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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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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88년부터 1099년까지 재위한 인물로,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에서 수사로 활동하며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을 지지했고, 오스티아의 추기경을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성직 매매 금지, 서임권 투쟁, 프랑스 왕 파문 등 개혁을 추진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에 따라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 파병을 호소하여 십자군 운동을 촉발했다. 또한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 맞서 교황권을 강화했고, 시칠리아를 가톨릭 영역으로 편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우르바노 2세는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직전 사망했으며, 1881년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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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황 우르바노 2세,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교황 우르바노 2세 세밀화
존칭 접두사복자
존칭 접미사O.S.B.
이름우르바노 2세
직함로마 주교
교회가톨릭 교회
출생명오도
재임 시작1088년 3월 12일
재임 종료1099년 7월 29일
선임자빅토르 3세
후임자파스칼 2세
사제 서품1068년
주교 서품1085년 7월 20일
추기경 서임1073년
추기경 서임자그레고리오 7세
출생일기원전 1035년경
출생지라게리, 샹파뉴 백국, 프랑스 왕국
사망일1099년 7월 29일
사망지로마, 교황령, 신성 로마 제국
이전 직책오스티아 추기경 (1078년–1088년)
벨레트리 추기경 (1080년–1088년)
독일 특사 (1084년–1085년)
축일7월 29일
공경가톨릭 교회
시복일1881년 7월 14일
시복 장소로마
시복자레오 13세
상징교황 예복
교황관
지팡이
기타우르바노
다른 이름
라틴어Urbanus II
출생명(라틴어)Odo Lageriae
출생명(프랑스어)Eudes de Châtillon
기타오토(Otto), 오도(Odo), 에우데스(Eudes)라고도 불림

2. 생애 초기

오동은 프랑스 태생으로, 샤티용쉬르마른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28][29] 1064년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으며, 나중에 수도원의 아빠스가 되었다. 1080년경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오동은 그레고리오 개혁의 열정적인 지지자이자 가장 유명한 활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1084년 독일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을 때 이런 그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그는 퀘들린부르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대립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를 계승할 유력한 교황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085년 그레고리오 7세의 뒤를 이어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아빠스인 데시데리우스가 교황 빅토르 3세로 즉위하였다. 빅토르 3세가 짧은 재임 기간을 마치고 선종한 후, 1088년 3월 테라치나에서 열린 추기경들과 기타 고위 성직자들의 회의에서 오동이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프랑스인으로는 두 번째 교황이다.

2. 1. 출생과 가문

우르바노 2세(세례명 오드, 오도)는 샤티용쉬르마른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1] 프랑스의 지방 귀족인 샤티옹 가문 출신으로[2] 1050년, 인근 랭스 대성당학교에서 켈른의 브루노에게 배우고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갔다.[3][2]

2. 2. 종교적 귀의

오도(Odo)는 프랑스의 샤티용쉬르마른 출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직자가 되도록 교육받았다.[1] 랭스에서 켈른의 브루노에게 배우고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1050년에는 인근 랭스 대성당학교에서 수학했다.[2][1] 클뤼니 수도원 원장을 역임한 후, 클뤼니와 관계가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다.[1]

3. 교황 선출과 개혁

오동은 프랑스 샤티용쉬르마른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064년 클뤼니 수도원에서 수사가 되었다.[28][29] 1080년경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에 서임된 그는 그레고리오 개혁의 열정적인 지지자였다. 1084년 독일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대립교황과 그 추종자들을 단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085년 그레고리오 7세 사후 교황 빅토르 3세가 선종한 후, 1088년 3월 테라치나에서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프랑스인으로는 두 번째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즉위 후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상대해야 했다. 전임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7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의 권위를 두고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1084년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점령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을 단호하게 지키면서도 유연성과 외교적 수완을 보여주었다.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서임권 행사, 일부 성직자들의 결혼을 비판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대립교황에 반대하였다.

3. 1. 대립교황과의 투쟁

우르바노 2세는 교황 즉위 직후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라벤나의 주교 기베르트)와 대립해야 했다. 전임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의 권위를 두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으로 황제를 굴복시킨 후에도 그레고리오 7세는 슈바벤 공작을 새 황제로 지지한다고 발표했고, 1080년 황제를 다시 파문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로마를 점령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하였다.

