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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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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 전쟁은 1969년 7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간에 발생한 무력 충돌이다. 1970년 FIFA 월드컵 북중미카리브 지역 예선에서 양국 간의 축구 경기 결과가 갈등의 기폭제가 되었지만, 이민 문제, 경제적 불균형, 국경 문제 등 복합적인 요인이 전쟁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으로 인해 양국은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었고, 온두라스는 중앙 아메리카 공동 시장에서 탈퇴하며 엘살바도르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또한 엘살바도르에서는 내전이 발발하는 등 사회·정치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이후 미주 기구의 중재와 국제 사법 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국경 분쟁을 해결하고, 2006년 국경선 확정 합의를 통해 오랜 갈등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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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축구 전쟁
원어 명칭 (스페인어)Guerra del Fútbol (게라 델 풋볼)
충돌 기간
날짜1969년 7월 14일 ~ 1969년 7월 18일 (4일)
장소엘살바도르온두라스 국경 지대
교전 세력
교전국 1엘살바도르
교전국 2온두라스
지원국니카라과
지휘관
엘살바도르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살바도르 엔리게스
온두라스오스왈도 로페스 아레야노, 오스카르 콜린드레스
전력
엘살바도르 육군8,000명
엘살바도르 공군600명 (또는 1,000명)
엘살바도르 해군400명
온두라스 육군 및 국가 경비대2,500명
온두라스 공군1,200명
피해 규모
엘살바도르 사망자 (추정)107명 (군인), 900명 (민간인 포함, 추정)
엘살바도르 부상자593명
엘살바도르 항공기 손실3대
온두라스 사망자 (추정)99명 (군인), 1,200명 (민간인 포함, 추정)
온두라스 부상자66명
사망자 총합 (추정, 신부의 보고)400명
사망자 총합 (CIA 추정)1,500명
민간인 사망자 (추정)2,000명 이상
결과
결과미주 기구의 중재로 정전, 엘살바도르 군대의 온두라스 철수,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
기타
관련 분쟁엘살바도르-온두라스 축구 라이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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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엘살바도르가 분쟁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점령했다가 결국 철수한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
엘살바도르가 분쟁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점령했다가 결국 철수한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
1969년 7월 18일 온두라스 대통령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의 종전 포고문.
1969년 7월 18일 온두라스 대통령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의 종전 포고문.
온두라스 지도
온두라스 지도

2. 배경

축구 전쟁의 배경에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양국 간의 복잡한 역사적, 사회경제적 문제가 있었다. 겉으로는 1969년 1970년 FIFA 월드컵 북중미카리브 지역 예선에서 엘살바도르온두라스 간의 축구 경기가 원인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두 나라 간의 오랜 정치적 갈등이 축구 경기를 기폭제로 하여 폭발한 것이었다.[133] 이 전쟁으로 중남미 5개국 간의 경제공동체가 와해되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다.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토 확장을 둘러싼 양국의 국경 문제였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엘살바도르 주민 수십만 명이 온두라스 영토로 불법 월경하여 정착하면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1969년부터 온두라스 정부는 농지 개혁을 실시하면서 엘살바도르에서 넘어온 월경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온두라스에서 학대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온두라스엘살바도르보다 면적이 5배 이상 컸지만, 1969년 당시 엘살바도르의 인구는 온두라스보다 40% 더 많았다. 20세기 초부터 많은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로 이주했으며, 1969년에는 30만 명 이상이 온두라스에 거주하고 있었다.[5]

온두라스에서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대기업들이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1966년에는 대기업들이 연합하여 온두라스 대통령에게 엘살바도르 출신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보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6] 1962년 온두라스는 새로운 토지 개혁 법을 제정했고, 1967년까지 이 법을 시행하여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몰수하여 온두라스 원주민에게 재분배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엘살바도르 노동자들이 온두라스에서 추방되었고, 이는 양국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2. 1. 이민 문제

엘살바도르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면적이 가장 작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였다.[55] 19세기 후반부터 커피 생산과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로 인해,[57] 소수의 백인 부유층이 토지와 재산을 독점한 반면,[56][57] 대다수 국민은 저소득층으로 전락하여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56][57]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엘살바도르 국민들은 국토 면적이 약 6배 더 크고 인구는 절반(250만 명)에 불과한 이웃 국가 온두라스로 이주하여 생활 기반을 마련했다.[58][59] 1960년대 당시 합법, 비합법 이민자를 포함하여 30만 명[58]에서 50만 명[59]에 달하는 엘살바도르인들이 온두라스에 거주했다.

