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는 1970년부터 2020년까지 오만의 술탄으로 재위했다. 그는 1940년 오만 살랄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70년 쿠데타를 통해 아버지 사이드 빈 타이무르를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집권 후 오만의 고립을 끝내고 석유 수입을 기반으로 국가를 근대화했으며,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국제 연합에 가입하는 등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2020년 1월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촌 하이탐 빈 타리크 알 사이드가 그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자 후원자였으며, 친일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2013년의 카부스 술탄
전체 이름카부스 빈 사이드 빈 타이무르 빈 파이살 빈 투르키 빈 사이드 알 사이드
출생일1940년 11월 18일
출생지살랄라, 무스카트 오만 (현재의 도파르 주, 오만)
사망일2020년 1월 10일
사망지시브, 무스카트 주, 오만
매장일2020년 1월 11일
매장지왕실 묘지, 무스카트
종교이바디 이슬람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카부스 빈 사이드 술탄의 서명
통치 정보
국가오만
직위술탄
통치 시작1970년 7월 23일
통치 종료2020년 1월 10일
이전 통치자사이드 빈 타이무르
후임 통치자하يث암 빈 타리크
총리타리크 빈 타이무르 (1970–1972), 자신 (1972–2020)
부총리파흐드 빈 마무드 알 사이드 (1972–2020), 파르 빈 타이무르 알 사이드 (1976–1996), 카이스 빈 압둘 무님 알 자와위 (1982–1995), 투와이니 빈 시하브 알 사이드 (?–1984–2010), 아사드 빈 타리크 (2017–2020)
겸직재무장관, 국방장관, 외무장관
가문
왕가알 사이드 가문
아버지사이드 빈 타이무르
어머니마준 빈 아흐마드
배우자나왈 빈트 타리크 (1976 결혼, 1979 이혼)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만 술탄 - 하이탐 빈 타리크 알사이드
    하이탐 빈 타리크 알사이드는 사이드 왕조 출신으로, 197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외교학을 전공했으며, 2020년 오만의 술탄으로 즉위하여 경제 발전과 외교 관계 강화에 힘썼다.
  • 오만의 무슬림 - 알리 알합시
    알리 알합시는 오만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골키퍼 포지션으로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136경기에 출전했으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볼턴 원더러스와 위건 애슬레틱 등에서 활약하며 위건 애슬레틱에서는 페널티 킥 방어 능력으로, 오만 국가대표팀에서는 2009년 걸프컵 우승을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오만의 무슬림 - 파드 빈 마무드 알사이드
    파드 빈 마무드 알사이드는 2016년 9월 20일 셰이크 이사 빈 알리 알 할리파 자원 봉사상을 수상했다.
  • 해병대 장군 - 시아오시 투포우 5세
    시아오시 투포우 5세는 통가의 제23대 국왕으로,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 2006년 즉위 후 민주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권력을 이양하는 등 통가의 정치 개혁에 힘썼으나 결혼하지 않아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녀는 없었다.
  • 해병대 장군 - 콘스탄티노스 2세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로, 재위 기간 중 정치적 혼란과 군사 쿠데타, 왕정 폐지를 겪었으며, 올림픽 요트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2. 생애

카부스 빈 사이드는 대대로 술탄을 배출해온 오만 남부의 항구 도시 살랄라 출신이다. 영국의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에 귀국하였다. 1970년 7월 23일, 아버지 사이드 빈 타이무르 술탄의 보수적인 정치에 반대하여 영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였다.

1971년 오만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이바드파의 관념에 근거하는 이슬람 전통을 지키면서도 국왕 주도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는 등 쇄국 정책에 반대하였다. 오만의 모든 국가 권력은 카부스 빈 사이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2020년 1월 10일 향년 79세로 지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카부스 빈 사이드는 1940년 11월 18일 오만 남부 살랄라에서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살랄라에서 초·중등 교육을 받았고, 16세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에 있는 사립 교육 기관에서 공부했다. 20세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62년 졸업 후, 영국 육군 제1대대 카메로니언스 (스코틀랜드 소총대)에 배치되어 1년 동안 독일에서 복무했다. 또한 영국 육군에서 참모직을 맡았다.

군 복무 후, 영국에서 지방 정부 과목을 공부하고 세계 일주를 한 뒤 1966년 귀국했다. 귀국 후 아버지에 의해 살랄라의 알 호슨 궁전에 사실상 가택 연금되었고, 정치에서 배제된 채 이슬람교와 오만의 역사를 공부했다. 그의 개인적인 관계는 아버지의 고문들의 아들들과 팀 랜던과 같은 몇몇 외국인 친구들에게 제한되었다.

