군우리 전투가 끝나고 중공군 제112사단이 제113사단에 합류하면서,[457] 도로 차단 지역은 9.7km로 더 넓어졌다.[458]

미 제2보병사단은 11월 29일까지 차단망에 주둔한 중공군의 병력을 알지 못했다.[438] 존 B. 쿨터(John B. Coulter)는 로렌스 B. 케이저(Laurence B. Keiser)에게 제27보병여단과 함께 도로 차단망을 돌파하여 철수할 것을 지시했고,[460] 11월 30일 아침, 로렌스 B. 케이저(Laurence B. Keiser)는 협곡을 따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461]

11월 30일, 미 제9보병연대는 차단망을 따라 공격을 개시하면서 철수를 시작했다.[462] 그러나 중공군의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으로 오전 9시에 공격이 중단되었다.[462] 미군 사령부와 영국군 부대의 연락도 원활하지 않아[465] 로렌스 B. 케이저(Laurence B. Keiser)는[467] 제2보병사단에게 오전 10시 도로 차단 지역을 따라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468]

나중에 곤틀릿이라고 불리게 되는 협곡에 미 제2보병사단이 들어서자,[269] 중공군의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고, 박격포가 도로를 강타했다.[469] 파괴된 차량과 사상자로 가득 찬 도로에서[471] 부대의 응집성은 곧바로 사라졌다.[470] 밤이 되자 중공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470] 중공군은 도로를 완전히 봉쇄해 미 제2보병사단 소속의 제38보병연대와 제503포병대대를 격멸했다.[472] 이동이 불가능해진 포병들은 차량을 버리고 언덕으로 도주했다.[470][472] 미 제2보병사단의 생존자들은 12월 1일 순천에 도착했고,[475] 12월 2일 미 제8군은 중공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475]

3. 6. 포위망 탈출 (곤틀릿)

1950년 11월 28일 아침, 중공군 제113사단은 미 제9군단 후방의 군우리-순천 도로 우측에 있는[451] 사모리를 점령했다.[423] 1시간 반 후, 미 제5기병연대의 선두 부대가 매복에 걸려 격파되었다.[452] 공격이 저지되자 제5기병연대는 중공군 지휘소를 파괴하려 했지만, 오후에 철수해야 했다.[453] 그날 밤, 제113사단은 군우리-순천 도로가 지나가는 협곡을 점령하여 미 제2보병사단의 퇴로를 차단했다.[302][426] 11월 29일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가 남쪽에서 협곡을 정리하려 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공격은 중단되었다.[454]

터키 여단은 11월 28일 밤 중공군의 차단 공격으로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455] 헌병 순찰대가 조사에 나섰으나, 아침에 대부분 사망했다.[456] 11월 29일 군우리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중공군의 도로 차단 소식이 미 제2보병사단에 전해졌다.[456] 카이저는 정찰중대와 제9보병연대 잔존 병력을 파견해 중공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전차 분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도로 차단은 더욱 강화되었다.[455] 11월 29일 밤, 군우리 전투가 끝나고 중공군 제112사단이 제113사단에 합류하면서,[457] 도로 차단 지역은 9.7km로 넓어졌다.[458]

"다음 500야드는 일시적으로 통과가 불가능했는데, 수많은 불타는 차량들과 산더미 같은 시체들 때문이었다. 구덩이에 묻힌 부상자들과 어떻게든 움직이는 것에 타려는 사람들... 우리 길에는 시체들이 있었고, 우리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달려드는 부상자들에게 압도당했다. 나는 [부상당한 한국군 병사들을] 우리 트레일러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태우자 다른 부상자들이 트레일러에 올라탔기 때문에, 지프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을 떨쳐낼 수밖에 없었다."
미 육군 제38보병연대 제1대대 윌리엄 켈러, "곤틀릿"에서의 대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다.[459]



11월 29일까지 미 제2보병사단은 차단망에 주둔한 중공군의 병력을 알지 못했다.[438] 게다가 미 제25보병사단 헌병이 실수로 군우리에서 안주로 가는 대체 도로 역시 중공군에 의해 막혔다고 보고했다.[458] 이후, 콜터는 카이저에게 제27보병여단과 함께 도로 차단망을 돌파하여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460] 11월 30일 아침, 카이저는 협곡을 따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461]

