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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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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 밴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며 록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캐나다-미국 밴드이다. 로니 호킨스의 백업 밴드인 더 호크스로 시작하여, 밥 딜런의 백업 밴드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컨트리, 로큰롤, 리듬 앤 블루스를 융합한 독특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Music from Big Pink", "The Band" 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1976년 "The Last Waltz"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으나, 여러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릭 댕코, 리처드 매뉴얼 등 멤버들의 사망 이후에도 헌정 앨범이 발매되는 등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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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밴드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9년 더 밴드. 왼쪽부터 리처드 매뉴얼, 가스 허드슨, 레본 헬름, 로비 로버트슨, 릭 단코.
1969년 더 밴드. 왼쪽부터 리처드 매뉴얼, 가스 허드슨, 레본 헬름, 로비 로버트슨, 릭 단코.
별칭더 호크스 (The Hawks)
레본 앤 더 호크스 (Levon and the Hawks)
캐나디안 스콰이어스 (Canadian Squires)
더 크래커스 (The Crackers)
출신지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미국 뉴욕주 우드스톡
장르루츠 록
아메리카나
포크 록
컨트리 록
활동 기간1957년–1977년
1983년–1999년
레이블캐피틀/EMI
라이노
워너 브라더스
웹사이트더 밴드 웹사이트
멤버
과거 멤버릭 단코
레본 헬름
가스 허드슨
리처드 매뉴얼
로비 로버트슨
짐 웨이더
스탠 젤레스트
랜디 시아란테
리처드 벨

2. 역사

(내용 없음)

2. 1. 1957–1964: 더 호크스

더 밴드의 멤버들은 초기에 토론토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로커빌리 가수 로니 호킨스의 백업 밴드인 '더 호크스'(The Hawks)에서 함께 연주하며 만났다. 아칸소 출신의 레본 헬름은 1957년부터 이 그룹과 연주하기 시작했고, 1958년 고등학교 졸업 후 정식 드러머로 합류하여 호킨스와 함께 온타리오로 이주했다.[11] 1959년, 로큰롤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호킨스는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활동 무대를 옮겼는데, 기존 멤버들이 향수병 등으로 떠나자 현지 캐나다 젊은이들을 영입했다. 이때 기타의 로비 로버트슨, 베이스의 릭 덩코, 피아노의 리처드 매뉴얼이 차례로 합류했으며, 마지막으로 가스 허드슨이 가입하여 훗날 더 밴드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당시 피아니스트였던 스탠 스젤레스트도 잠시 그룹 멤버로 활동했다.

호킨스는 토론토와 인근 해밀턴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유망한 밴드가 나타나면 최고의 연주자를 자신의 밴드로 영입하는 방식으로 경쟁자를 관리했다. 로버트슨, 덩코, 매뉴얼도 이런 과정을 통해 호크스에 합류했다.[11]

다른 멤버들과 달리, 대학에서 음악 교육을 전공하고 교사를 목표로 하던 허드슨을 영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록 음악을 단지 취미로만 여겼다. 그러나 호크스 멤버들은 허드슨의 독특하고 강력한 오르간 연주 스타일에 매료되어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허드슨은 자신을 '음악 강사'로 고용하여 매주 10USD를 지급하고 최신 로우 리 오르간을 구입해준다는 조건으로 합류를 수락했다. 이후 밴드의 음악 이론에 관한 질문은 허드슨이 도맡아 해결했다.

호킨스와 함께 활동하는 동안 더 호크스는 몇 장의 싱글을 녹음했으며, 당시 토론토 음악계에서 최고의 록 그룹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호킨스는 긴 클럽 공연 후에도 밤샘 리허설을 강행하며 젊은 멤버들의 연주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켰다.

하지만 1963년 말[12] 또는 1964년,[13] 멤버들은 호킨스와 음악적 견해 차이 및 개인적인 갈등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지쳤고, 자신들의 독창적인 음악을 하고 싶어했으며, 여자 친구를 데려오거나 마리화나를 피우면 벌금을 물리는 등 호킨스의 강압적인 통제 방식에도 불만을 느꼈다.[12] 로버트슨은 훗날 "결국 [호킨스]는 우리를 그의 음악을 능가하여 떠나야 할 정도로 키웠다. 그는 우리를 그런 특출난 밴드로 연마하여 세상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자충수를 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고, 우리 모두는 더 어리고 음악적으로 야심이 컸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하며, 호킨스가 의도치 않게 그들의 독립을 도왔다고 말했다.[12]

호킨스를 떠난 그룹은 잠시 색소폰 연주자 제리 펜파운드를 영입해 '레본 헬름 섹스텟'(Levon Helm Sextet)으로 활동하다가, 펜파운드가 떠난 후 '레본 앤 더 호크스'(Levon and the Hawks)라는 이름으로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13]

2. 2. 1965–1967: 밥 딜런과의 협업

밥 딜런과 세션을 진행한 "빅 핑크"(2006년 촬영)


왼쪽부터 밥 딜런, 딜런의 투어 매니저 빅터 메이뮤데스(Victor Maymudes), 로비 로버트슨. 1966년 4월 촬영.


1965년 늦여름, 밥 딜런은 첫 미국 "전기" 투어를 위한 백업 밴드를 찾고 있었다. 당시 '레본 앤 더 호크스(Levon and the Hawks)'로 활동하던 더 밴드는 블루스 가수 존 P. 해먼드의 추천을 받았다. 해먼드는 그해 초 헬름(Helm), 허드슨(Hudson), 로버트슨(Robertson)과 함께 자신의 뱅가드 레코드 앨범 ''So Many Roads''를 녹음한 인연이 있었다.[18][19] 비슷한 시기, 딜런의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만의 비서이자 토론토 출신 친구였던 메리 마틴(Mary Martin)도 딜런에게 토론토 영 스트리트의 르 코크 도르 타번(Le Coq d'Or Tavern)이나 프리어스 타번(Friar's Tavern)에서 연주하는 호크스를 보라고 권유했다.[20][21] 로버트슨은 1965년 6월 16일, 존 P. 해먼드를 따라 콜롬비아 레코드 스튜디오 A에서 "Like a Rolling Stone" 녹음 세션을 참관하며 딜런과 그로스먼을 처음 만났다고 회상한다.[101]

딜런은 호크스의 연주를 듣고 로버트슨과 만난 후, 헬름과 로버트슨에게 자신의 백업 밴드 합류를 제안했다. 두 사람은 다른 멤버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호크스 전체를 고용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딜런은 이를 수락했다.[22] 딜런은 로버트슨에게 먼저 8월 28일 뉴욕 포레스트 힐스 스타디움과 9월 3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보울 공연에서 리드 기타를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로버트슨은 헬름이 드럼을 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101] 이 두 공연은 로버트슨과 헬름에게 대규모 콘서트장의 첫 경험이었다.