2.2. 즉위 과정

1970년 7월 23일, 영국의 지원을 받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사이드 빈 타이무르를 축출하고 술탄으로 즉위했다. 이 쿠데타는 영국 MI6와 국방부, 외무부 공무원들이 런던에서 계획하고, 해럴드 윌슨 총리가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위 후 국호를 "무스카트 오만 토후국"에서 "오만 술탄국"으로 변경했다.

3. 통치

카부스 빈 사이드는 즉위 당시 낙후된 오만의 인프라, 의료,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는 석유 수입을 활용, 학교, 병원, 도로 및 통신망 등 현대적인 인프라 구축에 힘썼다. 1971년 쇄국 정책을 철회하고 오만을 유엔에 가입시켰으며, 이바드파의 관념에 기반한 이슬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국왕 주도의 근대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1970년대 초 남예멘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반란 세력인 도파르 반란을 이란, 요르단, 영국의 도움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카부스는 절대 군주제를 유지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모든 법률은 왕실 칙령으로 발포되었고, 행정관 및 재판관 임면권도 그가 장악했으며, 그의 권위는 불가침으로 여겨졌다. 현재 유통되는 오만 리알의 모든 지폐에는 카부스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2011년 오만 시위아랍의 봄으로 널리 알려진 혁명의 물결의 일환으로 페르시아만 국가 오만에서 일어난 일련의 시위였다. 시위대는 임금 인상, 생활비 감소, 더 많은 일자리 창출, 부패 감소를 요구했다. 카부스는 이에 대해 고용 창출, 실업 수당 지급, 사회 보장비 증액, 공무원의 급여·연금·퇴직금 증액 등의 정책을 결정하고 대폭적인 정치 개혁을 실시했다.

카부스 빈 사이드는 1971년 오만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1980년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하는 등 서방 국가와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미국과 이란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걸프 협력 회의(GCC) 설립에 관여하여 1981년 5월 25일 설립과 동시에 가맹했다.

3.1. 내정

카부스 빈 사이드는 즉위 당시 낙후된 오만의 인프라, 의료,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는 석유 수입을 활용, 학교, 병원, 도로 및 통신망 등 현대적인 인프라 구축에 힘썼다. 1970년대 초 남예멘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반란 세력인 도파르 반란을 이란, 요르단, 영국의 도움으로 진압했다.

1971년 쇄국 정책을 철회하고 오만을 유엔에 가입시켰으며, 이바드파의 관념에 기반한 이슬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국왕 주도의 근대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하지만 카부스는 절대 군주제를 유지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모든 법률은 왕실 칙령으로 발포되었고, 행정관 및 재판관 임면권도 그가 장악했으며, 그의 권위는 불가침으로 여겨졌다. 현재 유통되는 오만 리알의 모든 지폐에는 카부스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3.2. 2011년 아랍의 봄

2011년 오만 시위아랍의 봄으로 널리 알려진 혁명의 물결의 일환으로 페르시아만 국가 오만에서 일어난 일련의 시위였다. 시위대는 임금 인상, 생활비 감소, 더 많은 일자리 창출, 부패 감소를 요구했다. 오만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인 소하르에서 발생한 시위는 글로브 로터리(Globe Roundabout)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2011년 1월 17일, 무스카트에서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은 국민들이 정부와 관료의 부패 비판과 생활 개선을 요구하며 반정부 시위를 실시했고, 각지에서 유사한 시위가 빈발하여 경찰과 충돌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카부스는 이에 대해 고용 창출, 실업 수당 지급, 사회 보장비 증액, 공무원의 급여·연금·퇴직금 증액 등의 정책을 결정하고 대폭적인 정치 개혁을 실시했다. 국왕 즉위 이후 측근으로서 자신을 보좌해 온 국가 경제 장관, 상공 장관, 궁내 장관, 왕궁부 장관, 왕립 경찰청장을 포함한 각료 20명을 해임했지만, 각료의 부패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보류했다. 또한, 지금까지 자문 기관에 불과했던 의회에 입법권과 행정 감사권을 부여하고 국가 경제성을 폐지했으며, 재무성·소비자청 설치, 검찰청 독립, 지방 의회·국립 대학·이슬람 은행 설치를 결정했다. 이후 반정부 시위는 진정되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마츠모토 히로시는 "반정부 시위를 이용한 정권 중추의 세대 교체", "정상적인 국가 운영에 필요한 직무 분담"으로 분석하고 있다.