서임권 투쟁 당시 윌리엄 2세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한 안셀모를 맞이하는 우르바노 2세를 묘사한 19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더 큰 유연성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점진적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프랑스를 방문했다. 로마, 아말피, 베네벤토, 트로이아 등지에서 잇달아 소집된 교회회의들에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서임권 행사, 일부 성직자들의 결혼을 비판하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대립교황에 반대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토스카나 여공작 마틸데와 바이에른 공작 벨프 2세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또한 그는 콘라트 왕자에게 부친 하인리히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지했으며, 1093년에는 그를 로마와 밀라노의 왕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1095년 크레모나에서 우르바노 2세는 콘라트의 대관식을 집전하였다.[30] 크레모나에 머무는 동안 우르바노 2세는 콘라트와 시칠리아 백작 로제 1세의 딸 막시밀라 사이의 혼담을 주선했는데, 이 결혼은 그 해 말 피사에서 거행되었다. 막시밀라가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은 콘라트의 활동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30] 에우프락시아 황후가 남편인 하인리히 4세를 잠자리를 강요한다는 이유로 고발하자, 우르바노 2세는 이를 격려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캔터베리의 안셀모를 지원해 윌리엄 2세 국왕과 잉글랜드 성직자들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와 대립교황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게 하여 잉글랜드의 지원을 얻어냈다.

우르바노 2세는 전임자들의 개혁 정책을 계속 유지했으며, 캔터베리의 새 대주교로 착좌한 안셀모가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했을 때에도 기꺼이 그를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혁 정책을 위해서는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교황 특사 디에의 위그가 필리프 1세 국왕이 앙주 백작의 아내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중혼한 것을 비판하며 파문한 것에 대해서도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필리프 1세는 베르트라드를 포기했다고 약속하면서 그에게 내린 파문이 해제되었으나,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면서 다시 파문당했다. 비록 베르트라드가 도팽 루이를 대신해 자신의 아들이 필리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에 즉위하도록 적극적으로 정치 공작을 벌였지만, 결국 1104년 필리프 1세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사태는 종식되었다.[31]

3. 2. 서임권 투쟁

우르바노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단호하게 추진하면서도 더 큰 유연성과 외교적 기교를 보였다. 그는 보통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순방했다. 로마, 아말피, 베네벤토, 트로이아에서 열린 일련의 대규모 공의회는 성직매매, 속인 서임, 성직자 결혼(쿨라기움)과 황제 및 그의 반교황에 대한 반복적인 선언을 통해 그를 지지했다. 그는 토스카나 백작부인 마틸다와 벨프 2세(바이에른 공작)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는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콘라트 왕자를 지지했고, 1095년 크레모나에서 콘라트에게 궁정 시종의 직책을 수여했다.[8] 그곳에서 그는 콘라트와 시칠리아 백작 로제르의 딸 막시밀라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이 결혼은 그 해 말 피사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의 풍부한 지참금은 콘라트의 지속적인 군사 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8] 황후 아델라이데는 남편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성적 강압 혐의를 제기하도록 격려받았다. 그는 안셀무스의 신학적 및 교회적 활동을 지지하여, 성직자와 잉글랜드 왕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 사이의 난관에 대한 해결책을 협상하고 마침내 로마의 황제파 교황에 맞서 잉글랜드의 지지를 받았다.

우르바노 2세는 전임자들의 개혁을 굳건히 지지했으며, 캔터베리의 새로운 대주교 안셀무스가 잉글랜드를 탈출했을 때 그를 지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의 대의를 위한 프랑스의 지원이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사절 디의 휴고가 필리프 왕을 앙주 백작의 아내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의 이중 중혼으로 파문한 것을 옹호했다. (이 파문은 왕이 그녀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후에도 여러 차례 해제되고 재부과되었다. 1104년의 공개 참회로 논쟁은 종식되었지만,[9] 베르트라드는 필리프 대신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는 데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10]) 우르바누스 2세는 순회 설교자들, 예를 들어 로베르 드 아르브리셀을 승인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지식을 널리 알리고 개혁 운동의 사상을 증진했으며, 11세기 말 영성의 대중적 현상에 기여했다.[11]

라게리우스의 오도는 프랑스의 지방 귀족인 샤티옹 가문에서 태어나 성직자가 되도록 교육받았다. 랭스에서 켈른의 브루노에게 배우고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갔다. 원장을 역임한 후, 클뤼니와 관계가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 밑에서 추진된 교회의 자기 개혁(그레고리오 개혁)에서는 교황의 오른팔로 활약하여 특히 교황 대리로서 독일에서의 외교 정책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오도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빅토르 3세 사후였다.

