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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날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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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욕의 날 연설"은 1941년 12월 8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다음 날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루즈벨트는 이 연설에서 1941년 12월 7일을 "앞으로 치욕으로 기억될 날"로 규정하고, 일본의 기습 공격과 미국의 피해를 강조했다. 연설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이끌어냈고, 미국 라디오 역사상 최대 청취율을 기록하며 국민적 단결을 촉구했다. 이 연설은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연설에서 인용되는 등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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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날 연설
연설 개요
제목"치욕의 날" 연설
원제Day of Infamy
연설자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날짜1941년 12월 8일
장소미국 국회의사당, 워싱턴 D.C.
대상미국 의회 합동 회의
길이약 6.5분
배경
주요 사건진주만 공격
내용
주요 내용일본의 공격을 규탄하고, 미국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요청
핵심 문구... 치욕으로 영원히 기억될 날짜
영향
결과미국 의회의 대일 선전포고 승인

2. 배경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882년 뉴욕주 더처스군에서 태어나 로펌에서 일했고, 뉴욕주 상원 의원을 거쳐 우드로 윌슨 대통령 재임 시절 해군 차관을 역임했다. 이후 제44대 뉴욕 주지사로 선출되었으며,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1933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36년 재선, 1940년에는 3선에 성공했다.

1940년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준주(Territory of Hawaii)의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해군 기지가 오전 7시 48분 HST (오후 12시 48분 EST)에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Imperial Japanese Navy Air Service) 소속 항공기 353대의 기습적인 군사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미국의 군함 21척과 항공기 약 350대가 파괴되었고, 2,400명이 넘는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했다. 루즈벨트는 해리 S. 트루먼(Harry Hopkins)과 함께 점심을 먹던 중 오후 1시 이후에 이 공격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Frank Knox)는 "진주만 공습. 훈련이 아닙니다."라는 내용의 전화 메시지를 보냈다. 루즈벨트는 곧 모든 군인의 동원을 명령했다. 그의 비서에 따르면, 이 공격은 "두 국가가 평화 상태에 있을 때 아무런 경고 없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루즈벨트는 각료와 의회 의원들과 상의했다. 조지 T. 맥짐시(George T. McJimsey) 저서에 따르면, 루즈벨트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고 미국이 "참전하게 된" 사실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영국 총리(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체커스(Chequers)에서 루즈벨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이제 모두 같은 배를 탔습니다."라고 말했다.

소아마비로 인해 몸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로 널리 인식되었다.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의 로라 크로웰(Laura Crowell)은 루즈벨트가 연설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며, 그는 "정기적으로 연설에 통합하고 싶은 기본적인 생각을 제공했고… 원고를 그가 원하는 정확한 길이, 내용 및 어조로 만들었다는 것이 현재 널리 알려져 있다"고 썼다. 루즈벨트는 다음 날 의회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기로 결정했다. 맥짐시는 이 공격이 그에게 "명확한 방향과 목적"을 주었다고 썼다.

2. 1.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882년 뉴욕주 더처스군에서 태어나 로펌에서 일했고, 뉴욕주 상원 의원을 거쳐 우드로 윌슨 대통령 재임 시절 해군 차관을 역임했다. 이후 제44대 뉴욕 주지사로 선출되었으며,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1933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36년 재선, 1940년에는 3선에 성공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당시, 루즈벨트는 해리 S. 트루먼과 점심 식사 중 공격 소식을 접하고,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으로부터 "진주만 공습. 훈련이 아닙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즉시 군 동원을 명령했고, 각료 및 의회 의원들과 협의하여 참전을 결정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전화하여 "우리는 이제 모두 같은 배를 탔습니다."라고 말했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루즈벨트는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워싱턴 대학교의 로라 크로웰은 루즈벨트가 연설을 위해 "정기적으로 연설에 통합하고 싶은 기본적인 생각을 제공했고… 원고를 그가 원하는 정확한 길이, 내용 및 어조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루즈벨트는 다음 날 의회 합동회의에서 연설하기로 결정했다.

