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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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수부인은 백제 전지왕의 왕비로, 구이신왕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일본서기》의 기록과 해씨가 백제의 유력 가문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씨 출신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지왕이 왜국에 인질로 갔던 시기와 구이신왕의 출생 시기를 고려하여, 팔수부인이 왜인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칠지도 하사와 관련하여, 구이신왕의 탄생을 기념하여 백제와 왜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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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수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팔수부인 |
원래 이름 | 해팔수 |
휘 | 해팔수(解八須) |
별호 | 해부인(解八須) |
작위 | 왕후(王后), 황후(皇后) |
직업 | 백제 왕후 |
설명 | 알 수 없음 |
출생일 | 생년 미상 |
출생지 | 미상(未詳) |
사망일 | 미상(未詳) |
사망지 | 미상(未詳) |
매장지 | 미상(未詳) |
배우자 | 전지왕(腆支王) |
자녀 | 2남 구이신왕(久尒辛王) 비유왕(毗有王) |
부친 | 해구(解仇)? |
모친 | 미상(未詳) |
형제자매 | 미상(未詳) |
가문 | 해씨(解氏,추정) |
왕후 정보 | |
대관식 | 팔수부인(八須夫人) |
즉위식 | 미상(未詳) |
재위 | ?~? |
작위 | 백제의 왕후 |
재위 기간 | 405년~? |
섭정 | 미상(未詳) |
재상 | 미상(未詳) |
수상 | 미상(未詳) |
전임자 | 해씨(解氏) |
후임자 | 원비(院妃) |
휘호 | 미상(未詳) |
묘호 | 미상(未詳) |
시호 | 팔수부인(八須夫人) |
법명 | 미상(未詳) |
존호 | 팔수왕후(八須王后) 팔수황후(八須皇后) |
묘소 | 미상(未詳) |
능묘 | 미상(未詳) |
전각 | 미상(未詳) |
거주지 | 백제(百濟) |
기타 정보 | |
국적 | 미상(未詳) |
성별 | 여성(女性) |
연호 | 미상(未詳) |
왕조 | 백제(百濟) |
종교 | 미상(未詳) |
호칭 | 왕후(王后), 황후(皇后) |
목록 | 백제 18대 왕후 |
2. 생애
전지왕 즉위년에 왕비가 아들 구이신을 낳았으며, 구이신은 이후 전지왕을 이어 구이신왕으로 즉위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왕모가 국정을 장악했다는 기록이 있어 팔수부인을 추측하기도 한다.[1]
팔수부인의 출신에 대해서는 해씨 출신이라는 설과 왜인 출신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또한 전지왕 3년 해수와 해구를 좌평에 임명하면서 이들을 왕의 외척들이라고 하였기에, 팔수부인은 백제의 유력 가문인 대성팔족의 해씨로 추정되기도 한다.[1]
3. 출신에 대한 여러 학설
전지왕 즉위년에 왕비가 아들 구이신을 낳았고, 구이신은 이후 전지왕을 이어 구이신왕으로 즉위하였다. 《일본서기》에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왕모가 국정을 장악했다는 기록이 있어 팔수부인을 추측하기도 한다.
전지왕 3년 해수와 해구를 좌평에 임명하면서 이들을 왕의 외척이라고 하였기에, 대성팔족의 해씨로 추정하기도 한다.
김현구[1], 노중국[2], 홍성화(건국대학교)[3][5], 김기섭(공주대학교)[4] 등은 팔수 부인이 왜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김현구 등은 곤지왕, 동성왕, 무령왕의 부인 역시 왜인이었으며, 왜 왕가가 정책적으로 혼인시켰다고 주장한다[1].
전지왕은 아신왕 3년(394년)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6년(397년) 왜국에 인질로 파견되었는데,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 전지왕은 8년간 왜국에 머물렀고, 귀국할 때쯤에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언제 어디서 결혼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지왕 즉위 후 해씨가 왕족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전지왕 즉위 후 해씨 여성을 왕비로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전지왕 즉위년 조에 "妃八須夫人,生子久尓辛"이라고 하여, 이 해에 팔수 부인이 구이신왕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팔수 부인이 해씨 출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지왕에게는 구이신왕과 비유왕 두 아들이 있었는데, 구이신왕은 팔수 부인에게서, 비유왕은 해씨 여성에게서 태어났으므로, 팔수 부인은 전지왕이 왜국에서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2].
