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우치 마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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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케우치 마리야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로, 1955년 시마네현에서 태어났다. 1978년 데뷔하여 1980년대에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며, 1982년 야마시타 타츠로와 결혼 후 작사,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그녀는 1984년 앨범 《Variety》를 통해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1990년대에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0년대 후반, 1985년 발표한 'Plastic Love'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며 시티팝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2019년에는 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상을 수상했으며, 3개의 시대(쇼와, 헤이세이, 레이와)에 걸쳐 앨범 1위를 기록한 최초의 여성 아티스트가 되었다. 2024년에는 앨범 'Precious Days'로 69세 7개월의 나이에 앨범 1위를 차지하여 여성 아티스트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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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자취
1955년 3월 20일 시마네현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 미국에서 1년간 유학했다. 1978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재학 중 음악 활동을 시작, 싱글 '戻っておいで・私の時間'(돌아와줘 나의 시간)과 앨범 'Beginning'을 발표했다.[1][4] 1979년 싱글 'SEPTEMBER'와 1980년 싱글 '不思議なピーチパイ'(이상한 피치 파이)가 인기를 얻었으며,[5][6][4] NHK의 모두의 노래에 타케우치의 노래가 최소 한 곡씩 들어갔다.
1981년 가수 겸 작곡가 야마시타 타츠로와 결혼, 임신으로 잠정 활동을 중단했다.[1]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3] 1984년 복귀 후, 이전 싱글들을 능가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부터 자신이 주로 선곡한 6개의 성공적인 스튜디오 앨범을 발표, 모두 일본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다. 싱어송라이터로서 'シングル・アゲイン', '告白', '純愛ラプソディ', '今夜はHearty Party' 등 8곡이 오리콘 차트 10위 안에 진입했고, 'カムフラージュ'는 1위에 올랐다.[8]
2008년 10월 1일 데뷔 30주년을 맞아 베스트 앨범 《Expressions》를 발매, 오리콘 차트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1] 2014년 9월 10일 7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 《TRAD》를 발매하여 오리콘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기록,[1] 이 앨범으로 2014년 제56회 일본 레코드대상에서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했다.[1]
2. 1. 어린 시절
1955년 3월 20일 시마네현 히카와 군 다이샤 정(현 이즈모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다케우치 시게조(竹内繁蔵)는 1877년 외조부가 설립한 '다케노야'라는 료칸(일본 전통 여관)의 4대 주인이었다.[13][45] 그녀는 2남 4녀 중 셋째 딸이자 네 번째 자녀였다.[46] 가족은 항상 전 세계의 레코드를 들었으며, 3학년 때 이미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했지만, 비틀즈는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3]1961년 고향인 오사 정립 오사 소학교(현재 이즈모 시립 오사 소학교[47])에 입학했다. 1967년에는 오사 정립 오사 중학교(현재 이즈모 시립 오사 중학교[48])에 입학했다.
