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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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타르는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국가로, 5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해 온 지역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정착이 시작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 간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7세기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 무역과 진주 채취를 통해 번성했으며, 1916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71년 독립했으며, 풍부한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현재는 1인당 GDP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며, 2022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하는 등 스포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카타르 - [지명]에 관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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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카타르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과 교류하며 걸프 지역의 무역 및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특히 진주와 마른 생선 등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3세기경 이란사산 제국 시대에는 동서양 교역의 중요 거점이 되었고, 7세기 중엽에는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지역 통치자가 이를 수용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 시기에도 무역과 상업이 번성했으며, 특히 질 좋은 진주가 채집되어 중국까지 수출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 포르투갈이 약 150년간 걸프 지역을 통치하며 해상 무역을 장악했으나, 17세기 중반 오만 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카타르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아래 놓였지만, 지역 부족인 바니 칼리드가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고 동부 아라비아 지역을 지배하기도 했다. 1825년에는 현재 카타르 왕가인 알싸니 가문의 창시자 싸니 빈 무함마드가 도하 지역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19세기 후반, 바레인과의 갈등 이후 영국의 중재를 거치며 카타르의 독자적인 정치적 지위가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으나, 곧이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면서 카타르는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16년과 1934년 조약을 통해 영국은 카타르의 국방과 외교를 통제하는 대신 보호를 제공했다. 1930년대 후반 석유가 발견되고 1949년부터 수출이 시작되면서 카타르는 막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을 이루었다.

1968년 영국이 걸프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발표하자, 카타르는 바레인과 함께 아랍에미리트 연방 참여를 거부하고 1971년 9월 3일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1972년, 칼리파 빈 하마드 알싸니가 쿠데타를 통해 아버지 아흐마드 빈 알리 알싸니로부터 정권을 장악했다. 1995년에는 그의 아들 하마드가 다시 무혈 쿠데타로 아버지를 축출하고 집권했다. 하마드는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광 산업 육성, 위성 방송국 알자지라 설립 등 개방 및 다각화 정책을 추진했다.

카타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초기 회원국이었으나, 천연가스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2019년 탈퇴했다. 걸프 협력회의(GCC) 창립 회원국이며, 1990년 걸프 전쟁 당시에는 반이라크 연합군에 참여했다. 1996년부터 걸프 국가 중 유일하게 이스라엘 통상 대표부를 두었으나 2009년 폐쇄했다. 2006년 아시안 게임, 2011년 AFC 아시안컵, 2022년 FIFA 월드컵 등 주요 국제 스포츠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2030년 아시안 게임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이슬람 국가로서 금요일과 토요일이 주말 휴일이다.

2.1. 고대

알 호르 섬에서 발굴된 카시트 염료 생산지
알 호르 섬에서 발굴된 카시트 염료 생산지

카타르 지역의 인류 거주 역사는 약 5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반도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도구들이 발굴되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는 원주민이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우바이드 문화(기원전 6500~3800년경) 시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버려진 해안 유적지에서 우바이드 문화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카타르 서해안의 알 다아사 유적지는 카타르에서 가장 중요한 우바이드 문화 유적지로 확인된다. 이곳은 당시 소규모 계절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4~5세기에는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 문명과의 교역이 성행했다.

기원전 3천년 이후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딜문 문명은 카타르를 포함한 페르시아만 연안 지역을 아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수메르 문명의 기원이 이 지역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기원전 2~3세기경 카타르는 페르시아만 지역의 무역 및 상업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특히 서부 해안은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 간 교역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기 유럽-인도 간 교역로가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면서 카타르는 진주와 마른 생선 등을 수출했다.

기원전 2천년경의 유물인 알 호르 섬의 카시트바빌로니아 유적은 당시 카타르 주민과 오늘날 바레인 지역에 있던 카시트인들 사이의 무역 관계를 보여준다. 발견된 유물 중에는 조개껍데기와 카시트 토기 조각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카시트인들이 해안가에서 운영했던 자주색 염료 산업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카타르가 가장 오래된 조개껍데기 염료 생산지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기원후 1세기 중반,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이 반도 주민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기며 그들을 "카타레이(Catharrei)"라고 불렀는데, 이는 당시 주요 정착지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1세기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반도를 "카타라(Catara)"라고 부르며 최초로 지도를 제작했고, 지도에는 반도 동쪽에 "카다라(Cadara)"라는 도시도 표기했다. "카타라(Catara)"라는 명칭은 18세기까지 주로 사용되다가 이후 "카타라(Katara)"로 바뀌었고, 여러 변형을 거쳐 현대의 이름인 "카타르(Qatar)"로 정착되었다.

서기 224년, 이란의 사산 왕조가 페르시아만 일대를 지배하게 되면서 아라비아 반도는 동서양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로 더욱 중요해졌다. 카타르는 사산 왕조의 상업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진주와 자주색 염료 등을 공급했다. 동양으로부터 수입된 구리, 향료, 백단향 등과 아라비아 반도의 자색 염료, 의류, 진주, 대추야자, 금, 은 등을 물물교환하는 방식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사산 왕조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기독교인들을 통해 기독교가 동아라비아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이 시기에 수도원이 세워지고 새로운 정착지가 건설되기도 했다. 후기 기독교 시대에 카타르는 '베트 카트라예'(Beth Qatraye, 수리아어로 "카타르인들의 집"이라는 뜻)로 알려진 지역의 일부였는데, 이 지역은 카타르뿐만 아니라 바레인, 타루트 섬, 알-카트, 알-하사까지 포함했다.

628년,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동아라비아의 통치자였던 알마나제라(Al-Manajera) 가문의 알문지르 이븐 사와 알타미미(Al-Mnzir Ibn Sawa Al-Tamimi)에게 사절을 보내 이슬람교 수용을 권유했다. 알문지르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카타르 반도의 아랍 부족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같은 세기 중반, 이슬람 세력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사산 왕조는 멸망했다. 초기 이슬람 시대의 카타르 정착민들은 재봉 기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지며, '카타리야'라고 불리던 카타르산 의복은 무함마드와 그의 아내 아이샤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마이야 왕조 시기(661년~750년) 카타르는 무역과 상업이 번성했으며, 이어진 압바스 왕조(750년~1258년) 시기에는 양질의 진주가 많이 채집되어 동방에서의 수요 증가에 힘입어 중국에까지 진주를 수출하였다.

