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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 쿠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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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톤 쿠프만은 네덜란드의 지휘자, 오르가니스트,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음악학자이다.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바로크 음악을 전공했으며,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 합창단을 창단하여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중심으로 원전 연주를 해왔다. 그는 모차르트의 죽음을 기준으로 삼아 그 이후의 음악은 연주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흐의 칸타타 전곡과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전곡을 녹음했다. 2003년에는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 산하의 에라토 레이블을 떠나 자신의 레이블 앙투안 마르샹을 설립했으며, 네덜란드 사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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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 쿠프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톤 코프만
출생일1944년 10월 2일
출생지네덜란드 오버아이설주즈볼러
직업지휘자
하프시코드 연주자
음악학자
교수
소속 단체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 합창단
음악가 정보
출신 학교암스테르담 음악원
악기오르간
쳄발로
장르클래식 음악
활동 시기(정보 없음)
웹사이트www.tonkoopman.nl
이름 정보
로마자 표기Antonius Gerhardus Michael Koopman (안토니우스 헤르하르두스 미하엘 코프만)

2. 생애 및 교육

쿠프만은 고전학을 전공한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시몬 C. 얀센 사사)과 하프시코드(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사사)를,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다. 그는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모두에서 우등상(Prix d'Excellence|프리 덱셀랑스프랑스어)을 받았다.

1979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1992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창단하여 이후 두 단체를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 합창단으로 통합했다. 1984년에는 포틀랜드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창립 감독을 맡기도 했다. 쿠프만은 특히 바흐바로크 음악에 집중하며 “고증 연주” 운동의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1]

바흐 음악 외에도 오르간 음악의 선배 격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녹음에도 힘썼다. 2004년에는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바흐 칸타타 전집 녹음 완료 후 2005년부터 북스테후데 전집 녹음 프로젝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에 완성했다.

2003년에는 워너 산하의 에라토 레이블과 결별하고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10] 독자적인 레이블 「Antoine Marchand|앙투안 마르샹영어」을 설립했다. 같은 해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 1. 초기 생애

고전학을 전공한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은 Simon C. Jansen|시몬 C. 얀센nl에게, 쳄발로는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에게 배웠다. 또한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으며, 오르간 연주와 쳄발로 연주 모두 우등상(Prix d'Excellence|프리 덱셀랑스프랑스어)을 받았다.

2. 2. 음악 교육

쿠프만은 고전학을 전공한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Simon C. Jansen|시몬 C. 얀센nl에게, 하프시코드구스타프 레온하르트에게 사사했다. 또한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다. 그는 바로크 음악을 전공했으며,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연주 모두에서 우등상(Prix d'Excellence|프리 덱셀랑스프랑스어)을 받았다.

오르간 연주 시 발뒤꿈치를 사용하지 않고 발가락만으로 페달을 연주하는데, 이는 그의 작은 키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바로크 시대의 연주 방식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2. 3. 신체적 특징과 연주 스타일

쿠프만은 키가 작아 오르간 페달보드를 연주할 때 발꿈치를 사용하지 않고 발가락만 사용하는데, 이는 바로크 시대의 연주 방식과 일치한다. 그는 “고증 연주” 운동의 선구적인 인물로, 특히 바흐바로크 음악에 집중한다. 다른 초기 음악 지휘자들이 고음악적 접근 방식으로 낭만주의 음악까지 레퍼토리를 넓히는 것과 달리, 쿠프만은 "모차르트의 죽음 (1791년)을 기점으로 선을 긋는다"[1][9]고 밝히며 베토벤 이후의 음악을 오리지널 악기 앙상블로 연주하는 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할 때도 고전파 피치가 아닌 바로크 피치를 고수한다. 예외적으로 1928년에 작곡된 프랑시스 풀랑크의 「전원의 협주곡」을 녹음한 바 있다.[1]

3. 주요 활동 및 업적

톤 쿠프만은 고전학을 전공한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과 쳄발로를,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하며 음악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오르간과 쳄발로 연주 모두에서 우등상(Prix d'Excellence)을 받았다.

