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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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브리엘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그리고 음악 교육자였다. 1845년 프랑스 남부에서 태어나, 1854년 파리의 에콜 니데르마이어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는 클레망 로레, 카미유 생상스 등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생상스와의 60년에 걸친 우정을 통해 음악적 발전을 이루었다. 포레는 1865년 에콜 니데르마이어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렌과 파리의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며 작곡을 시작했다. 이후 파리 코뮌 시기에는 스위스로 피신하여 교직을 맡았고, 1871년 파리로 돌아와 생 쉴피스 교회의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 1874년에는 마들렌 교회로 옮겨 생상스의 대리 역할을 했으며, 1896년에는 마들렌 교회의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또한 국립 음악 협회의 창립 멤버이자 서기를 역임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05년에는 파리 음악원 원장으로 임명되어 교육 과정을 개혁했으며, 말년에는 청력 손실과 건강 악화로 은퇴했다. 포레는 프랑스 가곡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파반느, 레퀴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야상곡 등이 있다. 그는 1924년 파리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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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포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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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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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브리엘 유르뱅 포레 |
원어 이름 | Gabriel Urbain Fauré |
출생 | 1845년 5월 12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아리에주, 파미에 |
사망 | 1924년 11월 4일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활동 기간 | 1861년 - 1924년 |
음악 경력 | |
장르 | 낭만파 음악 |
직업 |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대학 교수 |
개인 정보 | |
배우자 | 마리 프레미에 (1883년 결혼) |
자녀 | 에마뉘엘 포레프리미에 (장남) 필립 포레프리미에 (차남) |
2. 생애
가브리엘 포레는 1845년 5월 12일 프랑스 남부 아리에주 주 파미에에서 투생-오노레 포레와 마리-앙투아네트-엘렌 라렌-라프라드 사이의 여섯 자녀 중 다섯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3] 포레 가문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가문이었지만, 19세기에는 재산이 줄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정육점 주인이었고 아버지는 교사가 되었다.[5] 1829년 그의 부모는 결혼했고, 그의 어머니는 하급 귀족의 딸이었다. 여섯 자녀 중 유일하게 음악적 재능을 보인 그는 네 살 때까지 양어머니와 함께 살았다.[6]
1849년, 그의 아버지가 푸아 근처 몽고지의 교사 양성 대학인 에콜 노르말 드 인스티튀에르의 학장으로 임명되자, 포레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돌아왔다.[7] 학교 예배당에서 하모늄을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던 그는 "나는 끔찍하게 연주했습니다. ... 전혀 방법이 없었고, 기술이 전혀 없었지만, 제가 행복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라고 회상했다.[8]
어떤 늙은 맹인 여성이 포레의 음악적 재능을 그의 아버지에게 알렸다.[6] 1853년 프랑스 국민의회의 시몽-뤼시앵 뒤포르 드 쏘비악은 포레의 연주를 듣고 그의 아버지에게 파리의 에콜 니데르마이어로 보낼 것을 권했다.[13] 1년간 고민한 끝에 포레의 아버지는 동의하여 1854년 10월 아홉 살 된 아들을 파리로 데려갔다.[14]
고향 교구의 주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포레는 11년 동안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15] 학교의 규칙은 엄격했고, 방은 어둡고, 음식은 형편없었으며, 정교한 제복을 입어야 했다.[9] 그러나 음악 교육은 훌륭했다.[9] 1861년 니데르마이어가 사망하자 카미유 생상스가 피아노 수업을 맡아 로베르트 슈만, 프란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를 포함한 당대 음악을 소개했다.[17] 포레는 생상스에 대해 깊은 존경심과 감사를 평생 동안 간직했다.[18] 생상스는 제자의 발전에 기쁨을 느꼈고, 그들 사이의 깊은 우정은 60년 후 생상스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0] 포레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많은 상을 받았고, 1865년 7월 오르간, 피아노, 화성학, 작곡 분야에서 수석 졸업생으로, 예배당 지휘자 자격증을 받고 학교를 졸업했다.[21]
니더마이어 학교를 졸업한 포레는 1866년 1월부터 브르타뉴 렌의 생소뵈르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4년 동안 재직했다.[22] 그는 개인 레슨으로 수입을 보충했고,[23] 생상스의 권유로 계속 작곡했지만, 이 시기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24] 렌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고, 본당 신부와도 관계가 좋지 않아 결국 사임했다.[25]
생상스의 도움으로 파리 북부 노트르담 드 클리냥쿠르 교회 부 오르가니스트직을 얻었으나,[26] 몇 달 후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다. 파리 포위 공격 해제 작전 등에 참여했고,[27] 크루아 드 게르 훈장을 받았다.[28]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파리 코뮌 기간, 포레는 스위스로 피신, 임시 이전한 니더마이어 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28] 이때 앙드레 메사주를 가르쳤다.[29] 1871년 10월 파리로 돌아온 포레는 샤를 마리 비도르 밑에서 생쉴피스 교회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29] 그는 생상스와 폴린 비아르도 살롱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14]
포레는 국립 음악 협회 창립 멤버였고,[32] 1874년 협회 서기가 되었다.[34] 그의 많은 작품이 협회 콘서트에서 초연되었다.[34]
1874년 포레는 마들렌 교회로 옮겨 생상스의 대리 역할을 했다.[35] 그는 즉흥 연주로 유명했고,[37] 생상스는 "원한다면 일류 오르가니스트"라고 평했다.[38] 그러나 포레는 오르간보다 피아노를 선호했다.[38]
1877년은 포레에게 중요한 해였다. 1월, 첫 번째 바이올린 소나타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40] 3월, 생상스 은퇴 후 포레는 마들렌 교회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40] 7월, 마리안느와 약혼했으나, 11월에 파혼했다.[42] 그는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고, 1878년부터 메사주와 함께 바그너 오페라를 보러 해외 여행을 다녔다.[43]
1883년, 포레는 조각가 에마뉘엘 프레미에의 딸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했다.[216] 결혼은 사랑으로 가득 찼지만, 마리는 집에 있는 것을 선호했고, 사교계에 함께 나가고 싶어하는 남편의 바람을 공유하지 않았다.[218] 부부는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는 에마뉘엘 포레-프레미에(1883년-1971년)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생물학자가 되었다.[220] 둘째 아들 필립(1889년-1954년)은 작가가 되었다.[221]
동시대의 증언에 따르면 포레는 여성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225] 1892년경부터 가수 엠마 발다크와 염문을 뿌렸고,[226] 1900년에는 알퐁스 아셀만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마르그리트 아셀만과 만났다. 이 관계는 포레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228]
포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마들렌 교회에서의 예배, 피아노와 화성 레슨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229] 작곡으로 얻는 대가는 적었다.[230] 이 시기 그는 많은 피아노곡과 가곡, 대규모 작품을 썼지만, 몇 차례 연주 후 대부분 파기하고, 모티브를 재활용했다.[182] 이 시기 작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에는 레퀴엠이 있다. 1887년에 착수하여 수년에 걸쳐 수정, 1901년에 최종본이 완성되었다.[231]
젊은 시절 포레는 명랑했지만, 30대부터 우울증 발작에 시달렸다.[182] 1890년 폴 베를렌의 가사로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시인이 술에 취해 리브레토가 도착하지 않아 중단되었다. 포레는 친구들이 걱정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 상태에 빠졌다.[235] 위너레타 싱어는 베네치아로 그를 초대했고, 정신을 회복한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 베를렌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5개의 베네치아의 노래』 제1곡을 완성했다.[237]
이 시기, 또는 그 직후에 포레와 엠마 발다크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 불륜으로 창작력의 폭발과, 연작 가곡 『온화한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음악의 새로운 독창성이 가져왔다는 데 전기 작가들은 동의한다.[239] 포레는 1894년부터 1897년에 걸쳐 피아노 2중주를 위한 모음곡 『돌리』를 작곡, "돌리"로 알려진 발다크의 딸 엘레느에게 헌정했다.