2.2. 이슬람 시대

7세기 중엽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동아라비아의 통치자 무누즈르 이븐 사와 알-타미미에게 사절을 보내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무누즈르는 이를 수용하여 당시 카타르 반도의 통치자였던 알마나제라(Al-Manajera) 가문의 알문지르 이븐 사와 알타미미(Al-Mnzir Ibn Sawa Al-Tamimi) 국왕을 포함한 이 지역 대부분의 아랍 부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같은 세기 중반, 페르시아 정복으로 사산 제국은 멸망했다. 초기 이슬람 시대의 카타르 정착민들은 재봉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카타리야’라고 불리던 카타르산 의복은 무함마드와 그의 아내 아이샤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마이야 왕조 시기(661년~750년) 카타르는 무역과 상업이 번성했으며, 유명한 말과 낙타 사육의 중심지로도 알려졌다. 8세기에는 페르시아만의 전략적 위치를 바탕으로 진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850년경 압바스 왕조의 최대 영토
850년경 압바스 왕조의 최대 영토

압바스 왕조(750년~1258년) 시기에는 카타르 지역에서 양질의 진주가 많이 채집되어 진주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동방에서의 진주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중국으로까지 진주를 수출하였다. 바스라에서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배들이 카타르 항구에 정박했으며, 카타르에서는 중국 도자기, 서아프리카 동전, 태국 유물 등이 발견되었다. 9세기 고고학 유적을 통해 당시 카타르 주민들이 부를 축적하여 더 나은 주택과 공공 건물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무르와브(Murwab)에는 100채가 넘는 돌집, 두 개의 모스크, 압바스 왕조 양식의 요새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칼리파의 권력이 쇠퇴하면서 카타르의 번영도 함께 약화되었다.

13세기 무슬림 학자 야쿠트 알-하마위(Yaqut al-Hamawi)는 그의 저서 무잠 알-불단(Mu'jam Al-Buldan)에서 카타르인들의 아름다운 줄무늬 망토와 창을 개량하는 기술에 대해 언급했다.

1253년 아라비아 동부 대부분은 우스푸리드 왕조(Usfurids)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1320년에는 호르무즈(Ormus)의 왕자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 카타르의 진주는 호르무즈 왕국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1515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호르무즈 왕국을 봉신으로 삼았고, 1521년에는 아라비아 동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약 150년간 걸프 지역을 통치하며 해상 무역을 통해 금, 은, 비단, 사향, 진주 등을 아시아 및 유럽으로 수출했다. 1550년, 알하사(Al-Ahsa) 주민들은 포르투갈 대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을 지배하려 했으나 1551년 까티프 공성전(Siege of Qatif (1551))에서 포르투갈에 의해 저지되었다. 포르투갈은 루와이다(Ruwayda)와 같은 요새를 건설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1650년 오만의 이맘 알야루비(Imam Al-Yarubi)가 포르투갈 세력을 걸프 만에서 축출하면서 카타르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미미했으며, 1670년 카타르에서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바니 칼리드(Bani Khalid) 부족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알하사에 있던 오스만 총독을 추방했다. 바니 칼리드 부족은 남쪽으로는 카타르, 북쪽으로는 쿠웨이트에 이르는 동부 아라비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1825년, 카타르 왕가인 알싸니(Āl-Thānī) 가문의 창시자 싸니 빈 무함마드가 비다우(현재의 도하)를 다스리는 카타르의 하킴(Hakim)으로 선출되었다. 1868년까지 바레인의 알할리파(Āl-Khalīfa) 가문이 북카타르를 지배했으나, 그 해 카타르 귀족들의 요청과 영국의 중재로 바레인은 주장을 철회했다. 하지만 곧이어 오스만 제국이 카타르를 점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철수한 후, 카타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2.3. 근대

포르투갈은 약 150년 간 걸프 지역을 통치하며 해상 무역을 통해 금, 은, 비단, 사향, 진주 등을 인도 등 아시아 및 유럽으로 수출했다. 1515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호르무즈 왕국을 봉신으로 삼았고, 1521년에는 아라비아 동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알하사 주민들은 1550년 포르투갈 대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은 바레인을 정복하며 자브리드 왕조를 멸망시켰고, 알하사까지의 아라비아 해안은 포르투갈 제국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1551년 카티프 공성전에서 패배하며 이 지역 지배에 실패했다. 포르투갈은 루와이다(Ruwayda) 등에 요새를 건설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려 했으며, 1563년 루이스 라자로가 제작한 지도에는 카타르가 요새 도시로 표시되어 있다.

1650년, 오만의 이맘 알야루비(Imam Al-Yarubi)가 포르투갈 세력을 걸프 만에서 몰아내면서 카타르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미미했고, 1670년 유목 부족인 바니 칼리드가 오스만 제국에 반발하여 알하사의 총독을 추방하고 카타르에서 쿠웨이트에 이르는 동부 아라비아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794년 사무엘 던(Samuel Dunn)이 그린 지도로, 중앙에 '카투라'(카타르)가 바레인 역사 지역에 위치한 모습을 보여준다.
1794년 사무엘 던(Samuel Dunn)이 그린 지도로, 중앙에 '카투라'(카타르)가 바레인 역사 지역에 위치한 모습을 보여준다.

1766년, 쿠웨이트에서 우투브 부족 연맹의 알 칼리파 가문 일원이 카타르의 주바라로 이주했다. 당시 바니 칼리드의 영향력은 약화된 상태였다. 1783년, 카타르의 바니 우트바 부족과 동맹을 맺은 아랍 부족들이 바레인을 침략하여 페르시아로부터 빼앗았고, 알 칼리파 가문은 바레인을 지배하며 주바라에 대한 관할권도 유지했다.

1788년 디리야 토후국의 왕세자 사우드 빈 압드 알아지즈와하비 영토를 페르시아만과 카타르로 확장하려 했다. 1795년 바니 칼리드를 물리친 후 와하비 세력은 동서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서쪽에서는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가, 동쪽에서는 바레인의 알 칼리파와 오만이 공격했다. 1811년, 이집트의 서부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와하비 아미르는 바레인과 주바라의 수비대를 줄였다. 이 틈을 타 마스카트의 통치자 사이드 빈 술탄이 동부 해안의 와하비 수비대를 공격하고 주바라 요새를 불태웠으며, 알 칼리파 가문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부분적으로 복원된 주바라(Zubarah) 폐허 도시의 모습
부분적으로 복원된 주바라(Zubarah) 폐허 도시의 모습

1821년, 해적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 선박이 도하를 폭격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수백 명의 주민이 피난했다. 1825년, 무함마드 빈 타니를 초대 지도자로 하는 타니 가문이 설립되었다.

카타르는 명목상 바레인의 속국으로 여겨졌으나, 지역 부족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1867년, 알 칼리파 가문은 아부다비 통치자와 연합하여 카타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알와크라에 대규모 해군을 파견했다. 이는 1867-68년 카타르-바레인 전쟁으로 이어졌고, 바레인과 아부다비 군대는 도하와 알와크라를 약탈했다. 이는 바레인이 1861년 영국과 맺은 영구 평화 우호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영국의 정치 담당관 루이스 펠리 대령은 1868년 카타르와 바레인을 방문하여 평화 협정을 중재했다. 이 과정에서 펠리는 바레인의 조약 위반을 비판하고, 무함마드 빈 타니가 대표하는 카타르 부족장들과 직접 협상했다. 이는 카타르가 바레인과 별개의 독립적인 정치체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무함마드 빈 타니의 지위를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카타르가 토후국으로 발전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1868년 영국 중재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다시 카타르를 점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철수한 후, 카타르는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16년, 영국은 당시 카타르의 아미르인 압둘라 빈 자심 알사니와 조약을 체결하여 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영국의 승인 없이는 영토 변경이나 독자적인 외교 관계 수립을 금지했다. 영국은 해상 침략으로부터 카타르를 보호하고 육상 공격 시 지원을 약속했다. 1934년 조약으로 영국의 보호는 더욱 강화되었다.