1965년 9월 24일부터 호크스는 "밥 딜런 앤 더 밴드(Bob Dylan and the Band)"라는 이름으로 딜런의 백 밴드로서 정식 투어를 시작했다.[101] 이 투어는 1966년 5월까지 이어졌으며, 딜런의 암페타민 사용과 일부 멤버들의 동참으로 얼룩지기도 했다.[23] 투어 내내 포크 음악 팬들의 야유와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는 딜런의 음악이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록으로 전환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지친 헬름은 1965년 11월 투어를 떠났다.[24][102] 그는 고향인 아칸소로 돌아간 뒤 멕시코 만의 석유 시추 시설에서 잠시 일했다.[25]

투어 중과 투어 사이에 딜런과 호크스는 여러 차례 녹음 세션을 가졌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1965년 10월과 11월 세션에서는 싱글 "Can You Please Crawl Out Your Window?"만이 나왔고,[101][103] 이는 12월 8일에 발매되었다.[104] 1966년 1월에는 딜런의 다음 앨범 ''Blonde on Blonde''를 위한 녹음에서 싱글로도 발매된 "One of Us Must Know (Sooner or Later)"가 탄생했다.[26] "One of Us Must Know" 녹음에는 딜런과 함께 드러머 바비 그레그, 베이시스트 릭 단코 (혹은 빌 리), 기타리스트 로비 로버트슨, 피아니스트 폴 그리핀, 오르간 연주자 알 쿠퍼가 참여했다.[27][101] 뉴욕 스튜디오 작업에 실망한 딜런은 프로듀서 밥 존스턴의 제안으로 내슈빌에서 ''Blonde on Blonde'' 녹음을 이어갔다. 이 세션에서는 로버트슨의 기타 연주가 "Leopard-Skin Pill-Box Hat" 등에서 두드러졌지만, 다른 호크스 멤버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헬름의 빈자리는 미키 존스가 임시로 메웠고, 밴드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유럽으로 이어지는 1966년 월드 투어를 계속했다. 특히 1966년 5월 17일 영국 맨체스터의 프리 트레이드 홀 공연은 전설로 남았다. 공연 중 한 관객이 딜런을 향해 "유다!"라고 외치자, 딜런은 "믿을 수 없어. 넌 거짓말쟁이야!"라고 응수한 뒤 밴드에게 "엄청 크게 연주해!"라고 외쳤고, 이어 "Like a Rolling Stone"의 강렬한 연주를 선보였다.[28] 이 공연은 오랫동안 부트레그로 유통되었으며(초기에는 로열 앨버트 홀 공연으로 잘못 알려짐), 1998년 ''The Bootleg Series Vol. 4: Bob Dylan Live 1966, The "Royal Albert Hall" Concert''라는 제목으로 공식 발매되었다. Creem의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공연을 "최고의 록앤롤 음악의 결정체"라고 평했으며,[29] 리치 언터버거는 공식 발매 음반을 "록 역사의 중요한 기록"이라고 평가했다.[30]

1966년 7월 29일, 투어 휴식 중 딜런은 오토바이 사고로 부상을 입고 뉴욕주 우드스톡에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31] 일자리를 잃은 호크스는 잠시 타이니 팀 등 다른 가수들의 백 밴드로 활동하다가, 1967년 2월 딜런의 제안으로 우드스톡에 합류했다.[32] 단코, 허드슨, 매뉴얼은 인근 웨스트 소거티스에 "빅 핑크"라고 불리는 분홍색 집을 임대했다. 이 무렵 헬름도 복귀했다. 이곳에서 진행된 딜런과의 세션 음원은 록 역사상 최초의 해적판 중 하나인 ''Great White Wonder''로 유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세션의 결과물은 1975년 ''지하실(The Basement Tapes)''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발매되었고, 2014년에는 딜런의 부트렉 시리즈 11집 ''The Bootleg Series Vol. 11: The Basement Tapes Complete''로 그 전체 내용이 공개되었다. 롤링 스톤의 잔 웨너는 이 부트레그 음원을 리뷰하며 밴드 멤버들의 이름을 명시하고 "크래커스(the Crackers)"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33]

2. 3. 1968–1972: 전성기

1971년 독일 함부르크 투어 중인 더 밴드 (왼쪽부터 릭 단코, 레번 헬름, 리처드 마누엘)


1967년밥 딜런과의 세션이 마무리되고 레번 헬름이 그룹에 복귀하면서, 이전까지 '호크스'로 활동하던 이들은 뉴욕 우드스톡 인근의 '빅 핑크'라 불리던 집에서 자신들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정식 데뷔를 준비하며 밴드 이름을 정해야 했는데, 로비 로버트슨은 딜런과 함께 활동할 당시 주변에서 그들을 단순히 '그 밴드(the band)'라고 불렀던 것이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결국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다.

1968년 7월, 이들은 '더 밴드'라는 이름으로 데뷔 앨범 ''Music from Big Pink''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앨범에는 딜런이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한 "This Wheel's on Fire", "Tears of Rage", "I Shall Be Released" 세 곡과 함께, 훗날 1969년 영화 ''Easy Rider''에 삽입되어 그룹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가 된 "The Weight"가 수록되었다. 앨범 전체적으로 주제적 통일성을 가지면서도 곡마다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록 음악에 컨트리, 포크, R&B 등 루츠 뮤직의 요소를 깊게 반영한 독특한 음악성은 당시 많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71년의 가스 허드슨