2. 2. 진주만 공격 이전의 국제 정세

1930년대에 일본 제국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확대했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식민 지배를 더욱 강화하여 한국인들에게 더 큰 고통과 억압을 안겨주었다.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유지하며 초기에는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했지만, 일본의 팽창 정책에 대한 우려는 커져갔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응하여 경제 제재를 강화하며 압박했다. 1940년 루즈벨트는 전례 없는 3선에 성공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Imperial Japanese Navy Air Service)는 하와이 준주(Territory of Hawaii)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해리 S. 트루먼(Harry Hopkins)과 점심을 먹던 중 이 소식을 접한 루즈벨트는 즉각 군 동원을 명령했다. 영국 총리(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루즈벨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이제 모두 같은 배를 탔습니다."라고 말했다.

3. 진주만 공격 (1941년 12월 7일)

3. 1. 공격 개요

3. 2. 공격의 의미

4. 치욕의 날 연설 (1941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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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여러분, 하원 의장 여러분, 그리고 상원의원 및 하원의원 여러분.

어제, 1941년12월 7일, '''앞으로 치욕으로 기억될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미국일본 제국해공군으로부터 갑작스럽고도 철저히 준비된 공격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그 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 측의 요청에 따라 태평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 정부 및 천황과 협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항공대가 오아후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1시간쯤 지났을 때, 주미 일본 대사와 그의 동료가 최근 미국의 메시지에 대한 공식 답변을 국무장관에게 제출했지만, 그 답변에는 현재의 외교 협상을 계속해도 무의미하게 보인다는 언급은 있었으나, 전쟁이나 군사 공격으로 이어질 어떠한 경고나 징후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하와이까지의 거리를 고려할 때, 이 공격이 수일 또는 수주 전부터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의 지속을 바란다는 허위 성명과 말로 미국을 속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어제 하와이 제도에 대한 공격은 미군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때 매우 많은 미국인의 목숨이 잃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는 미국의 선박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도 받았습니다. 또한 어제 일본 정부는 영국령 말레이아에 대해서도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어젯밤 일본군은 홍콩을 공격하고, 괌섬을 공격하고, 필리핀 제도를 공격하고, 웨이크섬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미드웨이섬을 공격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저는 육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국민은 우리에게 가해진 격렬한 공격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은 이 미리 계획된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그 정의의 힘으로 반드시 완전한 승리를 거머쥘 것입니다. 전력을 다해 우리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신 행위로 우리 나라를 다시는 위기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회와 국민의 의지는 이러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 이익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군의 힘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우리는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저는 의회에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이 가한 정당하지 않은 비열한 공격의 결과로 미국과 일본 제국이 교전 상태에 들어갔음을 선언하는 포고를 발표할 것을 요청합니다.

의회에 연설하는 루즈벨트


공격 후 불타는 USS ''애리조나''(Arizona)''의 잔해

4. 1. 연설 준비 과정

1941년 12월 8일 오후 12시 30분, 의회 상원 합동회의에서 약 6분 30초 동안 행해진 치욕의 날 연설(Infamy Speech)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연설문을 준비하고 수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은 일·미 관계(Japan–United States relations)와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권고했지만, 루즈벨트는 연설을 짧게 함으로써 더 극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믿었다.

루즈벨트는 연설문 초안을 직접 수정하며, 미국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초기 초안의 "세계사에 남을 날짜(a date which will live in world history)"를 "수치로 남을 날짜(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로 변경하여, 일본의 공격을 비판하고 미국의 피해를 강조했다. 이러한 수정은 단순한 개인적 반응이 아닌, 집단적 외상(collective trauma)에 직면한 모든 미국 국민을 대표하는 성명으로 의도되었다.