1935년, 이라크 석유 회사(IPC)의 자회사인 카타르 페트롤리엄 개발 회사(Petroleum Development (Qatar) Ltd, PDQ)는 카타르에서 75년간의 석유 시추권을 획득했다. 이 회사는 후에 카타르 석유 회사(Qatar Petroleum Company, QPC)로 개칭되었다. 1940년 카타르 반도 서해안에서 고품질의 석유가 발견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1949년에야 석유 수출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석유 수출로 얻은 막대한 부는 카타르의 번영과 사회적 진보를 이끌며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2.4. 독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철수한 후, 카타르는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916년, 영국은 당시 카타르의 수장(아미르)인 압둘라 빈 자심 알싸니를 셰이크로 인정하며 자치권을 부여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다른 페르시아 만 국가들과 맺은 조약들과 유사하게, 영국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영토 변경도 허용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 수립도 금지했다. 대신 영국은 해상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보호와 육상 공격 시 지원을 약속했다. 1934년 조약은 영국의 보호를 더욱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1935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의 공동 이익 회사인 카타르 페트롤리엄(Petroleum Development (Qatar) Ltd, PDQ)은 카타르에서 75년간의 석유 시추권을 얻었다. 1940년에는 카타르 반도 서해안에서 고품질의 석유가 발견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1949년까지 석유 수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석유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카타르는 막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번영과 사회적 진보를 이루며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8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자,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트루셜 오만(현재의 아랍에미리트)은 1971년 독립을 목표로 아랍에미리트 연합(Federation of Arab Emirates, FAE) 결성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카타르와 바레인도 FAE에 참여하는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이미 석유 생산으로 독자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했던 카타르와 바레인은 다른 토후국과의 이해관계 충돌 등을 이유로 FAE 참여를 거부하고 단독 독립을 선택했다.

결국 카타르는 1971년 9월 3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아랍 연맹에, 21일에는 국제 연합(UN)에 가입하며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3. 지리

카타르 지도
카타르 지도

아라비아 반도 동부에 위치하며, 카타르 반도를 형성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이며, 면적은 대한민국의 경기도와 비슷하다. 3면이 페르시아만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카타르 반도는 사우디아라비아 방향으로 약 160km 돌출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위 24°와 북위 27° 사이, 동경 50°와 동경 52° 사이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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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대부분은 모래로 뒤덮인 낮고 불모의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높은 지점은 서쪽의 자벨 두칸(Jebel Dukhan) 산맥에 있는 쿠라인 아부 알 바울(Qurayn Abu al Bawl)로, 해발 103m이다. 자벨 두칸 지역은 지크릿(Zikrit)에서 움 바브(Umm Bab)를 거쳐 남쪽 국경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낮은 석회암 노두 지대이다. 이 지역에는 카타르의 주요 육상 유전이 매장되어 있으며, 노스 가스전(North Gas Field)으로 알려진 세계 최대급의 천연가스전은 반도의 북동쪽 해상에 위치한다. 남동쪽에는 페르시아만의 작은 만을 둘러싼 연속적인 사구 지대인 코르 알 아다이드가 있는데, 이곳은 조용한 내해와 같아 "내륙의 바다"(Inland Sea)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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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기후는 평평하고 건조한 사막 경관과 연중 내리쬐는 햇살이 특징이다. 겨울은 온화하여 1월 평균 기온이 17°C 정도이며, 여름은 매우 더워 기온이 종종 40°C를 넘기도 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70mm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대부분 10월부터 3월 사이에 집중된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야외 활동에 영향을 미치며, 물 부족 문제도 심각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물 스트레스가 높은 국가로 꼽힌다.
카타르는 세계에서 5번째로 물 부족이 심각한 국가이다.
카타르는 세계에서 5번째로 물 부족이 심각한 국가이다.


1974년 이전의 국경선이 그려진 UAE 지도. 이 지도에서는 카타르(좌상)는 UAE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974년 이전의 국경선이 그려진 UAE 지도. 이 지도에서는 카타르(좌상)는 UAE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현재 카타르의 육상 국경은 사우디아라비아와만 접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아랍에미리트(UAE)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1974년 지다 조약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UAE 영토 일부를 할양받으면서 카타르와 UAE 사이의 육상 국경은 사라지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국경 참조).

카타르는 유럽과 중국 또는 아프리카 간의 무역에서 물류 및 항만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하마드 항과 같은 항구를 확장하고 기술 투자를 진행 중이다. 하마드 항은 도하 남쪽 움 알 홀(Umm Al Houl) 지역에 위치한 카타르의 주요 해상 항구로, 2010년 건설을 시작하여 2016년 12월부터 운영되고 있다. 이 항구를 통해 주로 식량과 건축 자재가 운송되며, 연간 최대 780만 톤의 물동량을 처리할 수 있다. 북부 해안에 위치한 라스 라판 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시설로 기능한다. 카타르는 역사적으로 해상 실크로드의 일부였으며, 현재도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고 있다.

4. 기후

여름에는 평균 30°C에서 40°C 정도의 기온이고 겨울에는 20°C에서 30°C 정도이다. 겨울에는 비가 가끔씩 오며 모래폭풍은 1년에 거의 한번씩 온다. 여름에는 건조하며 겨울에는 선선한 날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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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도하의 월별 평균 기온 및 강수량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
평균 최고 기온 (°C)22°C23°C27°C33°C39°C42°C42°C42°C39°C35°C30°C25°C
평균 최저 기온 (°C)14°C15°C17°C21°C27°C29°C31°C31°C29°C25°C21°C16°C
평균 강수량 (mm)12.7mm17.8mm15.2mm7.6mm2.5mm0mm0mm0mm0mm0mm2.5mm12.7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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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해양 기후 자료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평균 해수 온도 (°C)21°C19.4°C20.9°C23.3°C27.8°C30.5°C32.4°C33.6°C32.8°C30.8°C27.5°C23.5°C26.9°C

5. 경제

웨스트 베이 스카이라인 앞의 전통적인 도우(dhow)선들, 도하 코르니쉬(Doha Corniche)에서 바라본 모습
웨스트 베이 스카이라인 앞의 전통적인 도우(dhow)선들, 도하 코르니쉬(Doha Corniche)에서 바라본 모습

도하의 고층 건물
도하의 고층 건물

카타르는 국토 면적은 작지만 풍부한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높은 경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NP는 8만 6,300여 달러에 달해 세계 3위를 기록했으며, 한때 1인당 GDP 세계 1위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불리기도 했다. 2012년에는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GDP가 106 (38만 7,000 리얄)를 기록하며 3년 연속 세계 1위를 유지했다. 2015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약 192로, 일본 사이타마현과 비슷한 규모이다.