1979년 암스테르담 바로크 관현악단을, 1992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창단하여 원전 연주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쿠프만은 특히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 해석에 있어 오리지널 악기 연주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모차르트의 죽음 (1791년)을 기점으로 선을 긋는다"[9]고 밝히며, 바로크 및 고전주의 시대 음악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11][12]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 프로젝트가 있으며, 이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레이블 Antoine Marchand|앙투안 마르샹영어을 설립하여 2005년에 완수했다.[13][10][14] '앙투안 마르샹'은 쿠프만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10]

또한 바흐의 스승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연구와 연주에도 기여했으며, 2004년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북스테후데 작품 전곡 녹음 프로젝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를 2005년 시작하여 2014년 10월에 완료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다수의 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10]

3. 1.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 합창단 창단

쿠프만은 1979년 암스테르담 바로크 관현악단을 설립했고, 이어서 1992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창단했다.[11][12] 이 악단들과 함께 쿠프만은 바흐의 음악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중심으로 원전 연주를 선보였다. 그는 노링턴, 가디너 등 다른 고음악 지휘자들이 낭만주의 음악 등 더 후대의 음악까지 다루는 것과는 달리, 모차르트가 사망한 1791년 이후의 곡은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바로크 및 고전주의 음악 연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9][11][12] 심지어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할 때도 고전파 피치가 아닌 바로크 피치를 고수했다. 모차르트 이후 시대의 곡으로는 프랑시스 풀랑크의 「전원의 협주곡」(1927년 작곡) 녹음이 유일하다.

쿠프만은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작업은 2005년에 완료되었다.[13] 원래 이 프로젝트는 Erato 레이블에서 진행되어 2002년까지 12장의 음반이 발매되었으나, 회사의 자금 문제로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쿠프만은 녹음 권리를 사들여 2003년 직접 Antoine Marchand|앙투안 마르샹영어이라는 레이블을 설립했다.[10][14] 이후의 녹음은 이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다. '앙투안 마르샹'은 '톤 코프만'의 플라망어 이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10] 같은 해, 쿠프만은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한 쿠프만은 바흐의 스승으로 알려진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전곡 녹음 프로젝트에도 힘썼다.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2005년에 시작되어 2014년 10월에 완료되었다. 그는 이전에도 필립스 클래식에서 북스테후데의 건반 악기 곡을, 에라토에서 칸타타 일부를 녹음한 바 있으며, 2004년에는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3. 2. 역사적 고증 연주(원전연주) 활동

고전학을 전공한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시몬 C. 얀센에게, 쳄발로를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에게 사사했으며,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다. 그는 오르간과 쳄발로 연주 모두에서 우등상(Prix d'Excellence)을 받았다.

쿠프만은 역사적 고증 연주 운동의 선구적인 인물로, 특히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 연주에 집중한다. 그는 1979년 암스테르담 바로크 관현악단을 창단했고, 1992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병설했다. 이 두 단체는 후에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 합창단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1984년 포틀랜드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창립 감독을 역임했다.

다른 많은 고음악 지휘자들, 예를 들어 로저 노링턴, 존 엘리엇 가디너, 요스 반 임머젤 등이 고음악적 접근 방식으로 낭만주의 음악이나 더 후대의 음악까지 연주하는 것과는 달리, 쿠프만은 "모차르트의 죽음 (1791년)을 경계로 삼는다"고 선언하며[1][9] 베토벤 이후의 음악을 오리지널 악기 앙상블로 연주하는 데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조차 바로크 피치로 연주하고 녹음하는 경향을 보인다.[11][12] 모차르트 이후 시대의 곡으로는 예외적으로 프랑시스 풀랑크의 전원 협주곡(1928년 작곡)을 녹음한 바 있다.

그의 오르간 연주 방식 또한 역사적 고증에 기반하는데, 발꿈치와 발가락을 함께 사용하는 현대적인 주법 대신 발가락만을 사용하여 페달보드를 연주한다. 이는 그가 키가 작은 탓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바로크 시대의 연주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쿠프만은 방대한 녹음 작업을 수행했다. 특히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 프로젝트는 2005년에 완료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13] 이 프로젝트는 원래 에라토 레이블에서 시작되었으나, 2002년 회사의 자금 문제로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쿠프만이 직접 녹음 권리를 사들여 자신의 레이블인 Antoine Marchand|앙투안 마르샹영어을 설립하고 나머지 녹음을 발매했다.[14][10] '앙투안 마르샹'은 '톤 쿠프만'의 프랑스어 번역이다. 또한 바흐의 스승이자 오르간 음악의 대가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전곡 녹음 프로젝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를 2005년 시작하여 2014년 10월에 완료했다. 쿠프만은 2004년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활발한 연주 및 녹음 활동으로 다수의 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3. 3.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 프로젝트

