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놈 끼띠카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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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놈 끼띠카쫀은 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11년 딱 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1957년 사릿 타나라트 원수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사릿의 사망 후 총리직을 승계하여 친미, 반공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1971년과 1972년에 두 차례 쿠데타를 통해 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1973년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1976년 승려의 신분으로 귀국했으나, 그의 귀환은 다시 시위를 촉발시켰고, 탐마삿 대학교 학살 사건으로 이어졌다. 타놈은 2004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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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놈 끼띠카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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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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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타놈 |
출생일 | 1911년 8월 11일 |
출생지 | 딱 주 므앙딱 군, 나콘사완, 시암 (현재의 딱 주 므앙딱 군, 태국) |
사망일 | 2004년 6월 16일 |
사망지 | 방콕, 태국 |
배우자 | 쫑꼰 타낫롭 (1930년 결혼) |
자녀 | 나롱을 포함한 6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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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 [[파일:RTA OF-10 (Field Marshal).svg|15px]] 원수 [[파일:RTN OF-10 (Admiral of the Fleet).svg|15px]] 해군 원수 [[파일:RTAF OF-10 (Marshal of the Royal Thai Air Force).svg|15px]] 공군 원수 |
소속 | 태국 |
군 종류 | 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29년–1973년 |
참전 | 프랑코-태국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정당 | 통일 타이 국민당 |
다른 정당 | 국가 사회주의당 |
수상 경력 | |
훈장 | PChW SR MPCh MWM SMN GCC KmstkSO OMRI GCS GCMG LOM |
정치 경력 | |
군주 | 푸미폰 아둔야뎃 |
부총리 | 프라팟 차루사티엔 완 와이타야콘 왕자 폿 사라신 |
임기 시작 | 1963년 12월 9일 |
임기 종료 | 1973년 10월 14일 |
이전 | 사릿 타나랏 |
이후 | 산야 다르마삭티 |
군주1 | 푸미폰 아둔야뎃 |
부총리1 | 프라팟 차루사티엔 완 와이타야콘 왕자 수킷 니만해민다 |
임기 시작1 | 1958년 1월 1일 |
임기 종료1 | 1958년 10월 20일 |
이전1 | 폿 사라신 |
이후1 | 사릿 타나랏 |
총리6 | 자신 |
임기 시작6 | 1972년 12월 19일 |
임기 종료6 | 1973년 10월 14일 |
이전6 | Jaroonphan Isarangkun Na Ayutthaya |
이후6 | Jaroonphan Isarangkun Na Ayutthaya |
총리8 | 폿 사라신 사릿 타나랏 자신 |
임기 시작8 | 1957년 9월 23일 |
임기 종료8 | 1973년 10월 14일 |
이전8 | 쁠랙 피분송크람 |
이후8 | 다위 쭐라삽야 |
임기 시작3 | 1963년 12월 11일 |
임기 종료3 | 1973년 9월 30일 |
이전3 | 사릿 타나랏 |
이후3 | 다위 쭐라삽야 |
임기 시작4 | 1963년 12월 11일 |
임기 종료4 | 1964년 10월 1일 |
이전4 | 사릿 타나랏 |
이후4 | 프라팟 차루사티엔 |
총리5 | 사릿 타나랏 |
임기 시작5 | 1959년 2월 9일 |
임기 종료5 | 1963년 12월 8일 |
이전5 | 수킷 니만해민다 |
이후5 | 프라팟 차루사티엔 |
총리7 | 자신 |
이전7 | 대학교 설립 |
이후7 | 수킷 니만해민다 |
임기 시작7 | 1964년 2월 21일 |
임기 종료7 | 1972년 2월 20일 |
사령관 | 태국 왕립 군대 본부 사령관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타놈 끼띠카쫀은 딱 주의 쿤 암판 끼띠카쫀과 린치 끼띠카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국계 중국인 혈통이었다.[1] 왓 꼭쁠루 시립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임관 후 치앙마이 제7보병 연대에서 복무했으며, 지도 제작 학교와 보병 학교를 거쳐 국방대학을 1기로 졸업했다.