루즈벨트는 연설에서 수동태(passive voice)를 사용하여 미국의 피해자 지위를 강조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Japan attacked the United States)"는 능동태(active voice) 대신, 수동태를 선택하여 일본의 도발 없는 공격을 더욱 부각했다. 또한, 일본에서 하와이까지의 거리를 언급하며 공격이 "며칠 또는 몇 주 전에" 계획되었다고 주장하고, 일본과의 외교 협상이 진행 중이었음을 밝혀 일본 정부의 기만적인 행위를 비판했다.

루즈벨트는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참전 당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연설과는 달리, 추상적인 호소 대신 애국심(patriotism)에 호소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이상주의(국제 관계)(idealism (international relations))]보다는 본능적인 수준에서 국민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4. 2. 연설 내용 분석

"치욕의 날 연설(Infamy Speech)"은 1941년 12월 8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진주만 공격 다음 날 의회 상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12월 7일을 "앞으로 치욕으로 기억될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로 규정하며, 일본 제국의 기만적인 외교 행태와 미국의 피해 상황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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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는 연설에서 미국이 일본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에 따라 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위한 대화를 지속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은 오아후섬 폭격 1시간 후, 주미 일본 대사를 통해 미국의 메시지에 대한 공식 답변을 전달했는데, 여기에는 외교 협상 지속이 무의미하다는 언급만 있었을 뿐 전쟁이나 무력 공격에 대한 암시는 없었다. 루스벨트는 일본에서 하와이까지의 거리를 고려할 때, 공격이 수일 또는 수주 전부터 철저하게 계획되었다고 지적하며, 일본 정부가 평화를 희망한다는 허위 성명으로 미국을 속이려 했다고 비판했다.

루스벨트는 하와이 제도 공격으로 미군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고, 수많은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 공해에서 미국 선박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일본이 말레이아, 홍콩, 괌, 필리핀, 웨이크섬, 미드웨이섬을 공격하며 태평양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고 있음을 밝혔다.

루스벨트는 육군과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방위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했으며, 미국 국민은 정의의 힘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의회에 일본의 공격으로 미국과 일본 제국이 교전 상태에 들어갔음을 선언하는 포고를 발표할 것을 요청했다.

이 연설은 수동태 문장을 사용하여 미국의 피해자 지위를 강조하는 등 루즈벨트의 연설 기법이 돋보인다. 초기 초고의 "세계사에 남을 날짜(a date which will live in world history)"를 "수치로 남을 날짜(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로 바꾼 것은 이러한 의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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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thumb|공격 후 불타는 USS ''애리조나''(Arizona)''의 잔해]]

4. 3. 연설의 영향

루즈벨트의 연설은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여겨진다. 연설이 끝난 지 33분 후, 의회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했으며, 장네트 랭킨 의원 단 한 명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 연설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으며, 81%가 넘는 청취율을 기록하며 미국 라디오 역사상 최대 청중을 기록했다. 의회 내외에서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루즈벨트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새뮤얼 어빙 로젠먼은 이 장면을 "하원 의사당에서 가장 극적인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서 협력하는 정신이 똑같이 나타났고, "12월 8일 의사당에 갑자기 솟아오른 새로운 통합감, 대통령의 리더십 뒤에 있는 공동 목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공동의 결의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백악관은 루즈벨트의 입장을 칭찬하는 전보로 쇄도했다. 징병소는 자원봉사자들의 쇄도로 북적였고, 1917년 윌슨의 선전포고 이후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이 등록하려고 몰려들면서 24시간 근무를 해야 했다. 반전 및 고립주의 운동은 연설 이후 무너졌고,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비평가들조차도 동조했다. 찰스 린드버그는 고립주의를 주도했던 인물이었지만, 루즈벨트의 연설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무력으로 공격을 받았고, 무력으로 보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육군, 해군, 공군을 건설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알렌 잘버그가 1942년 미국 전쟁 정보국이 발행한 포스터 "12월 7일을 기억하라!"


알렌 잘버그가 1942년 미국 전쟁 정보국이 발행한 포스터 "12월 7일을 복수하라!"