1969년 초, ''Music from Big Pink''의 성공에 힘입어 더 밴드는 샌프란시스코의 윈터랜드 볼룸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투어에 나섰다. 같은 해 8월 17일에는 전설적인 우드스톡 페스티벌 무대에 섰으나, 법적인 문제로 인해 이들의 공연 장면은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드스톡''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8월 말에는 영국에서 열린 아일 오브 와이트 페스티벌에 딜런과 함께 참여했으며, 이때의 공연 중 일부는 딜런의 앨범 ''Self Portrait''에 수록되었다. 이 페스티벌 현장에서 그들은 비틀즈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와 만나 교류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더 밴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한 두 번째 앨범 ''The Band''를 발표했다. 소박한 분위기의 앨범 커버 사진처럼, 앨범에는 남북 전쟁 시기를 그린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나 농업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노래한 "King Harvest (Has Surely Come)" 등 옛 시골 미국의 정서를 물씬 풍기는 곡들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접근은 당시 주류 팝 음악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첫 두 앨범의 성공에는 프로듀서 존 시몬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순한 프로듀서를 넘어 때로는 피아노나 튜바를 연주하고 편곡에도 참여하며 거의 멤버처럼 활동했다. 특히 두 앨범에서 인상적으로 사용된 독특한 금관악기 사운드는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시몬은 뛰어난 색소폰 연주자인 허드슨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의 금관악기 연주 실력이 기초적인 수준이었기에 오히려 그 한계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은 이 시기 더 밴드에게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으며, 잡지 역사상 다른 어떤 그룹보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그들의 음악을 조명했다. 저명한 평론가 그릴 마커스 등의 글은 더 밴드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더 밴드는 1970년 1월 12일자 ''타임''의 표지를 장식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비틀즈 이후 록 그룹으로서는 2년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35] 이 표지에 사용되지 않은 데이비드 아티의 사진은 더 밴드의 전성기에 촬영된 몇 안 되는 스튜디오 초상화 중 하나로, 최근 발견되어 다니엘 로어의 로비 로버트슨 다큐멘터리 ''Once Were Brothers: Robbie Robertson and the Band''와 하비 쿠버닉, 켄 쿠버닉의 저서 "The Story of the Band: From ''Big Pink'' to ''The Last Waltz''"에 소개되었다.[36]

''Music from Big Pink''와 ''The Band'' 두 앨범은 Byrds나 플라잉 부리토 브라더스의 음악과 함께 컨트리 록이라는 장르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이후 이글스와 같은 밴드들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동시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에릭 클랩튼조지 해리슨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자신들의 음악적 방향 설정에 더 밴드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클랩튼은 훗날 더 밴드에 가입하고 싶었다는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37]

두 번째 앨범 발표 후, 더 밴드는 리드 밴드로서 첫 단독 투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점차 명성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이 커졌고, 이는 곡의 주제가 이전보다 어둡고 내성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분위기는 1970년 발표된 세 번째 앨범 ''Stage Fright''에 반영되었다. 이 앨범은 뮤지션이자 엔지니어인 토드 룬드그렌이 엔지니어링을 맡아 상징적인 공연장인 우드스톡 플레이하우스에서 녹음되었다. 초기 비평은 긍정적이었으나, 음악성과 깊이 면에서 이전 두 앨범에 비해 다소 아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Stage Fright'' 녹음 이후, 더 밴드는 캐나다에서 기차로 이동하며 열린 올스타 록 콘서트 투어인 페스티벌 익스프레스에 참여했다. 이 투어에는 재니스 조플린, 그레이트풀 데드 등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함께했으며, 훗날 더 밴드의 멤버가 되는 리처드 벨도 당시 조플린의 밴드 멤버로 참여했다. 2003년 개봉된 이 투어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댕코가 제리 가르시아, 밥 위어, 존 도슨, 조플린 등과 함께 술에 취해 "Ain't No More Cane"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시기부터 로비 로버트슨은 밴드 내에서 음악적, 실질적 주도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특히 헬름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헬름은 로버트슨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금전적 욕심을 비판한 반면, 로버트슨은 댕코, 헬름, 마누엘이 헤로인 사용 문제로 인해 점차 신뢰를 잃어갔기 때문에 자신이 그룹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38] 로버트슨은 특히 마누엘이 약물 중독에 빠지면서 창작 능력이 저하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가 다시 곡을 쓰도록 독려하려 애썼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멤버 간의 긴장 속에서도 더 밴드는 1971년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Cahoots''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딜런이 제공한 곡 "When I Paint My Masterpiece", 북아일랜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반 모리슨과 함께 부른 "4% Pantomime", 그리고 뉴올리언스 음악의 대가 앨런 투생이 힘 있는 금관악기 편곡을 더한 "Life Is a Carnival" 등이 수록되었다. 특히 투생의 참여는 이후 더 밴드의 음악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71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더 밴드는 뉴욕 시의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연말 공연을 가졌고, 이 실황은 이듬해 여름 라이브 앨범 ''Rock of Ages''로 발매되었다. 이 공연과 앨범을 위해 앨런 투생이 직접 편곡하고 지휘한 금관악기 섹션이 추가되어 더욱 풍성하고 강력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특히 12월 31일 마지막 날 공연에는 밥 딜런이 예고 없이 무대에 올라 "When I Paint My Masterpiece"를 포함한 네 곡을 밴드와 함께 열창하며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Rock of Ages''는 스튜디오 녹음 못지않은 뛰어난 연주 퀄리티와 생생한 현장감으로 라이브 앨범의 명반으로 평가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2. 4. 1973–1975: 샹그릴라 스튜디오

밥 딜런과 더 밴드, 1974년 시카고: (왼쪽부터) 릭 단코, 로비 로버트슨, 밥 딜런, 레본 헬름


1973년, 더 밴드는 커버 앨범인 ''Moondog Matinee''를 발매했다. 이 앨범을 홍보하기 위한 투어는 진행되지 않았고, 평가는 엇갈렸다. 하지만 그해 7월 28일, 더 밴드는 뉴욕주 Watkins Glen 외곽의 그랑프리 레이스웨이에서 열린 대규모 콘서트인 Summer Jam at Watkins Glen 무대에 섰다. 이 행사에는 그레이트풀 데드올맨 브라더스 밴드도 참여했으며, 6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모였다. 이 공연을 계기로 밥 딜런과의 투어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39] 1973년 말, 릭 단코, 레본 헬름, 가스 허드슨, 리처드 매뉴얼은 밥 딜런의 앨범 ''Planet Waves'' 녹음 작업에 참여했다. 이 앨범은 1974년 1월과 2월에 걸쳐 북미 지역에서 40회 공연을 한 더 밴드와 밥 딜런의 공동 투어 시기에 맞춰 발매되었다. 같은 해 말, 이 투어의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Before the Flood''가 발매되었다.

