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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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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충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교육자로, 본관은 해주이며 문하시중을 역임했다. 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문종 대에는 법령 개정을 주도하여 고려 국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1055년 은퇴 후에는 구재학당을 설립하여 유학자를 양성했으며, 이는 개경 사학 12도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해동공자'로 불리며 고려 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사후 문헌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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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
인물 정보
한글 이름최충
한자 이름崔沖
로마자 표기Choe Chung
호연(浩然)
성재(惺齋), 월포(月圃), 방회재(放晦齋)
시호문헌(文憲)
생애
출생984년
사망1068년 10월 13일 (향년 85세)
출생지고려 서해도 해주
사망지고려 개경
가족 관계
아버지최온(崔溫)
아들장남 최유선(崔惟善)
사위김성수(金成洙)
본관해주 최씨
경력
과거 급제1005년 문과 급제
주요 관직문하시중
재임 기간 (문하시중)1047년 8월 23일 ~ 1055년 9월 20일
재임 기간 (문하시중 겸 대리청정공)1048년 2월 29일 ~ 1049년 3월 2일
기타
종교유교
최충 초상화
최충 초상화

2. 주요 이력

해주를 본관으로 하며, 아전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에 이르렀다.[5]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 편찬 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6] 문종 즉위 후 법령을 개정하여 고려 멸망 시까지 고려 국법의 기틀을 완성시켰다. 구재학당을 설립하여 사학의 효시를 열었다. 서북 주(州)·진(鎭) 공역(工役)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동여진 등 야인들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은퇴 후 구재학당에서 유학자들을 양성했으며, 이는 개경 사학 12도의 모범이 되었다.

1050년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1053년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1055년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에 서훈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3. 생애

최충은 984년 신라 귀족 출신인 해주 최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1005년 진사 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1047년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였다.[2] 개경사학 9재학당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들의 과거 시험 준비를 도왔다. 9재학당에서는 구경삼사를 가르쳤으며, 사학 시스템 보급에 힘쓴 결과 "고려의 공자"라는 별명을 얻었다.[2][3] 1068년 10월 13일에 사망하였고, 사후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4][3]

3. 1. 초기 생애

최충의 아버지 崔溫|최온중국어해주의 아전이었으며, 사후에 아들 최충이 귀해지자 태자태보로 추증받았다.

최충은 984년 서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도 금성을 거쳐 개경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호는 성재, 월포, 방회 등을 사용했고 자는 호연이다. 1005년(목종 8)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우습유에 올랐다. 1013년(현종 4)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을 겸하였다.[2]

3. 2. 관료 생활

현종 때 습유보궐, 우습유, 한림학사, 간의대부 등을 지냈고, 덕종 초에 우산기상시, 동지 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형부상서, 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정종 때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 병마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고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변방에 병마사로도 나갔다.[5]

식목도 감사로 재직할 당시 내사시랑 왕총지와 함께 왕에게 과거 급제 문제를 진언하였다. 최충의 전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최충의 진언은 당시 문하시랑으로 있던 김원충과 판어사 김정준에 의해 논박당한다. '그의 씨족 등록이 안된 것은 그의 조부나 부친의 과실이지 본인의 죄는 아니며 또한 그가 다년간 글공부에 노력한 공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영예를 얻었으니 그 스스로에게는 어떤 허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직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라며 논박했던 것이다. 문종은 이 두 의견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 문종은 최충과는 달리 가끔 예외를 인정하고 인품과 실력을 중시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7]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의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5] 그 후 한림학사, 예부시랑, 간의대부,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문종 즉위 후에는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곧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5]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나라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참고하여, 이 글들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고사를 참고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원사(刑部尙書中樞院使)로 내직으로 돌아왔으며 정종초에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 수국사(參知政事 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임명되어 변경에 나가 영원진(寧遠鎭)·평로진(平虜鎭) 등 변경에 진(鎭)을 구축하는 등 북방 방비에도 힘썼다. 다시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守司徒 修國史)가 된 뒤 상주국(上柱國)의 훈위를 받고 곧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3. 3. 법률 개정

