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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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미아 전쟁은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추방령에 대한 반발과 마케도니아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황에서, 아테네는 하르팔로스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테살리아와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아테네를 지원하며 전쟁에 참여했으나, 마케도니아의 반격으로 인해 해전과 육전에서 패배했다. 결국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에 굴복하여 피레우스에 마케도니아 주둔군을 배치하고, 전쟁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처형되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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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미아 - 라미아 (도시)
라미아는 그리스 중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 도시로, 기원전 5천년 경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스파르타 군사 기지, 제투니온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프랑크와 오스만 제국 지배를 거쳐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중앙 그리스 주요 도시로 발전했다. - 라미아 전쟁 - 레오스테네스
레오스테네스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 장군으로, 마케도니아에 저항하며 라미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으나 라미아 공성전 중 전사하여 아테네 시민들이 그의 공헌을 기려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조각상을 세웠다. - 라미아 전쟁 - 안티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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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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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라미아 전쟁 |
관련 문서 | 라미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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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기원전 323년 – 기원전 322년 |
장소 | 그리스 |
결과 | 마케도니아의 승리 |
원인 | 그리스 반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아테네 아이톨리아 동맹 그리스 중부 대부분의 국가 |
교전국 2 | 마케도니아 보이오티아 에우보이아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레오스테네스 안티필로스 메논 에우에티온 (해군 제독) 포키온 |
교전국 2 지휘관 | 안티파트로스 (섭정) 레온나토스 크라테루스 클레이토스 (해군 제독)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알 수 없음 |
교전국 2 병력 | 알 수 없음 |
전투 목록 | |
육상전 | 플라타이아이 테르모필레 라미아 멜리타이아이 크란논 |
해상전 | 에키나데스 아모르고스 |
2. 배경
기원전 32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모든 그리스 도시들에 추방된 인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추방령을 선포했다.[13] 이 조치는 아테네와 아이톨리아 동맹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특히 아이톨리아는 오이니아데스를, 아테네는 사모스 섬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 이들은 추방령에 따라 점령지를 포기해야 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마케도니아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졌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복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와 알렉산드로스의 정신박약 형제인 필리포스 3세를 위해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망 소식은 아테네에게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민회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데마데스, 포키온과 같은 저명한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16][17]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인한 물자 징발은 그리스 내 식량 부족과 마케도니아에 대한 반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3. 반란
아테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무관이었던 하르팔로스에게서 빼앗은 5,000 달란트를 이용하여 레오스테네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 타에나롬으로 보냈다. 레오스테네스는 민회로부터 용병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고용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지시받았는데, 이는 다가올 전쟁에 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20][21][22][23]
3. 1. 참전 세력
아테네는 북부 및 중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네메아 경기에서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기원전 323년 9월 중순에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동맹이 체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5][26] 이 지역의 다른 동맹국들은 순서대로 연합했는데, 테살리아 ( 펠리나 제외), 오이타 ( 헤라클레아 제외), 아카이아 프티오티스 ( 테베 제외), 말리스 ( 라미아 제외), 도리스, 로크리스, 포키스, 아이니스, 알리제이아, 돌로피아, 아타마니아, 이오니아해의 레우카스 섬, 에피루스의 일부 몰로소스 등이었다.[27][28][29] 또한 북쪽에서는 일부 일리리아 및 트라키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27] N. G. L. 해먼드는 오드리시 왕 세우테스 3세도 같은 시기에 마케도니아와 전쟁 중이었다고 언급했지만, 이 반란과 라미아 전쟁을 연결 짓지는 않았다.[30]