이 시기에 더 밴드는 ''Planet Waves''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롭 프라보니에게 그룹 전용 녹음 스튜디오 설계를 의뢰했다. 1975년, 샹그릴라 스튜디오가 완공되었다. 그 해 더 밴드는 1971년 이후 처음으로 신곡으로 구성된 앨범 ''Northern Lights – Southern Cross''를 이곳에서 녹음하고 발매했다. 앨범에 수록된 8곡은 모두 로비 로버트슨이 단독으로 작곡했다. 앨범 판매량은 비교적 저조했지만, 비평가들과 팬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레본 헬름은 그의 자서전 ''This Wheel's on Fire''에서 이 앨범을 "우리가 ''The Band'' 앨범 이후 만든 최고의 앨범"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앨범에서는 가스 허드슨의 실험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Jupiter Hollow"라는 곡에서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2. 5. 1976–1978: 라스트 왈츠

The Last Waltz 콘서트에서 게스트들과 함께한 더 밴드. 사진: 데이비드 간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로비 로버트슨은 계속되는 투어 활동에 지쳐 있었다. 이전 앨범 《Northern Lights – Southern Cross》가 상업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1976년 투어는 산타크루즈 시민 강당, 롱아일랜드 아레나, 버몬트주 에식스 정션의 챔플레인 밸리 엑스포와 같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공연장 위주로 진행되었고, 9월에는 내슈빌 페어그라운드에서 당시 떠오르던 ZZ 탑의 오프닝 공연을 맡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40] 같은 해 9월 초, 리처드 매뉴얼이 보트 사고로 심각한 목 부상을 입는 일도 발생했다.[41]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버트슨은 밴드에게 "고별 콘서트"를 열고 라이브 공연 활동을 중단할 것을 제안했다. 이 공연은 훗날 ''The Last Waltz''로 알려지게 된다.

1976년 10월 30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연 이후, 더 밴드는 1976년 11월 25일(미국 추수감사절)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윈터랜드 볼룸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개최했다.[42] 이 공연은 5,000명의 관객에게 칠면조 만찬을 제공하는 등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앨런 투생이 편곡한 관악 섹션과 더불어 조니 미첼, 닐 영과 같은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들을 포함한 화려한 게스트들이 참여했다. 특히 밴드의 결성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로니 호킨스와 밥 딜런도 무대에 올랐다. 이 외에도 머디 워터스, 닥터 존, 반 모리슨,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론 우드, 바비 찰스, 닐 다이아몬드, 폴 버터필드 등 밴드가 존경하고 함께 작업했던 여러 뮤지션들이 게스트로 참여했다. 이 역사적인 공연은 로버트슨의 친구이자 영화 제작자인 마틴 스코세지가 촬영했다.[43]

콘서트 이후에도 캐피톨 레코드와의 계약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더 밴드는 1977년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Islands》를 발매했다. 이는 ''The Last Waltz''의 영화와 음반을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를 통해 발매하기 위한 계약 이행의 일환이었다. 《Islands》는 오리지널 곡과 커버 곡이 혼합된 앨범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오리지널 라인업으로 제작된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같은 해, 그룹은 컨트리 가수 에멀루 해리스("Evangeline")와 가스펠-소울 그룹 스테이플 싱어스("The Weight")와 함께 사운드스테이지 공연을 녹음했고, 스코세지는 이 영상과 그룹 인터뷰를 1976년 콘서트 영상과 결합하여 콘서트 영화이자 다큐멘터리인 ''The Last Waltz''를 완성했다. 영화는 1978년에 3장의 LP 사운드트랙과 함께 개봉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밴드 내부에 갈등을 야기했다. 레번 헬름은 훗날 자서전 《This Wheel's on Fire》에서 ''The Last Waltz'' 프로젝트가 전적으로 로비 로버트슨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로버트슨이 다른 멤버들에게 사실상 해체를 강요했다고 주장했다.[44] 또한 밴드 내에서는 공연 활동보다 앨범 제작을 중시하는 로버트슨과 계속해서 라이브 공연을 이어가고 싶어 했던 다른 멤버들 간의 의견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리처드 매뉴얼은 이러한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해 알코올과 약물 문제에 시달리기도 했다. 로버트슨은 1986년 인터뷰에서 "나는 내 큰 발언을 했다. 영화를 만들었고, 3장짜리 앨범도 만들었다. 이것이 단지 나의 발언일 뿐, 그들의 발언이 아니라면 받아들이겠다"라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45]

결국 《Islands》 앨범 발매 이후 멤버들은 점차 멀어졌고, 스튜디오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 의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오리지널 5인조로서의 마지막 공식적인 공연은 1978년 3월 1일, 릭 댕코의 솔로 공연이 끝난 후 록시 극장에서 앙코르로 "Stage Fright", "The Shape I'm In", "The Weight"를 함께 연주한 것이었다.[46]

2. 6. 1983–1989: 재결성 및 리처드 매뉴얼의 죽음

1982년, 댄코와 헬름은 어쿠스틱 듀오를 결성하여 "리빙룸 세트" 투어를 시작했으며, 한 공연에서는 밥 딜런이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이 투어 중에 더 밴드의 재결성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1983년에는 로버트슨 없이 재결성하여 투어를 진행했다. 로버트슨은 솔로 활동과 할리우드 음악 프로듀서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로버트슨의 빈자리는 뉴욕 우드스톡 출신의 기타리스트 짐 와이더가 채웠다. 같은 해에는 더 밴드로서 처음으로 일본 공연도 열렸다. 투어 멤버는 로버트슨을 제외한 4명에 케이트 브라더스가 서포트 밴드로 참여했다. 밴드의 인기는 이전보다 줄어들어, 헤드라이너로서는 극장과 클럽에서 공연했고, 그레이트풀 데드나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와 같은 동료 밴드들의 오프닝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86년 3월 4일, 플로리다주 윈터 파크에서의 공연 후, 매뉴얼은 42세의 나이로 모텔 방에서 자살했다.[47][48] 그는 수년간 알코올 및 약물 중독으로 고통받았으며, 1978년부터 몇 년간은 중독에서 벗어났으나 1984년경 다시 약물과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49] 매뉴얼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투어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피아노 자리는 오랜 친구인 스탠 셀레스트(얼마 후 사망)와 리처드 벨이 이어받았다. 벨은 로니 호킨스의 밴드에서 오리지널 호크스 멤버들이 떠난 후 활동했으며, 재니스 조플린의 풀 틸트 부기 밴드 멤버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1989년, 더 밴드는 1989년 주노상 시상식에서 캐나다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 자리에는 로버트슨도 참석하여 오리지널 멤버인 댄코, 허드슨과 재회했다. 캐나다 컨트리 록 그룹 블루 로데오가 백업 밴드로 참여했으며, ''뮤직 익스프레스''는 이 공연을 더 밴드에서 블루 로데오로 이어지는 상징적인 "횃불 전달"이라고 평가했다.