이 연설의 유명한 구절은 종종 "불명예스러운 날"로 잘못 인용된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연설의 마지막 줄에서만 언급한 일요일인 공격 당일이 아닌 1941년 12월 7일이라는 날짜를 강조했다. 그는 진주만 사건의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여 미국 국민에게 공격을 결코 잊지 말고 그 날짜를 기념하도록 암묵적으로 촉구했다. "불명예의 날"이라는 용어는 최고의 수치심이나 악행의 순간을 가리키는 데 언론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루즈벨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틀은 1941년 12월 7일 사건에 대한 표준적인 미국적 서술이 되었다. 할리우드는 ''웨이크 아일랜드'' (1942),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에어 포스'', 그리고 ''맨 프롬 프리스코'' (1944), ''배트레이얼 프롬 디 이스트'' (1945) 등 여러 전쟁 영화에서 이 서술을 채택했으며, 모두 일본과의 12월 7일 이전 협상에 대한 실제 라디오 보도를 포함하여 적의 기만성이라는 메시지를 강화했다.

"12월 7일을 기억하라"와 "12월 7일을 복수하라"라는 슬로건은 결집의 구호로 채택되어 포스터와 라펠 핀에 널리 표시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는가'' 영화 시리즈 (1942–45)의 첫 번째 작품인 ''전쟁의 서막'' (1942)은 미국인들에게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의 날짜를 "1941년 12월 7일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기억하라. 왜냐하면 1931년 그 날짜에 우리가 현재 싸우고 있는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촉구했다.

"불명예의 연설"의 지속적인 울림은 9·11 테러 이후에 나타났는데, 많은 해설가들은 세계에 미치는 지속적인 인상이라는 측면에서 진주만과 비교하기도 했다. 테러 이후 며칠 동안, 리처드 잭슨은 그의 책 ''Writing the War on Terrorism: Language, Politics and Counter-terrorism''에서 대통령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2001년 9월 11일을 진주만 공격 자체와 담론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루즈벨트의 불명예 연설을 직접 언급하고 루즈벨트가 연설에서 사용한 주제를 재사용함으로써 말이다.

5. 연설 이후의 상황

루즈벨트의 연설은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연설이 끝난 지 33분 만에 의회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했으며, 단 한 명의 의원(장네트 랭킨)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 연설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으며, 미국 라디오 역사상 최대 청취율인 81%를 기록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에 서명하는 모습


의회 안팎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으며, 루즈벨트의 고문이었던 새뮤얼 어빙 로젠먼은 이 장면을 "하원 의사당에서 가장 극적인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12월 8일 의사당에 갑자기 솟아오른 새로운 통합감, 대통령의 리더십 뒤에 있는 공동 목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공동의 결의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백악관에는 루즈벨트를 칭찬하는 전보가 쇄도했고, 징병소는 자원병들로 북적였다. 반전 및 고립주의 운동은 연설 이후 무너졌으며, 찰스 린드버그와 같은 대통령의 비평가들조차도 지지로 돌아섰다.

"불명예의 날"이라는 표현은 언론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루즈벨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인식은 미국의 표준적인 서술이 되었다. 할리우드는 여러 전쟁 영화에서 이러한 서술을 채택하여 적의 기만성이라는 메시지를 강화했다. "12월 7일을 기억하라"와 "12월 7일을 복수하라"는 슬로건은 결집의 구호로 채택되어 포스터와 라펠 핀에 널리 표시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는가'' 영화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인 ''전쟁의 서막''은 미국인들에게 만주사변 날짜를 기억하라고 촉구했다.

"불명예의 연설"은 9·11 테러 이후에도 다시 언급되었는데, 많은 해설가들은 진주만 공격과 9.11 테러를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강조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루즈벨트의 연설을 직접 언급하며 9.11 테러를 "악하고 비열한 테러 행위"로 규정하고, 미국이 대표하는 "자유와 기회를 위한 가장 밝은 등대"와 대조했다. 또한, 악의 축과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용어를 재사용하여 1941년과 2001년의 갈등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2004년 마드리드 기차 폭탄 테러 이후, 스페인 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는 "2004년 3월 11일은 이미 불명예의 역사에 자리 잡았다"라고 말했다. 2021년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이후, 척 슈머 상원의원은 그 날짜를 "영원히 불명예로 남을 미국 역사의 매우 짧은 목록"에 추가했다.