풍부한 석유 자금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한다. 대학 졸업자에게는 집을 무료로 임대해주고 10년 후 소유권을 이전해주며, 수도 요금, 전기 요금, 의료비, 교육비가 모두 무료이다. 소득세도 없어 바레인과 함께 세계에서 세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이다. 이러한 경제력과 복지 수준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 가깝거나 OECD 회원국들보다도 우수한 편이다.

1940년 두칸 유전에서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 카타르 경제는 어업과 진주 채취에 의존했다. 1892년 오스만 제국 기록에 따르면 진주 채취 수입은 245만 크랑에 달했으나, 1920년대 일본의 양식 진주 등장으로 카타르의 진주 산업은 쇠퇴했다. 석유와 천연가스 발견 이후 경제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카타르 경제의 근간은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이며, 수출의 대부분을 관련 제품이 차지한다. 경제 성장을 위해 해외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여, 이주 노동자가 전체 인구의 86%, 노동력의 94%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 6월 기준 실업률은 0.1%로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카타르 법인법은 자국 내 모든 사업체에서 카타르 국민이 51%의 지분을 소유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무역 및 산업은 상무부가 감독한다.

최근에는 카타르 국가 비전 2030 등을 통해 석유 및 가스 의존도를 줄이고 교육, 관광,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 투자하며 경제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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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산업 부문은 상대적으로 덜 발달했다. 농업은 연 강수량이 40mm에 불과하여 관개에 의존하며, 경작지는 국토의 0.7%(약 80km2), 목장은 4.5%(약 500km2) 정도이다. 주요 농작물은 보리, 옥수수, 토마토, 양배추 등이며, 축산업에서는 , , 염소, 낙타 등을 사육한다. 어업은 활발하지 않지만 연간 약 7000ton의 어획량을 기록하고 있다. 제조업은 축산물 가공, 질소비료 생산, 시멘트 생산 등이 소규모로 이루어지며, 석유화학공업과 제철이 비교적 큰 규모를 차지한다.

5.1. 에너지 산업

1940년 두칸 유전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어업과 진주 채취에 의존하던 카타르 경제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특히 풍부한 천연가스 자원은 카타르를 세계적인 에너지 강국으로 만들었다.

카타르의 확인된 원유 매장량은 약 252억 배럴이며(BP 통계 기준), 2017년 기준 하루 생산량은 약 192만 배럴에 달했다. 움사이드에는 하루 5만 배럴의 정제 능력을 갖춘 정유소가 운영되고 있다. 카타르는 1961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했으나, 2019년 1월 탈퇴했다. 1980년대에는 OPEC의 원유 생산 할당량과 유가 하락으로 경제 침체를 겪기도 했다.

카타르는 러시아, 이란에 이어 세계 3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규모는 약 250e12에 달한다. 이는 전 세계 매장량의 약 12.9%에 해당한다. 카타르는 세계 최대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으로, 1991년 1.5 규모의 노스필드 가스 개발 1단계 완료는 경제 회복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96년에는 카타르가스 프로젝트를 통해 일본으로 LNG 수출을 시작했다. 2017년 기준 하루 천연가스 생산량은 약 178e9이다. 주요 LNG 수출 대상국은 아시아 국가들이며, 대한민국, 중국 등과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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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LNG 수출국 순위 (2021년)
자료: BP 통계 2022
순위국가점유율
1위대한민국16.1%
2위인도13.6%
3위중화인민공화국12.3%
4위일본12.3%


국영 에너지 기업인 카타르에너지(QatarEnergy)는 노스 가스전 개발 등 국가 에너지 산업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메사이드 산업단지(Mesaieed Industrial Area)에는 정유소 외에도 요소 및 암모니아 비료 공장, 제철소, 석유화학 공장 등 중화학 공업 시설이 집적되어 있으며, 이들 시설은 주로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한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대부분 유럽, 일본, 미국 기업들과 카타르에너지 간의 합작 투자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메사이드 산업단지(Mesaieed Industrial Area)
메사이드 산업단지(Mesaieed Industrial Area)


카타르는 석유 및 가스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카타르 국가 비전 2030을 2008년에 발표했다. 이 비전은 환경 개발을 4대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 개발을 강조한다. 특히, 2030년까지 전체 에너지 생산의 20%를 태양광 발전으로 충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카타르는 연간 약 2,140 kWh/m²의 높은 전지구 수평 조사량과 약 2,008 kWh/m²의 직달 조사량을 가지고 있어 광전지 시스템 및 집광형 태양열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카타르 재단은 카타르 솔라(Qatar Solar) 및 카타르 솔라 테크놀로지스(QSTec)를 설립하여 태양광 에너지 개발을 주도하고 있으며, 2017년 라스 라판(Ras Laffan)에 1.1MW 규모의 태양광 발전 용량을 갖춘 폴리실리콘 공장을 준공했다. 정부는 향후 에너지 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지속할 계획이다.

카타르 정부는 에너지 산업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자국민의 고위직 진출을 장려하는 "카타리제이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해외에서 교육받은 카타르인들이 귀국하여 주요 직책을 맡는 사례가 늘고 있다.

5.2. 경제 다각화 노력

1995년 하마드 빈 칼리파 알싸니 국왕은 아버지로부터 정권을 장악한 후, 천연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 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제 다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관광 산업 육성에 착수하여, 과거 "세계에서 가장 지루한 도시"로 불렸던 수도 도하에 다양한 오락 시설 등을 건설하며 활기를 불어넣었다. --

이러한 노력은 카타르 국가 비전 2030의 일환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석유 및 가스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줄이고 산업 범위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비전 2030은 교육, 관광, 그리고 친환경 에너지 관련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2030년까지 에너지의 20%를 태양광 발전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관광 분야는 카타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로, 비자 완화 조치를 통해 88개국 국민의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는 등 중동에서 가장 개방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2022년 상반기에는 72만 9천 명 이상의 외국인 방문객을 기록하며 강력한 회복세를 보였고, 2030년까지 관광 부문의 GDP 비중을 12%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슬람 미술관, 수크 와키프(Souq Waqif), 카타라 문화 마을(Katara Cultural Village) 등이 주요 관광 명소로 꼽힌다. 2022년 FIFA 월드컵2030년 아시안 게임과 같은 세계적인 대회 개최는 스포츠 및 기업 관광 부문의 성장을 더욱 촉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카타르 항공하마드 국제공항의 세계적인 서비스 또한 관광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도하에 있는 카타르 중앙은행 사무실
도하에 있는 카타르 중앙은행 사무실