2. 7. 1990–1999: 마지막 활동 및 릭 댕코의 죽음

1990년, 캐피털 레코드는 1970년대 앨범의 재발매를 시작했다.[50] 남은 세 멤버(릭 댕코, 리본 헬름, 가스 허드슨)는 투어와 앨범 녹음을 이어갔으며, 마누엘과 로버트슨의 역할을 대신할 뮤지션들이 계속해서 바뀌었다. 같은 해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핑크 플로이드로저 워터스가 주최한 라이브 이벤트 "The Wall – Live in Berlin"에 참여하여 밴 모리슨, 조니 미첼 등과 함께 공연했다.

1992년 10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밥 딜런의 30주년 기념 콘서트에 출연하여 딜런의 "마스터피스"를 연주했다. 1993년, 여덟 번째 정규 앨범인 ''제리코''를 발매했다. 로버트슨이 주요 작사가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이 앨범의 작곡은 그룹 외부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같은 해, 더 밴드는 로니 호킨스, 밥 딜런 등 다른 공연자들과 함께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1993년 취임 기념 파티인 "블루 진 배시"에 출연했다.[51]

1994년, 더 밴드는 우드스톡 '94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같은 해 더 밴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 자리에는 로버트슨이 댕코, 허드슨과 함께 참석했으나, 작곡 크레딧 문제로 로버트슨과 갈등을 겪던 헬름은 불참했다.[52] 헌액식에서는 에릭 클랩튼과 함께 "The Weight"를 연주했다.

1996년 2월, 더 밴드는 크리켓츠와 함께 버디 홀리의 곡 "Not Fade Away"를 녹음하여 트리뷰트 앨범 ''Not Fade Away (Remembering Buddy Holly)''에 수록했다. 같은 해 ''High on the Hog'' 앨범을 발매했다.

1997년 5월 6일, 댕코는 일본 체류 중 헤로인 밀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7월 24일 치바 지방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강제 추방되었다.[105]

1998년에는 에릭 클랩튼과 존 하이아트가 게스트로 참여한 앨범 ''Jubilation''을 발매했다. 같은 해 헬름은 후두암 진단을 받았고, 이로 인해 수년간 노래를 부르기 어려웠으며 이는 ''Jubilation'' 앨범에서의 그의 목소리에서도 나타난다. 밴드는 ''Jubilation''의 후속 앨범 작업을 언급했으나, 이 앨범은 결국 발매되지 않았다.[53]

밴드가 함께 녹음한 마지막 곡은 1999년 밥 딜런 트리뷰트 앨범 ''Tangled Up in Blues''에 수록된 딜런의 "One Too Many Mornings" 버전이었다. 1999년 12월 10일, 릭 댕코는 55세의 나이로 잠을 자던 중 사망했다. 그의 사망 이후 더 밴드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해체 직전 그룹의 마지막 구성원은 리처드 벨(피아노), 랜디 시알란테(드럼), 그리고 짐 바이더(기타)였다.

3. 음악 스타일

더 밴드의 곡 대다수는 로비 로버트슨이 작사가 또는 공동 작사가로 이름을 올렸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저작권료의 상당 부분을 로버트슨이 받았다. 이는 특히 레본 헬름에게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헬름은 1993년 발간한 자서전 ''This Wheel's on Fire: Levon Helm and the Story of the Band''에서 더 밴드의 곡들이 모든 멤버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며, 앨범에 기재된 작곡가 크레딧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71] 릭 댄코 역시 헬름의 주장에 동의하며 "레본의 책은 로비, 앨버트 그로스먼,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어디에서 잘못되었고 더 밴드가 밴드이기를 멈췄는지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언급했다.[71] 반면 로버트슨은 헬름이 자신이 작곡가로 등재된 어떤 곡에도 기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72] 실제로 레본 헬름이 솔로 아티스트로서 녹음한 스튜디오 앨범들—''레본 헬름'' (1978), ''아메리칸 선'', ''레본 헬름'' (1982), ''Dirt Farmer'', 그리고 ''Electric Dirt''—에는 그가 작곡가로 이름을 올린 곡은 단 한 곡("Growin' Trade", 래리 캠벨과 공동 작곡)뿐이다.[73][74] 이러한 작곡 크레딧 논쟁은 밴드 음악의 창작 방식과 기여도에 대한 멤버 간의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밴드 내부에서는 공연 활동보다 앨범 제작을 중시해야 한다는 로버트슨과, 공연 활동에 더 집중하기를 원했던 다른 멤버들 사이에 음악 활동 방향에 대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또한, 활동 과정에서의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리처드 매뉴얼이 알코올 및 약물 문제로 건강이 악화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버트슨은 1976년에 공연 활동 중단을 결정했지만, 헬름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은 해체나 활동 중단을 원하지 않았다.

더 밴드의 음악은 동시대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에릭 클랩튼은 더 밴드의 데뷔 앨범 ''뮤직 프롬 빅 핑크''를 "인생을 바꾼 앨범"이라고 평가했으며[107], 1976년에 발표된 클랩튼의 앨범 ''노 리즌 투 크라이''에는 더 밴드 멤버 전원이 참여하기도 했다. 클랩튼은 이후 자신의 앨범 ''어거스트''(1986)에 수록된 "홀리 마더(Holy Mother)"를 그 해 사망한 리처드 매뉴얼에게 헌정했으며, 2005년 앨범 ''백 홈'' 역시 레이 찰스 등과 함께 매뉴얼과 댄코에게 헌정했다.

1976년 11월 24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윈터랜드에서 열린 더 밴드의 고별 공연(라스트 왈츠)에는 로니 호킨스, 밥 딜런, 닐 영, 조니 미첼, 머디 워터스, 닥터 존, 반 모리슨,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론 우드, 폴 버터필드, 닐 다이아몬드, 바비 찰스 등 당대의 저명한 뮤지션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는 더 밴드가 활동 기간 동안 폭넓은 음악적 교류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이 공연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의해 영화 『라스트 왈츠 (The Last Waltz)』로 제작되었으며, 3장짜리 사운드트랙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

밴드 초창기, 로니 호킨스와 결별한 후 멤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가스 허드슨은 당시를 "히모와 창녀와 알코올 중독자와 인생의 패배자"들의 연주를 반복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유랑의 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영화 《라스트 왈츠》에서 매뉴얼은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워 멤버들이 큰 코트를 이용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쳤던 일화를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버트슨은 "배낭을 메고 길에 서서, 인생이라는 것을 모두 함께 배웠다. 우리들은 서로를 지키고 격려했다"고 말하며, 이러한 고난 속에서 밴드의 결속력이 더욱 단단해졌음을 시사했다.

