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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뒤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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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르 뒤부아는 프랑스의 작곡가, 음악 교육자, 지휘자였다. 로마 대상 수상, 파리 음악원 원장 역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오페라, 발레, 종교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작곡했다. 특히 교육자로서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의 저서인 《대위법과 푸가》, 《화성법, 이론과 실천》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의 화성법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음악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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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뒤부아
기본 정보
테오도르 뒤부아
테오도르 뒤부아 (1896년)
본명프랑수아 클레망 테오도르 뒤부아
출생1837년 8월 24일
출생지로스네, 마른
사망1924년 6월 11일 (86세)
사망지파리
국적프랑스
직업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활동 기간1850년대 ~ 1920년대
스승앙브루아즈 토마
제자가브리엘 피에르네
플로랑 슈미트
폴 뒤카스
가브리엘 포레
조제프 카를 코에츠
음악 경력
장르클래식 음악
악기오르간

2. 생애와 경력

마른주로스네 출신으로, 처음에는 랭스 대성당의 교회 악장 루이 파나르에게 배웠고, 이후 파리 음악원에서 앙브루아즈 토마에게 사사했다. 1861년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보불 전쟁 때는 군인으로 참전했지만, 생상스와 교회에서 함께 연주하며 친분을 쌓았다. 1868년 마들렌 사원악장이 되었고, 1871년 세자르 프랑크의 뒤를 이어 생트 클로틸드 성당의 악장이 되었다. 1872년 8월 20일 피아니스트 잔느 뒤비나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며, 차남 샤를은 훗날 고고학자가 되었다. 1877년 생상스의 후임 오르가니스트로 마들렌 사원에 복귀했다. 1871년부터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며 폴 뒤카, 플로랑 슈미트 등을 가르쳤다.

1896년 스승 토마가 사망하자 파리 음악원 원장 직무를 맡았다. 그러나 1905년 로마 대상 심사에서 모리스 라벨이 참가 자격을 잃은 사건으로 큰 논쟁이 벌어졌고, 로망 롤랑이 공개 서한을 보내면서 논란이 커져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사건 발생 전에 이미 사임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후임 원장은 라벨의 스승인 가브리엘 포레였다.

뒤부아는 종교곡을 많이 작곡했지만,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고 싶어했다. 근동에 매료되어 작곡한 첫 무대 음악은 《''La guzla de l'émir''》였고, 첫 4막 오페라 《''Aben-Hamet''》였지만, 새로운 경지를 열지는 못했다. 또 다른 대작 오페라 《크사비에르 ''Xavière''》는 오베르뉴 지방을 배경으로, 과부가 된 어머니가 딸 크사비에르를 죽이려 하지만 사제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극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뒤부아는 발레 음악, 오라토리오, 교향곡도 작곡했다. 1922년 아내가 사망하자 작곡 의욕을 잃었고, 2년 후 그도 세상을 떠났다.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Les sept paroles du Christ''》(1867년)와 오르간곡 《토카타》(1889년)이다. 이 곡들은 가끔 연주되지만, 다른 많은 작품들은 거의 잊혀졌다.

2. 1. 초기 생애

뒤부아는 마른주 로스네 근처 랭스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음악과 관련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는 바구니 제작자였고, 그의 할아버지 장은 교사였다. 그의 어머니 셀리니 뒤부아(결혼 전 성씨 샤르보니에)는 직업이 없었고 주로 어린 테오도르를 키우는 데 시간을 보냈다. 뒤부아는 랭스 대성당의 성가대 지휘자 루이 파나르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로스네 시장 비콩트 외젠 드 브뢰유의 후원을 받아 피아니스트 장-앙리 라비나에게 소개받았다. 라비나의 인맥을 통해 뒤부아는 1854년 다니엘 오베르가 이끄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2] 그는 앙투안 프랑수아 마르몽텔에게 피아노를, 프랑수아 브누아에게 오르간을, 프랑수아 바쟁에게 화성을, 앙브루아 토마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1][3] 학생 시절에도 그는 1855년부터 생 루이 앵발리드에서, 1858년부터 생 클로틸드 (세자르 프랑크 아래)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1] 그는 화성, 푸가, 오르간 부문에서 잇따라 1등상을 받았고, 마침내 1861년 프랑스 최고의 음악상인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4][5]