1890년대에 포레의 운세는 호전되었다. 1892년 파리 음악원 작곡 교수 에르네스트 질로가 사망하자, 생상스가 포레에게 공석에 지원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음악원 교수진은 포레를 위험할 정도로 현대적이라고 여겼고, 학장 앙브루아즈 토마는 그의 임용을 저지했다.[241] 그러나 포레는 프랑스 각지 음악원 조사관으로 채용되었다.[242]
1896년 앙브루아즈 토마가 사망하고, 테오도르 뒤부아가 음악원 학장을 계승했다. 포레는 마들렌 교회의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음악원 작곡 교수 마스네는 토마의 후임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종신 임기를 주장하며 너무 강하게 나왔다.[244] 선발에서 탈락한 그는 뒤부아가 대신 임명되자 분노한 채 교수직을 사임했다.[245] 그렇게 비게 된 직위에 포레가 임명되었다.[246] 포레는 모리스 라벨, 플로랑 슈미트, 샤를 케크랭, 루이 오베르 등 많은 젊은 작곡가들을 길러냈다.[182]
세기말에 쓰여진 작품에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영어 초연을 위해 쓰여진 부수 음악(1898년)과, 베지에 원형극장을 위해 작곡된 서정 비극 『프로메테』가 있다.
1903년부터 1921년에 걸쳐 포레는 『피가로』지에서 음악 평론을 했지만, 그는 이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182]
1905년, 로마 대상을 둘러싸고 프랑스 음악계에 스캔들이 터졌다. 라벨이 조기에 탈락했고, 많은 사람들은 보수적인 콘서바토리 내부 요소들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80] 뒤부아는 은퇴를 발표하고 즉시 물러났다.[81]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뒤부아의 자리에 임명된 포레는 행정과 교육 과정을 급진적으로 바꿨다. 그는 독립적인 외부 심사위원을 임명했고,[82] 교육 과정은 르네상스 음악에서부터 드뷔시의 작품까지 확장되었다.[83]
포레의 새로운 직책은 재정 상황을 더 좋게 만들었지만, 콘서바토리 운영으로 작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84] 이 시기 그의 작품으로는 서정 오페라 ''페넬로페''(1913) 등이 있다.[14]
1911년 포레는 마드리드 거리의 새로운 건물로 콘서바토리가 이전하는 것을 감독했다.[85]
1920년, 75세의 포레는 청력 손실과 허약함 때문에 파리 음악원을 은퇴했다.[14] 같은 해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를 받았다. 1922년 알렉상드르 밀랑 공화국 대통령은 포레를 위한 공개적인 헌정, 즉 전국적인 오마주(hommage)를 주도했다.[88]
포레는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이는 과도한 흡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주었다.[88]
말년 몇 달 동안 포레는 현악사중주 작곡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려 1924년 9월 11일, 사망하기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완성했다.[103] 사중주는 그의 사후 초연되었고,[104] 그는 말년에 사적으로 연주될 것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는데, 청력이 악화되어 음악 소리가 끔찍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105]
포레는 1924년 11월 4일, 7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마들렌 교회에서 국장을 치렀고 파리의 파시 묘지에 묻혔다.[106]
2. 1. 유년기
포레는 프랑스 남부 아리에주 주 파미에에서 투생-오노레 포레(1810~1885)와 마리-앙투아네트-엘렌 라렌-라프라드(1809~1887)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자녀 중 다섯째이자 막내 아들이었다.[3] 포레 가문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가문이었지만, 19세기에는 재산이 줄었다. 작곡가의 할아버지 가브리엘은 정육점 주인이었고 그의 아들은 교사가 되었다.[5] 1829년 포레의 부모는 결혼했다. 그의 어머니는 하급 귀족의 딸이었다. 그는 여섯 자녀 중 유일하게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그의 네 형제는 언론, 정치, 군대, 공무원으로 경력을 쌓았으며, 그의 누이는 공무원의 아내로 전통적인 삶을 살았다.[3]어린 포레는 네 살이 될 때까지 양어머니와 함께 살았다.[6] 1849년, 그의 아버지가 푸아 근처 몽고지의 교사 양성 대학인 에콜 노르말 드 인스티튀에르의 학장으로 임명되자, 포레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돌아왔다.[7] 학교에는 예배당이 있었는데, 포레는 여기서 하모늄을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나는 끔찍하게 연주했습니다. ... 전혀 방법이 없었고, 기술이 전혀 없었지만, 제가 행복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라고 회상했다.[8]
어떤 늙은 맹인 여성이 포레의 음악적 재능을 그의 아버지에게 알렸다.[6] 1853년 프랑스 국민의회의 시몽-뤼시앵 뒤포르 드 쏘비악은 포레의 연주를 듣고 그의 아버지에게 파리의 에콜 니데르마이어로 보낼 것을 권했다.[13] 1년간 고민한 끝에 포레의 아버지는 동의하여 1854년 10월 아홉 살 된 아들을 파리로 데려갔다.[14]
고향 교구의 주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포레는 11년 동안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15] 학교의 규칙은 엄격했고, 방은 어둡고, 음식은 형편없었으며, 정교한 제복을 입어야 했다.[9] 그러나 음악 교육은 훌륭했다.[9] 유능한 오르가니스트와 합창 지휘자를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니데르마이어는 교회 음악에 중점을 두었다. 포레의 교사는 오르간은 클레망 로레, 화성학은 피에르-루이 디에슈, 대위법과 푸가는 자비에르 바켄탈러, 피아노, 평성가와 작곡은 니데르마이어였다.[14]
1861년 3월 니데르마이어가 사망하자 카미유 생상스가 피아노 수업을 맡아 슈만, 리스트, 바그너를 포함한 당대 음악을 소개했다.[17] 포레는 생상스에 대해 "그때부터 그에 대한 거의 자식 같은 애정... 엄청난 존경심, 끊임없는 감사를 평생 동안 간직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18]
생상스는 제자의 발전에 큰 기쁨을 느꼈고, 가능한 한 그를 도왔다. 전기 작가 장-미셸 넥투는 포레의 경력의 각 단계에서 "생상스의 그림자가 실질적으로 당연시될 수 있다"고 말한다.[19] 그들 사이의 깊은 우정은 60년 후 생상스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0]
포레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그의 초기 합창 작품인 '장 라신의 찬가', 작품번호 11에 대한 작곡 부문 1등상도 포함된다.[14] 그는 1865년 7월 오르간, 피아노, 화성학, 작곡 분야에서 수석 졸업생(Laureat)으로, 그리고 예배당 지휘자(Maître de chapelle) 자격증을 받고 학교를 졸업했다.[21]
2. 2.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니더마이어 학교(École Niedermeyer)를 졸업한 포레는 1866년 1월부터 브르타뉴(Brittany) 렌(Rennes)의 생소뵈르 교회(Church of Saint-Sauveur) 오르가니스트로 4년 동안 재직했다.[22] 그는 개인 레슨으로 수입을 보충했고,[23] 생상스(Saint-Saëns)의 권유로 계속 작곡했지만, 이 시기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24] 포레는 렌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고, 본당 신부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설교 중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1870년 초 무도회 복장으로 일요일 미사에 나타나 사임을 요청받았다.[25]생상스의 도움으로 파리 북부 노트르담 드 클리냥쿠르 교회(church of Notre-Dame de Clignancourt) 부 오르가니스트직을 얻었으나,[26] 몇 달 후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다. 파리 포위 공격(Siege of Paris (1870-1871)) 해제 작전, 르 부르제(Le Bourget), 샹피니(Champigny), 크레테유(Créteil) 전투에 참여했고,[27] 크루아 드 게르(Croix de Guerre) 훈장을 받았다.[28]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파리 코뮌(Paris Commune) 기간, 포레는 랑부이예(Rambouillet)를 거쳐 스위스로 피신, 임시 이전한 니더마이어 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28] 이때 앙드레 메사주를 가르쳤다.[29] 이 시기 그의 작품에는 "새로운 음울함, 어두운 색조의 비극적 감각"이 나타난다.[30]
1871년 10월 파리로 돌아온 포레는 샤를 마리 비도르 밑에서 생쉴피스 교회(Église Saint-Sulpice, Paris)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29] 그는 여러 찬가(canticle)와 모테트(motet)를 작곡했지만, 일부만 남아 있다.[31] 생상스와 폴린 비아르도 살롱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14]
포레는 국립 음악 협회 창립 멤버였고,[32] 1874년 협회 서기가 되었다.[34] 그의 많은 작품이 협회 콘서트에서 초연되었다.[34]
1874년 포레는 마들렌 교회(Église de la Madeleine)로 옮겨 생상스의 대리 역할을 했다.[35] 그는 즉흥 연주로 유명했고,[37] 생상스는 "원한다면 일류 오르가니스트"라고 평했다.[38] 그러나 포레는 오르간보다 피아노를 선호했다.[38]