우르바노 2세를 칭한 새 교황은 그레고리오 7세가 추진한 교회 개혁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할 것을 표명하고,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실제로 많은 개혁을 달성했다. 자기 개혁을 진행하기 위해 스승인 브루노를 로마로 초빙했다. 취임 초기에는 로마에서 반교황 클레멘스 3세의 존재에 시달렸지만 일련의 교회 회의에서 많은 주교의 동의를 얻고, 아말피, 베네벤토, 트루아 등 여러 도시가 교황의 개혁 노선의 성과를 지지함으로써 반교황의 존재를 압도했다. 성직 매매 금지, 사제의 독신제 철저, 속권으로부터의 서임권 탈환을 교회 개혁의 기둥으로 강력히 추진하여 실제로 교회의 강기숙정(綱紀粛正)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그레고리오 7세 이래 계속되던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4세와의 항쟁도 계속했다. 하인리히 4세에 대항하기 위해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와 바이에른 공 벨프 5세의 결혼을 주선하고, 하인리히 4세의 아내 아델하이트와 장남 콘라트의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란을 지원했다. 또한 이혼 문제로 프랑스 왕 필리프 1세를 파문했다.

3. 3. 프랑스와의 관계

우르바노 2세는 교황으로 즉위한 직후,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와 대립해야 했다. 전임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7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의 권위를 두고 지속적으로 충돌했으며, 1084년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점령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했다.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유연성과 외교적 수완을 보였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프랑스를 방문했으며, 로마, 아말피, 베네벤토, 트로이아 등지에서 열린 교회회의들에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서임권 행사, 일부 성직자들의 결혼을 비판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대립교황에 반대했다.

우르바노 2세는 마틸데와 벨프 2세의 혼담을 제의했다. 또한 콘라트 왕자에게 부친 하인리히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지했으며, 1095년 크레모나에서 콘라트의 대관식을 집전하고 로제 1세의 딸 막시밀라와의 혼담을 주선했다.[30] 에우프락시아 황후가 남편 하인리히 4세를 고발한 것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캔터베리의 안셀모를 지원하여 윌리엄 2세 국왕과 잉글랜드 성직자들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잉글랜드의 지지를 얻어냈다.

우르바노 2세는 전임자들의 개혁 정책을 유지했으며, 안셀모가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했을 때 그를 도왔다. 프랑스의 지원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특사 디에의 위그가 필리프 1세 국왕이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중혼한 것을 비판하며 파문한 것에 대해서도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필리프 1세는 베르트라드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며 파문이 풀렸으나, 약속을 어기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면서 재차 파문당했다. 1104년 필리프 1세가 공개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사태는 종식되었다.[31]

4. 제1차 십자군

우르바노 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갈등,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의 존재, 프랑스 왕과의 불화, 동로마 제국의 위협 등 여러 난관에 직면했다. 특히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셀주크 제국에게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빼앗긴 동로마 제국의 상황은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사절로부터 군사적 원조 요청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게 된다.

우르바노 2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고 성지를 탈환하는 것 외에도, 서유럽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성직매매 금지, 사제의 독신제 등 그레고리오 개혁을 이어받아 교회의 쇄신을 추구했다.

우르바노 2세의 노력은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대립교황을 로마에서 몰아내고, 토스카나의 마틸데와 같은 유력자들의 지지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작 우르바노 2세는 예루살렘 함락 14일 후인 1099년 7월 29일에 사망하여,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소식을 듣지 못했다.

4. 1. 클레르몽 공의회

우르바노 2세는 즉위 직후 독일과의 전쟁, 프랑스 내 갈등, 대립교황 문제, 동방 지역 그리스도인 문제 등 여러 난관에 직면했다. 특히 동방 문제에 대해 그는 대규모 성지 순례(당시에는 십자군이라는 용어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를 해결책으로 생각했다.[32] 1095년 3월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사절로부터 셀주크 제국에 맞설 군사적 원조 요청을 받은 것이 공개적인 움직임의 시작이었다.[33]

같은 해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에는 수많은 이탈리아, 부르고뉴, 프랑스 주교들이 참석하여 첫 모임은 클레르몽 시 외곽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노트르담 두 포르 성당에서 연설을 가진 우르바노 2세는 처음에는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다가, 11월 27일에는 민간인까지 포함된 더 많은 청중에게 거룩한 땅과 동방 교회들을 셀주크 투르크족으로부터 탈환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호소했다.[34]