쿠프만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 중 하나는 바흐의 모든 칸타타 전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으며,[2] 이 작업은 2005년에 완료되었다.[13] 이 프로젝트는 쿠프만이 프랑스 에라토 클래식스 레이블 소속 아티스트였을 때 시작되었다. 그러나 12개의 앨범(CD 36장)을 발매한 후, 소유주인 워너 클래식스가 2002년 프랑스 자회사를 정리하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14] 이에 쿠프만은 처음 12개 앨범에 대한 권리를 다시 사들였고, 2003년 자신의 레이블인 앙투안 마르샹을 설립하여 시리즈를 이어갔다.[14][3] 유통은 챌린지 클래식스가 담당했다.[3] 레이블 이름 "앙투안 마르샹"은 그의 이름 '톤 코프만'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3][10]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요 솔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성부솔리스트
소프라노리사 라르손, 코르넬리아 사무엘리스, 상드린 피오, 시빌라 루벤스, 바바라 쉴리크, 캐롤라인 스탐, 데보라 요크, 요하네테 조머
알토보그나 바르토스, 마이클 찬스, 프란치스카 고트발트, 베른하르트 란다우어, 엘리자베트 폰 마그누스, 아네테 마르케르트, 카이 베셀
테너폴 아그뉴, 요르크 듀름뮐러, 제임스 길크리스트, 크리스토프 프레가르디엔, 게르트 튀르크
베이스클라우스 메르텐스


3. 4. 북스테후데 작품 전곡 녹음 프로젝트

톤 쿠프만은 바흐의 스승이자 선배였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오랫동안 옹호해 왔다. 그는 이전에 필립스 클래식스 레이블을 통해 북스테후데의 건반 악기 작품을 녹음했으며, 에라토 레이블에서는 여러 칸타타를 녹음한 바 있다.

2004년에는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 프로젝트를 완료한 후, 쿠프만은 북스테후데의 전 작품을 녹음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05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Dieterich Buxtehude – Opera Omnia|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de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으며, 2014년 10월에 마침내 모든 작품의 녹음을 완료하며 마무리되었다.

3. 5. 기타 활동

쿠프만은 1979년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1992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창단했다. 이 두 단체는 현재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 합창단으로 통합되었다.[11][12] 그는 1984년 포틀랜드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창립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 합창단과의 활동 외에도, 그는 객원 지휘자, 하프시코드 연주자, 오르가니스트로 자주 초청받고 있다. 2011년, 톤 쿠프만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아티스트 레지던스로 3년간 활동을 시작했다.[4]

쿠프만은 특히 바흐의 음악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 연주에 집중하며, “고증 연주” 운동의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다른 많은 초기 음악 지휘자들이 낭만주의 음악 등 더 폭넓은 시대의 음악에 도전하는 것과 달리, 쿠프만은 "나는 모차르트의 죽음 (1791년)을 경계로 삼는다"고[1][9] 언급하며 바로크 및 고전주의 음악 연주에 집중한다.[11][12] 예외적으로 프랑시스 풀랑크의 전원 협주곡(1928년 작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녹음 활동으로는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이 있으며, 이는 2005년에 완료되었다.[13] 처음에는 Erato 레이블에서 12장의 음반을 발매했으나, 회사의 재정 문제로 프로젝트가 중단되자 쿠프만은 직접 녹음 권리를 구매했다. 이후 2003년 워너 산하의 에라토 레이블과 결별하고, 자신의 레이블인 Antoine Marchand영어를 설립하여 나머지 녹음을 발매했다.[14][10] 이 레이블 이름은 '톤 코프만'의 플라망어 이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10] 같은 해, 그는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한 바흐의 스승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전곡 녹음 프로젝트 "Dietrich Buxtehude – Opera Omniala"를 2005년 시작하여 2014년 10월에 완료했다. 그는 2004년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3. 6. 음반 및 수상

톤 쿠프만은 바로크 음악, 특히 바흐의 작품 녹음에 집중했으며, 이를 위해 1979년 암스테르담 바로크 관현악단과 1992년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창단하여 당시의 악기와 연주법을 재현하는 원전 연주를 추구했다.[11][12] 그는 모차르트가 사망한 1791년 이후의 작품은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바로크 및 고전주의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성을 보여주었다.[9]

