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하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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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 하우서는 프로이센 군인 가문에서 태어나 독일 제국 육군과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서 복무한 독일의 군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장교로 복무했으며, 전후에도 군에 남아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우익 단체인 철모단에 가입했다가 나치 정권 성립 후 친위대에 들어가 친위대 특무부대(SS-VT)의 군사 및 사상 훈련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SS-VT 사단, SS 기갑군단을 지휘하며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서 활약했고, 7군 사령관을 거쳐 G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전후에는 미군 포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가, 무장친위대의 명예 회복을 위해 활동했으며, 무장친위대의 전쟁 범죄 연루를 부인하는 등 역사 왜곡 및 수정주의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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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하우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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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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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파울 팔크 |
별명 | 파파 (Papa) |
출생일 | 1880년 10월 7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브란덴부르크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벨 |
사망일 | 1972년 12월 21일 |
사망지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루트비히스부르크 |
안장 장소 | 뮌헨 발트프리드호프 |
소속 | |
국가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군종 | 독일 제국 육군 프로이센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무장친위대 |
군 경력 | |
복무 기간 | 1892년–1932년 1934년–1945년 |
최종 계급 |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겸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
군번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4,138,779 친위대: #239,795 |
지휘 |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2SS기갑군단 제7군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발칸 전역 유고슬라비아 침공 동부 전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노르망디 전투 팔레즈 포위전 |
주요 훈장 |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엘리자베트 게라르트 (1912년 결혼, 1972년 사망) |
자녀 | 1명 |
전후 활동 | |
주요 활동 | HIAG (무장친위대 로비 단체) 창립 |
2. 어린 시절 및 군 경력
파울 하우서는 1880년 10월 7일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의 프로이센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쿠르트 하우서(Kurt Hausserdeu)는 독일 제국 육군 소령 출신이었다.[3] 하우서는 군인의 길을 따라 1899년 소위로 임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장군참모로 복무했다.[2][5] 1912년 엘리자베트 게르하르트(Elisabeth Gerhard)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고, 이 결혼 생활은 1972년 하우서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방위군에 남아 복무하며 여러 지휘관 및 참모직을 거쳤고, 1932년 중장 계급으로 예편했다.[3][4][10] 예편 후에는 우익 성향의 퇴역 군인 단체인 철모단에 가입하여 브란덴부르크-베를린 지부장이 되었다.[3][11] 나치 독일 정권 수립 이후 철모단이 돌격대(SA)에 흡수되었다가 장검의 밤 사건으로 SA가 숙청된 뒤, 하우서는 친위대(SS)로 소속을 옮겼다. 1934년 11월 친위대 특무부대(SS-VT)에 배치되어 친위대 지도자학교 브라운슈바이크의 책임자가 되었으며,[7] 1936년에는 SS-VT 총감으로 임명되어 군사 및 사상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력 동원 권한은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있었고, 이는 SS-VT를 군대도 경찰도 아닌 조직으로 유지하려는 히틀러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2. 1. 프로이센군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파울 하우서는 1880년 10월 7일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서 프로이센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1][2][3] 그의 아버지 쿠르트 하우서(Kurt Hausser)는 독일 제국 육군의 소령이었으며,[3] 어머니는 안나 오토(Anna Otto)였다.[3]하우서는 아버지를 따라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1892년 포메라니아 케슬린의 육군 유년 학교에 입학했다.[3] 1896년에는 베를린 리히터펠데의 프로이센 육군사관학교로 옮겨갔고, 1899년 베를린 리히터펠데의 사관후보학교를 졸업했다.[3][4]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여 제155(제7서프로이센)보병연대에 배치되어 1907년까지 복무했다.[5][2][3][4]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베를린의 프로이센 전쟁대학에서 수학했으며,[3][4] 1909년부터 1912년 사이에는 해군에서 공중 관측병으로 근무하기도 했다.[3][5] 1912년 프로이센 참모본부에 배속되었고,[3][4][5] 같은 해 엘리자베트 게르하르트(Elisabeth Gerhard)와 결혼하여 1913년 12월 딸을 얻었다. 1913년 10월 대위로 진급했다.[4][3]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장군참모로서 제6군단에 배속되어 제109보병사단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주로 1916년-1918년).[2] 동부 전선, 서부 전선, 루마니아, 발트 3국 등지에서 참전했다.[6][5] 전쟁 말기인 1918년 3월 22일 소령으로 진급했다.[3]
2. 2. 바이마르 공화국군 복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대인 국가방위군(Reichswehr|라이히스베어de)에 잔류하였다. 그는 군 복무를 이어가며 1922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4] 1927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4][3] 국가방위군 복무 시절 제4보병연대 3대대장, 슈테틴에 주둔한 제2군관구(Wehrkreis IIde) 참모장, 제10보병연대장, 제4보병사단 부사단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931년 2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으며,[4][3] 1932년 1월 31일 중장 명예 계급을 받고 예편했다.[3]3. 나치 친위대 경력
1934년 친위대(SS)로 이적한 파울 하우서는(대원 번호 239,795)[12][3][7], 친위대 특무부대(SS-VT)의 창설과 훈련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무장친위대의 군사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친위대 사관학교(SS-Junkerschule) 책임자[7] 및 SS-VT 총감 등을 역임하며 부대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했다. 그의 활동은 군사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1941년에는 하인리히 힘러 등과 함께 마우트하우젠-구젠 강제 수용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우서는 친위대 내에서 빠르게 승진했으며, 주요 계급 진급 내역은 다음과 같다.