1877년 1월, 첫 번째 바이올린 소나타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40] 3월, 생상스 은퇴 후 포레는 마들렌 교회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40] 7월, 마리안느와 약혼했으나, 11월에 파혼했다.[42] 그는 바이마르(Weimar)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고, 1878년부터 메사주와 함께 바그너 오페라를 보러 해외 여행을 다녔다.[43]
2. 3. 장년기
1883년, 포레는 조각가 에마뉘엘 프레미에의 딸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했다.[216] 네크튀는 마리에 대해 "아름다움도, 재치도, 행운도 없고 (중략) 옹졸하고 냉담하다[217]"라고 말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포레는) 그녀에게 향하는 친절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결혼은 사랑으로 가득 찼지만, 마리는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성격이었고, 사교계에 함께 나가고 싶어하는 남편의 바람을 공유하지 않았다.[218] 또한 포레가 자주 집을 비우는 것과 가정 생활을 혐오하는 것, 그리고 그가 집에 있는 동안 불륜을 저지르는 것에 분노했다. 포레는 마리를 친구이자 동료로 여기고 집을 떠날 때마다 편지를 썼지만, 그녀는 그의 열정적인 성격을 공유하지 않았고, 그 열정은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219] 부부는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는 에마뉘엘 포레-프레미에(1883년-1971년, 마리가 자신의 성과 합성해서 쓰도록 강력하게 주장했다)[218]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생물학자가 되었다.[220] 둘째 아들 필립(1889년-1954년)은 작가가 되었다.[221]동시대의 증언에 따르면 포레는 여성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뒤셰는 "파리 살롱에서 그가 구애하여 성공한 상대는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225] 1892년경부터 가수 엠마 발다크와 염문을 뿌렸고,[226] 작곡가 아딜라 마디손과 친밀해졌으며,[227] 1900년에는 알퐁스 아셀만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마르그리트 아셀만과 만났다. 이 관계는 포레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고, 그는 아셀만에게 파리의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녀는 공공연히 그의 동반자로 행동했다.[228]
포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마들렌 교회에서의 매일 예배, 피아노와 화성 레슨에 쏟았다.[229] 작곡으로 얻는 대가는 쥐꼬리만 했다. 출판사가 작품을 현금으로 매입했고, 가곡 한 곡당 60프랑을 지불한 후 포레는 인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230] 이 시기에 그는 많은 피아노곡과 가곡 외에도 대규모 작품을 여러 개 썼지만, 몇 차례 연주 후 대부분 파기하고, 모티브를 재활용하기 위해 몇몇 악장만 남겨두었다.[182] 이 시기 작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에는 레퀴엠이 있다. 1887년에 착수하여 수년에 걸쳐 수정과 가필을 거듭하여 1901년에 최종본이 완성되었다.[231] 1888년 초연 후 담당 사제는 포레에게 "우리는 이 신작이 필요 없습니다. 마들렌의 레퍼토리는 충분히 풍부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33]
젊은 시절의 포레는 매우 명랑했다. 친구 중 한 명은 "젊고, 어느 정도는 어린아이 같을 정도로 쾌활한" 성격이었다고 적었다.[234] 30대부터는 우울증 발작에 시달렸고, 그는 이를 "비장(간질의 의미)"이라고 표현했다. 그 시작은 약혼 파기,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얻지 못한 데 있었을 것이다.[182] 1890년에는 폴 베를렌의 가사로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영광스럽고 수익성이 좋은 위촉 제안이 있었지만, 당시 시인이 술에 취해 리브레토가 도착하지 않아 중단되었다. 포레는 친구들이 그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 상태에 빠져들었다.[235] 포레의 좋은 친구였던 위너레타 싱어는 그랜드 캐널에 "궁전"을 소유하고 있던 베네치아로 그를 초대했다.[236] 정신을 회복한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하여 베를렌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5개의 베네치아의 노래』 제1곡을 완성했다. 오페라 건으로는 최악의 경험을 했지만, 포레는 그의 시를 계속 칭찬했다.[237]
이 시기, 또는 그 직후에 포레와 엠마 발다크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뒤셰는 "40대 후반에 접어들었던 그는 처음으로 충족되고, 열정적인 관계를 경험했고, 이것은 수년에 걸쳐 확대되어 갔다"는 것이다.[238] 주요 포레 전기 작가들은 이 불륜으로 창작력의 폭발과, 연작 가곡 『온화한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음악의 새로운 독창성이 가져왔다는 데 동의한다.[239] 포레는 1894년부터 1897년에 걸쳐 피아노 2중주를 위한 모음곡 『돌리』를 작곡하여 "돌리"로 알려진 발다크의 딸 엘레느에게 헌정했다. 포레가 돌리의 아버지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네크튀나 뒤셰 등 전기 작가들은 그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다. 포레와 엠마 발다크의 불륜 관계는 돌리의 탄생 후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지만, 어느 쪽 주장에도 결정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40]
1890년대에 포레의 운세는 호전되었다. 파리 음악원 작곡 교수 에르네스트 질로가 1892년에 사망하자, 생상스가 포레에게 공석에 지원할 것을 권했다. 음악원 교수진은 포레를 위험할 정도로 현대적이라고 여겼고, 학장 앙브루아즈 토마는 "포레라고? 말도 안 돼! 만약 그가 채용된다면 나는 사임하겠다"라고 선언하며 임용을 저지했다.[241] 그러나 포레는 질로의 다른 직책이었던 프랑스 각지 음악원 조사관으로 채용되었다.[242] 그는 이 직업에 따른 전국 순회 여행을 싫어했지만,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아마추어 학생을 가르칠 필요가 없어졌다.[243]
1896년 앙브루아즈 토마가 사망하고, 테오도르 뒤부아가 음악원 학장을 계승했다. 포레는 뒤부아의 후임으로 마들렌 교회의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 인사에는 더 큰 여파가 있었다. 음악원 작곡 교수 마스네는 토마의 후임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종신 임기를 주장하며 너무 강하게 나왔다.[244] 선발에서 탈락한 그는 뒤부아가 대신 임명되자 분노한 채 교수직을 사임했다.[245] 그렇게 비게 된 직위에 포레가 임명되었다.[246] 포레는 모리스 라벨, 플로랑 슈미트, 샤를 케크랭, 루이 오베르, 장 로제-뒤카스, 조르제 에네스쿠, 폴 라드밀로, 알프레도 카젤라, 나디아 불랑제 등 많은 젊은 작곡가들을 길러냈다.[182] 포레는 제자들에게 기본적인 기술의 확실한 기초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앙드레 제달주에게 그 역할을 위임했다.[247] 그의 역할은 각 학생이 그러한 기술을 각자의 재능에 맞는 형태로 사용하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로제-뒤카스는 "그는 학생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워 담아, 손안에서 형식의 규칙을 만들어낸다(중략) 그리고 사례를 참고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거장의 것으로부터 인용되는 것이었다."라고 적었다.[248] 라벨은 교사로서의 포레의 관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라벨의 현악사중주곡을 받은 포레는 평소보다 열정이 부족한 모습이었지만, 원고를 다시 보여달라고 한 후, 며칠 후 "내가 잘못되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249] 음악학자 앙리 프뤼니에르(Henry Prunières)는 "포레가 제자들 속에서 키워낸 것은 화성의 감수성, 순수한 선율, 예상치 못한 색채가 풍부한 변조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스타일을 따른 작곡의 비결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 덕분에 모두가 다르고, 종종 반대 방향으로 자신의 길을 찾고, 발견해 나갔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250]
세기말에 쓰여진 작품에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영어 초연을 위해 쓰여진 부수 음악(1898년)과, 베지에 원형극장을 위해 작곡된 서정 비극 『프로메테』가 있다. 야외 공연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프로메테』에는 대규모 관현악과 성악이 사용되고 있다. 1900년 8월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베지에, 그리고 1907년에는 파리에서도 재연되었다. 일반적인 가극장식 오케스트레이션으로 고쳐 쓴 판도 제작되어, 1917년 5월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후 파리에서 40회가 넘는 공연을 거듭했다.