펠로폰네소스에서는 아르고스, 시키온, 아크테 반도 ( 에피다우로스 및 트로이젠 포함), 플리우스, 엘리스, 메세니아가 헬레니즘 동맹에 합류했다.[27][31][29] 이 도시들은 북부 도시들보다 늦게 아테네를 따랐는데, 아테네와 포키스의 조약은 10월 27일에, 시키온과의 조약은 12월 23일에 체결되었기 때문이다.[32] 이는 아테네의 외교적 노력이 전쟁 시작 후 몇 달 동안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스파르타는 아기스 3세 전쟁에서의 손실과, 전쟁을 주도한 세력이 아테네였기 때문에 합류를 거부했다. 또한 스파르타는 전통적인 적대 관계에 있던 아르고스와 메세니아를 포함하는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꺼렸다.[33] 클레오나이는 네메아 경기에서 외교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와의 동맹을 거부했다.[34] 아르카디아 국가들은 아기스 전쟁에서의 손실 때문에 중립을 유지했다.[35]
헬레니즘 동맹은 에게해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로도스와 카리스토스 ( 에우보이아 남쪽 끝)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36] 다른 섬 주민들은 마케도니아보다 아테네의 제국주의에 더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37]
에우보이아 동맹과 보이오티아는 마케도니아에 충성을 유지했다. 기원전 335년 테베 파괴 이후, 보이오티아 도시들은 아테네가 테베를 복원할 것을 두려워했다.[39] 아카르나니아는 아이톨리아 동맹에 의해 점령된 오이니아다이 때문에 마케도니아를 지지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카르나니아 도시 알리제이아는 홀로 헬레니즘 동맹 편을 들었다.[40]
마케도니아는 아크로폴리스에 테베와 코린트의 수비대를 가지고 있었다. 아크로코린토스 점령은 코린트의 중립을 보장하고, 펠로폰네소스 국가들이 북부 국가 군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았다.[41]
4. 전투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하자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패권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겨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97] 그리스 연합군은 약 25,000명으로, 아테네인 10,000명, 아이톨리아인 12,000명, 그리고 여러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유럽의 마케도니아군 사령관 안티파트로스는 1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98] 테살리아인들은 아테네의 설득으로 연합군에 합류했고, 안티파트로스는 라미아에 고립되었다.
4. 1. 초기 아테네의 성공 (기원전 323년 가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기원전 323년 6월, 아테네는 이미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전쟁은 그 직후인 아마도 9월 초에 시작되었다.[16][17] 전쟁 초기 그리스 전체 병력은 25,000명 정도였으며, 그 중 10,000명이 아테네인이었고, 12,000명이 아이톨리아인이었으며, 나머지는 다양한 용병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97]레오스테네스는 테나룸에서 7,000명의 아이톨리아인 지휘를 받았고, 이후 아테네 군대(중장보병 5,000명, 용병 2,000명, 기병 500명)와 합류하기 위해 보이오티아로 이동했다. 레오스테네스는 플라타이아이 근처에서 보이오티아인, 에우보이아인, 마케도니아인(카드메아 주둔군)으로 구성된 군대를 격파했다.[44][45] 이 초기 승리로 중앙 그리스의 대부분 다른 국가들이 그에게 합류했다. 약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레오스테네스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테르모필레 협곡을 방어하며 마케도니아의 대응을 기다렸다.[46]
한편, 유럽에서의 마케도니아 군 사령은 안티파트로스가 맡았다.[98] 그는 반란이 테살리아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케도니아 군대(중장보병 13,000명, 기병 600명)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했으며,[47] 110척의 삼단 노선으로 구성된 해군은 보급품을 싣고 해안을 따라 그를 따랐다. 테살리아에서 약 2,000명의 기병을 모집한 후 테르모필레에 주둔한 그리스 군대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테살리아 기병대는 안티파트로스를 배신하고 그의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파괴했다. 안티파테르는 여전히 온전한 팔랑크스를 유지한 채 라미아(테르모필레 북쪽 15km)로 후퇴하여 마케도니아에 충성심을 유지한 이 지역의 유일한 도시로 들어갔다.[29]
4. 2. 해전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백색 클레이토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함대에 패배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에키나데스 제도 근처에서 벌어진 두 번의 해전에서 아테네 제독 에우에티온이 패배했다고 간략하게 언급한다.[58] 에키나데스 제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오니아 해의 아카르나니아 앞바다가 아니라 말리아 만의 에키누스 근처라는 견해와, 기원전 330년경 아이톨리아 동맹에 의해 점령된 오이니아디 바로 앞바다라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에키나데스 제도 근처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여전히 수백 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배의 수에 맞추기 위해 제한된 수의 노잡이를 과도하게 사용했고, 배는 인력이 부족했다. 기원전 322년 늦여름, 아모르고스 해전에서 클레이토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함대는 사모스에 대한 아테네의 지배에 도전했고, 인력 부족과 수적 열세로 아테네 해군은 참패했다.[67]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에 의해 통제된 좁은 해협을 통해 흑해에서 곡물 공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헬레스폰트(다르다넬스 해협) 근처에서 또 다른 아테네의 패배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68]