11월 30일 아침, 제9보병연대는 차단망을 따라 공격을 개시하며 철수를 시작했다. 전차 4대가 차단망에 파견되었고, 중공군은 사격을 멈춘 상태였다.[462] 이에 고무된 슬론은 제9보병연대에게 전진을 명령했지만, 중공군은 기관총과 박격포로 미군을 공격했고, 오전 9시에 공격은 중단되었다.[462] 미 제2보병사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3보병연대가 미 제9보병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괴멸되었다.[463][464] 미군 사령부와 영국군 부대 간의 연락도 원활하지 않아,[465] 미들섹스 연대는 차단망을 돌파하지 않고 협곡 남쪽 끝으로 진격했다.[466] 카이저는 차단된 도로의 길이가 짧을 것이고 영국군이 도로를 따라 공격하고 있다고 믿고,[467] 제2보병사단에게 오전 10시 도로 차단 지역을 따라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468]

나중에 곤틀릿이라고 불리게 되는 협곡에 미 제2보병사단이 들어서자,[269] 중공군의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고, 박격포가 도로를 강타했다.[469] 차단된 도로의 길이에 미 제2보병사단은 놀랐고,[470] 도로는 파괴된 차량과 사상자로 가득 찼다.[471] 구덩이로 엄호하려던 이들은 남쪽으로 달아나는 수송대에게 버려졌고, 부대의 응집력도 곧바로 사라졌다.[470] 이날 유엔군은 공중 지원을 통해 중공군의 거점을 공격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공중 지원이 없던 밤에 중공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470] 중공군은 도로를 완전히 봉쇄해 미 제2보병사단 소속 제38보병연대와 제503포병대대를 괴멸시켰고,[472] 이동이 불가능한 포 때문에 사단의 남은 병력들은 차량을 버리고 언덕으로 도주했다.[470][472] 사단 후방에 있던 프리먼 중령은 군우리-안주 도로로 철수하여 자신의 부대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려 했다.[473] 마지막 교전에서 미 제23보병연대는 20분 동안 3,206발의 포탄을 발사했고,[471] 제23보병연대를 추격하던 중공군은 집중 포격에 충격을 받았다.[474] 미 제2보병사단의 생존자들은 12월 1일 순천에 도착했고, 12월 2일 미 제8군은 중공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475]

4. 결과 및 영향

1950년 11월 24일,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은 태천을 향해 진격했으나,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의 부비트랩과 박격포 사격으로 진격이 지연되었다.[409] 중공군은 제66집단군을 이끌고 대한민국 국군을 역습했고,[409][411] 11월 25일부터 26일까지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졌다.[411]

11월 26일, 태천 인근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11보병연대가 무너지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411] 백선엽은 제11보병연대를 구원하기 위해 예비 부대를 차출했고, 중공군의 반격에 대비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411] 11월 27일,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미국 제24보병사단이 분단되었다.[412] 미군 부대들은 청천강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413]

펑더화이는 중공군 제66집단군에게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이 철수하기 전에 격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414] 11월 27일 저녁, 중공군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대한민국 국군 전선을 돌파하고 영산동을 점령, 대한민국 제11보병연대, 제15보병연대, 미국 제35보병연대의 지휘 본부를 파괴했다.[416] 대한민국 제11보병연대와 제15보병연대는 흩어졌고,[417] 후퇴하던 미국 제35보병연대는 중공군에게 가로막혔으나, 11월 28일 오후 미국 제25보병사단에 합류했다.[418] 백선엽은 대한민국 연대들을 이끌고 영산동을 탈환, 11월 29일 철수할 때까지 중공군에 맞서 마을을 사수했다.[417][419]

4. 1. 유엔군의 피해

미국 제2보병사단은 4,03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부분의 야포와 신호 장비, 개인 화기 45%, 차량 30%를 잃었다.[477] 이 전투로 미국 제2보병사단은 제 기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478] 미국 제25보병사단은 1,313명의 사상자를 냈다.[480] 터키 여단은 93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장비의 90%, 야포의 50%, 차량의 90%를 잃었으며,[481] 이후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452] 대한민국 제2군단은 궤멸적인 피해를 보고 해체되었다.[483]

4. 2. 중공군의 피해

중공군은 이 전투에서 약 45,000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제38군은 미 제2보병사단을 격파한 공로로 '만세 군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중공군 역시 보급 문제와 혹한으로 인해 전투 지속 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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