1960년대 온두라스 정부는 농지 개혁법을 실시하여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63] 1962년에 제정된 농지 개혁법은 토지 소유자를 온두라스 출생자로 한정하고,[63] 이에 해당하지 않는 엘살바도르 이민자에게 30일 이내에 국외로 퇴거할 것을 요구했다.[63] 1969년 4월 온두라스 정부의 발표 이후,[62] 5월 하순까지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의 귀환이 시작되었다.[62]

2. 2. 경제 문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5개국은 커피, 바나나 등의 농업 생산과 수출에 특화하여 선진국으로부터 '근대화가 늦은 국가'로 여겨졌다.[64] 이들 5개국은 1961년 중앙 아메리카 공동 시장(CACM)을 결성하여 경제 통합을 추진했다.[64]

중앙 아메리카 공동 시장 결성과 미국의 압력으로 외자계 기업의 진입이 자유로워지면서 1960년대에 5개국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64] 초기에는 각국에 공평하게 공업 시설을 분배하기로 합의했지만,[65] 회원국 간 대립과 외자계 기업의 압력으로 이 합의는 완화되었고, 공업화가 이미 진행 중이던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코스타리카에 공업 시설이 집중되었다.[65]

1950년대부터 공업화를 추진했던 엘살바도르는 국민 대다수가 빈곤층이라 국내 시장이 좁았음에도 불구하고,[66] 일부 부유층을 위한 생산과 쌍무 무역 협정에 기반한 중앙 아메리카 국가로의 수출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66] 엘살바도르는 중앙 아메리카 공동 시장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가맹국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66] 반면 온두라스는 공업화가 늦어지고[66] 엘살바도르 제품에 시장이 잠식당하는 등의 불균형이 발생하여 불만을 품게 되었다.[66]

이러한 경제적 불균형은 양국 간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으며, 축구 전쟁 발발의 배경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중남미 5개국 간 경제공동체가 와해되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다.

2. 3. 국경 문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양국 간 국경선은 식민지 시대부터 하천을 기준으로 설정되었으나, 지형 변화로 인해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존재했다.[122][127][130] 이로 인해 양국은 국경 지역에서 잦은 충돌을 겪었으며, 이는 양국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었다.

영토 확장을 둘러싼 양국의 국경 문제가 근본적인 원인이었으나, 직접적으로는 엘살바도르 주민 수십만 명이 온두라스령(領)으로 불법 월경하여 정착한 정치적·경제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1980년 평화 조약에서 양국은 60%의 국경선에 대해 합의했고, 나머지는 합동위원회를 설립하여 5년 이내에 결론을 내기로 했다.[127] 1986년 국경 문제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 위탁되었고,[122] 1992년 9월 11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새로운 국경선 안을 제시,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122] 그러나 국경선 획정 작업은 난항을 겪었다.[130]

2006년 4월 18일, 엘살바도르 대통령 안토니오 사카와 온두라스 대통령 마누엘 셀라야는 양국 국경 지대에서 만나 국경선 375킬로미터를 획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며 국경 문제는 종결되었다.[130]

3. 월드컵 예선전

플레이오프멕시코시티온두라스2전반전1엘살바도르엘살바도르의 승리10후반전1



:1 플레이오프 전에서는 엘살바도르가 연장전에서(후반전 종료시 2-2 무승부) 3-2로 승리했다.

온두라스의 농업 개혁법은 국경 미확정 지대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을 추방하고 온두라스인을 이주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59] 이 정책으로 토지를 잃고 엘살바도르로 귀국한 이민자 수는 전쟁 시작 전 몇 달 동안 1만 4천 명[58]에서 5만 명[5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책은 월드컵 예선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행되었으며,[59] 양국 간의 국민 감정을 자극하여 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59]

이민자 추방은 강제적이었고,[58] 온두라스의 극우 조직 "라 만차 브라바"가 관여하여 잔혹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다.[49][69] 엘살바도르 언론은 온두라스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69]

1969년 7월, 온두라스 축구 연맹은 엘살바도르 대표팀 선수 2명이 출장 정지 처분 중임에도 경기에 출전했다며 국제 축구 연맹(FIFA)에 3차전 경기 결과 무효를 제소했다.[123] FIFA의 재정 결과는 불분명하다.