높이 6층의 위풍당당한 하얀 건물 외부
빌라 데 메디치, 로마


로마 대상은 빌라 데 메디치에 있는 프랑스 로마 아카데미에서 충분한 보조금과 숙식, 수업을 제공했다. 1861년 12월부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뒤부아는 쥘 마스네를 비롯한 동료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다.[1] 그는 학업을 병행하며 로마와 주변 시골의 기념물을 방문했고, 시스티나 성당의 음악 공연에 참석했으며, 나폴리, 폼페이, 베네치아, 베로나, 만토바, 밀라노피렌체로 여행을 갔다. 그는 고전 양식의 서곡, 이탈리아 부파 오페라(''La prova di opera seria'' – 오페라 세리아의 리허설)와 마지막으로 장엄한 미사에서 자신의 인상을 음악적인 형태로 표현했다.[6] 로마에 있는 동안 그가 만난 저명한 음악가 중에는 프란츠 리스트가 있었는데, 그는 미사를 듣고 젊은 뒤부아를 격려했다.[6]

2. 2. 음악 활동

뒤부아는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와 악장으로 활동했다. 1866년 파리로 돌아온 뒤부아는 생트클로틸드 성당의 악장으로 임명되었고,[4] 1871년에는 마들렌 교회의 악장이 되었다.[8] 1877년 생상스가 마들렌의 오르간 연주자에서 은퇴하자 뒤부아가 그를 대신했고, 포레가 악장 자리를 이어받았다.[12]

뒤부아의 국립음악협회 동료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로맹 뷔신, 카미유 생상스, 가브리엘 포레, 세자르 프랑크


1871년 생상스와 로맹 뷔신이 국립음악협회를 설립했을 때, 뒤부아는 앙리 뒤파르, 포레, 프랑크 등과 함께 창립 멤버였다.[7]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71) 동안 그는 국민 방위군에 입대했다. 그의 전기 작가 위그 임베르는 "그와 생상스는 종종 에글리즈 드 라 마들렌에서 군복을 입고 만났는데, 한 사람은 예배당 합창단을 이끌고, 다른 사람은 대형 오르간에 올랐다"고 기록했다.[8]

뒤부아는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고자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873년 그의 1막 오페라 《에미르의 류트》(La Guzla de l'Emir)가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4] 1879년에는 오페라 코미크에서 그의 1막 희극 《르 팽 비스》(Le Pain bis)를 상연했다.[4] 1884년에는 그의 4막 오페라 《아벤-하메트》(Aben-Hamet)가 초연되어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30] 극장 재정 문제로 곧 문을 닫았다.[19]

뒤부아는 발레, 오라토리오, 교향곡,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1867)이며,[4] 그의 《G장조 토카타》(1889)는 정규 오르간 레퍼토리에 남아 있다.

2. 3. 교육 활동

그는 작곡가보다는 교육자 및 음악 이론가로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쳤으며, 『대위법푸가 ''Traité de contrepoint et de fugue''』와 『화성법, 이론과 실천 ''Traité d'harmonie théorique et pratique''』과 같은 저작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화성법은 앙리 루벨의 교본을 오랫동안 사용해 왔으나, 빠진 규칙이 많아 연습 문제와 약간의 규칙을 보충"한 책이 바로 "앙리 루벨의 화성 교본에 대한 보충 및 연습"이다. 이 책을 새롭게 개정하여 출판한 것이 바로 『화성법, 이론과 실천 ''Traité d'harmonie théorique et pratique''』이다.

뒤부아의 화성법에서는 "스트라빈스키 이후의 현대 화성은 다루지 않는다"라고 후기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고전 화성에 한정된 뒤부아 화성은 현재까지도 개정판이 발행되며 학습자들에게 표준으로 일본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일본에서의 주문은 "대위법과 푸가" 모두 매우 비싼 책이었지만, 현재는 퍼블릭 도메인으로 몇몇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마르셀 비치가 제창한 "근음 생략형"을 뒤부아는 일관되게 "근음 ''제거''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 위탁처인 Leduc사가 Traité de contrepoint et de fugue를 품절시켜 버려, amazon 등 온라인 판매 사이트에서는 해적판인 Nabu사에 의한 리프린트 입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Traité de contrepoint et de fugue는 루이지 케루비니의 튜토리얼에서 66년 후에 출판되었으며, 케루비니에 비해 금지 규칙의 수가 증가했다. 일본의 음악 대학이 전거로 삼은 것은 뒤부아 이후의 이론가들의 규칙이며, 그 이전의 이론가들의 규칙은 참조되지 않았다.