날짜 | 계급 |
---|---|
1934년 3월 | 돌격대 대령(SA-Standartenführer)[3] |
1934년 11월 15일 | 친위대 대령(SS-Standartenführer)[3] |
1935년 7월 1일 | 친위대 상급대령(SS-Oberführer)[3] |
1936년 5월 22일 | 친위대 소장(SS-Brigadeführer)[3] |
1939년 6월 1일 | 친위대 중장(SS-Gruppenführer)[3] |
1939년 11월 19일 | 무장친위대 중장(Generalleutnant der Waffen-SSde)[3] |
1941년 10월 1일 | 친위대 대장 및 무장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ührer und General der Waffen-SSde)[3][29] |
1944년 8월 1일 | 친위대 상급대장 및 무장친위대 상급대장(SS-Oberst-Gruppenführer und Generaloberst der Waffen-SSde)[3][29]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하우서는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혼성 베르마흐트/SS 기갑사단 켐프의 옵저버로 복무했다. 같은 해 10월, SS-VT는 하우서가 지휘하는 기동 보병 사단인 SS-"비치결"-사단으로 개편되었고(이후 제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그는 이 사단을 이끌고 1940년 프랑스 공방전과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참전했다.
3. 1. 친위대 입대 및 무장친위대 창설
1932년 독일 국가방위군에서 중장으로 예편한 하우서는 우익 성향의 예비역 단체인 철모단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933년에는 철모단 브란덴부르크-베를린 지부장이 되었다.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철모단은 돌격대(SA)에 흡수되었고, 하우서는 1934년 3월 돌격대 대령 계급을 부여받고 브란덴부르크 돌격대 예비 부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3][4][7]그러나 같은 해 6월 30일, 돌격대 지도부가 숙청된 장검의 밤 사건 이후, 하우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우였던 파울 샤르페(Paul Scharfe)의 소개로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를 만났다. 힘러는 친위대(SS) 내에 독자적인 무장 부대를 만들고자 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우서는 1934년 11월 15일 친위대로 이적하여 친위대 대령 계급을 받았다(대원 번호 239,795).[12][3][7]
1934년 12월 14일,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와 친위대 정치 예비대(SS-Politische Bereitschaft)가 통합되어 무장친위대의 전신인 친위대 특무부대(SS-Verfügungstruppe, SS-VT)가 창설되었다.[13] 하우서는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11]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정치 예비대를 펠릭스 슈타이너가 지휘하는 '도이칠란트' 연대와 카를 마리아 데멜후버(Karl Maria Demelhuber)가 지휘하는 '게르마니아' 연대로 통합했다.[14] 그는 또한 브라운슈바이크에 친위대 사관학교(SS-Junkerschule)를 설립하는 데 관여하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7] 이후 1935년 8월부터 1937년 5월까지는 두 곳의 친위대 사관학교 총감을 역임했다.[15]
1936년 5월 22일 소장으로 진급한[3] 하우서는 같은 해 6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친위대 본부 제1부 작전 지도부(Führungsamt) 부장을 지냈다.[16][3] 1936년 10월 1일에는 친위대 본부 산하에 친위대 특무부대 총감직이 신설되자 초대 총감으로 취임했다.[17][18] 이 직책에서 하우서는 SS-VT의 군사 훈련 및 사상 교육을 담당했지만, 부대 동원 및 지휘 권한은 하인리히 힘러에게 있었다. 이는 SS-VT를 정규군이나 경찰과는 다른, 아돌프 히틀러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두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하우서는 SS-VT를 "힘러의 정치적 병사들"에서 실전에 투입 가능한 정예 부대로 훈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0] 하지만 SS-VT 총감임에도 불구하고 부대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을 확보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SS-VT의 전신인 정치 예비대가 일반친위대의 친위대 지구 소속이었기 때문에 각 지구 사령관들과 지휘권을 두고 갈등이 있었고,[21]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 역시 하우서의 지휘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지휘권을 주장했다.[21][22]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우서가 훈련시킨 SS-VT 부대원들과 라이프슈탄다르테 대원들 간의 숙련도 차이가 벌어지자, 디트리히도 결국 하우서에게 부대 훈련을 맡기게 되었다.[23][24] 하우서는 1937년 5월 1일 나치당에 입당했으며(당원 번호 4,138,779),[3][19] 1939년 6월 1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3]
