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달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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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달루게는 독일의 나치 친위대(SS) 장교이자 경찰 지도자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며, 전후에는 극우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나치당에 입당하여 돌격대(SA)에서 활동하다 친위대로 옮겨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다. 프로이센 경찰을 장악하고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을 지휘하며 점령지에서 학살에 관여했다. 1942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의 부보호관이 되어 리디체 학살을 명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체포되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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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달루에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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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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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쿠르트 막스 프란츠 달루에게 |
출생 | 1897년 9월 15일 |
출생지 | 클루치보르크(크로이츠부르크), 상슐레지엔, 독일 제국 (현재 폴란드) |
사망 | 1946년 10월 24일 (49세) |
사망지 | 판크라츠 교도소,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 |
국적 | 독일 |
배우자 | 1926년 케테 슈바르츠와 결혼 |
자녀 | 4명 |
별칭 | 해당사항 없음 |
경력 | |
소속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학력 | 토목 공학 |
모교 | 베를린 공과대학교 |
군사 경력 | |
충성 | 독일 제국 |
복무 | 왕립 프로이센 육군 |
복무 기간 | 해당사항 없음 |
최종 계급 | 해당사항 없음 |
소속 부대 | 제7근위보병연대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전투 | 서부 전선 동부 전선 |
훈장 | 철십자 훈장, 2등급 전상장 |
정치 경력 | |
직책 | 질서경찰 장관 |
임기 시작 | 1936년 6월 26일 |
임기 종료 | 1943년 8월 31일 |
상관 | 하인리히 힘러 (독일 경찰 총수) |
전임 | (사무실 설립) |
후임 | 알프레트 뷔넨베르크 |
직책 2 | 보헤미아 모라바 부/대리 보호관 |
상관 2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명목상 보호관) |
임기 시작 2 | 1942년 6월 5일 |
임기 종료 2 | 1943년 8월 24일 |
전임 2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후임 2 | 빌헬름 프리크 |
독일 국회 의원 | 해당사항 없음 |
유죄 판결 | |
범죄 |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
죄목 | 리디체 학살 |
재판 | 해당사항 없음 |
형벌 | 사형 |
상태 | 처형됨 |
서명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쿠르트 달루게는 1897년 9월 15일 상실레시아의 작은 도시 크로이츠부르크(현재의 클루치보르크)에서 프로이센 주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 제국 내 속령 프로이센 왕국의 Provinz Schlesien|실레시아 주de Kluczbork|클루츠보르크de에서 중급 공무원 파울 달루게(Paul Daluege)와 그의 아내 라우라(Laura)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아르투르, 에리히, 요아힘이 있었다. 브로츠와프와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의 초등학교(Volksschule)를 졸업한 후,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의 실과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1916년 1월 전시 중 아비투어의 Notabitur|노타비투어de에 합격하여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1916년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제7 근위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서 모두 복무했다. 1917년 10월 도베리츠에서 장교 훈련을 받았으며, 서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중 머리와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고 25% 장애 판정을 받았다. 이후 2급 철십자훈장과 흑색 전상장을 받았다.