3. 주요 작품

뒤부아는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희망했지만, 종교곡, 발레 음악, 오라토리오, 교향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Les sept paroles du Christ)》(1867년)과 오르간곡 《토카타》(1889년)가 있다.[1]

3. 1. 오페라

초연일제목대본 및 원작초연 장소
1873년 4월 30일에미르의 류트(La Guzla de l'Emir)1막쥘 바르비에, 미셸 카레파리 아테네 극장[4]
1879년 2월 26/27일르 팽 비 (Le Pain bis)1막A. 브런즈윅, A.R. 드 보플랑파리 오페라 코미크 (파르바 극장)[4]
1884년 12월 16일아벤-하메트(Aben-Hamet)4막L. 데트로야, A. 드 로지에르파리 샤틀레 극장[30]
1895년 11월 26일자비에르(Xavière)3막L. 갈레, F. 파브르 원작파리 오페라 코미크 (리릭 극장)[31]


3. 2. 발레


  • 라 코리간(La Korrigane), 루이 메랑트 안무, 1880년 1월 12일, 파리 오페라 초연.[19]
  • 라 파란돌(La Farandole), 루이 메랑트 안무, 1883년 12월 14일, 파리 오페라 코미크 초연.[1]

3. 3. 종교 음악

뒤부아는 오페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를 희망했지만, 많은 종교 작품을 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Les Sept paroles du Christ)》(1867)이다.[1] 이 작품은 때때로 계속 공연되며, 라 마들렌의 교구 사제인 장-가스파르(1797-1871) 수도원장에게 헌정되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미사곡과 종교 작품을 작곡했다.

3. 4. 관현악


  • 피아노 협주곡 2번 바단조 (1897)
  • 바이올린 협주곡 (1896)
  • 프랑스 교향곡 (1908)

3. 5. 오르간


  • 《오르간 또는 피아노-페달을 위한 12개의 소품》(1889)에는 유명한 G장조 《토카타》(3번)가 포함되어 있다.[1]
  • 《오르간 또는 피아노-페달을 위한 12개의 새로운 소품》(1893)에는 《천국으로》(9번)가 포함되어 있다.[1]

3. 6. 저서

제목출판년도출판사
《H. 레베르의 조화론 보충을 위한 화성학 노트와 연구》1889년위겔
대위법푸가론》1901년위겔
《이론 및 실천 화성법론》1921년위겔
《테오도르 뒤부아의 화성론에 따른 저음 및 멜로디 실현》1921년위겔

[1]

그는 작곡가보다는 교육자 및 음악 이론가로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쳤으며, 《대위법푸가론》과 《화성법, 이론과 실천》과 같은 저작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1] 앙리 루벨의 화성학 교본을 오랫동안 사용해 왔으나, 빠진 규칙이 많아 연습 문제와 약간의 규칙을 보충한 책이 바로 《H. 레베르의 조화론 보충을 위한 화성학 노트와 연구》이다. 이 책을 새롭게 개정하여 출판한 것이 바로 《화성법, 이론과 실천》이다.[1]

뒤부아의 화성법에서는 "스트라빈스키 이후의 현대 화성은 다루지 않는다"라고 간략하게 언급하며, 고전 화성에 한정된 뒤부아 화성은 현재까지도 개정판이 발행되며 학습자들에게 표준으로 일본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대위법과 푸가"는 일본에서 매우 비싼 책이었지만, 현재는 퍼블릭 도메인으로 몇몇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1]