도하의 업무 지구
도하의 업무 지구


지식 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위해 2004년에는 도하에 과학기술단지를 조성하여 기술 관련 기업 유치에 나섰으며, 정부는 지식 집약적인 민간 투자를 적극 장려하고 있다. 카타르 금융센터(QFC)는 걸프만 국가들을 포함한 투자에 향후 10년간 1를 공급할 계획을 발표하며 금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2005년에 설립된 국부펀드인 카타르투자청(QIA)은 석유 및 가스 산업에서 발생한 흑자를 바탕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 태평양 지역 등 전 세계적으로 발렌티노, 지멘스, 해롯, 더 샤드, 바클레이즈 은행, 히스로 공항, 파리 생제르맹 FC, 폭스바겐 그룹, 로열 더치 쉘, 뱅크 오브 아메리카, 티파니, 중국농업은행, 세인즈버리, 블랙베리, 및 산탄데르 브라질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하며 자산 다각화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비록 소득세는 없지만, 2016년 유가 하락 및 재정 적자 상황 속에서 정부는 가공식품, 사치품, 담배, 청량음료 등 특정 상품에 대한 세금 부과 계획을 발표하며 세수원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6. 인문환경

카타르의 인구는 2020년 기준 2,881,053명이다. 전체 인구 중 카타르 국적자는 약 13%인 27만 8천 명에 불과하며, 나머지 87%에 해당하는 약 250만 명은 외국인 이주 노동자이다. 외국인 노동자 중에서는 인도 출신이 54만 5천 명으로 가장 많고, 파키스탄남아시아 국가 출신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인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카타르의 인구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정식 명칭은 아랍어로 دَوْلَةُ قَطَر아랍어이며, 일반적으로는 قطر아랍어라고 부른다. 현지 구어체 발음은 '기타르'(Giṭar아랍어)에 가깝다.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이슬람 이전 시대 서양 기록에서 이 지역을 'Catara'로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이를 아랍어로 음차한 قَطَارَا아랍어 또는 كَتَارَا아랍어가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후자는 도하에 있는 문화 마을 '카타라 문화 마을'의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영어 공식 국명은 State of Qatar영어이며, 약칭은 Qatar영어이다. 세계에서 영어 국명이 'Q'로 시작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국민 또는 형용사 형태는 Qatari영어이다.

한국어로는 "카타르국", "카타르" 등으로 표기하며,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공식 한글 표기는 '카타르'이다.

6.1.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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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인구는 2020년 기준으로 2,881,053명이다. 이는 1950년의 2만 5천 명, 1970년의 11만 명, 2000년의 59만 2천 명과 비교했을 때 급격하게 증가한 수치이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주로 외국인 노동자의 대규모 유입에 기인한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약 280만 명 중 카타르 국적을 가진 인구는 약 27만 8천 명으로,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나머지 87%에 해당하는 약 250만 명 이상이 외국인 이주 노동자이다. 인구는 계절에 따라 변동성이 큰데, 이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카타르 최초의 인구 기록은 1892년 오스만 제국의 지역 총독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당시 도시 거주민은 9,830명이었다. 1970년 첫 인구 조사에서는 111,133명, 2010년 조사에서는 1,699,435명을 기록했다.

더 펄의 주거용 건물
더 펄의 주거용 건물

외국인 노동자 중에서는 남아시아(스리랑카 포함 인도 아대륙 국가) 출신이 약 150만 명 이상으로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주요 국적별 인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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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별 외국인 인구 (2017년 기준)
국적인구 수
인도650,000명
네팔350,000명
방글라데시280,000명
필리핀260,000명
이집트200,000명
스리랑카145,000명
파키스탄125,000명

이 외에도 다른 아랍 국가, 유럽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남성 노동자의 대규모 유입으로 인해 성비 불균형이 심각하여, 여성 인구는 전체의 약 4분의 1에 불과하다. 2013년 1월 통계청 추산 인구 1,903,447명 중 남성은 1,405,164명, 여성은 498,283명이었다.

카타르인은 주로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인 베두인,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유래한 하 다르(Hadar), 그리고 동아프리카(주로 수단, 소말리아) 출신 노예의 후손인 압드(Abd)의 세 그룹으로 나뉜다.

카타르 사회에는 몇몇 유력 가문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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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주요 가문
가문설명
아르타니 가문카타르의 토착 부족으로, 1868년 카타르 독립 이후 통치 가문이다. 2002년에는 내각의 60%를 차지했으나, 2013년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즉위 후 임명된 각료 20명 중에는 수상을 포함해 3명만이 아르타니 가문 출신이었다.
알아티야 가문카타르의 유력 가문 중 하나이다. 압둘라 빈 하마드 알 아티야는 2007년 부총리 겸 에너지·산업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알미스나드 가문전 국왕 하마드의 어머니와 두 번째 부인이자 현 국왕 타밈의 어머니인 모자 왕대비를 배출한 가문이다.
알카말 가문2002년 당시 재무장관 유시프 후세인 알 카말을 배출했다.

6.2. 언어 및 문화

아랍어가 공용어이며, 카타르 아랍어(Qatari Arabic)가 지역 방언이다. 카타르 수화(Qatari Sign Language)는 청각 장애인 공동체의 언어이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향으로 영어가 흔히 제2언어로 사용되며, 특히 상업 분야에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로서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어, 아랍어가 영어의 영향으로부터 보존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영어는 카타르의 많은 외국인 거주자들과의 의사소통에 특히 유용하며, 의료계와 간호사 훈련 등에서도 공용어 역할을 한다.

카타르의 인구 구성은 다문화적 특징을 보인다. 2013년 조사 기준으로 전체 인구 180만 명 중 카타르 국적자는 13%인 27만 8000명에 불과하며, 87%인 150만 명이 외국인 노동자였다. 이들 대부분은 석유 자원 개발 등을 위한 노동력으로 유입되었으며, 인도인 (54만 5000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외 필리핀인, 네팔인, 파키스탄인, 스리랑카인, 방글라데시인 등 대부분 남아시아 국가 출신 노동자들이 많다. 이러한 인구 구성을 반영하여 말라얄람어, 페르시아어, 발루치어, 브라후이어, 힌디어, 우르두어, 파슈토어, 칸나다어, 타밀어, 텔루구어, 네팔어, 신할라어, 벵골어, 타갈로그어, 툴루어인도네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카타르 국적자는 주로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인 베두인(Bedouin),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조상으로 둔 하다르(Hadar), 그리고 수단과 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 출신 노예의 후손인 압드(Abd)의 세 계통으로 나뉜다.

카타르 문학(Qatari literature)의 기원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초기에는 서정시가 가장 흔한 표현 양식이었다. 19세기 초의 시인 압둘 잘릴 알-타바타바이(Abdul Jalil Al-Tabatabai)와 모하메드 빈 압둘라 빈 우사이민(Mohammed bin Abdullah bin Uthaymeen)은 카타르 초기 서정시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석유 수출로 경제가 발전하면서 많은 카타르인들이 도시 생활을 선호하게 되었고, 시는 점차 인기를 잃었다. 1950년대 이후 교육이 보급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1970년에는 첫 단편 소설집이, 1993년에는 첫 현지 작가 소설이 출판되었다. 나바티(nabati) 형식의 시는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했지만, 다른 문학 장르에 점차 자리를 내주었다. 현대 문학 분야에서는 여성 작가들이 남성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카타르의 음악은 베두인족의 시, 노래, 춤을 기반으로 한다. 도하에서는 금요일 오후에 전통 춤 공연이 열리는데, 대표적으로 아르다(Ardah)는 여러 타악기(큰 북인 알-라스(al-ras), 탬버린, 심벌즈, 작은 북 등) 반주에 맞춰 두 줄로 선 무용수들이 추는 양식화된 무술 춤이다. 민속 음악에는 키가 큰 점토 항아리인 갈라스(galahs)와 틴 컵인 투스(tus) 또는 타삿(tasat) 같은 타악기도 사용되며, 우드(oud)와 레바바(rebaba)와 같은 현악기도 흔히 연주된다.