197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AFS 문화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일리노이주 락폴스에서 1년간 국제 교환 학생으로 공부했다. AFS 졸업앨범에는 "마리야 '마코' 다케우치"라고 적혀 있어, '마코'라는 애칭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1][13][2]

2. 2. 학창 시절
1955년 3월 20일 시마네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1년 9월부터 3학년 8월까지 AFS 교환유학 제도를 이용하여 미국 일리노이주 록폴스에 있는 록폴스 고등학교에서 1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51][52][53][54] 동아리 활동은 코러스부에 들어갔다.[50] AFS 졸업앨범에는 "마리야 '마코' 다케우치"라고 적혀 있어, 그녀의 애칭이 '마코'였음을 알 수 있다.[1][13][2]1973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영미문학을 전공하였다.[13] 같은 해 봄, '''재팬타임스'''가 주최한 전국 영어 낭독 대회에서 우승했다.[13] 게이오기주쿠 대학에는 1962년에 결성된 공인 밴드 서클 'Real McCOYs (리얼 매코이즈, 약칭: 매코이, KRM)'[57]가 있었고, 다케우치도 이 서클에 소속되어 음악 활동을 했다.[58] 3학년 스기 마리가 리더였던 이 밴드에서 다케우치는 스즈키 케이이치의 사촌 여동생 등과 함께 백코러스를 담당했다. 또한 스기의 솔로 활동을 지원하는 'PEOPLE (피플)'에도 참가하여 키보드와 백코러스를 맡았다.[50] 당시 다케우치는 프로 가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비틀즈 기사를 자주 읽었던 음악 잡지 편집자가 되고 싶어했다.[45]
2. 3. 데뷔 및 활동
1955년 3월 20일 시마네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 시절 미국에서 1년간 유학했다. 1978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재학 중 음악 활동을 시작, 싱글 '戻っておいで・私の時間'(돌아와줘 나의 시간)과 앨범 'Beginning'을 발표했다.[1][4] 1979년 싱글 'SEPTEMBER'와 1980년 싱글 '不思議なピーチパイ'(이상한 피치 파이)가 모두 인기를 얻었다.[5][6][4] 1979년 일본 레코드 대상, 도쿄 음악제, 일본 가요 대상, 신주쿠 음악제, 긴자 음악제 신인상을 수상했다.[1][4]1981년, 가수 겸 작곡가 야마시타 타츠로와 결혼하여 임신으로 잠정 활동을 중단했다.[1]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3] 1984년 복귀 후, 이전 싱글들을 능가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부터 자신이 주로 선곡한 6개의 성공적인 스튜디오 앨범을 발표, 모두 일본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다. 싱어송라이터로서 'シングル・アゲイン, '告白', '純愛ラプソディ', '今夜はHearty Party' 등 8곡이 오리콘 차트 10위 안에 진입했고, 'カムフラージュ'는 1위에 올랐다.[8]
1980년대 중반 나카모리 아키나의 앨범 『CRIMSON』에 곡을 제공, 1986년 앨범 발매 이후, 타케우치 마리야는 OL의 평범한 일상이나 불륜을 소재로 한 곡들을 많이 발표했다.[60]
1994년 베스트 앨범 《Impressions》는 일본에서만 3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그녀의 최고 판매 앨범이 되었다.[10] 2014년 9월 10일 발매한 7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 《TRAD》는 오리콘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 2014년 제56회 일본 레코드대상에서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했다.
2021년, 타케우치는 일본 팝 싱어송라이터인 안리와 함께 피치 앤드 애프리콧이라는 새로운 듀오를 결성했다. 2021년 11월 3일, 그들은 첫 번째 공동곡인 "Watching Over You"를 발매했다.[19]
타케우치 마리야의 곡은 다음과 같은 CM송으로 사용되었다.
2. 4. 2010년대 후반 이후
2008년 10월 1일 데뷔 30주년을 맞아 베스트 앨범 《Expressions》를 발매, 오리콘 차트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1] 2014년 9월 10일에는 7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 《TRAD》를 발매하여 오리콘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1] 이 앨범으로 2014년 제56회 일본 레코드대상에서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했다.[1]
2014년 9월까지 타케우치는 12장의 스튜디오 앨범, 42장의 싱글, 여러 편집 앨범, 2000년에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다. 2009년까지 그녀의 총 판매량은 1600만 장 이상으로 추산된다. 1994년 편집 앨범 ''Impressions''는 일본에서만 3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그녀의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10] 2018년 5월부터는 가족의 료칸 다케노야를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때까지" 운영하고 있다.[13]
일본 외에서는 1984년 앨범 ''Variety''에 수록된 시티팝 노래 Plastic Love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타케우치는 2018년 인터뷰에서 "[노래가]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 있어 해외 진출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당시 서구 세계에 음악을 발매할 생각이 없었다고 밝혔다.[13] 이 노래는 2010년대 중후반 유튜브에 업로드된 후 바이럴 영상이 되었고,[11][12]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를 통해 해외에서 인기를 얻어 2021년 6월 기준 유튜브 조회수 6700만 회 이상을 기록했다.[13]
''Noisey''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팝송"이라고 칭찬했고,[14] 고릴라즈(Gorillaz)는 "일본 펑크의 원더우먼 같은 곡"이라고 불렀다.[15] K팝 가수 유빈(유빈)의 "City Love"도 이 노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16] 더 블랙 마도나(더 블레시드 마도나)는 2017년 11월 ''Resident Advisor'' 믹스를 이 노래로 마무리했고, 밴드 차이(차이)는 2020년 이 노래의 커버를 발매했다.[17] "Plastic Love"는 수많은 팬 아트와 영상에 영감을 주었다.[13] 2019년 5월 17일, 워너 뮤직 재팬은 최초 발매 35년 만에 이 노래의 짧은 버전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공개했고,[18] 2021년 11월 11일에는 5분짜리 긴 버전이 공개되었다.