3. 2. 무장친위대 발전 기여
1933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철모단은 돌격대(SA)에 흡수되었고, 하우서는 1934년 3월 돌격대 대령 계급과 함께 브란덴부르크 돌격대 예비 부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3][4][7]。그러나 같은 해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으로 돌격대가 숙청된 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우였던 파울 샤르페(Paul Scharfe)의 소개로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를 만났다. 힘러는 친위대 내 무장 부대 육성에 관심이 있었고, 하우서는 1934년 11월 15일 친위대(SS)로 이적했다(대원 번호 239,795).[12][3][7]같은 해 12월 14일,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와 친위대 정치 예비대(SS-Politische Bereitschaft)가 통합되어 무장친위대의 전신인 친위대 특무부대(SS-Verfügungstruppe, SS-VT)가 편성되었다[13]。하우서는 이 편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11], 각지의 정치 예비대를 펠릭스 슈타이너 친위대 대령이 지휘하는 연대 「도이칠란트」와 카를 마리아 데멜후버(Karl Maria Demelhuber) 친위대 대령이 지휘하는 연대 「게르마니아」로 통합했다[14]。
하우서는 브라운슈바이크에 친위대 사관학교(SS-Junkerschule)를 창설하는 데 관여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했으며[7], 1935년 8월부터 1937년 5월까지는 두 곳의 친위대 사관학교 총감을 맡았다[15]。1936년 10월 1일에는 친위대 본부 산하에 신설된 친위대 특무부대 총감(Inspekteur der SS-Verfügungstruppe)직에 임명되어[17][18] SS-VT의 군사 및 사상 훈련을 담당했다. 그러나 부대 배치 결정권 등 실질적인 지휘 권한은 하인리히 힘러에게 있었으며, 이는 SS-VT를 "군대도 경찰도 아닌", 아돌프 히틀러의 전적인 지휘 하에 두려는 히틀러의 의도(1938년 8월 17일 명령)와 일치했다. 1937년 5월 1일에는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4,138,779)[3][19]。
이러한 지위를 바탕으로 하우서는 SS-VT의 교육을 책임지며, '힘러의 정치적 병사들'을 실전에 투입 가능한 수준의 군사 조직으로 훈련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의 노력은 훗날 무장친위대가 정예 부대로 평가받는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20]。하지만 SS-VT 총감임에도 불구하고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SS-VT의 전신인 정치 예비대가 일반친위대의 친위대 지구 소속이었던 배경 때문에, 각 지구 사령관들과 지휘권 다툼이 발생했다[21]。또한,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 역시 독자적인 지휘권을 주장하며 하우서의 지휘를 거부했다[21][22]。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우서가 훈련시킨 SS-VT 대원들과 라이프슈탄다르테 대원들 간의 숙련도 차이가 명백해지자, 디트리히도 결국 하우서에게 훈련을 위임하게 되었다[23][24]。
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하우서는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국방군과 친위대 특무부대(SS-VT)가 혼성 편성된 기갑사단 켐프에서 참관인 역할을 수행했다. 폴란드 전역 이후 SS-VT는 무장친위대로 개편되었고, 하우서는 새로 창설된 친위대 재량사단(이후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개명)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25][3]
하우서는 이 사단을 이끌고 1940년 프랑스 공방전과 1941년 독소전쟁 초기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했다. 특히 모스크바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오른쪽 눈을 잃었다.