카타르에는 종종 "중동의 CNN"으로 불리는 알자지라 방송국의 본사가 도하에 있다. 알자지라는 아랍어 뉴스 채널로 시작하여 현재는 여러 언어로 다양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아랍어와 영어 신문이 발행되며, 영어 월간 비즈니스 잡지로는 『Qatar Today』가 있다.

정식 국명은 아랍어로 دَوْلَةُ قَطَر아랍어이며, 일반적으로는 قطر아랍어라고 부른다. 현지 구어체 발음은 '기타르'에 가깝다.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이슬람 이전 시대 서양 기록에서 이 지역을 'Catara'로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이를 아랍어로 음차한 قَطَارَا아랍어 또는 كَتَارَا아랍어가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후자는 도하의 문화 마을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영어 공식 국명은 State of Qatar, 약칭은 Qatar이며, 세계에서 영어 국명이 'Q'로 시작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한국어로는 '카타르'로 표기한다.

6.3. 종교

카타르의 모스크
카타르의 모스크

이슬람교는 카타르의 주요 종교이며 국교이지만, 국가에서 유일하게 허용되는 종교는 아니다. 7세기에 전파된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아랍에미리트, 오만과 더불어 아라비아 반도 국가 중 기독교 교회가 허용된 소수의 국가 중 하나이다. 카타르 헌법은 "도덕적인" 범위 내에서 신앙을 실천할 자유를 보장한다.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외국 국적자를 포함한 카타르 전체 인구의 종교 구성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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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카타르 종교 구성 (외국인 포함)
종교비율 (%)
이슬람교67.7
기독교13.8
힌두교13.8
불교3.1
기타 / 무종교1.6


카타르 국적자의 95%는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은 수니파의 와하비즘 살라피 운동에 속한다. 시아파 무슬림은 전체 무슬림 인구의 약 5~15%를 차지하며, 다른 이슬람 종파는 매우 소수이다. 샤리아(이슬람 율법)는 헌법에 따라 주요 법률의 근원으로 명시되어 있다. 카타르의 샤리아 해석은 이웃 사우디아라비아보다는 덜 엄격하지만, 두바이보다는 덜 자유로운 것으로 평가된다. 카타르 와크프 및 이슬람 사무부는 "샤리아와 문화 유산을 육성하면서 현대적인 이슬람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무슬림 인구는 거의 전적으로 외국 이주민으로 구성된다. 2008년부터 기독교인들은 정부가 기증한 토지에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2008년에는 카타르 역사상 최초로 약 15만 명의 기독교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천주교회 예배당(도하 성모 마리아 성당)이 건립되었다. 현재 활동 중인 교회로는 말랑카라 마르 토마 시리아 교회, 말랑카라 정교회 시리아 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성모 마리아 성당과 에피파니 성공회 교회가 있다. 또한 두 개의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지부와 바하이교 공동체도 존재한다.

7. 문화

도하의 카타르 국립 박물관
도하의 카타르 국립 박물관

카타르 문화는 다른 동아라비아 국가들과 유사하며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매년 12월 18일에 개최되는 카타르 국경일은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날은 자심 빈 무함마드 알싸니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고 이후 국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것을 기념한다.

도하 문화 축제는 카타르 문화예술유산부가 2002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문화 행사 중 하나이며 카타르 안팎으로 카타르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95년에 당시 국장이었던 하마드가 아버지 칼리파의 해외 순방 중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하마드는 정권 장악 이후 천연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 체제를 넘어 관광 산업 육성 등에 착수했다. 과거 칼리파의 폐쇄적인 정책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지루한 도시"라고까지 불렸던 수도 도하에도 다양한 오락 시설 등이 건설되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한 위성 방송국 알자지라가 그의 사비(약 150)로 설립되었다. 1996년부터 걸프 지역 국가 중 유일하게 이스라엘의 통상 대표부가 있었으나, 2009년에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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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의 팜 주메이라와 유사한 인공섬이 Doha Bay영어에 조성되어 리조트 지역으로 개발되고 있다. 또한, 남부의 할룰 우데이드의 석호사구 투어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카타르는 노동자 권리, 특히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변화를 추진해왔다. 논란이 되었던 카팔라(kafala) 시스템을 폐지하고, 2021년에는 최저임금을 설정했으며, 노동자들이 제때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변화는 카타르의 국가 비전 2030과 연계되어 있으며, 국제적 위상 제고와 함께 근로 환경을 개선하려는 목표를 반영한다. 이러한 개혁 노력은 유엔 최빈개발국 5차 회의(LDC5)와 같은 국제 행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카타르는 풍부한 석유천연가스 수입을 바탕으로 의료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며, 사회보장 제도도 잘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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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국경일اليوم الوطني لدولة قطر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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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히즈(Dhū al-Ḥijjah) 10일부터희생제عيد الأضحىara이슬람력에 따른 이동 공휴일

※국경일은 2006년까지는 9월 3일이었으나, 2007년부터 12월 18일로 변경되었다.

7.1. 예술

도하의 카타르 국립 박물관
도하의 카타르 국립 박물관

카타르 관리들, 특히 알싸니 가문과 카타르 국왕의 여동생인 알마야사 빈트 하마드 빈 할리파 알싸니는 예술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알마야사는 카타르 박물관청을 이끈다. 2008년에 개관한 이슬람 미술관은 이 지역 최고의 박물관 중 하나로 여겨진다. 아랍 현대 미술관과 같은 다른 여러 카타르 박물관도 카타르 박물관청의 관할 아래 있으며, 베르사유의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2010년)와 런던의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2012년)와 같이 해외 예술 행사도 후원한다.

도하의 이슬람 미술관
도하의 이슬람 미술관


카타르는 가치 기준으로 세계 최대 미술 시장 구매국이다. 카타르 문화 부문은 가스 산업 자원을 주로 하는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개발되고 있다.