1957년 사릿 타나라트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병 치료차 출국한 사릿을 대신해 총리직을 수행했다. 이듬해 사릿에게 귀국을 요청, 사릿 정권의 부총리를 지냈다. 197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1973년 피의 일요일 사건 (1973년)으로 불리는 학생 시위 진압 실패로 망명했다. 1976년 승려로 귀국, 피의 수요일 사건을 촉발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타놈 끼띠카쫀은 1911년 태국 북서부 딱 주에서 쿤 암판 끼띠카쫀과 그의 아내 린치 끼띠카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태국계 중국인 혈통이었다.[1] 그는 왓 꼭쁠루 시립 학교를 다녔고, 태국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임관 후 그는 치앙마이의 제7보병 연대에 배속되어 복무했다. 타놈은 이후 지도 제작 학교와 보병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국방대학을 1기로 졸업했다.2. 2. 군 경력
1911년 태국 북서부 딱에서 태어났다. 태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한 후, 1957년 9월 사릿 타나라트 원수와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시켰다. 임시정부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후, 병 치료를 위해 출국하는 사릿의 뜻을 받아 총리직을 수행했다. 이듬해 사릿에게 귀국을 요청했고, 귀국 후에는 사릿 정권의 부총리를 오랫동안 역임했다.1971년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을 실시했지만, 1973년 학생들에 의한 군에 대한 항의 운동이 발생했다. 진압 과정에서 학생 다수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자세한 내용은 피의 일요일 사건 (1973년) 참조). 타놈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퇴진하여 망명을 해야만 했다.
1976년 8월 망명지에서 승려로서 입국했다. 방콕의 사원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귀국한 타놈의 단죄를 요구하며 정부에 항의 활동을 시작, 각지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1976년 10월 6일, 탐마삿 대학교에서 열리고 있던 집회에 국방부 장관이 지휘하는 국경 경찰대가 돌입하여 다수의 사망자, 부상자, 체포자가 발생했다. 이 혼란 속에서 경찰 등의 진압 행동은 쿠데타로 이어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자세한 내용은 피의 수요일 사건 참조).
3. 권력 장악 과정
반(反) 인도인 정서 폭동 이후, 영국령 버마 시기 버마의 샨 주에서 복무한 타놈 끼띠카쫀은 1947년 사릿 타나라트 대령이 주도한 쿠데타에 참여했다. 그는 연대장이 되었고 롭부리 군사 부서의 수장이 되었다. 곧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11보병사단을 지휘했다. 1951년 국회의원에 임명되었고, 이는 그의 첫 정치적 역할이었다. 같은 해 소장으로 진급했다.[2]
1953년 2월, 타놈은 군사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 진압을 이끌었고, 중장으로 진급하는 보상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한국 전쟁 종전을 기념하는 행사에 태국 대표로 참석했고, 이후 제1지역군 사령관으로 진급했다.[2]
1955년에는 협동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57년 사릿 타나라트 원수와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쁘라윳 삐분송크람 원수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폿 사라신의 꼭두각시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타놈은 사릿의 두 번째 군사 지도자이자 오른팔로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친정부 성향의 사하품당("연합 토지")이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둔 1957년 12월 태국 총선 며칠 후, 타놈은 국가사회당(Chat Sangkhomniyom)을 공동 창당했다. 그는 이 정당의 부대표가 되었고, 친정부 진영을 확장하고 국회의원으로 무소속으로 재선된 삐분송크람의 세리 마낭카실라당의 전 멤버들을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2]
1958년, 대장으로 진급하여 총리 겸 국방부 장관직을 맡았다. 9개월 동안 총리를 역임한 후 사릿 자신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부총리, 국방부 장관, 군 최고 사령관 부사령관이 되었다. 병 치료를 위해 출국하는 사릿의 뜻을 받아 총리직을 수행했다. 이듬해, 사릿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귀국 후에는 사릿 정권의 부총리를 오랫동안 역임했다.[2]
1971년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을 실시했지만, 1973년에는 학생들에 의한 군에 대한 항의 운동이 발생했다. 진압 과정에서 학생 다수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피의 일요일 사건 (1973년) 참조). 타놈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퇴진하여 망명을 해야만 했다.[2]
4. 태국 총리 재임
타놈은 1963년 사릿 타나랏 총리가 사망한 다음 날 총리직을 승계받았다. 그는 전임자의 친미국, 반공주의 정책을 이어갔으며,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경제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1968년 연합 태국 인민당을 창당하고 1969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1971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1년간 과도 정부를 이끌었다.
1972년 다시 총리에 취임하여 국방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타놈, 그의 아들 나롱, 나롱의 장인 쁘라팟 짜루사티안은 "세 폭군"으로 불리며, 이들의 독재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커졌다. 결국 1973년 민중 봉기로 인해 타놈 정권은 몰락하고, 타놈은 미국과 싱가포르로 망명했다.