전후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실레시아의 의용군(프라이코르)에 부대 지휘관으로 참가하여, 1921년에는 실레시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건축 기술을 공부했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Sturmabteilung Roßbach|로스바흐 돌격대de와 「Deutschvölkischer Schutz und Trutzbund|독일 민족 방위 및 저항 연합회de」에 가입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달뤼게는 1897년 9월 15일 상실레시아의 작은 도시 크로이츠부르크(현재의 클루치보르크)에서 프로이센 주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10] 1916년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제7 근위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 참전했다.[13] 1917년 10월 도베리츠에서 장교 훈련을 받았고, 서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중 머리와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고 25% 장애 판정을 받았다. 1917년 10월 25일 부조장(Vizefeldwebel)으로 승진했다.[13] 달뤼게는 2급 철십자훈장과 흑색 전상장을 받았다.[13][14]2. 2. 전후 극우 민족주의 운동 가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달루게는 상실레시아 자위대(Selbstschutz Oberschlesien, SSOS)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는 상실레시아 출신 참전 용사 단체로, 당시 그 지역에서 폴란드인들과 전투를 벌였다.[3] 1921년,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교(Technische Universität Berlin)에서 공학을 공부하는 동안 프리코르프스 게르하르트 로스바흐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결국 토목 공학 학위를 받았다. 2년 후, 그는 나치당에 입당하여 31,981번의 당원 번호를 받았다. 같은 해에 대독일 노동자당에도 입당했다. 1924년부터 그는 나치당 돌격대(SA)의 전위 조직인 베를린 프론트반 조직화를 도왔다. 당시 나치당과 돌격대는 프로이센에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26년 그는 직접 SA에 가입하여 결국 베를린 SA의 지도자이자 조셉 괴벨스의 베를린 지방장(Gauleiter)이 되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달루게는 SA의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부를 이끌었다.2. 3. 나치당 입당과 돌격대 활동
달루게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상실레지아 출신 참전 용사 단체인 상실레지아 자위대(Selbstschutz Oberschlesien, SSOS)의 지도자가 되어 폴란드인들과 전투를 벌였다.[3] 1921년에는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하며, 자유군단(Freikorps) 게르하르트 로스바흐(Gerhard Roßbach)에서 활동했고, 토목 공학 학위를 받았다.1922년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으나, 뮌헨 폭동 실패로 당이 해산되어 일시 탈당했다. 1924년 대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하여[3] 돌격대(SA)의 위장 조직인 프론트반(Frontbann)에 참가했다. 1924년 8월부터 1926년 3월 22일까지 "프론트반"의 북부 지역 책임자였다.[16][13] 1924년에 공학사 시험에 합격하고, 제철소에서 통계 담당으로 근무한 후 프로이센 농무성에 입성했다. 처음에는 기술관 보조로 근무했지만, 나중에는 운하와 철도 건설 감독관을 역임했고, 1927년에는 베를린 쓰레기 처리장 건설을 책임지는 부서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3]
1926년 3월 12일 재건된 나치당에 재입당(당원 번호 31,981)했다.[9] 자유군단 출신자, 실업자, 민족주의적 스포츠 선수 등을 모아 베를린에 최초의 돌격대(SA)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1926년 초 500명 규모로 베를린 나치당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17]
1926년 달루게는 직접 SA에 가입하여 베를린 SA의 지도자이자 요제프 괴벨스의 베를린 지방장(Gauleiter) 대리가 되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SA의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부를 이끌었다. 1926년 3월 22일부터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가 되었고, 11월부터 1930년 7월까지 돌격대 집단 베를린-브란덴부르크(SA-Gruppen "Berlin-Brandenburg") 사령관을 역임했다. 1928년 10월 1일 대베를린 대관구가 설치되자 1930년 11월 1일까지 대리 역할을 수행했다.
달루게는 뮌헨 나치당 중앙부에도 과격한 태도를 취하는 베를린 돌격대 최고 지도자였지만, 당수 아돌프 히틀러는 그를 자기 편으로 만들면 유용하다고 보고 포섭했다. 달루게는 괴벨스와 함께 베를린 과격파를 감시하는 "히틀러파"가 되었다.[18] 히틀러는 달루게가 돌격대 감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1929년 1월부터 베를린 친위대(SS) 부대 지휘를 맡겼다. 또한 뮌헨의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독립하여 지휘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19] 1929년 7월부터 1930년 7월까지 돌격대 최고 지도부 특별 임무 지도자(Führer z.b.V.)에 임명되었다.[20]