7.2. 스포츠

2022년 FIFA 월드컵 기간 중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
2022년 FIFA 월드컵 기간 중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

알라이얀 스타디움
알라이얀 스타디움

할리파 국제 경기장
할리파 국제 경기장

수용 인원 8만 명의 루사일 아이코닉 스타디움
수용 인원 8만 명의 루사일 아이코닉 스타디움


카타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선수와 관중 수 모두에서 단연 축구이다. 카타르 축구 협회는 1970년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했으며, 1981년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카타르 20세 이하 대표팀이 서독에 0-4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성인 대표팀AFC 아시안컵을 1988년, 2011년, 2023년 세 차례 개최했다. 특히 2019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일본을 3-1로 꺾고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7경기 전승 및 단 1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어 2023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개최국으로서 요르단을 꺾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2010년 12월 2일, 카타르는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이는 중동 국가 최초의 월드컵 개최로,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수도 도하2006년 아시안 게임 개최지이기도 하다. 월드컵 대회를 위해 7개의 경기장을 신설하고 1개의 기존 경기장을 확장했다. 하지만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모하메드 빈 함맘 전 AFC 회장이 지지를 얻기 위해 관계자들에게 총 3를 지불했다는 뇌물 수수 의혹이 제기되는 등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유럽 축구 협회들은 더위 문제와 겨울 개최 시 리그 일정 차질 등을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다. 2014년 FIFA의 조사에서는 카타르 측의 위법 행위가 없다고 결론 내렸으나, 비판은 계속되었다.

특히 월드컵 시설 건설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주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 열악한 숙소 환경 속에서 착취당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2014년에는 인프라 건설에 동원된 네팔 출신 노동자들이 이틀에 한 명꼴로 사망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2021년 가디언은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약 6,500명의 이주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카타르 조직위원회는 월드컵 개최가 지역의 "변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비판에 대응했다. 월드컵 기간 동안 약 160만 명의 팬을 유치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부족한 숙박 시설을 해결하기 위해 호텔 객실 수를 7만 개로 늘리고, 대규모 사막 야영지와 크루즈 선박을 임시 숙소로 활용하는 계획을 세웠다. 월드컵 자체는 역대 가장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최신 기술이 동원되었고 대회 운영에 대한 만족도도 높게 나타났다.

카타르의 프로 축구 리그인 카타르 스타즈 리그는 1963년 창설되어 2008년 프로화되었으며,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선수들을 영입해왔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펩 과르디올라, 페르난도 이에로, 라울 곤살레스, 사비 에르난데스, 베슬레이 스네이더, 사뮈엘 에토, 하메스 로드리게스, 마이클 올룽가 등이 카타르 리그를 거쳐갔다. 일본 선수로는 2019년 나카지마 쇼야알 두하일 SC로 이적하며 기록한 약 4375의 이적료는 당시 일본 선수 역대 최고액이었다. 이후 고바야시 유키 (알 홀 SC), 다니구치 쇼고 (알라얀 SC) 등도 카타르 리그에 진출했다. 카타르는 FIFA 아랍컵도 2021년에 개최했으며, 2025년과 2027년 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축구 다음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는 크리켓으로, 특히 남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카타르 크리켓 협회는 1980년에 설립되어 1999년 국제 크리켓 평의회(ICC)에 가입했으며, 2017년에는 준회원이 되었다. 남녀 국가대표팀이 ICC 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주요 경기장으로는 웨스트 엔드 파크 국제 크리켓 경기장이 있다.

2015 카타르 레이디스 투어
2015 카타르 레이디스 투어


다른 단체 스포츠에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핸드볼에서는 카타르 남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이 개최국 자격으로 출전한 2015년 세계 남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 프랑스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이 대회는 개최국 및 대표팀 구성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농구는 아시아계 이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으며, 2005년 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 2013년 FIBA 아시아 3x3 선수권 대회, 2014년 FIBA 아시아 U-18 선수권 대회, 2022년 FIBA U-16 아시아 선수권 대회 등 다수의 국제 대회를 개최했다. 남자 3x3 대표팀은 2014년 FIBA 3x3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남자 대표팀은 2006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 처음 출전했다. 또한 카타르는 2027년 FIBA 농구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어 아랍 국가 최초로 대회를 유치하게 된다.

사이클링에서는 2002년부터 매년 투르 드 카타르 로드 레이스가 개최되고 있다. 투르 드 프랑스를 주최하는 아모리 스포르 오르가니자시옹(ASO)이 주관하며, 시즌 초반 많은 정상급 선수들이 참가하는 수준 높은 대회이다. 모터스포츠에서는 2004년 루사일 인터내셔널 서킷이 완공되어 매년 MotoGP 경기가 열리고 있다.

테니스에서는 도하의 할리파 국제 테니스 및 스쿼시 센터에서 WTA 투어 챔피언십 (2008-2010)과 WTA 프리미어 대회인 카타르 레이디스 오픈이 매년 개최된다. 경마는 순혈 아랍종과 서러브레드 경주가 열리며, 2012년부터 시작된 '카타르 견습기수 초청 경주'에는 일본 기수들도 초청받고 있다.

루사일 스포츠 아레나
루사일 스포츠 아레나


스카이다이빙에서는 카타르 군 스카이다이빙 팀이 세계적인 실력을 자랑하며 국경일 등 주요 행사에서 공연을 펼친다. 배구에서는 도하가 FIVB 남자 클럽 월드 챔피언십 4회, FIVB 여자 클럽 월드 챔피언십 3회, 1997년 아시아 남자 배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했다. 육상에서도 21세기 들어 아시안 게임 등 국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전통 스포츠로는 낙타 경주가 있으며, 알샤하니야 등의 도시에 경주 경기장이 있다.

8.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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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빈 압둘라흐만 빈 자심 알싸니2023년부터 총리
모하메드 빈 압둘라흐만 빈 자심 알싸니
2023년부터 총리


카타르는 공식적으로 준헌법 군주국이지만, 군주가 가진 막강한 권력 때문에 사실상 절대 군주제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싸니 가문( آل ثانيara )은 1825년 가문 창립 이래 카타르를 통치해 왔다. 2003년, 카타르는 헌법을 제정하여 45명의 입법부 의원 중 30명을 직접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이 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8%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승인되었으나, 실제 통치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카타르는 2023년 중동에서 두 번째로 선거 민주주의 수준이 낮은 국가로 평가되었다. 카타르 법은 정치 단체나 노동 조합의 설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카타르국 아미리 디완, 에미르의 행정 사무소
카타르국 아미리 디완, 에미르의 행정 사무소


카타르의 제8대 에미르는 타밈 빈 하마드 알싸니이다. 행정권은 국가원수인 에미르와 내각이 갖는다. 에미르는 총리와 각료를 임명할 배타적 권한을 가지며, 이들로 구성된 내각이 국가의 최고 행정권을 행사한다. 법률안 제출 역시 내각에서 시작된다. 총리직이 존재한다.