술탄은 시위대에 대한 상징적인 양보를 했지만, 소셜 미디어 활동가들을 구금했다.

3.3. 외교 정책

카부스 빈 사이드는 1971년 오만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1980년 미국과 방위 협정을 체결하는 등 서방 국가와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미국과 이란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란에 억류된 미국 등산객 석방을 위해 1를 지불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미국과 이란의 비밀 회담을 중재하여 2015년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이란 핵 합의)을 이끌어냈다.

걸프 협력 회의(GCC) 설립에 관여하여 1981년 5월 25일 설립과 동시에 가맹했다. 걸프 전쟁 이후 GCC 합동군 설립을 제창하는 등 역내 협력 강화에 힘썼다. 2018년 10월에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를 오만에 초청했는데, 이는 이스라엘과 오만의 공식 외교 관계 수립은 아니었지만 중동 평화 프로세스에서 중재자 역할을 모색한 것이었다. 한편, 2015년 사우디 아라비아가 주도한 예멘 내전 개입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2017년 카타르 외교 위기에서도 중립을 지켰다.

4. 사망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는 2014년부터 결장암으로 투병하며 치료를 받았다. 2019년 12월 14일, 벨기에 뢰번 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말기 암 환자이며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으며, 조국에서 죽고 싶어 귀국했다. 2020년 1월 10일, 무스카트 외곽에 위치한 자택 알 바라카 궁전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만 정부는 3일간의 국가 애도일을 선포하고, 40일 동안 국기를 조기 게양하며, 공공 및 민간 부문의 공식 업무를 3일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요르단, 레바논,이집트는 모두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인도방글라데시는 1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영국은 존경의 표시로 국기를 조기 게양했으며, 보리스 존슨 총리는 카부스 국왕을 "오만을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국가로 발전시키는데 헌신하고 오만 국민의 삶을 개선하려 노력한 국가의 아버지로서 매우 존경받고 그리워할 뛰어난 지도자"라고 묘사했다.

4.1. 후계

카부스는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의 다른 수장들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상속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헌법 제6조는 왕족 회의가 술탄 자리가 비게 된 날로부터 3일 이내에 새로운 술탄을 선택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왕족 회의가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군 및 안보 관계자, 대법원장, 자문 의회 상·하원 의장의 입회하에 카부스 술탄이 작성한 이름이 적힌 편지를 개봉해야 한다.

2020년 1월 11일, 오만 국영 TV는 왕족 회의가 국방 위원회에 보낸 서한에서 카부스가 유언장에서 지명한 선택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카부스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한 편지를 개봉했으며, 곧 하이탐 빈 타리크가 국가의 통치 술탄이라고 발표했다. 하이탐은 카부스의 사촌으로, 오만의 유산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두 아들과 두 딸을 두고 있다.

5. 기타

카부스 빈 사이드는 국가 개발의 모범으로 일본을 언급했으며,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10의 구호금을 일본에 제공하는 등 친일 성향을 보였다.

5.1. 개인사

카부스 빈 사이드는 1940년 11월 18일 도파르 지역 살랄라에서 사이드 빈 타이무르 술탄과 마준 빈트 아흐마드 알 마샤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76년 3월 22일, 카부스는 사촌인 나왈 빈트 타리크 알사이드와 결혼했다. 나왈은 카부스의 후계자인 하이탐 빈 타리크의 이복 여동생이다. 그러나 이 결혼은 1979년에 이혼으로 끝났으며, 자녀는 없었다.

5.2. 문화 예술 후원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자 후원자였다. 1986년 오만 로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데, 이 오케스트라는 오만 현지에서 연주회를 열고 카부스 술탄과 함께 해외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작곡가 랄로 시프린에게 '오만의 교향적 인상'이라는 작품을 작곡하도록 의뢰하기도 했다.

카부스는 특히 파이프 오르간을 좋아하여 무스카트 왕립 오페라 하우스를 건립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동식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다. 이 오르간에는 그의 이름을 따 "로열 솔로"라고 명명된 세 개의 특별 제작된 오르간 스톱이 있다. 그는 또한 오만의 민속 음악가 살림 라시드 수리를 후원하고 그를 문화 컨설턴트로 임명하기도 했다.

무스카트 왕립 오페라 하우스
무스카트 왕립 오페라 하우스

5.3. 친일 성향

카부스 빈 사이드는 국가 개발의 모범으로 일본을 언급했으며,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10의 구호금을 일본에 제공하는 등 친일 성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