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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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유왕은 백제의 제19대 왕으로, 구이신왕의 아들이거나 전지왕의 서자로 추정된다. 429년 남조의 송나라에 조공하고, 이듬해 송나라로부터 작위를 계승받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433년 신라와 화친하여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남조, 신라, 왜와의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 비유왕은 455년에 사망했으며, 아들인 개로왕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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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왕 | |
|---|---|
| 기본 정보 | |
![]() | |
| 한글 | 비유왕 |
| 한자 | 毗有王 |
| 로마자 표기 | Biyu-wang |
| 일본어 표기 | 히라가나: ひゆうおう 가타카나: ピユワン |
| 본명 | 부여비유 (扶餘毗有) |
| 다른 이름 | 부여비 (扶餘毗) |
| 출생일 | ? |
| 출생지 | ? |
| 사망일 | 455년 9월 (음력) |
| 사망지 | ? |
| 재위 | 427년 12월 ~ 455년 9월 (음력) |
| 매장지 | 석촌동 4호분 (추정) |
| 자녀 | 개로왕 문주왕? 곤지? |
| 부왕 | 구이신왕? 혹은 전지왕 부여주 |
| 모후 | ? |
| 형제자매 | 구이신왕? |
| 왕비 | ? |
| 전임자 | 구이신왕 |
| 후임자 | 개로왕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종교 | 불교 |
| 가문 | ? |
| 왕조 | ? |
| 연호 | ? |
| 호칭 | 어라하 |
| 목록 | 제20대 백제 국왕 |
| 백제 왕 | |
| 백제 군주 목록 | 온조왕 18 BCE–28 CE 다루왕 28–77 기루왕 77–128 개루왕 128–166 초고왕 166–214 구수왕 214–234 사반왕 234 고이왕 234–286 책계왕 286–298 분서왕 298–304 비류왕 304–344 계왕 344–346 근초고왕 346–375 근구수왕 375–384 침류왕 384–385 진사왕 385–392 아신왕 392–405 전지왕 405–420 구이신왕 420–427 비유왕 427–455 개로왕 455–475 문주왕 475–477 삼근왕 477–479 동성왕 479–501 무령왕 501–523 성왕 523–554 위덕왕 554–598 혜왕 598–599 법왕 599–600 무왕 600–641 의자왕 641–660 |
| 기타 정보 | |
| 관련 주제 | 나제동맹 |
2. 생애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장남 혹은 전지왕의 서자로, 가계가 다소 불분명하다. 삼국유사에는 구이신왕의 장남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의 장남이라는 설과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 두 가지가 있지만, 전지왕 서자 설은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구이신왕의 아들로 등장하며, 왜의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비유왕을 시조로 받드는 성씨로는 불파련(不破連)씨가 있다고 한다.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는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손자라는 설도 있어, 구이신왕의 아들 부여주가 비유왕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왜에서는 그를 비유왕 또는 곤유왕, 피류왕으로도 불렀다. 전지왕의 후손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며, 어머니의 이름과 집안, 행적 등은 미상이다.
구이신왕이 반란중에 죽자 왕위에 오른 비유왕은 429년(비유왕 3년), 남조의 송나라에 조공하였고, 좌평 부여신이 죽자 전지왕 때의 외척이었던 해(解)씨 가문의 해수(解須)를 새로운 좌평으로 임명했다. 이듬해인 430년(비유왕 4년)에는 송나라가 전지왕에게 내렸던 작위를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되었다.
433년(비유왕 7년)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신라와의 우호 관계가 성립하여, 553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중국 남조, 송,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대항하는 태세를 만들었지만, 455년 9월에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휘·시호가 전해지지 않으며, 송서에는 백제왕 餘毗|여비중국어로 나타난다. 아들로 개로왕이 있다.[3][4][5][6][7]
2. 1. 왕위 계승과 초기 통치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장남 혹은 전지왕의 서자로, 가계가 다소 불분명하다. 삼국유사에는 구이신왕의 장남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의 장남이라는 설과 전지왕의 서자라는 설 두 가지가 있지만, 전지왕 서자 설은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구이신왕의 아들로 등장한다. 왜의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비유왕을 시조로 받드는 성씨로는 불파련(不破連)씨가 있다고 한다.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손자라는 설도 있어, 구이신왕의 아들 부여주가 비유왕의 아버지라 한다. 왜에서는 그를 비유왕 또는 곤유왕, 피류왕으로도 부른다. 전지왕의 후손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어머니의 이름과 집안, 행적 등은 미상이다.구이신왕이 반란중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429년(비유왕 3년), 남조의 송나라에 조공하였고, 좌평 부여신이 죽자 전지왕 때의 외척이었던 해(解)씨 가문의 해수(解須)를 새로운 좌평으로 임명했다.
이듬해인 430년(비유왕 4년)에는 송나라가 전지왕에게 내렸던 작위를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되었다.
433년(비유왕 7년)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신라와의 우호 관계가 성립하여, 553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중국 남조, 송,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대항하는 태세를 만들었지만, 455년 9월에 사망했다.
전임 구이신왕의 이복동생이다.[4][5] 전지왕은 팔수부인과 해씨 여성이라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고, 구이신왕은 팔수부인에게서 태어났으며, 비유왕은 해씨 여성에게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6] 참고로, 팔수부인은 왜인이다.[6] 『삼국사기』에는 휘·시호가 전해지지 않으며, 『송서』에는 백제왕 餘毗|여비중국어로 나타난다. 429년[3] 12월 선왕의 서거로 왕위에 올랐다.[7] 아들로 개로왕이 있다.