4. 1. 1차 총리 재임 (1963년 ~ 1971년)
타놈은 1963년 사릿의 사망 다음 날 총리직을 승계받았다. 이후 육군 최고 사령관을 자임했다. 1년 후, 스스로 원수, 해군 원수, 공군 원수 직위를 겸임했다. 타놈은 전임자의 친미국적, 반공산주의 정치를 이어갔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의 막대한 경제적, 재정적 지원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는 인기가 있었지만, 그의 정권은 대규모 부패로 알려졌다. 1968년 10월에는 연합 태국 인민당(''Saha Prachathai'')을 설립하고 이끌었다.1969년 2월 총선이 완료된 후 다시 총리직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1970년대 태국 농민 반란이 시작되었다. 1971년 11월, 공산주의 침투를 억제해야 할 필요성을 이유로 자신의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 행정 위원회 의장을 자임했으며, 1년 동안 과도 정부를 이끌었다.
4. 2. 2차 총리 재임 (1972년 ~ 1973년)
타놈은 1971년 11월, 공산주의 침투를 억제해야 한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 행정 위원회 의장을 맡아 1년 동안 과도 정부를 이끌었다.[1] 1972년 12월, 다시 총리에 취임하여 국방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1] 타놈과 그의 아들 나롱 대령, 나롱의 장인 쁘라팟 짜루사티안 장군은 "세 폭군"으로 불렸다.[1]새로운 의회 선출을 위한 총선 요구와 함께 대중의 불만이 커졌다.[1] 학생 주도로 헌법 정부 복귀를 요구하는 시위는 며칠간의 폭력 사태로 이어진 1973년 민중 봉기로 이어져 타놈 정부가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 타놈과 다른 "폭군들"은 미국과 싱가포르로 망명했고, 이후 태국에는 민주주의 통치가 회복되었다.[1]
4. 3. 1973년 민주화 운동과 실각
1971년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을 실시했지만, 1973년에는 학생들의 항의 운동이 발생했다. 진압 과정에서 학생 다수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피의 일요일 사건 (1973년) 참조). 타놈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퇴진하여 망명을 해야 했다.학생 주도의 헌법 정부 복귀 요구는 며칠간의 폭력 사태로 이어져 타놈 정부가 갑작스럽게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 타놈과 다른 "폭군들"은 미국과 싱가포르로 망명했다.[1] 타놈의 퇴진 이후 태국에는 민주주의 통치가 회복되었다.[1]
5. 퇴진 이후
타놈은 1973년 학생 시위로 총리직에서 물러나 망명했다. 1976년 승려 신분으로 귀국했지만, 이는 탐마삿 대학교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후 정치에 복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나, 1999년 태국 왕실 근위대 명예 장교 임명으로 논란이 되자 사임했다.[5][6][7]
2004년 방콕 종합 병원에서 92세로 사망했으며,[8]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의료비를 지불했다. 이는 1973년 국왕의 요청으로 타놈이 국외로 떠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007년 시리킷 왕비 주재로 화장이 거행되었다.
5. 1. 망명과 귀환
타놈은 망명 기간 동안 싱가포르의 왓 아난다 메티야라마 태국 불교 사원에서 승려가 되었다.[3] 1976년 10월, 타놈은 수도승 복장으로 태국으로 돌아와[4] 방콕의 왓 보원니웻에 머물렀다. 그는 정치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지만, 그의 귀환은 학생 시위를 촉발했고, 결국 탐마삿 대학교 캠퍼스로 확산되었다. 이는 남베트남과 태국의 이웃 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간 지 불과 1년 후였으며, 우익 태국인들은 시위자들이 자국에도 똑같은 운명을 바라기를 바란다고 의심했다. 1976년 10월 6일, 정부 보안군의 지원을 받은 우익 무장 세력이 탐마삿 캠퍼스를 습격하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많은 시위자를 살해했다. 그날 저녁, 군은 세니 쁘라못의 민주당 선출 문민 정부로부터 권력을 찬탈하고 강경 왕당파 타닌 끄라이위치엔을 총리로 임명했다.타놈은 곧 승려의 신분을 벗었지만, 다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말년에 그는 훼손된 이미지를 회복하고, 자신의 정부가 전복되었을 때 압류된 재산을 되찾으려 했다.