회복 후 1942년 새로 창설된 SS기갑군단(1943년 6월 제2SS기갑군단으로 재명명)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초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예하 부대를 후퇴시켜 포위 섬멸을 피하게 했으며, 이후 반격 작전을 통해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이어서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제2SS기갑군단을 지휘했다.
1944년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노르망디 전역에 참전했다. 전투 중 제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이 사망하자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팔레즈 포위전 당시 제7군의 철수를 지휘하다 턱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 공로로 친위대 최상급집단지도자(SS-Oberst-Gruppenführer)로 진급했다. 이후 상라인 강 집단군과 G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나, 1945년 4월 3일 G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당시 요제프 괴벨스는 하우서가 "시험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종전 시에는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참모로 있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무장친위대가 순수하게 군사적인 역할만 수행했을 뿐 전쟁 범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4. 1. 폴란드 침공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자, 하우서는 국방군과 친위대 특무부대(SS-VT)가 혼성된 기갑사단 켐프에서 참관인(옵저버) 역할을 맡았다. 이 사단은 베르너 켐프 소장이 지휘했으며, 주력 기갑 부대는 육군 연대였고 보병 부대는 SS-VT의 '도이칠란트' 연대로 구성되었다. 하우서는 폴란드 전역 기간 동안 이 사단에서 육군 부대와 SS-VT 부대 간의 연락 역할을 담당했다.[25]폴란드 전역 이후, SS-VT는 무장친위대로 명칭을 변경했고[26], 라이프슈탄다르테를 제외한 SS-VT 3개 연대를 모아 친위대 재량사단(SS-Verfügungsdivision, SS-VT 사단)이라는 이름의 차량화보병 사단이 새롭게 편성되었다. 하우서는 이 사단의 초대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25][3] 이 사단은 이후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이름이 바뀌었다.
4. 2. 서부 전선 및 독소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자, 하우서는 친위대 특무부대(SS-VT)와 국방군 부대가 혼성 편성된 기갑사단 켐프에서 연락 장교 역할을 맡아 참관했다.[25] 1939년 10월, SS-VT는 차량화보병사단인 친위대 재량사단으로 정식 편성되었고 하우서가 초대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25][3] 이 사단은 이후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이름이 바뀌었다.하우서는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 B 집단군 소속으로 네덜란드 침공과 프랑스 전선에서 이 사단을 지휘했다. 프랑스 점령 후 사단은 'SS 사단 라이히'로 재편되었고, 발칸 전선에도 참전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하우서는 하인츠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제2기갑집단의 일원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여했다. 특히 모스크바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활약하여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SS-Obergruppenführer)로 진급하고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으나,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오른쪽 눈을 잃었다. 이로 인해 사단장 자리를 빌헬름 비트리히에게 넘기고 약 1년간 요양했다.
1942년 회복 후, 하우서는 새로 창설된 SS기갑군단(1943년 6월 제2SS기갑군단으로 재명명)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군단은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등 정예 SS 사단들을 휘하에 두었다. 1943년 초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이 항복하면서 하우서의 군단도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현 위치 사수 명령을 내렸으나, 하우서는 1943년 2월 15일 전멸을 피하기 위해 명령을 거부하고 독단적으로 하르코프에서 군단을 철수시켰다. 이 결정은 히틀러의 분노를 샀지만, 결과적으로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후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지휘 아래 반격 작전에 참여하여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하우서는 제2SS기갑군단을 이끌고 참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동부 전선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3년 7월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은 재편되어 제9 및 제10 SS 기갑사단을 배속받았고, 잠시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이동하여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대응하는 임무를 맡았다. 노르망디 전투 중 제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이 사망하자, 국방군을 신뢰하지 않던 히틀러의 의향에 따라 하우서는 제7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하우서는 제7군을 이끌고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쳤으나, 히틀러의 비현실적인 명령으로 발동된 뤼티히 작전의 실패로 많은 병력이 팔레즈 포위망에 갇힐 위기에 처했다. 하우서는 최전선에서 지휘하며 제7군의 상당 병력을 포위망에서 성공적으로 철수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턱에 총상을 입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이 공적으로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하고 1944년 8월 친위대 최상급집단지도자(SS-Oberst-Gruppenführer) 및 무장친위대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상라인 강 집단군 사령관을 거쳐 1945년 1월 G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전황 악화 속에서 1945년 4월 3일 해임되었다. 당시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그(하우서)는 명백히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였다"고 기록했다. 하우서는 종전 시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참모진에 배속되어 전쟁을 마쳤다.