쿠프만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 중 하나는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이었다.[2] 이 방대한 작업은 프랑스 에라토 클래식스 레이블에서 시작되었으나, 2002년 모회사인 워너 클래식스가 재정 문제로 프로젝트 중단을 결정하면서 위기를 맞았다.[14] 하지만 쿠프만은 기존에 발매된 12개 앨범의 권리를 다시 사들였고, 2003년 자신의 레이블인 앙투안 마르샹을 설립하여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다. 챌린지 클래식스가 유통을 맡아 2005년에 마침내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을 완료했다.[3][13] 레이블 이름 '앙투안 마르샹'은 쿠프만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옮긴 것이다.[10] 이 프로젝트에는 소프라노 리사 라르손, 바바라 쉴리크, 데보라 요크, 알토 보그나 바르토스, 엘리자베트 폰 마그누스, 테너 폴 아그뉴, 크리스토프 프레가르디엔, 베이스 클라우스 메르텐스 등 여러 뛰어난 솔리스트들이 참여했다.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 완료 후, 쿠프만은 바흐의 스승으로 알려진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전곡 녹음 프로젝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Dietrich Buxtehude – Opera Omnia)'에 착수했다. 2005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14년 10월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쿠프만은 2004년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쿠프만의 방대한 음반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작품들이 포함된다.

작곡가주요 작품 녹음
바흐칸타타 전곡, 오르간 작품 전곡, 마태 수난곡 (2회 녹음),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마가 수난곡 (재구성본), 각종 협주곡 및 하프시코드 작품
스벨링크건반 작품 전곡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작품 전집 (오페라 옴니아)
하이든하프시코드 협주곡 전집, 교향곡
모차르트대관식 미사, 저녁 기도, 레퀴엠, 교향곡, 초기 건반 작품 (K. 1a-5), J.C. 바흐 주제에 의한 하프시코드 협주곡 K. 107
샤르팡티에Les Motets à double Chœur (H.403, H.404, H.135, H.136, H.137, H.392, H.410, H.167)
비발디사계
헨델메시아, 오르간 협주곡



쿠프만은 솔리스트 및 지휘자로서의 수많은 녹음을 통해 다수의 상을 받았으며, 그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아 2003년에는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10]

4. 학문적 접근 및 연주 철학

쿠프만은 서양 고전학을 전공한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 Simon C. Jansen|시몬 C. 얀센nl 사사), 쳄발로(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사사), 음악학을 공부했다. 그는 오르간과 쳄발로 연주 모두에서 우등상(Prix d'Excellence)을 받으며 바로크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다.

그의 연주 철학의 핵심은 역사적 진정성 추구에 있다. 쿠프만은 작곡가가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악기나 그 정확한 복제품을 사용하고, 당시의 음악적 조율법과 연주 스타일을 채택하여 원곡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려 노력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으로 그는 “고증 연주” 운동의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오르간 연주에 있어서는 발꿈치와 발가락을 함께 사용하는 현대적인 주법 대신, 발가락만으로 페달보드를 연주하는 방식을 고수하는데, 이는 진정한 바로크 시대의 연주법을 따르는 것이다.

쿠프만은 주로 바로크 시대 음악, 특히 바흐의 작품에 집중한다. 그는 자신의 연주 범위를 명확히 설정하여, "모차르트의 죽음 (1791년)을 경계로 삼는다"고 밝힌 바 있다.[1][9] 이는 로저 노링턴, 존 엘리엇 가디너, 요스 반 임머젤 등 고음악적 접근을 낭만주의 음악까지 확장하는 다른 지휘자들과는 다른 행보이다. 쿠프만은 베토벤 이후의 음악을 오리지널 악기 앙상블로 연주하는 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작품조차 고전파 피치가 아닌 바로크 피치로 연주하고 녹음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예외적으로 1928년에 작곡된 프랑시스 풀랑크의 전원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의 목표는 항상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한 연주를 선보이는 것이지만, 그의 해석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학자이자 동료 건반 연주자인 존 버트는 쿠프만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해석이 지나치게 장식을 많이 사용한다고 지적하며, 이는 스승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의 해석과 차별화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5]

바흐 외에도 쿠프만은 오르간 음악에서 바흐의 선배 격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연구와 녹음에도 힘썼다. 그는 2004년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바흐 칸타타 전집 녹음을 완료한 후 2005년부터 북스테후데의 전 작품을 녹음하는 프로젝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에 완성했다.