1903년부터 1921년에 걸쳐 포레는 『피가로』지에서 음악 평론을 했지만, 그는 이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타고난 친절함과 관용으로 인해, 그는 작품의 좋은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네크튀는 적고 있다.[182]
2. 4. 파리 음악원 원장
1905년, 프랑스 최고의 음악상인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둘러싸고 프랑스 음악계에 스캔들이 터졌다. 포레의 제자 라벨이 여섯 번째 도전에서 조기에 탈락했고, 많은 사람들은 보수적인 콘서바토리 내부 요소들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다.[80] 뒤부아는 많은 비난을 받자 은퇴를 발표하고 즉시 물러났다.[81]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뒤부아의 자리에 임명된 포레는 행정과 교육 과정을 급진적으로 바꿨다. 그는 입학, 시험 및 경쟁에 대해 독립적인 외부 심사위원을 임명했는데, 이는 사립 제자들에게 특혜를 제공했던 교수진을 격분시켰다. 상당한 추가 수입을 박탈당했다고 느낀 많은 교수들이 사임했다.[82] 포레는 콘서바토리에서 가르치는 음악의 범위를 현대화하고 확장하면서 반발하는 구세대 구성원들로부터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넥투(Nectoux)의 말처럼, "오베르, 알레비, 특히 메이어베어가 최고로 군림했던 곳... 이제 라모의 아리아나 심지어 지금까지 콘서바토리 벽 안에서는 금지된 이름이었던 바그너의 음악까지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83] 교육 과정은 르네상스 음악에서부터 드뷔시의 작품까지 확장되었다.[83]포레의 새로운 직책은 그의 재정 상황을 더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작곡가로서 훨씬 더 널리 알려지게 된 반면, 콘서바토리를 운영하는 일은 그가 오르가니스트와 피아노 교사로 생계를 꾸리느라 고군분투하던 때보다 작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게 했다.[84] 작업 연도가 끝나자마자 7월 말에 그는 파리를 떠나 10월 초까지 보통 스위스 호숫가의 호텔에서 두 달을 보내며 작곡에 집중했다.[85] 이 시기 그의 작품으로는 서정 오페라 ''페넬로페(Pénélope)''(1913)과 그의 가장 특징적인 후기 가곡(예: 1910년에 완성된 가곡집 ''에브의 노래(La chanson d'Ève)'', 작품 95) 및 피아노곡(야상곡 9-11번; 바카롤 7-11번, 1906년부터 1914년 사이에 작곡)이 있다.[14]
1911년 포레는 마드리드 거리(rue de Madrid)의 새로운 건물로 콘서바토리가 이전하는 것을 감독했다.[85]
2. 5. 말년과 유산
1920년, 75세의 포레는 점점 심해지는 청력 손실과 허약함 때문에 파리 음악원을 은퇴했다.[14] 같은 해 그는 음악가에게는 드문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를 받았다. 1922년 알렉상드르 밀랑 공화국 대통령은 포레를 위한 공개적인 헌정, 즉 전국적인 오마주(hommage)를 주도했는데, 이는 『뮤지컬 타임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소르본느에서 열린 훌륭한 기념 행사로, 프랑스의 가장 저명한 예술가들이 참여했으며, 그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그것은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자신의 작품 연주회에 참석했지만 단 한 음도 들을 수 없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앞을 응시하고 앉아 있었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만족해했다."[88]포레는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이는 과도한 흡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 6인조의 멤버들을 포함한 젊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주었다.[88] 넥투는 "그는 노년에 어떤 종류의 평온함에 도달했지만, 그의 놀라운 정신적 활력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1875년에서 1895년 사이에 작곡한 작품들의 관능주의와 열정에서 벗어났다."라고 썼다.[14]
말년 몇 달 동안 포레는 현악사중주 작곡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0년 전 그는 모리스 라벨의 현악사중주 작품의 헌정자였다. 라벨과 다른 이들은 포레에게 자신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여러 해 동안 거절했다. 마침내 작곡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피아노가 없는 현악 사중주를 시작했어. 이것은 특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유명하게 만든 장르이고, 베토벤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장르야."라고 말했다.[102] 그는 1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려 1924년 9월 11일, 사망하기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완성하기 위해 긴 시간 작업했다.[103] 사중주는 그의 사후 초연되었고,[104] 그는 말년에 사적으로 연주될 것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는데, 그의 청력이 악화되어 음악 소리가 그의 귀에 끔찍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105]
포레는 1924년 11월 4일, 7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마들렌 교회에서 국장을 치렀고 파리의 파시 묘지에 묻혔다.[106]
포레 사후 파리 음악원은 그의 급진적인 면을 버리고 새로운 음악 경향에 저항했으며, 포레 자신의 화성 기법이 현대성의 극한으로 여겨져 학생들은 그 이상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108] 1922년부터 1941년까지 파리 음악원 원장을 지낸 그의 후임자 앙리 라보는 "현대주의는 적이다"라고 선언했다.[107] 전쟁 사이에 태어난 학생 세대는 이러한 시대에 뒤떨어진 전제를 거부하고, 벨라 바르토크, 제2 빈 악파, 그리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최신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108]
1945년 100주년 기념 헌정에서 음악학자 레슬리 오리는 『뮤지컬 타임즈』에 다음과 같이 썼다. "'생상스보다 더 심오하고, 랄로보다 더 다양하며, 댕디보다 더 자발적이고, 드뷔시보다 더 고전적인 가브리엘 포레는 프랑스 음악의 탁월한 거장이며, 우리 음악 천재성의 완벽한 거울이다.' 아마도 영국 음악가들이 그의 작품을 더 잘 알게 된다면, 로제 뒤카스의 이 말은 과찬이 아니라 그의 마땅한 몫으로 여겨질 것이다."[109]
3. 음악적 특징
포레는 프랑스 예술 가곡, 즉 멜로디(mélodie)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14] 라벨은 1922년에 포레가 독일 리트(Lied)의 영향에서 프랑스 음악을 구했다고 평가했다.[117] 1911년, 피아니스트이자 작가인 로이 하우엇과 음악학자 에밀리 킬패트릭은 포레의 가곡이 전 세계 음악원과 독주회에서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고 언급했다.[119]
포레는 여러 가곡집을 작곡했는데, 베니스의 다섯 개의 멜로디(Cinq mélodies "de Venise")》(Op. 58, 1891)는 음악적 주제를 반복 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곡 모음곡으로 묘사된다. 후기 작품 중에는 샤를 뱅 뢰르베르그(Charles van Lerberghe)의 시에서 따온 《이브의 노래(La chanson d'Ève)》(1910)와 《닫힌 정원(Le jardin clos)》(1914)와 같은 순환곡이 있다.[121]
1888년 초연된 진혼곡(Op. 48)은 "즐거움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부드러운 음색 때문에 "죽음의 자장가"로 묘사되기도 한다.[122] 포레는 진노의 날(Dies irae)을 생략했지만, 베르디처럼 일반 전례문에 Libera me를 추가했다.[123]
포레의 오페라는 정기 레퍼토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페넬로페(Pénélope)》(1913)는 레치타티보(leitmotif)를 사용하고 영웅적인 음색을 요구하지만, "분명히 비극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20][126] 그의 작곡 스타일은 20세기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유명한 작품으로는 '파반느', 레퀴엠, '시실리엔느', 피아노를 위한 밤의 노래, 가곡 "꿈의 뒤에", "달빛" 등이 있다.