마르셀 비치가 제창한 "근음 생략형"을 뒤부아는 일관되게 "근음 ''제거''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 위탁처인 Leduc사가 《대위법과 푸가론》을 품절시켜, amazon 등 온라인 판매 사이트에서는 해적판인 Nabu사에 의한 리프린트 입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위법과 푸가론》은 루이지 케루비니의 튜토리얼에서 66년 후에 출판되었으며, 케루비니에 비해 금지 규칙의 수가 증가했다. 일본의 음악 대학이 전거로 삼은 것은 뒤부아 이후의 이론가들의 규칙이며, 그 이전의 이론가들의 규칙은 참조되지 않았다.[1]

4. 평가 및 영향

뒤부아는 생전에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나, 현재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잊혀졌다. 그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의 프랑스 음악 전통을 따르며, 선율적이고 화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하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La guzla de l'émir''》, 《''Aben-Hamet''》, 《크사비에르 ''Xavière''》 등을 작곡했지만 새로운 경지를 열지는 못했다. 현재 가장 알려진 작품은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Les sept paroles du Christ''》(1867년)와 오르간곡 《토카타》(1889년) 정도이다.[4]

교육자로서 뒤부아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당대 프랑스 음악계의 주류에서 벗어난 새로운 음악적 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1905년 로마 대상 심사에서 모리스 라벨이 참가 자격을 잃었을 때, 음악학자이자 작가인 로망 롤랑의 공개 서한으로 논란이 격화되자 책임을 지고 파리 음악원 원장직을 사임하기도 했다.[2] 그의 저서, 특히 《화성법, 이론과 실천》은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화성학 교재로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다.[5] 뒤부아가 한국 음악 교육에 끼친 영향은 주로 화성학 이론을 통해서이며, 그의 저서는 일본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다.[5]

5. 한국과의 관계

테오도르 뒤부아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의 저서와 음악 교육 방식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 음악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5. 1. 뒤부아 화성학의 영향

뒤부아의 저서 《화성법, 이론과 실천 ''Traité d'harmonie théorique et pratique''》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의 음악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고전 화성학의 규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 음악 대학에서 오랫동안 표준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뒤부아의 화성법은 스트라빈스키 이후의 현대 음악 화성 어법은 다루지 않아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참조

[1] 웹사이트 Dubois, (François Clément) Théodore https://www.oxfordmu[...] Oxford University Press 2021-05-24
[2] 문서 Imbert, p. 48
[3] 문서 Imbert, pp. 48–49
[4] 문서 Jullien, pp. 734–735
[5] 웹사이트 Théodore Dubois https://gallica.bnf.[...] 1924-08-08
[6] 문서 Imbert, p. 53
[7] 웹사이트 150ème anniversaire de la naissance de la Société nationale de musique https://www.concertc[...] 2021-05-24
[8] 문서 Imbert, p. 56
[9] 웹사이트 Dubois https://www.oxfordmu[...] Oxford University Press 2021-05-24
[10] 문서 Imbert, p. 57
[11] 웹사이트 Spectacles du 10 Mai 18 https://gallica.bnf.[...] 1873-05-10
[12] 문서 Jones, p. 33
[13] 문서 Noël and Stoullig (1880), pp. 178–179
[14] 문서 Nectoux (1991), p. 507
[15] 문서 Nectoux (1991), p. 39
[16] 문서 Imbert, p. 59
[17] 문서 Noël and Stoullig (1884), p. 24
[18] 문서 Imbert, p. 60
[19] 문서 Imbert, p. 61
[20] 문서 Duchen, p. 122; Gordon, p. 131; Johnson, p. 260; Jones, p. 78; Nectoux (1994), p. 63; and Smith, p. 137
[21] 문서 Massenet, p. 216; and Irvine, p. 204
[22] 웹사이트 Massenet, Jules http://www.oxfordmus[...] Oxford University Press 2021-05-24
[23] 문서 Nichols, p. 35; and Orenstein, p. 26
[24] 문서 Nectoux (1991), p. 269
[25] 문서 Orledge, p. 65
[26] 문서 Nectoux (1991), p. 267
[27] 문서 Nectoux (1991), p. 268
[28] 웹사이트 Théodore Dubois https://gallica.bnf.[...] 1924-06-20
[29] 웹사이트 Mort de Théodore Dubois https://gallica.bnf.[...] 1924-06-12
[30] 뉴스 The Drama in Paris 1884-12-27
[31] 뉴스 Xavière 189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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