더 밴드로서의 첫 공식 데뷔 공연은 1969년 4월 17일 샌프란시스코 윈터랜드에서 열렸다. 첫날 공연은 로버트슨이 인플루엔자에 걸리는 등 어려움 속에 7곡 정도만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와 관객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다음 날인 18일 공연에서는 로버트슨의 컨디션이 회복되면서 전날과는 확연히 다른 훌륭한 연주를 선보였고, 특히 앙코르 곡이었던 리틀 리처드의 "슬리핑 앤드 슬라이딩(Slippin' and Slidin')"에서는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로큰롤 역사에 남는 순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4. 멤버

더 밴드의 음악은 주로 오래된 컨트리 음악과 초기 로큰롤을 포함한 많은 요소를 융합했지만, 리듬 섹션은 종종 스택스모타운 스타일의 리듬 앤 블루스를 연상시켰다. 로비 로버트슨커티스 메이필드와 스테이플 싱어스를 주요 영향으로 언급하며 다양한 음악 장르의 융합을 이루었다. 싱어인 리처드 매뉴얼, 릭 덩코, 레본 헬름은 각자 더 밴드에 독특한 목소리를 부여했다. 헬름의 남부 억양은 그의 거칠고 파워풀한 보컬에서 두드러졌고, 덩코는 독특하게 끊어지는 발음으로 테너를 불렀으며, 매뉴얼은 팔세토와 소울풀한 바리톤을 오갔다. 싱어들은 정기적으로 하모니를 섞었다. 노래는 셋 사이에 거의 균등하게 분배되었지만, 덩코와 헬름 모두 매뉴얼을 더 밴드의 "리드" 싱어로 여겼다고 말했다.[68]

1971년 함부르크에서의 더 밴드: (왼쪽부터) 매뉴얼, 덩코, 로버트슨, 헬름.


모든 멤버는 여러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였다. 라이브 공연에서는 악기 교체가 거의 없었지만, 녹음 시에는 곡에 따라 다양한 악기 구성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가스 허드슨은 그의 Lowrey 오르간에서 다양한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헬름의 드럼 연주는 종종 칭찬을 받았는데, 평론가 존 캐롤은 헬름을 "당신을 울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드러머"라고 평했으며, 세션 드러머 짐 켈트너는 헬름의 몇 가지 기술을 차용했다고 인정했다.[69] 프로듀서 존 시몬은 ''Music from Big Pink''를 프로듀싱하고 연주했으며, ''The Band''를 공동 프로듀싱하고 연주했고, 1993년 더 밴드의 재결합 앨범 ''Jericho''까지 다른 곡들을 연주하며 더 밴드의 "여섯 번째 멤버"로 자주 언급된다.[70]

=== 주요 멤버 ===

이름활동 기간주요 악기 및 역할비고
릭 덩코 (Rick Danko)1965–1977, 1983–1999베이스 기타, 보컬, 기타, 더블 베이스, 바이올린1999년 사망
가스 허드슨 (Garth Hudson)1965–1977, 1983–1999키보드, 오르간, 색소폰, 아코디언, 목관악기, 금관악기
리처드 매뉴얼 (Richard Manuel)1965–1977, 1983–1986피아노, 드럼, 오르간, 보컬1986년 사망
로비 로버트슨 (Robbie Robertson)1965–1977기타, 보컬, 타악기, 피아노2023년 사망
레본 헬름 (Levon Helm)1967–1977, 1983–1999드럼, 보컬, 만돌린, 기타, 타악기, 베이스2012년 사망 (1965-1967년 잠시 탈퇴)



=== 후기 및 투어 멤버 ===

이름활동 기간주요 악기 및 역할비고
짐 와이더 (Jim Weider)1985–1999기타, 백 보컬, 베이스, 만돌린로버트슨 탈퇴 후 합류
스탠 설레스트 (Stan Szelest)1990–1991키보드1991년 사망
랜디 치알란테 (Randy Ciarlante)1990–1999드럼, 타악기, 보컬
리처드 벨 (Richard Bell)1992–1999키보드2007년 사망
존 시몬 (John Simon)1968–1977 (스튜디오)바리톤 호른, 일렉트릭 피아노, 피아노, 테너 색소폰, 튜바프로듀서, "여섯 번째 멤버"
테리 케이글 (Terry Cagle)1983–1985, 1986–1989드럼, 백 보컬2023년 사망
얼 케이트 (Earl Cate)1983–1985기타
어니 케이트 (Ernie Cate)1983–1985키보드
론 이오프 (Ron Eoff)1983–1985베이스
버디 케이지 (Buddy Cage)1986–1989페달 스틸 기타2020년 사망
프레드 카터 주니어 (Fred Carter, Jr.)1986–1989기타2010년 사망
잭 캐서디 (Jack Casady)1986–1989베이스
블론디 채플린 (Blondie Chaplin)1986–1989기타, 드럼, 백 보컬
조르마 카우코넨 (Jorma Kaukonen)1986–1989기타
스레드니 볼머 (Sredni Vollmer)1986–1989, 1990–1991하모니카2013년 사망
빌리 프레스턴 (Billy Preston)1991키보드, 백 보컬2006년 사망
아론 L. 허위츠 (Aaron L. Hurwitz)1992–1999아코디언, 오르간, 피아노a.k.a. Professor Louie



=== 멤버 구성 변화 (타임라인) ===

연도라인업 및 주요 활동
1965–1967
(레본 앤 더 호크스)
1967–1977
(클래식 라인업 - "더 밴드")
1977–1983
1983–1985
(재결성)
1985–1986
1986–1989
1990–1991
1992–1999


5. 음반 목록

더 밴드의 주요 음반과 참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상세한 내용은 각 하위 섹션을 참고할 수 있다.

발표 연도앨범명RIAA 인증[108]
정규 스튜디오 앨범
1968년뮤직 프롬 빅 핑크골드
1969년더 밴드플래티넘
1970년스테이지 프라이트골드
1971년카후츠
1973년문도그 매티니
1975년노던 라이츠 – 서던 크로스
1977년아일랜즈
라이브 앨범
1972년록 오브 에이지스골드
1974년비포 더 플러드 (밥 딜런과 함께)플래티넘
1978년더 라스트 왈츠
1995년Live at Watkins Glen
재결성 후 스튜디오 앨범
1993년예리코
1996년하이 온 더 호그
1998년주빌레이션
주요 컴필레이션 앨범 및 박스 세트
1975년더 베이스먼트 테이프스 (밥 딜런과 함께)골드
1976년The Best of the Band골드
1978년Anthology
1989년To Kingdom Come (박스 세트)
1994년Across The Great Divide (박스 세트)
1999년The Best of The Band, Vol. II
2000년Greatest Hits
2002년The Last Waltz (박스 세트)
2005년A Musical History (박스 세트)



'''밥 딜런과의 기타 공동 작업'''


더 밴드 멤버들은 밥 딜런의 다음 앨범 작업에도 참여했다.