2021년, 타케우치는 일본 팝 싱어송라이터 안리(Anri)와 함께 듀오 피치 앤드 애프리콧을 결성했다. "피치"는 타케우치의 히트곡 신비로운 피치 파이에서, "애프리콧"은 안리의 데뷔 앨범 ''Apricot Jam''에서 따왔다. 2021년 11월 3일, 그들은 첫 공동곡 "Watching Over You"를 발매했다.[19] 가사는 타케우치, 음악은 하야시 테츠지가 작곡 및 편곡했다. 이 노래는 "Ichigo no Yuuwaku" 이후 40년 만의 하야시와 타케우치의 첫 협업이자, "You Are Not Alone" 이후 38년 만의 하야시와 안리의 첫 협업이다.[20]
3. 논란
일본의 음반 프로듀서 마쓰오 기요시(松尾潔)는 여러 언론 매체에서 키타가와 조니의 성추행 의혹을 언급했는데, 소속사였던 스마일 컴퍼니(スマイルカンパニー)가 계약 기간 중 그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해지했다. 그는 타케우치 마리야와 그녀의 남편인 야마시타 타츠로도 같은 회사 소속이며, 회사 방침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21][22][23]
4. 음악 스타일
타케우치 마리야는 작곡 시 피아노나 키보드를 사용한다고 알려졌지만,[103] 실제로는 피아노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식탁 위에서 미니 키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45] 남편 야마시타 타츠로는 자택 지하에 전용 음악실을 가지고 있지만, 타케우치는 별도의 공간 없이 생활 공간에서 작곡한다.[45]
싱글 「색·화이트 블렌드」 작곡 당시에는 아기를 재운 후 깨우지 않도록 세면실 근처에서 작은 소리로 작곡해야 했다.[45] 곡을 만들기 어려울 때는 육아나 주부 일에 의지하고, 육아나 주부 일에 막히면 작곡에 의지하며 균형을 맞췄다고 회상한다.[45]
NHK 연속텔레비전소설 『단단』의 극중가 "いのちの歌"의 가사는 Miyabi라는 필명으로 타케우치 마리야가 썼다.[100][101] 그녀는 "대중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이런 감정은 모두에게 있을 거야'라고 느낀 내용을 가능한 한 쉽고 강요하지 않는 듯한 작사를 유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102]
4. 1. 초기 스타일
타케우치 마리야의 음악적 기원은 1960년대의 닐 세다카와 델 섀넌 등 서구 팝 음악 작품, 그리고 히로타 미에코, 사카모토 큐, 더 피너츠 등 일본 가수들이 번안하여 불렀던 올디스, 그리고 요시다 타쿠로[108]이다.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비틀즈이다. 1984년 발매된 앨범 『VARIETY』(버라이어티)에 수록되고 싱글로도 발매된 「머지비트로 노래하게 해줘」는 비틀즈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오마주 곡이며, 소녀였던 당시에는 말하는 언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열중해서 쫓아다녔다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대학 시절에는 제임스 테일러 등의 싱어송라이터, 웨스트코스트 록, 더 밴드, 닐 영 등을 즐겨 들었다. 린다 론스태드의 『Living in the USA』 앨범 재킷과 비슷한 차림을 한 적이 있으며,[109] "일본의 린다 론스태드"라고 불린 적도 있었지만,[109] 이에 반발하여 "린다보다 캐럴 킹을 존경한다. 그녀는 스스로 작곡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109]4. 2.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변화
2010년, 야마시타 타츠로의 공연에 백 코러스로 참여하고, 10년 만의 라이브 공연에서 いのちの歌를 피아노 독주로 선보이며 자신의 필명을 밝혔다.[64][65] 2012년에는 야마시타 타츠로의 공연에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하여 히트곡들을 불렀다.2013년, 고향 이즈모시의 의뢰로 이즈모타이샤 대전궁을 기념하는 곡 「사랑스러운 이즈모」를 작곡해 제공했다.[66][67] 그해 12월에는 다른 아티스트에게 제공한 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Mariya's Songbook』을 발매했다.[68]
2014년, 쿠와타 케이스케, 하라 유이코, 야마시타 타츠로와 함께 싱글 「고요한 전설(레전드)」를 발매했다. 같은 해 9월, 앨범 『TRAD』로 오리콘 차트 2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했다. 33년 만의 전국 투어도 개최했다.
타케우치는 남편 야마시타 타츠로에 의해 "싱어송라이터 전업주부"로 불리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싱어송 ‘겸업주부’"라고 표현한다.[106][107][45] 주부와 음악 활동을 병행하며 작가적 시각을 길렀다고 말한다.