3. 치세
427년부터 428년까지 해충이 섭정을 하였고, 428년부터 454년까지 비유왕이 직접 통치하였다. 454년부터 455년 비유왕이 붕어할 때까지는 아들 경사가 대리청정을 했다.
429년, 남조송에 조공을 바쳤으며, 430년에는 이복형 구이신왕(久尓辛王)의 작호(爵号)를 계승하여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433년 이후 신라와 화친을 맺고(나제동맹) 선물을 교환하며 양국 간 우호 관계를 다졌다. 이로써 중국 남조(송)-백제-신라-왜의 협력 체제가 구축되어 북조와 손잡은 고구려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 덕분에 455년 비유왕이 훙거할 때까지 백제는 전쟁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비유왕 사후 455년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했을 때 신라가 구원군을 파병한 것은 비유왕의 대고구려 방어 체제가 효과를 발휘한 결과였다.
문화적으로는 남조송에 조공을 바치면서 『역림(易林)』, 『식점(式占)』 등의 서적을 구했고, 남조송 문제로부터 이를 하사받았다.
3. 1. 대외 관계
비유왕은 송, 신라, 왜와 활발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429년 송에 조공을 바치고, 430년에는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되었다.[1] 433년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553년까지 동맹을 유지했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북위와 연결된 고구려에 대항하는 데 중요했다. 비유왕 사후 455년 고구려 침입 때 신라가 군대를 파병한 것은 이러한 외교적 노력의 결과였다.3. 1. 1. 남조 송과의 관계
429년(비유왕 3년), 남조의 송나라에 조공하였다.[1] 이듬해인 430년(비유왕 4년)에는 송나라가 전지왕에게 내렸던 작위를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되었다.[1] 남조송에 조공을 바치는 과정에서 『역림(易林)』, 『식점(式占)』 등의 서적을 구하였고, 문제로부터 하사받았다.[1]3. 1. 2. 신라와의 동맹(나제동맹)
433년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 선물의 교환을 통해 신라와의 우호가 성립되었다. 이를 통해 553년까지 동맹 관계가 이어졌는데, 이를 나제동맹이라 한다. 중국 남조의 송, 신라, 왜국의 협조 체제를 가지고, 북조의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대항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455년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였을 때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는 군대를 파병하였는데, 이는 비유왕이 추진하던 고구려에 대한 방어 체제가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3. 1. 3. 왜와의 관계
429년(비유왕 3년), 남조의 송나라에 조공하였고, 이듬해 430년에는 송나라가 전지왕에게 내렸던 작위를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어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되었다.[1]433년(비유왕 7년)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신라와의 우호 관계가 성립하여, 553년까지 동맹 관계(나제동맹)가 이어지게 되었다.[1] 이처럼 중국 남조(송)~백제~신라·왜의 협조 체제를 통해 북조와 손을 잡은 고구려에 대항하는 체제를 갖추었다.[1]
3. 1. 4. 고구려와의 관계
429년(비유왕 3년) 송나라에 조공하였고, 이듬해인 430년(비유왕 4년)에는 송나라가 전지왕에게 내렸던 작위를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어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되었다.433년(비유왕 7년)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요청해, 선물의 교환을 통해서 신라와의 우호 관계가 성립하여 553년까지 나제동맹이 이어지게 되었다. 송, 신라, 왜와의 협조 체제를 통해 북위와 연결한 고구려에 대항하는 태세를 만들었다.
455년 9월 비유왕이 사망한 후, 같은 해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했을 때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는 군대를 파병하였는데, 이는 비유왕이 추진하던 고구려에 대한 방어 체제가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3. 2. 문화적 교류
비유왕은 남조송에 조공을 바치는 과정에서 『역림』, 『식점』 등의 서적을 구하였고, 남조송 문제로부터 하사받았다.[1]3. 3. 죽음
455년 9월 비유왕이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비유왕 대의 반란 기사가 직접 나오지는 않으나, 왕이 죽기 직전 흑룡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있는 등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비유왕은 반란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9]왕이 죽은 직후(455년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했을 때, 신라는 백제를 구원하는 정예군을 파견했다.[9]
4. 가계
비유왕은 백제 전지왕의 서자이거나 구이신왕의 아들로 추정된다.[2][1]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지왕에게는 팔수부인과 해씨 성을 가진 여성,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구이신왕은 팔수부인에게서 태어났으며, 비유왕은 해씨 성을 가진 여성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6] 팔수부인은 왜인이다.[6]
참조
[1]
웹사이트
전지왕
https://www.doopedia[...]
Doopedia
2021-08-27
[2]
웹사이트
비유왕이 즉위하다 ( 427년 12월(음) )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1-08-27
[3]
서적
삼국사기
[4]
서적
삼국사기
[5]
서적
삼국사기
[6]
뉴스
5세기의 한일 관계사-『송서』왜국전의 검토-
https://www.jkcf.or.[...]
일한역사공동연구
2005-00-00
[7]
뉴스
『日本書紀』朝鮮関係記事と百済三書
https://hdl.handle.n[...]
교토산업대학일본문화연구소
2021-03-31
[8]
웹사이트
毗有王 久辛王之長子 或云 支王庶子 未知孰是 美姿貌 有口辯 人所推重 久辛王薨 卽位
https://db.history.g[...]
삼국사기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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