1930년 8월 30일 발터 슈텐네스 등 베를린 돌격대 간부의 반란을 막지 못했고, 괴벨스의 요청으로 달루게의 베를린 친위대 부대가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지만 실패했다. 괴벨스는 경찰에 개입을 요청했다.[21][22] 1931년 4월 2일 슈텐네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달루게의 친위대 부대가 투입되어 진압에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히틀러는 달루게에게 "SS 대원이여, 충성이 곧 너의 명예다"라는 말을 선물했다. 이 말은 모든 친위대의 모토인 충성이 곧 나의 명예의 원형이 되었다.[23][24]
3.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1936년, 독일 경찰 전체가 재편되면서 달루게는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의 장으로 임명되어 나치 독일의 대부분의 제복 경찰에 대한 행정적 권한을 부여받았다.[4] 그는 1943년까지 Orpo를 지휘했으며, SS-오버스트그룹펜퓌러(Oberst-Gruppenführer) 겸 경찰대장(Generaloberst der Polizei) 계급까지 올랐다. 달루게는 자신의 경찰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임명과 동시에 "범죄에 대한 국민 사회주의 투쟁(National-sozialistischer Kampf gegen das Verbrechertum)"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5]
달루게가 지휘하는 질서경찰(Orpo)은 시 경찰, 농촌 헌병대, 교통 경찰, 해안 경비대, 철도 경찰, 우편 보호 서비스, 소방대, 공습 서비스, 긴급 기술 서비스, 방송 경찰, 공장 보호 경찰, 건축 규정 집행 및 상업 경찰 등 다양한 조직을 포함했다.[6] 1939년 8월까지 Orpo의 병력은 12만 명 이상이었다.[2]
달루게의 질서경찰은 폴란드 침공 이후 점령지에서 잔혹 행위에 가담했다. 예를 들어, 1939년 9월 5일자 보고서에는 폴란드 쳉스토호바 주변에서 폴란드 프랑티외르를 가로등에 매달아 처형하라는 지시가 있었다.[3] 1941년에는 경찰 대대 307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근처에서 4,435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하고 민스크에서 유대인 학살에 참석했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에서 유대인들을 리가와 민스크로 강제 추방하는 명령에 서명했다.[9] 1942년 7월에는 라인하르트 작전의 "확대"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했다.[9]
한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달루게가 Orpo를 장악한 것과 동시에 보안경찰(SiPo)을 장악했는데, 달루게를 "바보"라고 비웃으며 경멸했다.[1]
3. 1. 친위대 이적과 권력 투쟁
1930년 7월, 달루게는 아돌프 히틀러의 뜻에 따라 돌격대(SA)를 사임하고 친위대(SS)에 SS-오베르퓌러(Oberführer) 계급으로 입대하여 회원 번호 1,119를 받았다.[9] 그의 주요 임무는 돌격대와 나치당의 정적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1930년 8월,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발터 슈테네스가 베를린 당 본부를 공격했을 때, 달루게의 SS 부대가 이를 방어하고 진압했다. 이후 히틀러는 달루게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SS 장교여, 당신의 명예는 충성이다!(SS Mann, deine Ehre heißt Treue!)"라고 칭송했다. "마인에레 하이스트 트로이에(Meine Ehre heißt Treue)"(나의 명예는 충성이다)라는 문구는 SS의 표어가 되었다. 히틀러는 달루게와 하인리히 힘러를 SS-오버그루펜퓌러(Obergruppenführer)로 승진시켰고, 달루게는 북부 독일의 SS 지도자가 되었다.1932년 4월, 달루게는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3년 6월에는 제국평의회의 프로이센 전권대리, 1933년 7월 11일에는 프로이센 주 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9월, 헤르만 괴링은 달루게를 프로이센 내무부로 이동시켜 란데스폴리체이(Landespolizei)의 제너럴마요르(Generalmajor) 계급을 부여하고 비정치적 경찰을 맡겼다. 1933년 11월 12일, 그는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25]
긴 칼의 밤 사건 당시 괴링,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등이 주도하는 숙청에 협력했다. 에른스트 룀 등 돌격대 간부들이 숙청된 후, 달루게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중앙, 폼머른, 실레지엔, 오스트마르크 5개 돌격대 집단의 임시 지휘를 맡았다.[31]
괴링은 1934년 4월 20일 게슈타포 지휘권을 힘러에게 넘겼지만, 달루게는 계속 힘러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다. 1934년 11월부터 1936년 6월까지 달루게는 빌헬름 프리크로부터 독일 내무부 제3국(경찰국) 국장을 맡았다.[32] 프리크는 달루게를 독일 경찰 책임자로 만들려 했다.[33]