3. 1. 음악사적 위치
아론 코플랜드는 포레의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지만, 다른 많은 작곡가들과 달리 초기와 후기 작품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코플랜드는 초기 작품에서도 후기 포레의 특징을 발견했고, 노년의 작품에서도 초기 포레의 흔적을 찾았다.[20] 포레가 태어났을 때, 베를리오즈와 쇼팽은 여전히 작곡 활동을 하고 있었고, 쇼팽은 포레의 초기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110] 말년에 포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예고하는 작곡 기법을 개발했고,[111] 이후에는 재즈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112] 뒤쉔은 '장 라신의 찬가'와 같은 초기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전통을 따르지만, 후기 작품은 제자들의 작품만큼이나 현대적이라고 평가했다.[113]포레에게 영향을 준 작곡가로는 쇼팽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와 슈만도 있었다. '레코드 가이드'(1955)의 저자들은 포레가 모차르트에게서 절제와 아름다움을, 쇼팽에게서 자유로운 음조와 긴 선율을, 슈만에게서 발전 부분의 풍부함과 코다의 밝음을 배웠다고 썼다.[114] 그의 작품은 에콜 니더마이어에서 쥐스타브 르페브르로부터 얻은 화성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14] 르페브르는 특정 화음을 "불협화음"으로 금지하지 않는 화성 이론을 제시했다.[14] 포레는 미해결의 부드러운 불협화음과 색채 효과를 사용하여 인상주의 작곡가의 기법을 예고했다.[167]
포레의 리듬은 미묘하고 반복적이며, 선율의 흐름을 깨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브람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신중한 싱코페이션을 사용했다.[14] 코플랜드는 그를 "프랑스의 브람스"라고 불렀다.[20] 음악 평론가 제리 두빈스는 포레가 "브람스의 후기 독일 낭만주의와 드뷔시의 프랑스 인상주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나타낸다"고 말했다.[115]
색빌-웨스트와 셰이-테일러는 포레의 후기 작품은 초기 음악의 쉬운 매력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달콤한 낭만적 화성은 나중에 엄격한 단색 스타일로 바뀌었고, 많은 화성 전환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동시에 사용되는 여러 음조 중심의 인상을 만들어냈다."[116]
''베이커 음악가 전기 사전''(2001)은 포레의 작곡가로서의 위상이 변함없다고 결론짓는다. 포레는 독자적인 음악적 어법을 개발하고, 오래된 양식을 미묘하게 적용하여 새로운 예술의 분위기를 불러일으켰으며, 해결되지 않은 부드러운 불협화음과 색채 효과를 사용하여 인상주의적 기법을 예고했다. 그의 피아노 작품에서는 기교를 피하고 하프시코드 프랑스 거장들의 고전적 명료성을 선호했으며, 그의 노래의 명확하게 표현된 선율은 프랑스 성악 음악의 최고 전통을 따른다. 그의 위대한 레퀴엠과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는 일반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167]
포레의 전기 작가 넥투는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 포레가 프랑스 가곡의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널리 여겨지며, ''멜로디''와 함께 실내악 작품이 "포레의 음악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평가했다.[14] 비평가 로버트 올리지는 포레의 천재성이 음계와 조성, 고뇌와 평온, 유혹과 힘과 같은 상반되는 요소들을 조화시키는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명백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품질은 그의 천재성의 놀라운 측면이며, 그의 유일한 현악 4중주곡의 간결하고 함축적인 스타일은 그의 매우 자기 훈련된 스타일이 사망 당시에도 여전히 발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168]
포레는 리스트, 베를리오즈, 브람스 등이 활동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다조, 무조 작품, 미분음, 십이음 기법 등이 시도되던 시기에 말년을 맞이했다. 특히 바그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며, 동시대 작곡가들은 바그너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포레의 음악은 절충적인 양상을 보인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거부했지만, 포레는 오페라 『페네로페』에서 리트모티프를 채용하는 등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아류가 되지는 않았다. 형식면에서는 생상스의 고전주의에 머물지 않았다. 한편, 그의 작품 형태는 당시 유행을 따르지 않고, 고전주의적인 악곡 형식을 채용했다. 조성에서는 빈번한 전조 속에 때때로 무조적인 울림도 삽입되지만, 선율이나 조성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음계에서는 선법성이나 드뷔시가 확립한 전음계를 도입하고 있지만, 이것들에게 지배되거나 기반하지는 않았다.
포레의 음악은 극적인 표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 관현악을 거느린 대작은 적다. 하지만, 화성의 영역에서는 샤브리에와 함께 드뷔시, 라벨로 이어지는 존재이며,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3. 2. 포레 음악의 변천
라벨을 비롯한 제자들의 영향과 청력 문제 등으로 인해 포레의 음악은 시기별로 변화를 겪었다. 포레의 음악은 보통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 초기에는 쇼팽 등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인 특징을 보였으며, 중기에는 보다 독자적인 어법을 발전시켰다. 후기에는 청력 상실과 함께 내면적이고 복잡한 음악 세계를 탐구했다.[20]1905년, 로마 대상(Prix de Rome)을 둘러싼 스캔들로 인해 콘서바토리 원장직을 맡게 된 포레는 행정과 교육 과정을 개혁했다. 그는 입학과 시험에 외부 심사위원을 도입하고, 르네상스 다성음악부터 드뷔시의 작품까지 교육 과정을 확대했다.[82][83]
콘서바토리 원장직은 포레의 재정 상황을 개선시켰지만, 작곡에 전념할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는 여름 휴가 동안 작곡에 집중했으며, 이 시기에 오페라 ''페넬로페(Pénélope)''와 가곡집 ''에브의 노래(La chanson d'Ève)'' 등을 작곡했다.[85][14]
1909년, 포레는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라벨 등 젊은 작곡가들과 함께 독립음악협회(Société musicale indépendante)를 결성하여 새로운 음악을 육성하는 데 힘썼다.[86]
20세기 초, 포레의 음악은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얻었다.[89] 그는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에서 연주하기도 했으며, 엘가 등과 교류했다.[90]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포레는 프랑스에 남아 작곡을 계속했다. 그는 음악에서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보편적인 예술 언어를 추구했다.[99]
1920년, 포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를 받았으며, 1922년에는 그를 위한 국가적인 오마주(hommage) 행사가 열렸다.[88]
말년에 포레는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젊은 작곡가들을 지원하고 현악 4중주를 작곡하는 등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103]
포레 사후, 파리 음악원은 한동안 그의 급진적인 면을 배제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젊은 세대는 포레의 음악에서 영감을 얻었다.[108]
아론 코플랜드는 포레의 작품이 시기에 따라 급격한 변화를 보이지 않으며, 초기와 후기 작품 모두에서 그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20] 포레의 화성과 선율 스타일은 동시대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11]
3. 3. 아르누보와의 관련성
포레 연구가 장-미셸 네크튀(Jean-Michel Nectoux)는 저서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에서 당대 문학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포레의 음악에 매료되었으며, 프루스트와 포레를 모두 아르누보에 속하는 예술가로 지칭했다. 그는 "구불구불 서로 얽혀 있는 긴 프레이즈와 항상 등장하는 꽃과 관련된 주제는 바로 1900년대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44]일반적으로 아르누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장식미술·디자인에 적용되는 양식 개념이며, 네크튀의 주장은 이것을 문학, 음악으로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적은 아르누보가 지닌 장식성이나, 대조가 아닌 곡선을 중시하는 표현성을 포레의 음악성과 통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포레의 또 다른 측면이 보이는데, 장식적인 음형이 멜로디에 동화되어 있는 점에서는 초기 가곡 『꿈을 꾼 후에』가 먼저 거론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뱃노래를 비롯한 작품에서 아르페지오에 대한 기울기는 말년까지 볼 수 있는 특징이다.
3. 4. "살롱 음악" 작곡가인가?