당시 그의 연설을 그대로 옮긴 정확한 필사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전해지는 다섯 가지 연설문은 모두 후대에 작성되었고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35] 샤르트르의 퓔세의 기록 외에는 제1차 십자군 원정 연대기인 《게스타 프랑코룸》(Gesta Francoru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샤르트르의 퓔세는 1101년경까지 십자군 원정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당시 시노드 현장에 있었다. 랭스의 로베르 역시 시노드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기록은 1106년경의 것이다. 우르바노 2세의 연설문들은 실제 그의 발언보다는 후대 작가들의 생각이 첨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교황의 실제 동기는 그가 직접 쓴 네 통의 서신(플랑드르(1095년 12월), 볼로냐(1096년 9월), 발롬브로사 수도원(1096년 10월), 카탈루냐 백작(1089년 또는 1096-1099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클레르몽 시노드에서의 연설보다는 이 편지들이 십자군 원정에 대한 그의 본심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문들은 십자군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불러왔기에, 실제 그의 말과 비교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샤르트르의 퓔세는 우르바노 2세가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전령이 되어 이 사실을 곳곳에 전파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보병이든 기사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서둘러 도와주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우리 친구들의 땅에서 사악한 무리를 쫓아내는 일을 돕기를 바라십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물론 자리에 계시지 않는 분에게도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32]

랭스의 로베르는 우르바노 2세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은 사방이 바다로 막혀있고 산지가 많아,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너무나 비좁습니다. 더군다나 자원도 충분하지 않아서, 경작자들에게 필요한 작물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그 결과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미움을 버리십시오. 서로 싸움을 멈추고, 전쟁을 그만두십시오. 모든 불화와 갈등을 종식시키십시오. 거룩한 무덤으로 가서 불경한 자들로부터 그곳을 되찾고 여러분이 다스리십시오. …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 가운데 먼저 우리에게 그처럼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로베르는 이어서 "우르바노 교황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한껏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하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공경하올 로마 교황님께서 이 외침을 듣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33]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머무르시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외침은 모두 한 곳으로부터 기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게끔 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 외침이 전장에서의 함성이 되게 합시다. 왜냐하면 이 외침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들을 향해 공격할 때, 하느님의 병사들이 모두 이렇게 외치도록 합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34]라고 썼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우르바노 2세


샤르트르의 퓔세가 기록한 연설에는 십자군 원정 참가자에게 대사 수여를 허락한다는 내용이 있다.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외교인들과 싸우다 죽은 모든 사람은 그 즉시 대사를 받을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받은 권한에 따라 전사자들에게 이러한 잠벌의 사면을 허락할 것입니다. 아아, 악마들을 숭배하는 혐오스럽고 비천한 민족이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스럽게 된 이들을 정복하다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만약 우리가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돕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찌 책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한심하게도 서로 싸우는데 익숙했던 신자들이 이제는 신앙이 없는 자들과 싸워,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었어야 할 전쟁을 승리로 끝나게 합시다. 오랫동안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기사가 되게 합시다. 자기 형제와 친지들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들이 이제는 야만족들을 상대로 싸우게 합시다. 적은 보수를 받으며 용병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이제는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합시다. 몸과 영혼이 모두 지친 사람들이 이제 더 큰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합시다. 보십시오! 한쪽에는 슬픔과 가난에 빠진 사람들이 설 것이고, 다른 한쪽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설 것입니다. 한쪽에는 주님의 적들이 설 것이고, 다른 한쪽에는 주님의 친구들이 설 것입니다. 군사 원정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미루게 하지 않게 합시다.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임대해 원정 비용을 충당하게 합시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자마자 그들이 인도자이신 주님과 더불어 원정을 떠나게 합시다."[32]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의미의 ‘Deus vult’가 실제로 클레르몽 시노드에서 함성으로 외쳐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로베르 수사의 기록에는 있지만, 후대에 선전용으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플랑드르 시민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동방 교회 해방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대사 부여를 허용했음을 알 수 있다. 로베르 등이 기록한 연설 내용과 비교했을 때, 예루살렘 자체에 대해 매우 짧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서신에서 우르바노 2세는 예루살렘을 한 번만 언급한다. 플랑드르 시민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투르크족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아름답게 꾸며진 거룩한 도시(예루살렘)를 장악하고 있으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들지만, 거룩한 도시와 그곳의 성당들은 끔찍하게도 노예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볼로냐와 발롬브로사에 보낸 서신들에서는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의 통치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보다는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 원정대의 소망을 말하고 있다. 글의 전체적인 논조는 예루살렘 자체를 탈환하는 것보다는 현지 교회들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르바노 2세는 ‘동방 지역의 교회들’, ‘동방 교회들’(플랑드르), ‘교회의 자유’(볼로냐), ‘그리스도교의 자유’(발롬브로사), ‘아시아 교회’(카탈루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샤르트르의 퓔세가 기록한 연설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동방의 형제 그리스도인들이 투르크족으로부터 소아시아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고만 언급하고 있다.[35]