'''영상 작품'''

  • ''라스트 왈츠'' (The Last Waltz) [1978]
  • ''The Band Is Back'' [1983]
  • ''The Band Japan Tour''
  • ''The Authorized Biography'' [1995]
  • ''Live at the New Orleans Jazz Festival'' [1996]
  • ''Classic Albums: The Band'' [1997]
  • ''Live at Loreley'' [2001]


'''기타 참여 작품'''

  • 로저 워터스 - ''The Wall – Live in Berlin'' [1990]
  • ''The 30th Anniversary Concert Celebration'' (밥 딜런 30주년 기념 콘서트) [1993]
  • 로니 호킨스 - ''Let it ROCK!'' (로니 호킨스 60세 생일 콘서트) [1995]
  • ''페스티벌 익스프레스'' (Festival Express) [2004]

5. 1. 스튜디오 앨범


  • ''빅 핑크 (Music from Big Pink)'' (1968)
  • ''The Band'' (1969)
  • ''스테이지 프라이트 (Stage Fright)'' (1970)
  • ''카후츠 (Cahoots)'' (1971)
  • ''문도그 매티니 (Moondog Matinee)'' (1973)
  • ''노던 라이츠 – 서던 크로스 (Northern Lights – Southern Cross)'' (1975)
  • ''아일랜즈 (Islands)'' (1977)
  • ''예리코 (Jericho)'' (1993)
  • ''하이 온 더 호그 (High on the Hog)'' (1996)
  • ''주빌레이션 (Jubilation)'' (1998)

5. 2. 라이브 앨범


  • ''Rock of Ages'' (1972): 1971년 12월 31일 뉴욕 아카데미 오브 뮤직 공연 실황을 녹음하여 1972년 여름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이다. 뉴올리언스 출신 뮤지션 앨런 투생이 편곡한 금관악기 섹션이 더해져 풍성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밥 딜런이 새해 전야 무대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하여 "When I Paint My Masterpiece"를 포함한 네 곡을 그룹과 함께 연주했다. 이 앨범은 RIAA로부터 골드 인증을 받았다.[108]
  • ''Before the Flood'' (1974): 밥 딜런과 함께 진행한 1974년 투어의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이다. 더 밴드와 딜런의 협연을 생생하게 기록했으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108]
  • ''The Last Waltz'' (1978): 1976년 11월 25일 샌프란시스코 윈터랜드 볼룸에서 열린 더 밴드의 고별 콘서트 실황과 스튜디오 녹음곡을 함께 수록한 앨범이다. 이 공연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의해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 ''Live at Watkins Glen'' (1995): 1973년 7월 뉴욕주 왓킨스 글렌에서 열린 서머 잼 페스티벌에서의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으로, 1995년에 발매되었다. 이 페스티벌에는 그레이트풀 데드, 올맨 브라더스 밴드 등도 참여했다.

5. 3. 밥 딜런과의 협업 앨범



1965년 늦여름, 밥 딜런은 첫 미국 "전기" 투어를 위한 백업 밴드를 찾고 있었다. 당시 레본 앤 더 호크스(Levon and the Hawks)로 활동하던 더 밴드는 블루스 가수 존 P. 해먼드의 추천과 딜런의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만의 비서 메리 마틴의 소개로 딜런과 연결되었다.[18][19][20][21] 로버트슨에 따르면, 그는 1965년 6월 존 P. 해먼드를 통해 콜롬비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딜런을 처음 만났고, 당시 딜런은 "Like a Rolling Stone"을 녹음하고 있었다.[101]

이후 딜런은 로비 로버트슨레번 헬름에게 먼저 백업 밴드 합류를 제안했으나, 로버트슨과 헬름은 다른 멤버들과의 의리를 지키며 호크스 전체를 고용할 것을 요구했다. 딜런은 이를 수락하여 밴드 전체와 함께 투어를 진행하기로 했다.[22] 밴드 멤버들은 이 기회를 통해 더 넓은 대중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했다.

1965년 9월 24일부터 더 호크스는 공식적으로 딜런의 백 밴드로서 투어를 시작했다.[101] 1965년 9월부터 1966년 5월까지, 그들은 "밥 딜런 앤 더 밴드(Bob Dylan and the Band)"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23] 하지만 딜런의 음악이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사운드로 전환되면서, 공연은 종종 포크 음악 순수주의자들의 야유와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지친 레번 헬름은 1965년 11월, 투어 시작 한 달여 만에 밴드를 떠났다.[24][102] 헬름은 고향인 아칸소 주로 돌아간 후, 멕시코 만의 석유 시추 시설에서 잠시 일했다.[25] 헬름의 빈자리는 미키 존스가 임시로 메웠다.

투어 중과 투어 사이에 딜런과 호크스는 여러 차례 녹음을 시도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1965년 10월과 11월 세션에서는 싱글 "Can You Please Crawl Out Your Window?"가 나왔고,[101][103][104] 1966년 1월에는 딜런의 다음 앨범 ''Blonde on Blonde''를 위한 녹음에서 "One of Us Must Know (Sooner or Later)"가 싱글로 발매되었다.[26] "One of Us Must Know" 녹음에는 딜런과 함께 드러머 바비 그레그, 베이시스트 댄코 (또는 빌 리), 기타리스트 로버트슨, 피아니스트 폴 그리핀, 오르간 연주자 알 쿠퍼가 참여했다.[27] 뉴욕에서의 더딘 작업에 실망한 딜런은 프로듀서 밥 존스턴의 제안으로 내슈빌에서 ''Blonde on Blonde'' 녹음을 이어갔고, 이 앨범에서는 로버트슨의 기타 연주가 두드러졌으나 다른 호크스 멤버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1966년 5월 17일, 영국 맨체스터의 프리 트레이드 홀 공연은 특히 유명하다. 딜런의 전기 세트 연주 중 한 관객이 "유다!"라고 외치자, 딜런은 "믿을 수 없어. 넌 거짓말쟁이야!"라고 응수한 뒤 밴드에게 "엄청 크게 연주해!"라고 외쳤고, 이어서 "Like a Rolling Stone"을 강렬하게 연주했다.[28] 이 공연은 해적판 음반으로 널리 퍼졌으며(초기에는 로열 앨버트 홀 공연으로 잘못 알려짐), 록 역사상 중요한 순간으로 평가받는다.[29] 이 공연은 1998년 ''The Bootleg Series Vol. 4: Bob Dylan Live 1966, The "Royal Albert Hall" Concert''라는 제목으로 공식 발매되었다.[30]