아이돌 활동 시절 겪었던 어려움과 고민은 타케우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TV 프로그램 출연 중 느꼈던 회의감,[45] 그라비아 촬영 등에 대한 갈등은 야마시타 타츠로와의 상담을 통해 극복했다.[45]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까지 겪은 후, 연예 활동을 재설정하고 결혼 후에는 작곡 활동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았다.[45]
아이돌 활동 경험은 타케우치에게 작곡가로서 큰 자산이 되었고, 아이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제공할 수 있었다.
4. 3. 시티팝의 아이콘
타케우치 마리야는 197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시티팝을 대표하는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84년에 발매된 앨범 ''Variety''에 수록된 "Plastic Love"는 2010년대 후반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시티팝 열풍을 이끌었다.[11][12]1978년 데뷔한 타케우치는 1980년대 초까지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며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81년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1984년 복귀 후에도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며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갔다.[10]
"Plastic Love"는 발매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2010년대 중후반 유튜브에 업로드된 후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 장르 팬들에게 사랑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13] 이 곡은 Noisey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팝송"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14] 고릴라즈와 같은 유명 아티스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15] 2019년에는 발매 35년 만에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기도 했다.[18]
타케우치는 2021년에도 안리와 함께 새로운 듀오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등, 현재까지도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19]
5. 평가 및 영향
타케우치 마리야는 1978년 데뷔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일본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84년 복귀 이후 발표한 앨범들은 모두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로서 뛰어난 작사, 작곡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シングル・アゲイン', '고백', '純愛ラプソディ', 'চাওয়া পার্টি', 'カムフラージュ' 등 다수의 곡을 히트시켰다.[1]
타케우치 마리야는 데뷔 30주년 기념 베스트 앨범 《Expressions》(2008)와 7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 《TRAD》(2014)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다. 《TRAD》는 제56회 일본 레코드대상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
그녀는 음악적 성과 외에도 다양한 상을 수상하며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1]
6. 음반 목록
타케우치 마리야의 음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 외 베스트 앨범, 라이브 앨범, 커버 앨범, 참여 작품 등은 다음과 같다.
6. 1. 정규 앨범
6. 2. 베스트 앨범
(다양한 가수들을 위해 작곡한 노래)(Expressions에 수록되지 않은 다른 베스트 송과 다케우치 마리야의 희귀곡, 프리미엄 커버)
(오카다 유키코를 위해 작곡한 노래)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그녀의 노래 영어 커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