알 수 없는 날짜에, 포키온이 지휘하는 아테네 군대는 아티카의 람누스 마을에서 미키온이 이끄는 마케도니아의 기습을 격퇴했다.[69]
4. 3. 마케도니아의 반격
안티파테르는 기원전 323년부터 322년 겨울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라미아에 포위되었지만, 마케도니아군은 출격하여 레오스테네스가 사망하기도 하였다.[71] 안티파테르는 트라키아의 마케도니아 지휘관인 리시마코스의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오드리시아 왕국의 왕 세우테스의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또한 프리기아에 있던 레오나투스와 킬리키아에 있던 크라테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안티파테르는 크라테루스에게 자신의 딸 둘을 약속했는데, 레오나투스에게는 에우리디케, 크라테루스에게는 필라였다.[72] 레오나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누이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려 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의 지원을 받아 그에게 결혼을 제안했는데, 올림피아스는 안티파테르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강력하고 상징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레오나투스는 마케도니아 왕위를 탐냈다.[73][74]레오나투스는 보병 20,000명과 기병 1,500명을 거느린 군대를 가지고 기원전 322년 초 봄에 테살리아에 도착했지만, 안티파테르와 협력하지 않았다. 그리스군의 새로운 지휘관인 안티필루스는 레오나투스와 싸우기 위해 라미아 포위를 풀었다. 이어진 전투는 각 기병대 사이에서만 벌어졌는데, 파르살루스의 메논이 지휘하는 테살리아 기병대가 우위를 점하며 레오나투스를 죽였지만,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은 고지대로 후퇴할 수 있었다.[75]
그리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안티파테르는 그리스 군대가 레오나투스와 싸우러 간 사이에 라미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레오나투스의 죽음은 안티파테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76] 안티파테르는 자신의 군대와 레오나투스의 군대, 그리고 킬리키아에서 막 도착한 크라테루스의 군대를 합쳤다. 안티파테르는 보병 40,000명, 궁수와 투석병 3,000명, 기병 5,000명으로 구성된 매우 큰 군대를 지휘했는데, 이는 안티필루스의 중장보병 25,000명과 기병 3,500명보다 훨씬 컸다.[77][78][79] 최종 전투는 기원전 322년 8월 6일 크라논에서 벌어졌다.[80][81] 테살리아 기병대가 기병전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그리스 보병은 밀려나 교전에서 이탈했다. 사상자는 그리스군 500명(아테네인 200명 포함)과 마케도니아군 130명으로 제한적이었지만, 그 결과는 아테네와 그 동맹국들이 평화를 구걸하게 할 정도로 결정적이었다.[82][83]
그리스의 안티필루스와 메논 장군은 처음에는 모든 동맹을 위해 협상하려 했지만, 안티파테르는 각 도시와 개별적으로 거래하고 싶어했다.[85] 그는 테살리아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했고, 이로 인해 아테네와 아이톨리아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국가들이 개별적으로 항복하게 되었다.[86][87]
5. 결과
안티파테르는 각 도시와 개별적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아테네와 아이톨리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항복했다.
5. 1. 아테네에 대한 처벌
안티파테르는 무니키아 요새에 마케도니아 주둔군을 배치했다. (기원전 322년 9월 18일)[90][81][91] 데모스테네스, 히페레이데스 등 전쟁 주동자들은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히페레이데스는 기원전 322년 10월 6일 클레오나이에서 살해되었고, 데모스테네스는 일주일 뒤 자살했다.[81]
아테네의 민주정은 폐지되고, 재산에 따라 참정권이 제한되는 과두정으로 전환되었다. 시민 수는 21,000명에서 9,000명으로 감소했다.[91] 아테네는 오로푸스와 오로푸스의 아피아레이온 신전을 상실했다.[92]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유지를 지지하며 아테네가 사모스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사모스의 클레루키들은 아테네로 돌아가야 했다.[93]
5. 2. 역사적 평가
고대 작가들은 종종 라미아 전쟁을 시작한 그리스인들을 심하게 비난했다. 3세기경 역사가 덱시푸스는 아테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훨씬 강력한 알렉산더 제국을 공격한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크라논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도 아테네인들의 오만을 비판했다.[95]19세기경 급진적 정치인이자 역사가인 조지 그로트는 라미아 전쟁의 결과를 "자율적인 헬레니즘 세계"의 소멸을 의미하는 재앙적인 비극으로 여겼다.[96]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전쟁은 그리스의 자유로운 발언을 없앴고 아테네의 데모스를 먼 땅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재앙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공정한 기회를 약속하는 상황에서 수행된 그리스 자유 회복을 위한 영광스러운 노력"이었다.
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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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페레이데스, 『장례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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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enelope.u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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