1047년 문종 즉위 직후 평장사에서 문하시중으로 특진한 뒤 도병마사가 되었고, 대흉년을 만난 서북 지방 백성이 부역에 시달리는 것을 금지케 했으며, 동여진의 변경 침입에 대해 강경책을 쓰도록 주장하여 시행되었다.[8] 문하시중에 임명된 그에게 가장 먼저 부여된 일은 형법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었다.[8] 문종은 즉위년 8월 경신일 아침 조회를 마치고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을 불러 정치적 당면 과제를 질문하였다.[8] 최충은 법제도 확립이 정치의 관건이라고 역설했다. 시중 최제안이 곧 죽고 최충이 후임 시중으로 오른 후 곧바로 법제 개편 작업에 돌입했다.[8] 1047년 왕은 최충과 율사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5]

최충은 왕명을 받들어 율사들과 함께 형법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5] 당시까지 허술하게 되어 있던 많은 법규들이 고쳐지고, 죄수에 대한 신문을 할 때 반드시 형관 3인이 함께 들어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이 마련되었다.[8] 문종은 이외에도 많은 법제를 신설하고 개편했는데, 여기에는 최충의 조언이 많이 작용했다.[8]

3. 4. 북방 경비와 외교

1037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임명되어 영원진(寧遠鎭)·평로진(平虜鎭) 등 변경에 진(鎭)을 구축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다.[5] 도병마사로서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6]

1050년(문종 4) 동여진(東女眞) 추장 등 86명의 석방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8] 최충은 동여진 등 야인들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며, 이들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한편, 포로 석방을 통해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3. 5. 은퇴와 교육 활동

1053년(문종 7)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문종의 만류로 태사문하시중에 임명되면서 치사(致仕)가 허락되었다.[7] 은퇴 후 구재학당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6] 1055년 송악산 밑에 사숙(私塾)을 세우고 유학을 강의했는데, 이것이 바로 구재학당으로, 후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린다. 구재학당은 사학십이도의 모범이 되었으며,[10] 구재학당에서 우수한 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이후 다른 유학자들이 이를 본받아 사학을 개설하여 문헌공도를 포함해 12공도라 하였다. 최충은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칭호를 받았다.[10]

그의 시호를 따서 사후에 붙여진 문헌공학도는 사학십이도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수백여 명에 이르렀던 문헌공학도 주도로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대대적인 유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10]

3. 6. 사망

崔冲중국어은 1068년 음력 9월 15일에 85세로 사망하였다.[4] 사후에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3]

4. 사상과 신념

비록 악한 적이라고 해도 힘으로만 누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그의 판단에서는 실리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8] 또 인간을 형벌로만 다스리는 것은 자칫 원한을 사게 할 수 있으니 차라리 풀어주어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편이 적을 만들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 역시 현실적이었다.[8] 그러나 사회체제에 대한 그의 시각은 매우 보수적이고 원리원칙에 충실하였다.[8]

최충은 개경사학 9재학당을 설립했는데, 이는 귀족 자제들이 과거 시험을 준비하도록 돕는 사립 학교였다. 이 학당에서는 학생들에게 주역, 서경, 시경, 예기, 주례, 의례, 좌전, 공양전, 곡량전 등 구경, 그리고 사기, 한서, 후한서 등 삼사를 가르쳤다. 이 학교와 학생들의 성공은 다른 유학자들도 유사한 사립 교육 기관을 설립하도록 이끌었다. 최충이 사학 시스템을 보급하는 데 힘쓴 결과,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에게 "고려의 공자"라는 별명을 붙였다.[2][3]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최온
아들최유선 ( ? ~ 1075년)
아들최유길
사위김성수
외손김만제


6. 평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고려 유학 진흥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海東孔子|해동공자중국어라는 칭호를 받았다.[10] 구재학당을 설립하여 사학의 효시를 열었으며, 이는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재학당은 국자감과 더불어 고려시대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고려의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7. 작품

청구영언》 등에 전하는 시조 2수가 있다. 거돈사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의 갈기(碣記) 등이 현재 전한다.[10]

8. 기타

문종은 생각에 차이가 있었음에도 최충을 깊이 신임하여,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사람을 보내 최충에게 자문을 구하게 했다.[9][7] 최충의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은 해주 최씨 문중에 계승되어, 조선 시대에도 많은 학자와 관료를 배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참조

[1] 논문 An Outlin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Part I: The Early Period and Yi Factionalism https://www.jstor.or[...] 1958
[2] 논문 The development of the Korean ruling class from late Silla to early Koryo https://www.proquest[...] University of Washington 2023-07-18
[3]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3-11-14
[4]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5]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6]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7]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8]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9]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0]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 문서 해주 최씨 문중 기록에는 83세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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