1966년 7월 29일, 딜런은 투어 휴식 중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활동을 중단하고 뉴욕주 우드스톡에서 칩거에 들어갔다.[31] 1967년, 딜런은 호크스 멤버들을 우드스톡으로 불렀고,[32] 릭 단코, 가스 허드슨, 리처드 마누엘은 근처 웨스트 소거티스에 "빅 핑크(Big Pink)"라는 별명의 분홍색 집을 빌려 거주했다. 이때 밴드를 떠났던 헬름도 다시 합류했다. 딜런과 더 밴드는 빅 핑크의 지하실 등에서 비공식적인 녹음 세션을 가졌는데, 이 녹음들은 ''The Basement Tape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음원들은 록 역사상 최초의 해적판 중 하나인 『Great White Wonder』 등으로 유출되었다.[33] 이 세션의 결과물은 1975년에 ''The Basement Tapes''라는 제목으로 일부가 공식 발매되었고, 2014년에는 ''The Bootleg Series Vol. 11: The Basement Tapes Complete''로 전체 내용이 공개되었다.

밥 딜런과 더 밴드가 함께 작업하여 발표한 주요 앨범은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더 밴드 멤버들은 딜런의 다른 앨범들, 예를 들어 ''Blonde on Blonde''(1966)의 일부 곡이나 ''Self Portrait''(1970), ''A Tribute To Woody Guthrie, Part 1''(1972)[109] 등에서 세션 연주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6. 유산 및 영향

1977년, 릭 댄코는 자신의 이름을 딴 데뷔 솔로 앨범을 발매했으며, 이 앨범에는 더 밴드의 나머지 네 멤버가 여러 트랙에 참여했다. 1984년 댄코는 버즈의 멤버, 플라잉 부리토 브라더스 등과 함께 "더 버즈 20주년 기념" 투어에 참여했다. 투어의 여러 멤버들은 쇼를 시작하기 위해 솔로 곡을 연주했는데, 댄코는 "미스터리 트레인"을 연주했다. 댄코는 또한 에릭 앤더슨과 요나스 피엘드와 함께 두 개의 합작 앨범을 발매했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여러 라이브 및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했다. 이 중 다수는 애런 L. 허위츠가 프로듀싱했으며 브리즈 힐/우드스톡 레코드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61]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레본 헬름은 여러 솔로 앨범을 발매하고 레본 헬름 앤 더 RCO 올스타즈라는 밴드와 함께 투어를 했다. 그는 또한 로레타 린의 아버지 역을 맡은 영화 ''광부의 딸''로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 헬름은 1983년 영화 ''필사의 도전''에서 샘 셰퍼드와 함께 내레이션과 조연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1997년에는 레본 헬름 앤 더 크로우매틱스의 CD ''기념품''이 발매되었다.[62] 1990년대부터 헬름은 뉴욕 우드스톡에 있는 자신의 집과 스튜디오에서 정기적으로 미드나잇 램블 콘서트를 열고 투어를 했다.[63] 2007년 헬름은 자신의 남부 뿌리에 대한 헌정 앨범인 ''Dirt Farmer''를 발매했는데, 이 앨범은 2008년 2월 9일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전통 포크 앨범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Electric Dirt''가 발매되어 초창기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아메리카나 앨범을 수상했다. 그의 2011년 라이브 앨범 ''Ramble at the Ryman''은 같은 부문에서 수상했다.[64]

더 밴드를 떠난 후, 로비 로버트슨음악 프로듀서가 되었고 (마틴 스코세이지의 여러 영화에서 음악 감독을 맡는 것을 포함하여) 영화 사운드트랙을 작곡했다. 이후 1987년 다니엘 라누아가 프로듀싱한 자신의 이름을 딴 앨범으로 솔로 경력을 시작했다. 로버트슨은 2023년 사망할 때까지 주로 영화 음악을 작곡했다.[65]

가스 허드슨은 2001년에 애런 (프로페서 루이) 허위츠가 프로듀싱한 ''북쪽 바다''와 2005년에 발매된 ''늑대에서의 라이브'' 두 개의 솔로 CD를 발매했으며, 두 앨범 모두 그의 아내 모드가 보컬로 참여했다. 그는 또한 활발히 활동하는 세션 뮤지션이었다. 그는 더 콜과 컨트리-인디 스타 네코 케이스의 음반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허드슨은 1986년 유니언 스퀘어 극장에서 스탠리 키스가 쓰고 브래드 메이스가 연출한 오프브로드웨이 작품 ''드래곤 슬레이어스''에 오리지널 전자 음악을 기여했는데, 이 작품은 199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새로운 캐스트로 다시 공연되었다. 2010년 허드슨은 더 밴드가 녹음한 곡을 커버한 캐나다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가스 허드슨 프레젠트: 더 밴드에 대한 캐나다 찬가''를 발매했다.

리처드 매뉴얼은 더 밴드 외에는 프로젝트가 거의 없었다. 그는 더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과 함께 에릭 클랩튼의 1976년 앨범 ''노 리즌 투 크라이''에 참여했다. 이 앨범에는 매뉴얼이 작곡한 오리지널 곡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러 트랙에서 그의 보컬과 드럼 연주가 담겨 있다. 매뉴얼은 이후 허드슨, 로버트슨과 함께 여러 영화 음악 작업에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분노의 주먹''과 ''컬러 오브 머니''가 포함된다. ''Whispering Pines: Live at the Getaway''는 2002년에 발매되었다.

2012년, 짐 바이더는 더 밴드의 음악을 커버하는 더 웨이트 밴드를 결성했으며, 레본 헬름 밴드와 릭 댄코 그룹의 전 멤버들이 함께 했다. 더 웨이트 밴드는 전국적으로 방송된 PBS 스페셜, 인피니티 홀 라이브에서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66] 쇼 이후, 밴드는 새로운 음악으로 구성된 동명의 앨범을 발표했다. 더 웨이트 밴드는 또한 우드스톡 사운드의 유산을 기념하는 캠프 크리플 크릭을 개최한다. 과거 게스트로는 재키 그린, ''빅 핑크'' 프로듀서 존 시몬, 존 세바스찬 등이 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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