우르바노 2세에게 제1차 십자군 원정의 가장 큰 소득은 1097년 프랑스군의 힘을 빌려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로마에서 몰아낸 것이다. 토스카나의 마틸데 역시 그의 로마 귀환을 지원했다.

4. 2. 십자군 원정의 배경

우르바노 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라벤나의 주교 기베르트)와 맞서야 했다. 전임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의 권위를 두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계속 충돌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황제를 굴복시킨 후에도 그레고리오 7세는 슈바벤 공작을 새 황제로 지지하며 1080년 황제를 다시 파문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로마를 점령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내세웠다.[30]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와 같은 정책을 펼쳤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을 단호하게 지키면서도 유연성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조심스럽게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재임 기간 동안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프랑스를 방문하곤 했다. 로마, 아말피, 베네벤토, 트로이아 등에서 연이어 소집된 교회회의에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서임권 행사, 일부 성직자들의 결혼을 비판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대립교황에 반대했다. 토스카나 여공작 마틸데와 바이에른 공작 벨프 2세의 결혼을 제안했다.

또한 콘라트 왕자가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지했으며, 1093년에는 그를 로마와 밀라노의 왕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1095년 크레모나에서 콘라트의 대관식을 집전했다.[30] 크레모나에 머무는 동안 콘라트와 시칠리아 백작 로제 1세의 딸 막시밀라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 결혼은 그 해 말 피사에서 이루어졌으며, 막시밀라가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은 콘라트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30] 에우프락시아 황후가 남편 하인리히 4세를 고발하자 이를 격려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를 지원하여 윌리엄 2세 국왕과 잉글랜드 성직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와 대립교황에 대한 반대를 이끌어내 잉글랜드의 지원을 얻었다.

전임자들의 개혁 정책을 이어갔으며, 캔터베리의 새 대주교로 착좌한 안셀모가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했을 때에도 그를 도왔다. 프랑스의 지원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특사 디에의 위그가 필리프 1세 국왕이 앙주 백작의 아내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중혼한 것을 비판하며 파문한 것에 대해서도 지지했다. 필리프 1세는 베르트라드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며 파문이 풀렸으나,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면서 재차 파문당했다. 1104년 필리프 1세가 공개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사태는 종식되었다.[31]

샤티용쉬르마른에 있는 교황 우르바노 2세 전신상


우르바노 2세는 즉위하자마자 독일과의 전쟁, 프랑스에서의 갈등, 대립교황, 위협받는 동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동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규모 성지 순례를 생각했다. 1095년 3월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동로마 제국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에 맞설 군사적 원조를 요청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사절을 접견하면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소집된 클레르몽 공의회에는 수많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프랑스의 주교들이 참석하여 첫 모임은 클레르몽 시 외곽의 야외에서 열려야 했다. 같은 해 11월 노트르담 두 포르 성당에서 연설을 한 우르바노 2세는 처음에는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다가, 11월 27일에는 더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이때 시노드에 참석한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거룩한 땅과 동방 교회들을 셀주크 투르크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탈환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4. 3. 십자군 원정의 결과

우르바노 2세에게 제1차 십자군 원정의 가장 큰 소득은 프랑스군의 힘을 빌려 1097년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로마에서 몰아낸 것이었다. 토스카나의 마틸데 역시 우르바노 2세의 로마 귀환을 적극 지원하였다.[34]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지(예루살렘 공방전) 14일 만인 1099년 7월 29일에 선종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탈환 소식이 로마에 당도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생전에 그는 예루살렘 탈환 소식을 듣지 못했다.