1936년 6월 17일, 히틀러는 힘러를 전 독일 경찰 총감으로 임명했다. 힘러는 달루게를 일반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질서경찰 총감으로 임명했지만, 게슈타포와 범죄경찰(크리포) 등 정치 경찰 업무는 모두 하이드리히의 치안경찰에 통합되어 달루게의 권력은 제한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달루게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항은 모두 치안경찰의 관할에 속한다"고 통보했고, 달루게는 SS 내부에서 점차 실권을 잃어갔다.[36]
3. 2. 프로이센 경찰 장악과 괴링과의 관계
1932년 4월, 달루게는 나치당 의원으로 프로이센 주의회에 선출되었고, 1933년 6월에는 프로이센의 전권대리로 제국평의회에 임명되었다.[9] 1933년 7월 11일, 프로이센 총리 헤르만 괴링은 달루게를 프로이센 주 의회에 임명했다.[9] 1933년 9월, 괴링은 달루게를 프로이센 내무부로 이동시켜 란데스폴리차이(Landespolizei)의 제너럴마요르(Generalmajor) 계급을 부여하고 비정치적 경찰을 맡겼다.[9]괴링의 후원을 받은 달루게는 하인리히 힘러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27][28] 그는 1934년 긴 칼의 밤 사건 당시 괴링,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등이 주도하는 숙청에 협력했다.[31]
1936년, 독일 경찰 전체가 재편되면서 달루게는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의 장으로 임명되어 나치 독일의 대부분의 제복 경찰에 대한 행정적 권한을 부여받았다.[5] 그는 1943년까지 Orpo를 지휘했으며, SS-오버스트그룹펜휘러(Oberst-Gruppenführer) 겸 경찰대장(Generaloberst der Polizei) 계급까지 올랐다. 한편, 하이드리히는 달루게를 "바보"라고 비웃으며 경멸했다.[5]
3. 3. 질서경찰 총수 임명
1936년, 독일 경찰 전체가 재편되면서 이전에는 연방 주들이 행사했던 행정 기능이 명목상으로는 제국 내무부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인리히 힘러의 SS 통제하에 재배치되었다.[4] 달루게는 자신의 경찰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임명과 동시에 "범죄에 대한 국민 사회주의 투쟁(National-sozialistischer Kampf gegen das Verbrechertum)"이라는 책을 출판했다.[5] 같은 해, 힘러는 달루게를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의 장으로 임명하여 나치 독일의 대부분의 제복 경찰에 대한 행정적 권한(하지만 집행적 권한은 아님)을 부여했다.[6][7][8] 그는 1943년까지 Orpo를 지휘했으며, SS-오버스트그룹펜퓌러(Oberst-Gruppenführer) 겸 경찰대장(Generaloberst der Polizei) 계급까지 올랐다.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달루게가 Orpo를 장악한 것과 동시에 보안경찰(SiPo)을 장악했는데, 그는 초기 권력 투쟁에서 경쟁자였던 달루게를 매우 경멸했으며, "둠미-둠미(Dummi-Dummi)" 또는 "바보"라고 비웃었다.[1]
1939년 8월까지 달루게의 지휘와 통제하에 있는 Orpo의 병력은 12만 명 이상의 현역 인원에 달했다.[2] 달루게의 사무실(질서경찰(Ordnungspolizei) 장)에서 나온 잔혹 행위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는 1939년 9월 5일자 보고서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보고서는 폴란드에서의 평화 유지 작전에 사용될 방법을 개괄하고 있다. 폴란드 도시 쳉스토호바 주변에서 계획된 보복 행위를 위한 제복 경찰 대대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 대대 지휘관은] 상부 실레시아 공업 지역과 같은 가장 과감한 조치와 방법, 즉 폴란드 프랑티외르를 가로등에 매달아 전체 인구에게 보이는 상징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다.]"[3]
1941년 전쟁 중 그는 경찰 대대 307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근처에서 4,435명의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고 민스크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에도 참석했다. 또한 1941년 10월 달루게는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에서 유대인들을 리가와 민스크로 강제 추방하는 명령에 서명했다.[9] 1942년 7월 7일, 그는 힘러가 주도한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폴란드 점령지의 총독부 지역에서 폴란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려는 비밀 나치 계획인 라인하르트 작전의 "확대"와 동부 지역의 SS 및 경찰 정책과 관련된 다른 문제들이 논의되었다.[9]
4. 제2차 세계 대전 중 범죄 행위
1942년, 달루게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이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부보호관이 되었다.[7] 히틀러는 원래 에리히 폰 뎀 바흐 젤레프스키를 임명하려 했지만, 하인리히 힘러는 동부 전선의 군사 상황 때문에 바흐 젤레프스키를 빼앗길 수 없다는 이유로 히틀러를 설득하여 달루게를 임명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명목상 보호관이었지만 1941년에 권한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달루게는 사실상 보호관 직무를 대행했다.