4. 3. 주요 지휘관 경력
폴란드 침공 당시 혼성 베르마흐트/SS 기갑사단 켐프에서 육군 부대와 특무 부대의 연락 역할을 맡았다.[25] 1939년 10월, 친위대 특무부대(SS-VT)는 무장친위대로 명칭을 변경했고[26], 친위대 재량사단(SS-Verfügungsdivision)이라는 이름의 차량화보병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하우서가 그 사단장이 되었다.[25][3] 이 사단은 이후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재편성되었다.하우서는 이 사단을 이끌고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 참전하여 B 집단군 소속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한 뒤 프랑스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후 발칸 전선에도 참가하여 베오그라드 함락에 참여했다. 1941년에는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제2기갑집단 소속으로 독소전쟁 초기 단계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선봉으로 활동하며 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ührer)으로 진급하고 1941년 8월 8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으나,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어 오른쪽 눈을 잃었다. 이로 인해 사단장 자리를 빌헬름 비트리히에게 넘기고 약 1년간 전선에서 물러나 회복기를 가졌다.
회복 후 1942년, 새로 창설된 SS기갑군단(1943년 6월 제2SS기갑군단으로 재명명)의 군단장으로 부임했다. 이 군단은 초기에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등 SS 사단들로 구성되었다.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군이 항복하면서 하우서의 군단도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하르코프 사수 명령을 내렸으나, 1943년 2월 15일 하우서는 전멸을 피하기 위해 이 명령을 무시하고 군단을 후퇴시켰다. 히틀러는 격노했지만, 하우서는 후퇴 과정에서 소련군을 격파하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지휘 아래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로 1943년 7월 28일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서 제1, 제2, 제3SS사단들을 지휘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제2SS기갑군단은 재편되어 기존의 제1, 2, 3 SS 기갑사단 대신 제9SS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과 제10SS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가 배치되었다. 재편된 군단은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이동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벌어진 노르망디 전역 초기 단계에 투입되었다.
노르망디 전역 중 제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이 사망하자, 하우서는 제7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그는 제7군을 이끌고 연합군에 맞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히틀러의 명령으로 발동된 뤼티히 작전이 실패하면서 팔레즈 포위망에 갇힐 위기에 처했다. 하우서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제7군의 상당 병력을 성공적으로 철수시켰으나, 마지막까지 전선에서 지휘하다 턱에 총상을 입는 심각한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다. 이 공적으로 1944년 8월 26일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하고, 친위대 최상급집단지도자(SS-Oberst-Gruppenführer)로 진급했다.
이후 상라인 강 집단군 사령관을 거쳐 1945년 1월 G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945년 4월 3일 프리드리히 슐츠와 교체되며 해임되었다. 당시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그는 명백히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였다"고 기록했다. 지휘권을 잃은 하우서는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참모진으로 배속되어 종전을 맞았다.