엘살바도르 대표팀은 아이티 대표팀과의 최종 예선에서 승리하여 1970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나, 조별 리그에서 3전 전패로 탈락했다.[124]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1969 CONCACAF 선수권 예선에서 실격되었고,[125] 1971 CONCACAF 선수권 예선에서는 엘살바도르가 축구 전쟁을 이유로 기권했다.[126]

1980년 11월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양국은 12년 만에 경기를 가졌고, 엘살바도르가 2-1로 승리했다.[131] 양국은 모두 지역 예선을 통과하여 1982년 FIFA 월드컵에 함께 출전했다.

3. 1. 1차전 (온두라스 승리)

1969년 6월 8일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홈팀 온두라스가 1:0으로 승리했다.[4] 경기 전날 밤, 온두라스 팬들은 엘살바도르 팀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선수들을 괴롭혔다.[8] 엘살바도르의 한 여성 축구팬은 자국 대표팀의 패배에 충격을 받아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34][135] 이 소식은 엘살바도르 전역에 퍼졌고,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엘살바도르 대통령과 축구 대표팀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소녀를 추모했다.[136] 이 사건은 엘살바도르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선수들은 2차전 필승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경기는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날짜장소나라점수나라결과
1969년 6월 8일테구시갈파온두라스1전반전0엘살바도르온두라스의 승리
0후반전0


3. 2. 2차전 (엘살바도르 승리)

1969년 6월 15일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엘살바도르가 3:0으로 이겼다.[11] 경기 종료 직후 장외에서 양국 응원단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온두라스 원정 응원단이 집단 폭행을 당한 채 엘살바도르 국경 밖으로 추방되었고 2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136]

이에 격분한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에 대한 폭력, 방화, 약탈 등 보복 범죄를 자행하면서 수십 명이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136] 복수를 원하는 엘살바도르 팬들은 온두라스 팀의 호텔 밖에서 폭동을 일으켜 여러 명이 사망했고,[10] 경기 시작 시 온두라스 국기 대신 더러운 걸레가 게양되었다.[9]

3. 3. 플레이오프 (엘살바도르 승리)

1969년 6월 27일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플레이오프에서 엘살바도르는 연장전 끝에 3:2로 온두라스를 꺾고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4] 그러나 이 경기는 양국 간의 감정 대립을 격화시켰고, 엘살바도르는 외교 단절을 선언했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 정부가 엘살바도르인에게 가해진 피해에 대해 배상하거나 보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6]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날짜장소나라점수나라결과
1969년 6월 8일테구시갈파rowspan="2" |1전반전0rowspan="2" |온두라스 승리
0후반전0
1969년 6월 15일산살바도르rowspan="2" |3전반전0rowspan="2" |엘살바도르 승리
0후반전0
1969년 6월 27일
(플레이오프)
멕시코시티rowspan="2" |2전반전1rowspan="2" |엘살바도르 승리1
0후반전1



:1 플레이오프에서 엘살바도르는 연장전(후반전 종료 시 2:2 무승부) 끝에 3:2로 승리했다.

4. 무력 충돌

1969년 7월 14일, 엘살바도르 공군이 P-51 머스탱[12][31]C-47 스카이트레인 등, 폭격기로 개조된 민간 항공기를 사용하여 온두라스 비행장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16][24] 주요 목표는 톤콘틴 국제공항이었으며, 이곳에는 온두라스 공군(FAH) 항공기 절반이 배치되어 있었다.[16] 같은 날 엘살바도르 육군은 약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온두라스로 진군했다.[137]

전쟁 중 사용된 온두라스 공군의 보우트 F4U 콜세어.