포레는 당시 살롱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에, 드뷔시를 비롯하여 포레의 작품을 "살롱 음악"으로 축소하여 받아들이는 풍조가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히 중기부터 말년에 이르는 포레의 음악은 규모가 작은 작품에서도 단지 부드럽고 우아하며 세련되었다고만 할 수 없다. 그는 전통적인 모든 기법을 구사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흐르는 음의 흐름을 독자적인 정밀한 구성으로 정리하였다.4. 주요 작품
포레의 잘 알려지고 친숙한 곡들은 대개 초기 작품이지만, 후기로 갈수록 화성적, 선율적으로 복잡성이 증가했으며 높이 평가받는 걸작 대부분은 후기에 만들어졌다. 그의 작품 중 유명한 것으로는 파반느, 레퀴엠, '시실리엔느', 피아노를 위한 밤의 노래, 가곡 "꿈의 뒤에", "달빛" 등이 있다.
다음 「Op.」 이하의 숫자는 작품번호를 나타낸다. 전체 목록은 가브리엘 포레의 작품 목록을 참조한다.
포레는 구노의 영향을 받은 초기 가곡 (아프레 엉 레브" , "Au bord de l'eau")을 포함하여, 20년 동안 60여 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멜로디'(mélodie)의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14] "Les berceaux", "Les roses d'Ispahan", 특히 "Clair de lune"는 "너무 아름답고 완벽해서 심지어 미국까지 진출했다"는 평을 받는다.[20]
포레는 여러 개의 가곡집도 작곡했다. 《베니스의 다섯 개의 멜로디(Cinq mélodies "de Venise")》(Op. 58, 1891)는 음악적 주제를 반복 사용하는 새로운 종류의 가곡 모음곡이며, 《La bonne chanson》(Op. 61, 1894)에는 다섯 개의 주제가 있다.[120] 포레는 《선한 노래》가 자신의 가장 즉흥적인 작품이었으며, 엠마 발다크가 매일 새로 쓰인 악보를 그에게 불러주었다고 회상한다.
포레는 오케스트레이션보다 실내악 작곡에 더 큰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피아노와 현악기를 위한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포레의 주요 피아노 작품으로는 13개의 야상곡, 13개의 바카롤(뱃노래), 6개의 즉흥곡, 그리고 4개의 왈츠 카프리스가 있으며, 그의 긴 음악 활동 기간 동안 작곡되었다. 이 작품들은 단순하고 젊은 매력이 넘치는 초기 스타일에서 중년 시절의 격동기를 거쳐 마지막에는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때로는 열정적인 내면의 성찰로 변화하는 그의 스타일 변화를 보여준다.[20]
포레에게는 현재는 거의 상연되지 않는 프로메테와 페네로페 두 편의 대작 오페라가 있다.[1]
4. 1. 관현악곡
포레는 오케스트레이션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때때로 장 로제 뒤카스나 샤를 꾀흘랭 같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콘서트와 극장 작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부탁했다. 넥투의 말에 따르면, 포레의 절제된 오케스트라 스타일은 "확실한 미적 태도... 음색의 개념은 포레의 음악적 사고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를 반영한다.[136] 그는 화려한 음색 조합에 매료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자기 만족이거나 진정한 음악적 발명의 부족을 감추는 것으로 생각했다.[14] 그는 제자들에게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실로폰, 종 또는 전자 악기 없이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137]포레의 잘 알려진 오케스트라 작품으로는 그가 직접 오케스트레이션한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희극적 오락 또는 ''디베르티스망 코미크''를 위한 음악을 바탕으로 함),[139] 돌리(앙리 라보가 오케스트레이션),[140]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을 위한 부수 음악을 바탕으로 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있다. 무대 버전은 꾀흘랭이 오케스트레이션했지만, 포레 자신이 출판된 슈트를 위해 오케스트레이션을 수정했다.[137]
- 교향적 조곡 바장조 작품번호 20 (1865~74)
- 파반느 올림바단조 작품번호 50 (1887)
- 칼리굴라 작품번호 52 (1888)
- 돌리 조곡 작품번호 56 (1894~96)
- 샤일록 작품번호 57 (1890)
-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작품번호 80 (1900)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사장조 작품번호 111 (1918)
- 바이올린 협주곡 라단조 Op.14
-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작품번호 112 (1919)
; 칼리굴라 Op.52 (''Caligula'', 1888년)
: 무대 음악으로서의 첫 작품. 알렉상드르 뒤마(아들)로부터 의뢰받아 불과 몇 달 만에 완성했다. 극음악으로서의 초연은 1888년 11월 8일에 이루어졌다. 그 후, 포레 자신이 연주회용 악보를 제작하여 다음 해인 4월 6일 국민 음악 협회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Op.80 (''Pelléas et Mélisande'', 1898년)
: 별항 참조
;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Op.112 (''Masques et Bergamasques'', 1919년)
:【1. 서곡 / 2. 목가 / 3. 마드리갈 / 4. 가장 즐거운 길 / 5. 메뉴엣 / 6. 달빛 / 7. 가보트 / 8. 파반느】
: 무대 음악으로서는 마지막 작품. 단, 8곡 중 4곡은 이미 작곡되었던 다른 작품을 가져온 것이며, 새로 작곡된 것은 제1, 2, 5, 7곡뿐이다. 기존 작품인 제6곡과 제8곡은 독립적으로 연주되어 친숙하다. 르네 포르쇼아의 대본에 의한 작품이다. 초연은 1919년 4월 10일 몬테카를로에서 이루어졌다.
4. 2.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라단조 Op.14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발라드 Op.19 (1880년)
:전체는 3부(Andante cantabile - Allegro moderato - Andante, 제2부는 출판 악보에 따라 Allegretto moderato)로 구성된다. 주조는 B장조이다. 전곡을 통해 세 가지 주제가 반복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4. 3. 실내악
포레의 실내악 작품은 그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이다. 그는 오케스트레이션보다 실내악 작곡에 더 큰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피아노와 현악기를 위한 작품에서 두드러진다.포레의 실내악 작품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장르 | 작품명 |
---|---|
첼로 소나타 | 첼로 소나타 1번 라단조 Op.109 (1917), 첼로 소나타 2번 사단조 Op.117 (1921) |
바이올린 소나타 | 바이올린 소나타 1번 가장조 Op.13 (1876), 바이올린 소나타 2번 마단조 Op.108 (1916~17) |
피아노 4중주 | 피아노 4중주 1번 다단조 Op.15 (1876~79), 피아노 4중주 2번 사단조 Op.45 (1887) |
피아노 5중주 | 피아노 5중주 1번 라단조 Op.89 (1887~95), 피아노 5중주 2번 다단조 Op.115 (1919~21) |
피아노 3중주 | 피아노 3중주 라단조 Op.120 (1922~23) |
현악 4중주 | 현악 4중주 마단조 Op.121 (1924) |
기타 | 자장가 작품번호 16 (1879), 로망스 내림 나장조 작품번호 28 (1883), 슬픈 노래 작품번호 24 (1880), 시실리엔 작품번호 78 (1898), 환상곡 작품번호 79 (1898), 즉흥곡 작품번호 86 (하프) (1904), 『탑 속의 귀부인』 마단조 Op.110 (1918) |
특히 피아노 4중주 1번은 포레의 대표적인 실내악곡으로 꼽히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141] 두 번째 5중주곡은 포레의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20] 끊임없는 흐름과 제한적인 색채 때문에 지루하다는 비판도 있다.[141] 현악 4중주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깊이 있는 명상과 영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142][143]
- 피아노 5중주 제1번: 포레가 청각 장애를 겪기 시작할 무렵 작곡된 곡으로, 외젠 이자이에게 헌정되었다.
- 피아노 5중주 제2번: 포레가 음악원을 사퇴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작곡된 곡으로,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폴 뒤카스에게 헌정되었다.
- 현악 4중주: 포레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일하게 피아노가 포함되지 않은 실내악곡이다.
- 피아노 4중주 제1번: 마리안느 비알도와의 파혼으로 상심한 시기에 쓰여진 곡으로,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인다.
- 피아노 4중주 제2번: 포레의 원숙기 작품으로, 레퀴엠 직전에 작곡되었다.