2003년에는 워너 산하의 에라토 레이블을 떠나 자신의 독자적인 레이블 'Antoine Marchand|앙투안 마르샹영어'을 설립했다. 레이블 이름은 자신의 이름 '톤 코프만'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10]

5. 수상 및 서훈

2003년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네덜란드 사자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6] 2024년 1월에는 고향인 즈볼러 시장으로부터 명예 메달을 받았다.[7]

6. 개인사

쿠프만은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포르테피아노 연주자인 티니 마토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은 함께 공연을 자주 한다. 마토는 그의 수석 음반 프로듀서이자 왕립 음악원의 교사이기도 하다.[8] 고전학을 전공한 후,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시몬 C. 얀센에게, 쳄발로를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에게 사사했으며, 음악학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오르간 연주와 쳄발로 연주로 우등(프리 덱셀랑스)을 받았다.

1979년에 암스테르담 바로크 관현악단을 설립했고, 1992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병설했다. 그는 특히 바흐종교곡모차르트교향곡 연주 및 녹음을 통해 오리지널 악기 연주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노링턴, 가디너, 임머젤과 같은 지휘자들이 고음악적 접근 방식으로 낭만주의 음악에도 진출하는 것과 달리, 코프만은 "모차르트의 죽음 (1791년)을 기점으로 선을 긋는다"[9]고 하며 베토벤 이후의 음악을 오리지널 악기 앙상블로 연주하는 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이든모차르트의 작품 역시 고전파 피치가 아닌 바로크 피치로 연주 및 녹음을 진행해왔다. 모차르트 이후의 악곡 녹음은 프랑시스 풀랑크의 「전원의 협주곡」(1927년 작곡)이 유일하다.

코프만은 바흐의 칸타타 전곡 녹음을 2005년에 완료했으며, 바흐의 오르간 작품 전집 녹음을 세 번째 시도 끝에 완수했다. 솔리스트 및 지휘자로서의 수많은 녹음을 통해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오르간 음악에서 바흐의 선배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 녹음에도 힘썼다. 일찍이 필립스 클래식에서 건반 악기 곡을 녹음했으며, 에라토에서도 칸타타 몇 곡을 녹음했다. 2004년에는 국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바흐 칸타타 전집 완성에 이어 2005년부터 북스테후데 전집 녹음 프로젝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 오페라 옴니아」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에 완성했다.

2003년에는 워너 산하의 에라토 레이블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레이블 「Antoine Marchand|앙투안 마르샹영어」을 설립했다. 이 레이블명은 플라망어의 「톤 코프만」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10]。같은 해,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012년 10월 11일에는 다큐멘터리 ''백 살까지 살아라 – 톤 쿠프만의 일 년''이 네덜란드 영화관에서 개봉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ach JS – Harpsichord Concertos – Amsterdam Baroque Orchestra, Ton Koopman http://ottosbaroquem[...] 2010-12-20
[2] 웹사이트 Ton Koopman and the Bach cantatas https://www.radionet[...] 1996-05-19
[3] 간행물 Koopman Gets Back on his Bach Cycle – Koopman started his own Antoine Marchand label imprint and, with the help of a financier friend, revised his search for an existing label that would take on finished master tapes for manufacturing and distribution. Billboard 2003-07-05
[4] 웹사이트 Tuned In: Gabriele, come blow your horn for Philharmonia Baroque https://www.mercuryn[...] 2011-02-07
[5] 서적 Bach Recordings since 1980: A Mirror of Historical Performanc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9
[6] 뉴스 Lintjesregen daalt vooral op niet-BN'ers niet https://leiden.coura[...] 2024-01-31
[7] 웹사이트 Geëerde Ton Koopman (79) stond in grootste concertzalen van de wereld: 'Maar een Blauwvinger blijf ik altijd' https://www.ad.nl/zw[...] Algemeen Dagblad 2024-01-31
[8] 웹사이트 Tini Mathot (Harpsichord) – Short Biography http://www.bach-cant[...]
[9] URL http://ottosbaroquem[...]
[10] 문서 もともと Ton は彼のファーストネーム Antonius の愛称であり、Koopmanはフラマン語で「商人」の意味。これをフランス語にすると Antoine Marchand となる。
[11] 웹인용 Bach JS – Harpsichord Concertos – Amsterdam Baroque Orchestra, Ton Koopman http://ottosbaroquem[...] 2010-12-20
[12] 문서 단 [[프랑시스 풀랑크]]가 1928년에 쓴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연주한 적 있다.
[13] 웹인용 Ton Koopman and the Bach cantatas https://www.radionet[...] 1996-05-19
[14] 간행물 Koopman Gets Back on his Bach Cycle – Koopman started his own Antoine Marchand label imprint and, with the help of a financier friend, revised his search for an existing label that would take on finished master tapes for manufacturing and distribution. Billboard 200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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