5. 1. 미국 국내 상황

5. 2. 국제 정세 변화

6. 역사적 유산과 영향

루즈벨트의 연설은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여겨진다. 연설이 끝난 지 33분 후, 의회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했으며, 장네트 랭킨 의원 단 한 명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 연설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으며, 81%가 넘는 청취율을 기록하며 미국 라디오 역사상 최대 청중을 기록했다. 의회 내외에서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루즈벨트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새뮤얼 어빙 로젠먼은 이 장면을 "하원 의사당에서 가장 극적인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서 협력하는 정신이 똑같이 나타났고, "12월 8일 의사당에 갑자기 솟아오른 새로운 통합감, 대통령의 리더십 뒤에 있는 공동 목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공동의 결의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백악관은 루즈벨트의 입장을 칭찬하는 전보로 쇄도했다. 징병소는 자원봉사자들의 쇄도로 북적였고, 반전 및 고립주의 운동은 연설 이후 무너졌고,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비평가들조차도 동조했다. 찰스 린드버그는 고립주의를 주도했던 인물이었지만, 루즈벨트의 연설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무력으로 공격을 받았고, 무력으로 보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육군, 해군, 공군을 건설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연설의 유명한 구절은 종종 "불명예스러운 날"로 잘못 인용된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연설의 마지막 줄에서만 언급한 일요일인 공격 당일이 아닌 1941년 12월 7일이라는 날짜를 강조했다. 그는 진주만 공격의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여 미국 국민에게 공격을 결코 잊지 말고 그 날짜를 기념하도록 암묵적으로 촉구했다. "불명예의 날"이라는 용어는 최고의 수치심이나 악행의 순간을 가리키는 데 언론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루즈벨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틀은 1941년 12월 7일 사건에 대한 표준적인 미국적 서술이 되었다. 할리우드는 ''웨이크 아일랜드''(1942),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에어 포스'', 그리고 ''맨 프롬 프리스코''(1944), ''배트레이얼 프롬 디 이스트''(1945) 등 여러 전쟁 영화에서 이 서술을 채택했으며, 모두 일본과의 12월 7일 이전 협상에 대한 실제 라디오 보도를 포함하여 적의 기만성이라는 메시지를 강화했다. 배신당한 미국의 순수함이라는 주제도 화면에서 자주 묘사되었다.

루즈벨트가 1941년 12월 7일을 "불명예로 남을 날짜"라고 묘사한 것은 사실이 되었고, 이 날짜는 존 F. 케네디 암살과 9·11 테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진주만 공격을 간단히 나타내는 약어가 되었다. "12월 7일을 기억하라"와 "12월 7일을 복수하라"라는 슬로건은 결집의 구호로 채택되어 포스터와 라펠 핀에 널리 표시되었다. 프랭크 카프라의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는가'' 영화 시리즈 (1942–45)의 첫 번째 작품인 ''전쟁의 서막''(1942)은 미국인들에게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의 날짜를 "1941년 12월 7일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기억하라. 왜냐하면 1931년 그 날짜에 우리가 현재 싸우고 있는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촉구했다.

"불명예의 연설"의 지속적인 울림은 9·11 테러 이후에 나타났는데, 많은 해설가들은 세계에 미치는 지속적인 인상이라는 측면에서 진주만과 비교하기도 했다. 리처드 잭슨은 그의 책 ''Writing the War on Terrorism: Language, Politics and Counter-terrorism''에서 대통령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2001년 9월 11일을 진주만 공격 자체와 담론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루즈벨트의 불명예 연설을 직접 언급하고 루즈벨트가 연설에서 사용한 주제를 재사용함으로써 말이다. 산드라 실버스타인은 루즈벨트와 부시가 사용한 언어 사이의 직접적인 유사성을 제시하면서, "불명예의 연설"과 부시의 대통령 연설 사이의 여러 유사점을 강조했다. 에밀리 S. 로젠버그 또한 루즈벨트가 사용한 것과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용어를 재사용하여(예: 미국의 적을 가리키는 "악의 축"과 같은) 1941년과 2001년의 갈등을 연결하려는 수사적 노력에 주목했다.