- 피아노 3중주: 포레는 이 곡을 "작은 트리오"라고 불렀지만, 플로랑 슈미트는 "이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평했다.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마리안느 비알도와의 행복한 연애가 반영된 작품이다. 생상스는 포레의 재능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40년의 간격을 두고 작곡된 곡으로, 포레 만년의 작곡 기법을 보여준다.
- 첼로 소나타 제1번: 1918년 앙드레 에킹과 알프레드 코르토에 의해 초연되었다.
- 첼로 소나타 제2번: 나폴레옹 1세 서거 100주년 기념식을 위해 작곡한 장송가를 중간 악장에 사용했다. 뱅상 당디는 이 곡을 극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 시실리엔느: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후에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 전용되었다.
4. 4. 피아노곡
포레의 주요 피아노 작품으로는 13개의 야상곡, 13개의 바카롤(뱃노래), 6개의 즉흥곡, 그리고 4개의 왈츠 카프리스가 있다. 이 작품들은 그의 긴 음악 활동 기간 동안 작곡되었으며, 단순하고 젊은 매력이 넘치는 초기 스타일에서 중년 시절의 격동기를 거쳐 마지막에는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때로는 열정적인 내면의 성찰로 변화하는 그의 스타일 변화를 보여준다.[20] 그의 다른 주목할 만한 피아노곡으로는 단편 작품이나 세트로 작곡 또는 출판된 작품인 '말 없는 로망스', F장조 발라드, B단조 마주르카, C샵단조 '주제와 변주곡', 그리고 '8개의 단편'이 있다.[129]피아노 작품들은 종종 아르페지오를 사용하며, 멜로디는 두 손 사이에 흩어져 있고, 오르가니스트에게 자연스러운 손가락 교체를 포함한다. 이러한 측면 때문에 일부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어려운 작품이다. 리스트와 같은 거장조차도 포레의 음악을 연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초기 피아노 작품은 쇼팽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132]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포레가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더 좋아했던 슈만의 피아노 음악이었다.[133]
비평가 브라이스 모리슨은 피아니스트들이 2번 즉흥곡과 같은 매력적인 초기 피아노 작품을 후기 피아노 작품보다 더 자주 연주하는 것을 지적했다. 후기 작품들은 "그런 사적인 열정과 고독, 그리고 번갈아 가는 분노와 체념"을 표현하여 청중을 불안하게 만든다.[134] 그의 피아노 음악에서,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포레는 프랑스인과 종종 연관되는 고전적인 명료성을 위해 화려함을 피했다.[167] 그는 순전히 기교적인 피아니스트들에게 감명을 받지 않았으며, "그들이 더 위대할수록, 나의 음악을 더 못 연주한다"고 말했다.[135]
작품 번호 | 작품명 | 작곡 연도 |
---|---|---|
소나타 바장조 | 1863 | |
32 | 마주르카 내림 나장조 | 1875년 추정 |
19 | 발라드 올림 바장조 | 1877~79 |
73 | 주제와 변주곡 올림 다단조 | 1895 |
103 | 9개의 전주곡 | 1909~10 |
13개의 야상곡 | ||
33-1 | 야상곡 1번 내림 마단조 | 1875년경 |
33-2 | 야상곡 2번 나장조 | 1881년경 |
33-3 | 야상곡 3번 내림 가장조 | 1883 |
36 | 야상곡 4번 내림 마장조 | 1884 |
37 | 야상곡 5번 내림 나장조 | 1884 |
63 | 야상곡 6번 내림 라장조 | 1894 |
74 | 야상곡 7번 올림 다단조 | 1898 |
84-8 | 야상곡 8번 내림 라장조 | 1902 |
97 | 야상곡 9번 나단조 | 1908년 추정 |
99 | 야상곡 10번 나단조 | 1908 |
104-1 | 야상곡 11번 올림 바단조 | 1913 |
107 | 야상곡 12번 마단조 | 1915 |
119 | 야상곡 13번 나단조 | 1921 |
13개의 뱃노래 | ||
26 | 뱃노래 1번 가단조 | 1881년 추정 |
41 | 뱃노래 2번 사장조 | 1885 |
42 | 뱃노래 3번 내림 사장조 | 1885 |
44 | 뱃노래 4번 내림 가장조 | 1886 |
66 | 뱃노래 5번 올림 바단조 | 1894 |
70 | 뱃노래 6번 내림 마장조 | 1895년 추정 |
90 | 뱃노래 7번 라단조 | 1905 |
96 | 뱃노래 8번 내림 라장조 | 1906 |
101 | 뱃노래 9번 가단조 | 1908~9 |
104-2 | 뱃노래 10번 가단조 | 1913 |
105 | 뱃노래 11번 사단조 | 1913 |
106bis | 뱃노래 12번 내림 마단조 | 1915 |
116 | 뱃노래 13번 다장조 | 1921 |
4개의 왈츠 기상곡 | ||
30 | 왈츠 기상곡 1번 가장조 | 1882 |
38 | 왈츠 기상곡 2번 내림 라장조 | 1884 |
59 | 왈츠 기상곡 3번 내림 사장조 | 1887~93 |
62 | 왈츠 기상곡 4번 내림 가장조 | 1893~4 |
5개의 즉흥곡 | ||
25 | 즉흥곡 1번 내림 마장조 | 1881 |
31 | 즉흥곡 2번 바단조 | 1883 |
34 | 즉흥곡 3번 내림 가장조 | 1883 |
91 | 즉흥곡 4번 내림 라장조 | 1905~6 |
102 | 즉흥곡 5번 올림 바단조 | 1908~9 |
68 | 교향 알레그로 | 1895 |
;『주제와 변주곡』 嬰ハ단조 Op.73 (1895년)
:주제와 11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된다. 1896년 12월 레옹 뒤라포스(Léon Dufossé)에 의해 초연되었다. 야상곡 제6번, 보트 노래 제5번과 같은 시기에 작곡된 작품이며, 이들과 함께 포레의 가장 풍성한 피아노 작품으로 여겨진다.
;피아노 모음곡 『돌리』 Op.56 (1893년 - 1896년)
:【1. 자장가 / 2. 미아우 / 3. 돌리의 정원 / 4. 키티 발스 / 5. 상냥함 / 6. 스페인 춤】
:4손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돌리"는 포레가 귀여워했던 아이이며, 이 작품이 헌정된 엘렌 발다크(Hélène Bardac)의 애칭이다.
;왈츠-카프리스 전4곡
:【1. 이장조 Op.30 / 2. 변니장조 Op.38 / 3. 변토장조 Op.59 / 4. 변이장조 Op.62】
;즉흥곡 전5곡
:【1. 변호장조 Op.25 / 2. 헤단조 Op.31 / 3. 변이장조 Op.34 / 4. 변니장조 Op.91 / 5. 嬰헤단조 Op.102】
:위의 5곡에 하프를 위해 작곡되어 피아노로 편곡된 1곡(변니장조, Op.86bis)을 포함하여 6곡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3번까지의 곡과 후기에 쓰여진 2곡 사이에는 스타일의 큰 차이가 있다. 3번까지의 3곡은 생상스의 손으로 초연되었다.
;야상곡 전13곡
:【1. 변호단조 Op.33-1 / 2. 로장조 Op.33-2 / 3. 변이장조 Op.33-3 / 4. 변호장조 Op.36 / 5. 변로장조 Op.37 / 6. 변니장조 Op.63 / 7. 嬰하단조 Op.74 / 8. 변니장조 Op.84-8 / 9. 로단조 Op.97 / 10. 호단조 Op.99 / 11. 嬰헤단조 Op.104-1 / 12. 호단조 Op.107 / 13. 로단조 Op.119】
:야상곡의 작곡 시기는 포레의 활동 시기 전반에 걸쳐 있다. 13번은 피아노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이다. 피아니스트 마르그리트 롱은 6번을 "포레의 가장 아름다운 영감"이라고 평가했다.