전쟁은 엘살바도르의 우세로 전개되었으나,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기구(OAS)가 조정에 나섰고, 7월 19일 엘살바도르가 무조건 철수에 합의하면서 5일 만에 끝났다.[138] 7월 17일 오후, 기예르모 레이날도 코르테스 대위가 사망했는데,[31] 그는 전쟁 중 최고위급 사상자였다.[32] 축구 전쟁은 프로펠러 전투기가 서로 싸운 마지막 분쟁이었다.[31][33][34]

4. 1. 엘살바도르의 공세

1969년 7월 14일, 엘살바도르 육군과 공군이 온두라스 공군기지를 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137] 엘살바도르 공군(살바도르 공군(FAS))은 P-51 머스탱[12][31]C-47 스카이트레인, 그리고 급히 폭격기로 개조된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여 온두라스 비행장을 공격했다.[16][24] 이들은 온두라스 공군(FAH) 항공기 절반이 배치된 톤콘틴 국제공항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16]

같은 날 18시 10분, 엘살바도르 공군의 C-47, P-51D, FG-1D(F4U 콜세어의 라이선스 생산기)[88]로 구성된 최소 6기[87]의 편대가 테구시갈파 교외의 톤콘틴 국제공항을 폭격했다. 이와 동시에 엘살바도르 공군은 온두라스 영내의 산타로사 데 코판, 아마팔라, 촐루테카 등 주요 비행장 및 군사 시설 십여 곳을 폭격했다.[87][88]

이러한 공습은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의 직접 명령에 따른 것으로, 1961년부터 추진된 "헤랄도 바리오스 장군 계획"의 일환이었다.[87] 이 계획의 전략적 목표는 "온두라스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신분 보장과 완충 지역 점령"이었다.[67] 엘살바도르 공군은 전력 우위에 있는 온두라스 공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군사적 균형을 무너뜨리려 했지만,[88]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88]

전쟁에 관한 살바도르 대통령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의 선언문.


엘살바도르 공군의 폭격 후, 엘살바도르 육군은 서부, 찰라테낭고 현, 동부의 세 방향에서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 영내로 침공을 시작했다.[89] 육군은 온두라스를 두 방향으로 침공했는데, 한 부대는 술라 계곡을 확보하기 위해 이동했고, 다른 부대는 범아메리카 고속도로를 따라 테구시갈파로 진격했다.[25][26] 병력은 M3A1 스튜어트와 개조 장갑을 장착한 불도저 및 트럭의 지원을 받았다.[27] 초기 진격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라 프렌사 그래피카''는 하루에 40km를 진격했다고 주장했다.[28]

7월 16일, 마리오 ("엘 디아블로") 벨라스케스 잔드레스 대령이 이끄는 살바도르군은 누에바 오코테페케에 도달하여 포위했다.[16][30] 포병 사격 이후 온두라스군은 민간인과 함께 후퇴하여 마을이 점령되었다.[16] 그러나 탄약 부족과 온두라스군의 저항 증가로 인해 그날 늦게 양쪽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1]

이러한 공중 및 육상 기습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나 제3차 중동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사례처럼 양측의 완벽한 연계가 이루어졌을 때 효과를 발휘하지만,[90] 엘살바도르 측은 기대했던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온두라스 측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90]

4. 2. 온두라스의 반격

7월 15일, 온두라스 공군(FAH)은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의 항공기인 F4U 콜세어를 주력으로 사용하여 엘살바도르의 주요 시설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다.[26][29] 주요 목표는 일로팡고 국제공항과 아카후틀라 및 Puerto Cutuco|라쿠투코 항es의 유류 시설이었다.[10][12] 이 공습으로 엘살바도르는 연료 비축량의 20%를 잃었다.[16]

온두라스 공군의 공격 지점은 다음과 같다:

위치좌표비고
산살바도르lat_min=41|lat_sec=30|lat_dir=N일로팡고 국제공항 폭격
아카후트라lat_min=35|lat_sec=24|lat_dir=N정유 시설 및 저장 탱크 공격
La Unión, El Salvador|라・우니온영어lat_min=20|lat_sec=0|lat_dir=NPuerto La Unión|라 우니온 항es (Puerto Cutuco|라・쿠투코 항es) 폭격, 저장 탱크 5개 파괴



온두라스 공군은 T-28, F4U, F-51S 등 여러 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엘살바도르 영내를 공격했다.[88] 일로팡고 국제공항은 군민 공용 비행장으로, 활주로, 격납고, 주차장 등이 피해를 입었다.[88] 아카후트라에서는 정유 시설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저장 탱크가 손상되었고,[88] 라・우니온 항에서는 17개의 저장 탱크 중 5개가 파괴되었다.[88]

항공 전력에서는 온두라스가 우세했지만,[88] 지상 전력은 양국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했던 구식 장비를 갖추고 있어 큰 차이가 없었다.[88] 그러나 조직력과 전투 능력 면에서는 엘살바도르 육군이 우위를 점하여 온두라스 영내로 진격했다.[88]