카를 헤르만 프랑크는 힘러와 히틀러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달루게의 권한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43] 달루게는 하인츠 라인파르트를 민정 장관으로 임명하여 프랑크의 권력을 억제하려 했으나, 프랑크는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1942년 4월, 달루게는 친위대 최고위직인 친위대 상급대장 겸 경찰 상급대장(SS-Oberstgruppenführer und Generaloberst der Polizei)으로 승진했다. 친위대 상급대장 계급은 달뤼게를 포함해 4명에게만 수여되었다.
1943년 5월과 6월, 달루게는 연이어 심근경색을 일으켜 중태에 빠졌다. 7월 30일부터 질병 치료를 위해 질서경찰 총감직에서 휴직했고,[34] 8월 20일에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부총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달뤼게는 Doberschisch|도베르시슈de에서 요양했다.
4. 1. 점령지에서의 잔혹 행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달뤼게의 질서경찰은 점령 지역에서 파르티잔 진압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41년 7월 25일과 31일에는 질서경찰 총감으로서 Schutzmannschaft|슈츠만샤프트de (Schutzmannschaft, 약칭 슈마) 설립 명령을 내렸다. 슈마는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에 협력하는 자들을 무장부대로 조직한 것이지만, 설립 직후 보안경찰의 관할로 들어갔다.[39]1941년 7월 24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근처에서 Polizei-Bataillon 307|제307경찰대대de에 의한 4435명의 유대인 총살을 직접 시찰했다. 또한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민스크를 방문하여 에리히 폰 뎀 바흐와 함께 Polizei-Bataillon 322|제322경찰대대de에 의한 여성을 포함한 2278명의 유대인 총살을 시찰했다.[40]
1941년 10월 24일, 달뤼게는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리가, 민스크의 유대인에 대한 추방 강제 명령서에 서명했다.[41]
1942년 5월 27일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부총독 하이드리히가 습격당하자, 달뤼게는 조사 감독을 위해 프라하로 가서 부총독 직무를 대행했다. 하이드리히 사망 후, 달뤼게는 후임으로 임명되어[42] 하이드리히 암살의 보복으로 리디체 마을과 레자키 마을의 학살을 자행했다.
4. 2. 리디체 학살
1942년 6월, 쿠르트 달루에게는 카를 헤르만 프랑크 및 다른 SS 요원들과 함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리디체와 레자키 마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 리디체와 레자키 두 마을의 모든 남성들이 살해되었고, 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나치 강제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5. 몰락과 죽음
1945년 5월, 달루게는 뤼베크에서 영국군에 체포되어 룩셈부르크를 거쳐 뉘른베르크에 수감되었으며, "주요 전범"으로 기소되었다.[8] 1946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된 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에서 저지른 반인륜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8]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10월 23일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0월 24일 프라하 판크라츠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8]
5. 1. 질병과 몰락
1943년 5월, 달루게는 심각한 심근 경색(심장마비)을 겪었다.[1] 8월에 모든 일상 업무에서 해임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히틀러가 준 서포메라니아의 부동산에서 생활했다.[2]5. 2. 체포, 재판 및 처형
1945년 5월, 달루게는 뤼베크에서 영국군에 체포되어[45] 룩셈부르크를 거쳐 뉘른베르크에 수감되었으며, "주요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1946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된 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에서 저지른 수많은 반인륜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 내내 달루게는 회개하지 않고 "300만 명의 경찰"에게 사랑받았으며, 단지 히틀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양심에 떳떳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10월 23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6년 10월 24일 프라하 판크라츠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8], 사형 집행 직전에 깨진 유리잔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46]6. 가족
달루에게는 1926년 10월 16일에 카테 슈바르츠(Käthe Schwarz, 1901년 11월 23일 출생)와 결혼했다. 카테 슈바르츠는 훗날 나치당원(당원 번호 118,363)이 되었다.[1] 1937년, 달루게 부부는 아들 한 명을 입양했다. 이후 달루게의 아내는 1938년과 1940년에 두 아들을, 1942년에 딸 한 명을 낳았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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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0-01 # 추정 날짜
[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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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0-01 # 추정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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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assination — Operation Arthropoid, 1941–1942
http://www.army.c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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