『일본서기』에는 팔수 부인처럼 이름에 "팔" 자가 붙는 인물이 많다. 인덕천황의 이복 형제로서 계비가 된 야다 황녀, 리추 천황에게 딸인 구로히메를 시집보낸 스다노 야시로노 스쿠네 등이 그 예시이며, 특히 야다 황녀의 존재는 팔수 부인이 왜인일 가능성을 높인다. 따라서 전지왕은 왜국에서 팔수 부인을 맞이하여 귀국할 때 데려왔고,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팔수 부인에게서 구이신왕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2].
3. 1. 해씨 출신설
전지왕 즉위년에 왕비가 아들 구이신을 낳았으며, 구이신은 이후 전지왕을 이어 구이신왕으로 즉위하였다. 《일본서기》에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왕모가 국정을 장악했다는 기록을 통해 팔수부인을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전지왕 3년 해수와 해구를 좌평에 임명하면서 이들을 왕의 외척들이라고 하였기에, 그녀를 백제의 유력 가문인 대성팔족의 해씨로 추정하기도 한다.
3. 2. 왜인 출신설
김현구[1], 노중국[2], 홍성화(건국대학교)[3][5], 김기섭(공주대학교)[4] 등은 팔수 부인이 왜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현구 등은 곤지왕, 동성왕, 무령왕의 부인 역시 왜인이었으며, 왜 왕가가 정책적으로 혼인시켰다고 주장한다[1].
전지왕은 아신왕 3년(394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6년(397년)에 왜국에 인질로 파견되었는데,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 8년간 왜국에 머물렀고, 귀국할 때쯤에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지왕 즉위 후 해씨가 왕족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전지왕 즉위 후 해씨의 여성을 왕비로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전지왕 즉위년 조에 "妃八須夫人,生子久尓辛"이라고 하여, 이 해에 팔수 부인이 구이신왕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팔수 부인이 해씨 출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지왕에게는 구이신왕과 비유왕 두 아들이 있었는데, 구이신왕은 팔수 부인에게서, 비유왕은 해씨 여성에게서 태어났으므로, 팔수 부인은 전지왕이 왜국에서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2].
『일본서기』에는 팔수 부인처럼 이름에 "팔" 자가 붙는 인물이 많다. 인덕천황의 이복 형제로서 계비가 된 야다 황녀, 리추 천황에게 딸인 구로히메를 시집보낸 스다노 야시로노 스쿠네 등이 그 예시이며, 특히 야다 황녀의 존재는 팔수 부인이 왜인일 가능성을 높인다. 따라서 전지왕은 왜국에서 팔수 부인을 맞이하여 귀국할 때 데려왔고,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팔수 부인에게서 구이신왕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2]
4. 칠지도 하사 관련
왜인으로 추정되는 팔수부인의 존재는 전지왕이 왜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으며, 팔수부인에게서 태어난 구니신왕 즉위 후에도 두터운 관계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
건국대 홍성화는 칠지도에 대해 전지왕이 408년 11월 16일에 구니신왕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하고, 409년에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5] 칠지도에는 "11월 16일 병오"라는 구체적인 날짜와 간지가 명문되어 있으며, 4세기부터 6세기까지 11월 16일이 병오 간지에 해당하는 연도를 찾으면, 전지왕 4년 (408년)이 된다. 전지왕은 왜국의 여성(팔수부인)과 결혼하여 구니신왕을 낳았기 때문에, 백제인과 왜인의 혼혈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백제에서 왜왕에게 칠지도가 전달되었다고 분석했다.[5]
5. 평가
왜인으로 추정되는 팔수부인의 존재는 전지왕이 왜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으며, 팔수부인에게서 태어난 구니신왕 즉위 후에도 두터운 관계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
건국대 홍성화는 칠지도에 대해 전지왕이 408년 十一月十六日|11월 16일중국어에 구니신왕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하고, 409년에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5] 칠지도에는 "11월 16일 병오"라는 구체적인 날짜와 간지가 명문되어 있으며, 4세기부터 6세기까지 11월 16일이 병오 간지에 해당하는 연도를 찾으면, 전지왕 4년 (408년)이 된다. 전지왕은 왜국의 여성(팔수부인)과 결혼하여 구니신왕을 낳았기 때문에, 백제인과 왜인의 혼혈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백제에서 왜왕에게 칠지도가 전달되었다고 분석했다.[5]
6. 가계
참조
[1]
서적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Changbi Publishers, Inc.
2010-12-24
[2]
뉴스
5世紀の韓日関係史-『宋書』倭国伝の検討-
https://www.jkcf.or.[...]
日韓歴史共同研究
2005
[3]
뉴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https://www.khan.co.[...]
京郷新聞
2021-06-28
[4]
서적
백제의 주민과 이주 여성
한국여성사학회
2017
[5]
뉴스
石上神宮 七支刀에 대한 一考察
https://www.krm.or.k[...]
한일관계사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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