엘살바도르 육군은 H&K G3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를 앞세워 온두라스 영내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89] 그러나 엘살바도르군의 사령관은 병참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88] 온두라스 공군의 공격으로 석유 공급에 차질이 생겨 휘발유 부족에 빠지면서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88]

4. 3. 미주기구(OAS)의 중재

미국이 주도하는 아메리카 대륙 28개국 공동협력체인 미주기구(OAS)는 전쟁 발발 직후 특별 회의를 열어 협상을 감독할 7개국 위원회를 구성하고 휴전을 촉구했다.[13] 온두라스는 이에 동의했지만, 엘살바도르는 며칠 동안 미주 기구의 압력에 저항했다.[35] 7월 16일 OAS가 파견한 평화 유지 위원회는 온두라스 측이 "엘살바도르 군이 온두라스 영내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엘살바도르와의 휴전에 응할 것을 승낙했다고 발표했다.[91]

7월 17일, 엘살바도르 정부는 "온두라스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에 대한 박해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전쟁 전의 원상태로 복귀시킨다"는 조건으로 휴전에 응할 것을 승낙했다.[93]

7월 18일 밤에 휴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엘살바도르 군대는 96시간 이내에 철수해야 했고, "선동적인 언론, 라디오 및 텔레비전 캠페인"이 중단되어야 했다.[36] 엘살바도르 정부는 OAS에 문서를 보내 휴전을 유지할 것이지만, 온두라스에 아직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에 대한 안전 보장, 배상금 지급, 엘살바도르 반대 시위자 처벌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37][38] 온두라스는 첫 번째 요구 사항만 충족했지만, OAS가 제재를 위협하자 엘살바도르는 물러섰고, 그 결과 1969년 8월 2일에 군대가 철수했다.[25]

5. 결과와 영향

월드컵 지역 예선 경기를 치르는 동안 양국 국민 간 감정이 격해져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양국 간 누적된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여 실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으로 중남미 5개국 간 경제 공동체가 와해되는 등 양국에 큰 피해를 남겼다.

엘살바도르온두라스국교를 단절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1972년 극우파에 의한 내전으로 혼란에 빠졌다. 온두라스 또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후 1980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며 양국은 국교를 회복했다.[133]

7월 18일 아침, 미주 기구(OAS)의 갈로 플라사 사무총장은 양국 정부 관계자와 OAS 평화 유지 위원회 간의 3자 회담을 통해 전쟁 종식을 위한 4개 항목의 평화 협정안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97]



OAS 발표에 따르면 양국은 중앙 아메리카 시간 7월 18일 22시부터 정전에 들어가고,[98] 3개국으로 구성된 감시단의 지휘 아래 양국 군대를 96시간 이내에 철수시킬 예정이었다.[99] 그러나 엘살바도르의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같은 날 방송에서 점령 지역으로부터의 철수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98]

5. 1. 인명 및 재산 피해

5일간 벌어진 전쟁으로 약 4천 명이 사망하고 1만 2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0만달러(한화 약 290억)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138] 희생자 중 다수는 온두라스의 농민이었다.[62][109]

전쟁 기간 동안 엘살바도르는 107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최대 7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온두라스 공습으로 항공기 3대가 파괴되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온두라스는 99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165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누에바 오코테페케의 본당 신부는 400명의 사망자를 목격했다고 전했고,[2] CIA 내부 문서에는 최대 1,500명으로 보고되었다.[3]

8월 3일 13시 15분, 미주 기구(OAS) 자문단의 감시 아래, 온두라스 남부 렌피라 주에 있는 라 비르투드에서 마지막 철수가 확인되어 철수가 완료되었다.[106] 이 전쟁으로 양국을 합쳐 2천 명이 사망했고[62][107][108][109] (2천에서 3천 명[47], 3천 명[48], 6천 명[110][111]으로 보는 자료도 있다), 4천 명[108] 또는 1만 2천 명[110][111]이 부상당했다.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많은 농민이 집과 토지를 잃었다.[62]

5. 2. 중미공동시장(CACM) 붕괴

온두라스가 중미공동시장(CACM)을 탈퇴하면서 엘살바도르와의 교역을 중단하고 엘살바도르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전개하였다.[139] 이로 인해 엘살바도르는 거대한 온두라스 시장을 잃게 되어 공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국가 경제까지 위태로워졌다.