5. 전후 활동
1948년까지 미군 포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변호 측 증인으로 출두하여 무장친위대는 다른 친위대 조직과 달리 순수한 군사 조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구 무장 친위대원 상호 부조 협회(HIAG)의 활동에 참여하며 무장친위대의 명예 회복과 전후 법적 지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1966년에는 회고록 『Soldaten wie andere auch. Der Weg der Waffen-SS|다른 병사들과 똑같은 군인들. 무장친위대의 길de』을 저술하기도 했다. 동서 냉전 시기 서독의 정치적 상황 변화 속에서 하우서를 비롯한 HIAG의 노력은 무장친위대원들에게 부과되었던 여러 법적 제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72년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5. 1. 미 육군 역사부 참여
전쟁 이후 프란츠 할더의 지도 아래 미국 육군 역사부는 독일 측 입장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작전 연구를 진행했다. 하우서 역시 이 작업에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포로 신분이었으나 이후 정직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 후반, 하우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돌파에 대한 제7군의 대응을 다룬 작전 연구 논문을 작성했다. 이 연구는 루돌프 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 하인리히 프라이헤어 폰 뤼트비츠, 빌헬름 파름바허, 하인리히 에버바흐 등과 공동으로 진행되었으며, 2004년 ''돌파구를 위한 전투: 코브라 작전에서 팔레즈 갭까지의 노르망디 독일군''(Fighting the Breakout: The German Army in Normandy from COBRA to the Falaise Gap영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5. 2. 무장친위대 이익단체의 수장
1950년 이후 하우서는 전직 무장친위대 대원들의 이익단체인 전직 무장친위대원 상호부조협회(HIAG)에 참여했다. HIAG는 1950년 말 여러 지역 조직의 느슨한 연합체로 시작했으나, 1951년 10월에는 서독 전역에 376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성장했다. 1951년 12월, 하우서는 HIAG의 초대 대변인이 되었다.HIAG는 1951년 말 자체 정기간행물 제1호를 발행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지만, 동시에 네오나치 집단이라는 의혹을 받으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하우서는 독일 연방의회에 공개 서한을 보내 HIAG는 전직 무장친위대원을 위한 단체일 뿐이며 어떠한 형태의 극단주의도 배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HIAG 회원들이 "올바른 시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데이비드 C. 라지(David C. Large)는 1980년대 연구를 통해 HIAG가 로비 활동의 일환으로 역사적 기록을 왜곡하거나 무시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HIAG는 편향된 정기간행물, 서적 출판, 대중 연설 등 다양한 선전(프로파간다) 활동을 통해 역사 왜곡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무닌 출판(Munin Verlagde)이라는 출판사까지 설립하여, 전직 친위대원들의 입장에서 본 전쟁 경험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우서는 무장친위대가 국방군과 완전히 같은 군인들이었으며, 여러 국적의 병사들로 구성되었기에 나토군의 선구자라고 주장하는 등 무장친위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1966년에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회고록 Soldaten wie andere auch. Der Weg der Waffen-SS|다른 병사들과 똑같은 군인들. 무장친위대의 길de을 저술했다.
동서 냉전 시기 서독의 정치적 분위기 변화 속에서 하우서를 비롯한 HIAG의 노력으로, 전후 무장친위대원들에게 부과되었던 여러 법적 제한 문제들은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
5. 3. 역사 왜곡 및 수정주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 육군 역사부(Historical Division)에서 잠시 일했던 하우서는 1950년부터 전직 무장친위대 대원들의 로비 단체인 HIAG 창설에 참여하고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HIAG는 1951년 12월 하우서를 초대 대변인으로 선출했으며, 무장친위대의 법적, 역사적 복권을 목표로 삼았다.HIAG는 로비 활동의 일환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무시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를 위해 자체 정기간행물 발간, 서적 출판(무닌 출판사 설립), 대중 연설 등 다양한 프로파간다 수단을 동원했다. 하우서는 이러한 역사 왜곡 및 수정주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직접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여 무장친위대를 옹호하고 미화하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1953년에 출간된 《작전 중의 무장친위대》(Waffen-SS im Einsatz|바펜-SS 임 아인자츠de)와 1966년에 HIAG 자체 출판사인 무닌 출판사를 통해 발행된 《다른 이들과 같은 병사들》(Soldaten wie andere auch|졸다텐 비 안더레 아우흐de)이 있다. 이 책들에서 하우서는 무장친위대가 나치즘과는 무관한 순수한 군사 조직이었으며, 다국적 병력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이자 '유럽 통합 사상의 선구자'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장친위대의 전쟁범죄 연루를 부인하고 그 책임을 다른 친위대 조직에게 떠넘기려 시도했다.
하우서와 HIAG의 이러한 주장은 무장친위대의 전쟁범죄와 나치즘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명백한 역사 왜곡 시도로, 많은 역사학자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하우서의 첫 저서 《작전 중의 무장친위대》는 폭력 미화와 배외주의 조장 우려로 서독 연방청소년유해매체부에 의해 유해서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5. 3. 1. 무장친위대 무오설 주장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하우서는 변호 측 증인으로 출두하여, 무장친위대는 다른 친위대 조직과 달리 순수한 군사 조직이라고 주장했다.1950년대 중반, 하우서가 활동하던 HIAG는 무장친위대(Waffen-SS)를 일반친위대(Allgemeine-SS, 공안 및 경찰조직), 친위대 해골부대(SS-Totenkopfverbände, 강제수용소 위병), 특수작전집단(Einsatzgruppen, 기동학살부대) 등 다른 친위대 조직과 분리시키고, 이들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를 통해 무장친위대가 국방군 무오설처럼 결백하다는 인식을 심으려 했다.