;보트 노래 전13곡
:【1. 이단조 Op.26 / 2. 토장조 Op.41 / 3. 변토장조 Op.42 / 4. 변이장조 Op.44 / 5. 嬰헤단조 Op.66 / 6. 변호장조 Op.70 / 7. 니단조 Op.90 / 8. 변니장조 Op.96 / 9. 이단조 Op.101 / 10. 이단조 Op.104-2 / 11. 토단조 Op.105-1 / 12. 변호장조 Op.105-2 / 13. 하장조 Op.116】
:4번까지는 베네치아를 방문하기 전에 작곡되었으며, 포레의 동경으로서의 이탈리아를 그려낸 것이라고 말해진다.
;전주곡집 Op.103 전9곡 (1910년)
:【1. 변니장조 / 2. 嬰하단조 / 3. 토단조 / 4. 헤장조 / 5. 니단조 / 6. 변호단조 / 7. 이장조 / 8. 하단조 / 9. 호단조】
:포레가 이 전주곡집을 작곡한 시기는 드뷔시가 전주곡집 제1권을 작곡한 시기와 겹친다. 드뷔시의 작품과 달리 포레는 작곡 의도의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포레는 1910년 1월 처음 3곡의 전주곡을 출판사에 넘겼고, 같은 해 가을에 나머지 6곡을 작곡했다.
4. 5. 가곡
포레는 프랑스 예술 가곡, 즉 '멜로디'(mélodie)의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14] 초기에는 구노의 영향을 받아 아프레 엉 레브"나 "Au bord de l'eau"와 같은 곡을 작곡했으나, 이후 20년 동안 60여 곡의 가곡을 작곡하며 "진정한 포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Les berceaux", "Les roses d'Ispahan", 특히 "Clair de lune"는 "너무 아름답고 완벽해서 심지어 미국까지 진출했다"는 평을 받는다.[20]포레는 여러 개의 가곡집도 작곡했다. 《베니스의 다섯 개의 멜로디(Cinq mélodies "de Venise")》(Op. 58, 1891)는 음악적 주제를 반복 사용하는 새로운 종류의 가곡 모음곡이며, 《La bonne chanson》(Op. 61, 1894)에는 다섯 개의 주제가 있다.[120] 포레는 《선한 노래》가 자신의 가장 즉흥적인 작품이었으며, 엠마 발다크가 매일 새로 쓰인 악보를 그에게 불러주었다고 회상한다.
포레의 주요 가곡 및 가곡집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작곡 연도 | 비고 |
---|---|---|
꿈을 꾼 후에 (Après un rêve) Op.7-1 | 1865년경 | 가곡집 『세 개의 노래』Op.7의 제1곡 |
이스파한의 장미 ('Les Roses dIspahan'') Op.39-4 | 1884년 | 가곡집 『네 개의 노래』Op.39의 제4곡 |
달빛 (Clair de lune) Op.46-2 | 1887년 | 가곡집 『두 개의 노래』Op.46의 제2곡, 폴 베를렌의 시 |
베니스의 다섯 개의 멜로디 (Cinq mélodies de Venise) Op.58 | 1891년 | 【1. 맨돌린 / 2. 은밀하게 / 3. 그린 / 4. 크리메인에 / 5. 황홀경】, 베를렌의 시, 연작 가곡집 |
친절한 노래 (La bonne chanson) Op.61 | 1891년 - 1892년 | 【1. 후광을 쬐는 성녀 / 2. 새벽의 빛은 퍼져나가고 / 3. 흰 달빛은 숲에 비치고 / 4. 나는 불충실한 길을 걷고 있었다 / 5. 나는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 6. 새벽별이여, 네가 사라지기 전에 / 7. 그것은 어떤 여름의 밝은 날 / 8. 그렇겠지요 / 9. 겨울이 끝나고】, 베를렌의 시, 가곡집 |
9월의 숲에서 (Dans la forêt de septembre) Op.85-1 | 1902년 | 가곡집 『세 개의 노래』Op.85의 제1곡 |
더 부드러운 길(마드리갈) (Le plus doux chemin) 작품번호 87의 1 | 1904년 | |
이브의 노래 ('La chanson dÈve'') Op.95 | 1906년 - 1910년 | 【1. 낙원 / 2. 첫 번째 말 / 3. 타오르는 장미 / 4. 신의 광채처럼 / 5. 새벽 / 6. 흐르는 물 / 7. 깨어 있나, 태양의 향기 / 8. 하얀 장미의 향기 속에서 / 9. 황혼 / 10. 오 죽음이여, 별가루여】, 가곡집 |
(Le jardin clos) Op.106 | 1914년 | 【1. 허락 / 2. 당신이 내 눈을 들여다볼 때 / 3. 시녀 / 4. 나는 당신의 마음에 몸을 맡기겠소 / 5. 님프의 신전에서 / 6. 어둠 속에서 / 7. 나에게는 소중합니다, 사랑의 신이여 / 8. 모래 위의 묘비명】, 가곡집 |
환영 (Mirages) Op.113 | 1919년 | 【1. 물 위의 백조 / 2. 물에 비친 그림자 / 3. 밤의 정원 / 4. 무희】, 가곡집 |
환상의 지평선 ('Lhorizon chimérique'') Op.118 | 1921년 | 【1. 바다는 끝없이 / 2. 나는 탔다 / 3. 디아나여, 셀레네여 / 4. 배들이여, 우리는 너희와 함께】, 포레의 마지막 가곡집 |
4. 6. 종교곡/합창곡
- 장 라신 찬송가 작품번호 11 (1865)
- 마드리갈 작품번호 35 (1883)
- 진혼곡 작품번호 48 (1877, 1887~1893)
- 성체 안의 예수 작품번호 65의 1 (1894)
- 성모송 내림 가장조 작품번호 67의 2 (1895)
- 라신의 찬가 Op.11 (''Cantique de Jean Racine'', 1863년~1864년): 하모늄 또는 피아노 반주가 있는 합창곡.
- 레퀴엠 Op.48 (1887년)
- 파반느 Op. 50 (''Pavane'', 1887년):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작품. 합창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음. 두 종류의 편곡본 존재.
- 소미사곡 (''Messe basse''): 앙드레 메사주와의 공동 작품인 『빌레르빌 어부의 미사』( ''Messe des pêcheurs de Villerville'', 1881년~1882년)를 개작.
4. 7. 오페라
포레에게는 현재는 거의 상연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두 편의 대작 오페라가 있다.[1]- '''프로메테''(Prométhée)''' 전 3막 Op.82 (1900년):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비극을 바탕으로 장 로랑과 안드레-페르디낭 에롤드가 대본을 작성하였다. 관현악 편곡은 샤를 위스타스가 맡았다. 1900년 8월, 베지에의 야외 원형극장에서 300명의 관악단, 100명의 현악, 13명의 하프, 30명의 무대 위 트럼펫, 200명의 합창 등 총 800명이 넘는 연주자와 포레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당시 관객은 1만 명이었다고 한다. 포레의 제자 로제-뒤카스에 의한 일반적인 오케스트라를 위한 연주회용 편곡이 있다.[1]
- '''페네로페''(Pénélope)''' 전 3막 (1907년 - 1912년):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를 바탕으로 르네 포르쇼가 대본을 작성하였다. 1913년 3월, 레옹 쥬앙의 지휘로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해 5월 파리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포레는 1905년 프랑스 국립 음악·연극학교의 학장에 취임하여 그 이후 매년 2개월의 휴가 기간에 집중하여 작곡하였다. 따라서 페네로페의 작곡 기간은 실질적으로 10개월 정도로 보인다. 초연에 맞추기 위해 제2막 제2장 이후와 제3막 마지막 장면의 오케스트레이션에 페르낭 페쿠(뱅상 당디의 제자)의 도움을 받았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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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ongman Pronunciation Dictionary
Longman
[2]
간행물
Nectoux (1991), p. 3; Jones, p. 15; and Duchen, 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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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간행물
Nectoux (1991), 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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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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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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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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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ctoux (1991),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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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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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xfordmus[...]
2010-08-21
[15]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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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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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stor.or[...]
1937-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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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es, p. 16
[18]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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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Nectoux (1984),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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