전쟁의 영향으로 양국 간의 무역은 완전히 중단되었고[62], 국경선이 폐쇄되어 교통망이 차단되는 등 양국의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62] 쿠바 혁명의 영향을 상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에 의해 설립된 지역 통합 프로젝트였던 중앙 아메리카 공동 시장은 온두라스의 탈퇴로 더욱 약화되었다.[26] [40] [42]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미 공동 시장은 양국간의 문제와 원래 존재했던 가맹국 간의 경제 격차 문제 등으로 인해 그 역할이 크게 후퇴하였다.[120]

5. 3. 엘살바도르 내전 발발

온두라스에서 추방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의 귀국은 엘살바도르의 사회 불안을 가속화시켰다.[6] 이들은 빈민층을 형성하며 사회 혼란을 야기했고, 1970년부터는 직업이나 농지가 없는 엘살바도르인의 온두라스 이민이 금지되면서 인구 과잉과 빈곤 문제가 심화되었다.[138] 이러한 사회 불안은 약 7만에서 8만 명이 사망하고 8,000명이 추가로 실종된 엘살바도르 내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1]

전쟁 후, 엘살바도르에서는 "14가족"으로 불리는 부유층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고, 국민 대다수가 저소득층이라는 사회 구조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56]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좌익계 노동자들의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했고,[56] 1972년 대통령 선거 부정 의혹으로 반정부 운동이 활발해졌다.[114] 좌익 게릴라의 정부군 병영 습격,[56] 외국계 기업 대상 몸값 목적 유괴 사건이 빈발했다.[56] 이에 맞서 군부와 우익 세력이 결탁한 "죽음의 부대"에 의해 좌익 운동가 탄압과 암살이 자행되면서 치안이 악화되었다.[56][114]

1980년 3월 24일,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극우 조직에 암살되면서[56]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은 좁혀졌고,[115] 좌익 게릴라는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 전선(FMLN)을 결성, 정부군과의 본격적인 내전으로 돌입했다.[56][115]

중미에서 가장 공업이 발전했던 엘살바도르는 내전으로 쇠퇴했다.[116] 12년 동안 지속된 내전으로 7만 5천 명이 희생되었고,[117] 경제적 손실은 약 50억달러에 달했다.[117]

5. 4. 양국 관계 회복

1980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양국 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33] 이 조약에는 전 페루대통령이자 국제 사법 재판소장을 역임한 José Luis Bustamante y Rivero|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 이 리베로es가 중재자로 참여했으며, 양국 외무부 장관이 참석하여 조인식이 진행되었다. 이로써 양국은 11년 만에 국교를 회복했다.[127] 평화 조약 조인의 배경에는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좌익 게릴라의 근거지가 국경 미확정 지역에 존재했기 때문에, 엘살바도르 정부가 온두라스 정부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는 설과[127], 국경 지역이 좌익 게릴라의 근거지가 된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가 양국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50]

1980년에 조인된 평화 조약에서는 국경선 60%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나머지 국경선에 대해서는 양국 간 합동위원회를 설립하여 5년 이내에 결론을 내기로 했다.[127] 1986년에는 국경 문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 위탁되었다.[122]

국제사법재판소(ICJ)는 1992년 9월, 분쟁 지역 대부분을 온두라스에 할당하는 중재안을 제시했고[45],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122] 1998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ICJ 판결 이행을 위한 국경 획정 조약을 체결했다.[45] 판결 이후 온두라스에 귀속된 총 분쟁 지역 면적은 약 374.5km2였다.[45] 폰세카 만에서는 온두라스가 티그레 섬에 대한 주권을, 엘살바도르는 멩게라와 메엥게리타 섬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고 판결했다.[45]

ICJ 판결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계속되었다. 2012년 12월,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3국은 위원회를 구성하여 2013년 3월 1일까지 해결책을 제시하기로 합의했지만, 위원회는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양국 간 군사 행동 위협 서신이 오가는 등 갈등이 있었다.[45]

2006년 4월 18일, 양국 국경 지대에서 기념식이 개최되었고, 엘살바도르 대통령 안토니오 사카와 온두라스 대통령 마누엘 셀라야는 국경선 375km를 획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국경 문제는 종결되었다.[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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