1999년 초, 타놈이 군부의 추천으로 추안 릭파이 총리에 의해 태국 왕실 근위대 명예 장교로 임명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5] 타놈은 스스로 사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6][7]
5. 2. 1976년 탐마삿 대학교 학살
1976년 8월, 타놈은 망명지에서 승려로서 태국에 입국하여[3] 방콕의 사원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귀국한 타놈의 처벌을 요구하며 정부에 항의 활동을 시작했고, 각지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1976년 10월 6일, 탐마삿 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 국방부 장관이 지휘하는 국경 경찰대가 돌입하여 다수의 사망자, 부상자, 체포자가 발생했다. 이 혼란 속에서 경찰 등의 진압 행동은 쿠데타로 이어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피의 수요일 사건 참조).[4]5. 3. 말년
타놈은 망명 기간 동안 싱가포르의 왓 아난다 메티야라마 태국 불교 사원에서 승려가 되었다.[3] 1976년 10월, 수도승 복장으로 태국으로 돌아와[4] 방콕의 왓 보원니웻에 머물렀다. 그는 정치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지만, 그의 귀환은 학생 시위를 촉발했고, 이는 탐마삿 대학교 캠퍼스로 확산되었다. 당시 남베트남과 태국의 이웃 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간 지 불과 1년 후였으며, 우익 태국인들은 시위자들이 자국에도 똑같은 운명을 바라기를 바란다고 의심했다. 1976년 10월 6일, 정부 보안군의 지원을 받은 우익 무장 세력이 탐마삿 캠퍼스를 습격하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많은 시위자를 살해했다. 그날 저녁, 군은 민주당의 선출된 문민 정부 세니 프라모트로부터 권력을 찬탈하고 강경 왕당파 타닌 끄라이위치엔을 총리로 임명했다.타놈은 곧 승려의 신분을 벗었지만, 다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말년에 그는 훼손된 이미지를 회복하고, 자신의 정부가 전복되었을 때 압류된 재산을 되찾으려 했다.
1999년 초, 타놈이 군부의 추천으로 추안 릭파이 총리에 의해 태국 왕실 근위대 명예 장교로 임명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5] 타놈은 스스로 사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6][7]
타놈 끼띠카쫀은 2년 전 뇌졸중과 심근 경색을 겪은 후 방콕 종합 병원에서 2004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 그의 가족의 의료비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지불했는데, 이는 1973년 폭력 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가 국왕의 요청에 따라 국외로 떠나는 데 동의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타놈의 화장은 2007년 2월 25일 왓 뎁시린에서 거행되었다. 시리킷 왕비가 국왕 푸미폰을 대신하여 화장식을 주재하고 왕실의 불꽃을 점화했다. 막내딸인 쭐라본 왈라일락 공주도 참석했다. 타놈의 부인은 2012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훈장
타놈은 태국 훈장 제도에서 다음과 같은 왕실 훈장을 받았다.[9]
훈장 | 수여 일자 |
---|---|
1961년 | |
1965년 | |
1956년 | |
1955년 | |
1988년 | |
1972년 | |
1962년 | |
1955년 | |
1972년 | |
1969년 | |
1934년 | |
1943년 | |
1962년 | |
1944년 | |
1950년 | |
1964년 | |
1952년 | |
1950년 | |
1932년 | |
1957년 | |
1972년 |
참조
[1]
서적
Thailand: The Politics of Despotic Paternalism
Cornell Southeast Asia Program
[2]
서적
Thailand: The Politics of Despotic Paternalism
Cornell Southeast Asia Program
[3]
웹사이트
At Wat Ananda, Thai Buddhism with a Singaporean Twist
https://biblioasia.n[...]
2024-09-20
[4]
뉴스
In the book of exile, Thaksin pens his legacy
http://bangkokpost.c[...]
[5]
간행물
THAILAND: A Year of Diminishing Expectations
1999
[6]
뉴스
The Murky Events of October 1973
http://edition.cnn.c[...]
2023-03-30
[7]
웹사이트
ให้พ้นจากตำแหน่งนายทหารพิเศษ
https://ratchakitcha[...]
Royal Thai Government Gazette
2023-03-30
[8]
웹사이트
Thanom Kittikachorn
https://www.theguard[...]
2022-01-06
[9]
웹사이트
Biography
http://www.rta.mi.th[...]
2008-12-04
[10]
문서
แจ้งความสำนักนายกรัฐมนตรี เรื่อง พระราชทานพระบรมราชาอนุญาตประดับเครื่องอิสริยาภรณ์ต่างประเทศ
ราชกิจจานุเบกษา
[11]
웹사이트
Senarai Penuh Penerima Darjah Kebesaran, Bintang dan Pingat Persekutuan Tahun 1962.
http://www.istiadat.[...]
2016-06-15
[12]
웹사이트
タノーム・キティカチョーン
https://kotobank.jp/[...]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2021-02-26
[13]
뉴스
タノム氏生活開始 対応に苦しむ反対派学生
朝日新聞
197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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