스페인 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는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이후 몇 시간 만에 "2004년 3월 11일은 이미 불명예의 역사에 자리 잡았다"라고 말했다. 2019년 다니엘 이머와는 연설 편집에서 루즈벨트가 하와이를 미국 일부로 격상하고 필리핀을 외국으로 강등시켰다고 썼다.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습격 이후, 척 슈머 상원의원은 그 날짜를 "영원히 불명예로 남을 미국 역사의 매우 짧은 목록"에 추가했다.

== 한국에 미친 영향 ==

진주만 공격과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참전으로 일본 제국의 패망이 가시화되면서, 한국 독립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1941년 12월 10일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했는데, 이는 미국의 참전과 더불어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9.11 테러와의 비교 ==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설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치욕의 날 연설" 내용을 인용했다. 부시는 "악하고 비열한 테러 행위"를 언급하며, 미국이 "자유와 기회를 위한 가장 밝은 등대"라고 강조했다. 이는 루즈벨트 연설과 유사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악의 축"과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된 용어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1941년과 2001년의 갈등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두 연설은 모두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민을 단결시키고, 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미국의 가치를 강조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연설은 선전포고를 위한 것이었고, 부시의 연설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치욕의 날"이라는 표현은 진주만 공격 이후 9.11 테러,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등 국가적 비극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 역사적 연속성을 보여준다. 스페인 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는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이후 "2004년 3월 11일은 이미 불명예의 역사에 자리 잡았다"라고 말했다.

6. 1. 9.11 테러와의 비교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설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치욕의 날 연설" 내용을 인용했다. 부시는 "악하고 비열한 테러 행위"를 언급하며, 미국이 "자유와 기회를 위한 가장 밝은 등대"라고 강조했다. 이는 루즈벨트 연설과 유사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악의 축"과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된 용어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1941년과 2001년의 갈등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두 연설은 모두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민을 단결시키고, 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미국의 가치를 강조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연설은 선전포고를 위한 것이었고, 부시의 연설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치욕의 날"이라는 표현은 진주만 공격 이후 9.11 테러,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등 국가적 비극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 역사적 연속성을 보여준다. 스페인 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는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이후 "2004년 3월 11일은 이미 불명예의 역사에 자리 잡았다"라고 말했다.

6. 2. 한국에 미친 영향

진주만 공격과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참전으로 일본 제국의 패망이 가시화되면서, 한국 독립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1941년 12월 10일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했는데, 이는 미국의 참전과 더불어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7. 미디어


참조

[1] 웹사이트 Presidential materials https://amhistory.si[...]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Smithsonian Institution 2002-00-00
[2] 웹사이트 Address by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December 8, 1941, in Declarations of a State of War with Japan and Germany https://web.archive.[...] Peter DeHaven Sharp 1941-12-08
[3] 간행물 Senate Document No.148 Congressional Serial Set 1942-00-00
[4] 서적 In the Shadow of the Rising Sun: The Political Roots of American Economic Decline https://books.google[...] 1991-00-00
[5] 서적 The Columbia Documentary History of the Asian American Experience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2-00-00
[6] 뉴스 FDR’s ‘Pearl Harbor Speech,’ then and now https://www.americam[...] 2015-12-07
[7] 웹사이트 FDR’s “Day of Infamy” Speech: Crafting a Call to Arms https://www.archives[...]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2001-00-00
[8] 웹사이트 Roosevelt's 'Date of Infamy' Speech https://www.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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