5. 시칠리아와의 관계

수세기 동안 동로마 제국아글라브 토후국, 파티마 왕조에게 연이어 통치를 받은 시칠리아를 가톨릭 영역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우르바노 2세의 계획은 장기적으로 십자군 원정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시칠리아는 노르만 군주 로제 1세가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통치하였다. 1098년 카푸아 공방전 이후 가진 회담에서 우르바노 2세는 로제 1세에게 특별히 몇 가지 특권을 부여했는데, 이것들은 유럽의 다른 군주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잠정적으로 보류한 것들이었다. 로제 1세는 평신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주교 후보자들을 지명할 권한과 더불어 교회의 봉헌금들을 모아 교황에게 전하고, 교회 문제를 다루는 법정에 참여할 권한까지 부여받았다.[2] 로제 1세는 사실상 시칠리아 내에서 교황 특사와 같은 위치였다.[3] 수세기 동안 이슬람교도들의 지배를 받은 시칠리아를 다시 기독교화하면서 교계제도를 재설정함과 동시에 새 주교좌들을 설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로제 1세의 아내 아델라이데 델 바스토는 시칠리아 동부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포 강의 계곡에 있던 주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교황의 눈에 로제 1세는 세속 군주들 중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동맹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의 봉신인 아풀리아 백작의 친척이자 한낱 봉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르바노 2세는 안심하고 로제 1세에게 그토록 엄청난 특권들을 많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훗날 로제 1세의 후손들이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세우면서 교권과 속권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우르바노 2세는 비잔티움 제국, 로마인,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의 갈등에서 노르만인인 캄파니아와 시칠리아의 지원을 받았다. 그 대가로 그는 로제르 1세에게 주교 임명권(즉, 재속 서임권), 교회 수입을 교황청에 송금하기 전에 징수할 권리, 그리고 교회 문제에 대한 재판 권한을 부여했다.[2] 로제르 1세는 사실상 시칠리아 내에서 교황의 특사가 되었다.[3] 1098년 당시 이러한 특권들은 교황이 유럽 다른 지역의 세속 군주들에게는 주지 않았던 것들이었으며, 나중에 로제르의 호엔슈타우펜 계승자들과의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6. 평가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881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그의 축일은 7월 29일이다.[27]

참조

[1] 서적 Key Figures in Medieval Europe: An Encyclopedia
[2] 서적 Pope Bl. Urban II Robert Appleton Company 1912
[3] 서적 Urban (pop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1
[4] 서적 Key Figures in Medieval Europe: An Encyclopedia
[5] 서적 Medieval Italy: An Encyclopedia
[6] 논문 The Speech of Pope Urban II. At Clermont, 1095 https://www.jstor.or[...]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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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Henry IV of Germany, 1056–1106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9] 서적 Philip I of France and Bertrad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10] 문서 Orderic Vita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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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Leipzig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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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논문 Pope Urban II and Jerusalem: a re-examination of his letters on the First Crusade https://www.mag.gesc[...] 202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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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논문 Some Recent Interpretations of Pope Urban II's Eastern Policy 1940
[19] 서적 Crusades, Idea and Reality, 1095–1274 London 1981
[20] 논문 Some Recent Interpretations of Pope Urban II's Eastern Policy 1940
[21] 서적 Patrologia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22] 서적 Patrologia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23] 논문 The View of the Crusades from Rome and Damascus: The Geo-Strategic and Historical Perspectives of Pope Urban II and ʿAlī ibn Ṭāhir al-Sulamī 2011
[24] 서적 The Origin of the Idea of Crusade Princeton 1977
[25] 논문 Auctores antiquissimi https://www.dmgh.de/[...]
[26] 서적 Patrologia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27] 웹사이트 Patron Saints Index: Pope Urban II https://web.archive.[...] 2008-08-22
[28] 서적 Key Figures in Medieval Europe: An Encyclopedia
[29] 서적 Medieval Italy: An Encyclopedia
[30] 서적 Henry IV of Germany, 1056–1106 https://books.google[...]
[31] 서적 Philip I of France and Bertrad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32] 웹사이트 Urban II: Speech at Council of Clermont, 1095, Five versions of the Speech http://www.fordham.e[...]
[33] 성경 마태 18,20
[34] 웹사이트 Urban II: Speech at Council of Clermont, 1095, Five versions of the Speech http://www.fordham.e[...]
[35] 서적 Crusades, Idea and Reality, 1095–1274 London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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