하우서는 무장친위대와 나치의 잔학행위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57년에는 HIAG의 공식 출판물인 Der Freiweligge|데어 프라이빌리게de 지면을 통해 서독 국방부에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해골부대가 "강제수용소 외부 위병으로 복무했을 뿐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는 위병들이 외부 노역에 동원되는 수용자들을 감독했고, 강제수용소 지휘관 다수가 무장친위대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옹호는, 친위대 조직 간 인력 이동과 임무 변경(전투 및 후방 '안정화 작전' 수행)을 통해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학살 시스템에 연루된 사실을 외면한 것이었다.
하우서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직접 책을 저술했다. 1953년 출간된 《작전 중의 무장친위대》(Waffen-SS im Einsatz|바펜-SS 임 아인자츠de)는 무장친위대가 "위대한 유럽적 사고의 군사적 표상"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운 다국적 부대였다고 미화했다. 이 책은 전 국방군 상급대장 하인츠 구데리안이 서문을 써주었으나, 그 내용 때문에 서독 연방청소년유해매체부에 의해 유해서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1966년에는 HIAG 자체 출판사를 통해 《다른 이들과 같은 병사들》(Soldaten wie andere auch|졸다텐 비 안더레 아우흐de)을 출간했는데, 군사사학자 사이먼 맥켄지(Simon MacKenzie)는 이 책이 HIAG 지도부가 무장친위대가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하우서와 HIAG의 주장을 역사 왜곡으로 간주하며 강하게 비판한다. 프랑스의 장폴 피카르(Jean-Paul Picaper|장폴 피카페르프랑스어)는 이를 "자기 찬양(self-panegyriceng)"이라고 규정했고, 미국의 David C. Large|데이비드 C. 라지eng는 "무장친위대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터무니없는 환상"이라고 평가했다. 사이먼 맥켄지는 HIAG 관련 서적들을 "자기 합리화의 합창"이라고 불렀으며, George Stein|조지 스타인eng은 "변증론(apologetics)"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특히 James M. Diehl|제임스 M. 딜eng은 무장친위대가 국방군의 네 번째 군대였다는 주장은 명백한 "허위"이며, NATO의 선구자였다는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우서가 HIAG 내에서 마지막으로 관여한 프로젝트는 1973년에 출판된 500페이지 분량의 SS 사진집 《Wenn alle Brüder schweigen|벤 알레 브뤼더 슈바이겐de》(우리 형제들이 모두 침묵할 때)이었다. 이 책에는 유죄 판결을 받은 나치 전범 요아힘 파이퍼를 비롯한 다른 무장친위대 주요 인물들도 기고자로 참여하여 논란을 빚었다.
6. 사망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파울 하우서의 사망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하거나 수정할 수 없습니다.
7. 서훈 내역
- 1914년형 철십자장 2급 및 1급
- 바이에른 군사 공로 훈장 4급 (검 포함)
- 작센 알베르트 훈장 1급 기사십자 (검 포함)
- 뷔르템베르크 프리드리히 훈장 1급 기사십자 (검 포함)
- 안할트 프리드리히 십자장
-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기사십자 (검 포함)
- 오스트리아 철관 훈장 3급 (전쟁 장식 포함, 1918년 7월 11일 수훈)
- 은색 부상 훈장 (1942년 5월 9일 수훈)
- 철십자 훈장 (1939년형) 2급 및 1급 부장
-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 * 기사십자 철십자장 (1941년 8월 8일): 당시 SS-집단지도자 겸 무장친위대 중장,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사단장
- *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1943년 7월 28일): 당시 SS-상급집단지도자 겸 무장친위대 기갑상급대장, 제2SS기갑군단 군단장 (261번째 수훈자)
- *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1944년 8월 26일): 당시 SS-최상급집단지도자 겸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제7군 사령관 (90번째 수훈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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