자문회의는 45석으로 구성되며, 장관에 대한 질문권과 예산안 승인 투표권 등을 가진다. 2003년 헌법 개정으로 45석 중 30석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고 15석은 에미르가 임명하는 방식이 도입되었으나, 선거 실시는 계속 연기되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민주화 요구가 일자 정부는 선거 실시를 발표했고, 여러 차례 연기 끝에 2021년 10월 2일 카타르 최초로 자문회의 선거가 실시되어 30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자문회의는 단순 과반수로 법안을 거부할 수 있으며,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총리를 포함한 각료를 해임할 수 있다. 그러나 2024년 11월 헌법 개정으로 선거제는 다시 폐지되었고, 모든 의원을 에미르가 임명하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타밈 에미르(왼쪽, 2016년 7월 28일)가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타밈 에미르(왼쪽, 2016년 7월 28일)가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카타르 헌법은 샤리아 법이 카타르 법률의 주된 근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법 체계는 민법과 샤리아 법이 혼합된 형태이다. 샤리아는 가족법, 상속, 그리고 간통, 강도, 살인과 같은 특정 형사 범죄에 적용된다. 일부 샤리아 기반 가정 법원에서는 여성의 증언 효력이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2006년에는 성문화된 가족법이 도입되었으며, 이슬람식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

사법적 체벌은 카타르에서 시행되는 처벌 방식 중 하나이다. 의학적으로 건강하다고 판단되는 무슬림에게만 집행된다. 태형은 음주나 불법적인 성관계에 대한 처벌로 사용된다. 형법 제88조는 간통죄에 대해 태형 100대를 규정하고 있다. 투석형 역시 카타르에서 합법적인 처벌 방식이다. 배교동성애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이지만, 실제로 이들 범죄로 사형이 집행된 사례는 없다. 신성모독은 최대 7년, 다른 종교를 포교하는 행위는 최대 1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사법권은 상급형사재판소, 하급형사재판소, 민사·상사재판소, 노동재판소, 고등재판소의 5개 재판소가 행사한다. 사형(교수형, 총살형) 제도가 존재한다.

음주는 부분적으로 허용된다. 일부 5성급 호텔에서는 비무슬림 고객에게 주류 판매가 가능하다. 무슬림의 음주는 금지되어 있으며, 적발 시 태형이나 추방을 당할 수 있다. 비무슬림 외국인 거주자는 개인 소비 목적의 주류 구매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카타르항공의 자회사인 카타르 유통 회사는 주류 및 돼지고기 수입 허가를 받아, 주류 판매 면허 소지자에게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유일한 주류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2022년 FIFA 월드컵 당시 카타르 관리들은 "팬 존"에서 주류 판매를 허용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경기 시작 이틀 전인 11월 18일, 경기장 내 주류 판매 금지를 발표하며 입장을 번복했다.

2014년에는 관광객들에게 엄격한 복장 규정을 상기시키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여성 관광객은 공공장소에서 레깅스, 미니스커트, 민소매 드레스, 짧거나 몸에 붙는 옷을 입지 않도록 권고받았고, 남성은 반바지나 민소매 셔츠를 입지 않도록 주의받았다.

8.1. 외교

걸프 협력 회의(GCC)의 창립 회원국인 카타르는 작은 국가이지만 풍부한 석유천연가스 자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미군 기지를 유치하는 등 서방 국가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아랍 국가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때로는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소련(당시) 및 중화인민공화국과 각각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초기 회원국이었으나, 천연가스 생산에 주력한다는 방침에 따라 2019년 1월 1일 탈퇴했다. 1990년 걸프 전쟁 당시에는 이라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95년 하마드 빈 칼리파 알싸니가 집권한 이후, 천연자원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위성 방송국 알자지라를 자신의 사재 150를 들여 설립하기도 했다. 1996년부터 2009년까지는 걸프 지역 국가 중 유일하게 이스라엘 통상 대표부를 운영하기도 했으나 이후 폐쇄했다.

카타르는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중동 지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재정 지원을 통해 아랍의 봄 당시 여러 국가의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시리아 내전에서는 서방 국가들과 협력하여 알누스라 전선과 같은 알카에다 계열 반정부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파 하마스에 대해서도 무슬림 형제단을 통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2012년에는 아프가니스탄탈레반도하에 대외 연락 사무소를 개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후 카타르는 탈레반과 미국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2020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위한 평화 협상이 도하에서 열렸으며,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하자 유럽 국가들과 탈레반 간의 대화 창구 역할을 맡았다. 또한 미군 철수 후 혼란에 빠진 카불 국제공항의 운영을 위해 항공 관제 및 물자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자적인 외교 행보는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2014년,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랍에미리트(UAE) 3개국은 카타르의 내정 간섭을 문제 삼아 자국 주재 카타르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며 외교적 마찰이 시작되었다. 갈등은 2017년 6월 최고조에 달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 UAE, 바레인, 이집트, 예멘, 몰디브, 모리타니 등 다수의 이슬람 국가들이 카타르의 무슬림 형제단 지원과 이란, 터키와의 관계 강화를 이유로 일제히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2017년 카타르 외교 위기). 이 단교 사태는 수년간 지속되었으나, 2021년 1월 4일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가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으며, 다음 날인 5일에는 UAE, 바레인, 이집트와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한편, 이 외교 위기를 계기로 카타르와 터키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으며, 한때 카타르 영토 내에 터키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주변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카타르 외교의 주요 과제로 남아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본부를 둔 경제평화연구소(IEP)가 2022년 발표한 '긍정적 평화 지수' 보고서에서, 여러 지표를 바탕으로 산출된 카타르의 '주변국과의 관계' 지수는 4.41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며 아프가니스탄보다도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8.1.1.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정부는 1971년 9월 카타르가 독립하자마자 카타르를 승인했으며, 1974년 4월 19일에 공식적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1976년부터 대한민국의 건설업체가 카타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양국은 경제 및 외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협정을 체결했는데, 1984년 4월에는 경제기술무역협력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1999년 4월에는 투자보장 협정과 외무부 간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현재 카타르에는 대사관 가족을 포함하여 약 900명에서 1000명 가량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카타르는 88 서울 올림픽 당시 12명의 선수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현재 카타르 항공인천도하를 잇는 직항편을 새벽 시간대에 운항하고 있다.

8.2. 군사

카타르의 군비 예산은 GNP 대비 4.2%(1993년 기준)이며, 전체 병력은 1만 1800명이다.

미국 중부 사령부가 수도 도하 인근 아스 사일리야(As Sayliyah) 캠프에 주둔해 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위한 기지 사용을 반대하면서 2003년에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미공군의 합동공군작전센터(CAOC)를 이전한 알 우데이드(Al Udeid) 공군기지가 있다. 미국 중부 사령부는 본부가 있는 플로리다주 탬파중동 지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 직전인 2003년에 이곳에 제2의 사령부를 설치하여 중동 지역 미군 부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전개한 미군 부대는 이곳에서 지휘를 받았다.

2016년, 카타르는 과거 지배를 받았던 터키에 군사 기지를 제공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2017년 카타르 외교 위기 이후 카타르는 군사적으로 다각적인 행보를 보였다. 2017년 6월에는 미국 해군과, 8월에는 미군 공수부대와 합동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외교적 고립에 대응하여 상하이 협력 기구에 가입을 신청했으며, 이후 터키와 마찬가지로 대화 파트너로서 참여가 승인되었다. 또한 2017년 12월 건국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훈련을 받아 기존의 영국식 퍼레이드 대신 중국식 대열과 거위걸음 행진을 선보였다. (카타르 경찰 부대도 중국 공안부에 의해 중국식으로 훈련받았다.) 이 퍼레이드에서는 중국산 탄도 미사일 BP-12A도 공개되어 중국과의 군사적 접근이 두드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