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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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이돈은 기원전 7세기 전반에 활동한 아르고스의 통치자로, 아르고스 왕국을 재통일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펠로폰네소스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올림픽 축제에 개입하여 엘리스의 관리들을 내쫓고 직접 대회를 주관했으며,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도량형을 제정했다. 페이돈의 통치 시기는 아르고스 세력의 절정기로 평가받으며, 군사적으로는 팔랑크스 전술을 처음 사용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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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치 시기
페이돈의 통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기원전 7세기 전반(아마도 기원전 680–660년)이 가장 유력하게 여겨지지만,[1]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모순되는 점이 있어 논란이 있다. G. L. 헉슬리는 기원전 8세기를,[1] 토마스 켈리는 기원전 6세기 설을 지지한다.[2]
2. 1. 기원전 7세기 설
기원전 7세기 전반(아마도 기원전 680–660년)이 페이돈의 통치 시기로 가장 유력하게 여겨진다.[1] 이 시기는 헤로도토스의 기록, 즉 페이돈이 올림픽 축제에 개입하여 엘리스의 집행관들을 내쫓고 자신이 직접 대회를 주관했다는 보고에 근거한다. 헤로도토스는 이 사건의 연대를 제시하지 않지만, 후대 작가인 유세비우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668년에 올림픽 축제에 대한 통제권(전통적으로 엘리스의 특권)이 피사로 넘어갔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견해는 페이돈이 기원전 668년에 피사 사람들이 올림픽 축제를 장악하는 것을 도왔고, 따라서 그의 시기를 기원전 7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2]그러나 기원전 7세기 설은 페이돈의 아들이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시키온의 참주 클레이스테네스의 딸 아가리스테의 구혼자 중 한 명이었다는 헤로도토스의 또 다른 보고와 모순된다. 그러나 이는 그 보고의 민속적인 특성에 기인한 혼란일 수 있다. (레지널드 월터 매칸은 처음으로 아가리스테에게 구애하는 이야기가 인도 우화인 "춤추는 공작"에서 각색된 것이라고 제안했다.) 또는 헤로도토스가 페이돈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다른 인물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2]
2. 2. 기타 학설
G. L. 헉슬리는 페이돈의 시기를 기원전 8세기로 보았고,[1] 토마스 켈리는 기원전 6세기 설을 지지한다.[2]2. 3. 논란
페이돈의 통치 시기로 기원전 7세기 전반(아마도 기원전 680–660년)이 가장 유력하게 여겨진다.[1] 그러나 기원전 7세기 설은 페이돈의 아들이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시키온의 참주 클레이스테네스의 딸 아가리스테의 구혼자 중 한 명이었다는 헤로도토스의 또 다른 보고와 모순된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 헤로도토스가 두 명의 페이돈을 혼동했을 가능성, 또는 해당 보고가 민속 설화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레지널드 월터 매칸은 아가리스테에게 구애하는 이야기가 인도 우화인 "춤추는 공작"에서 각색된 것이라고 처음으로 제안했다.)3. 생애와 업적
페이돈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 남아있지만, 그는 강력하고 팽창주의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1] 그는 도리아인 아르고스의 통치자였으며, 전설적인 테메노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테메노스는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헤라클레이다이 중 한 명으로, 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 이후 아르고스를 차지했다고 한다.
페이돈의 통치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아르고스 세력의 절정기였다.[2] 그는 아르고스의 통치를 아르고스 지역 전체로 확장했으며, 에포루스는 그가 테메노스 이후 분열된 아르고스 왕국을 재통일했다고 기록했다.
페이돈은 펠로폰네소스의 무게와 측정을 만들거나 표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고스의 헤라이온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짧은 철제 꼬챙이들은 페이돈이 표준 측정을 확립하면서 봉헌한 것으로 추정된다.[2] 훗날 펠로폰네소스에서 사용된 일반적인 무게와 측정 시스템은 '페이도니안'이라고 불렸다. 다만, 페이돈이 최초의 그리스 동전을 주조했다는 기록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2]
페이돈은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문제에도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메가라와 코린토스 간의 국경 분쟁에서 메가라를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는 페이돈이 코린토스의 내전에 개입하다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페이돈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라케다스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의 손자 멜타스는 아르고스의 마지막 왕이었다. 게오르기우스 싱켈루스는 마케도니아 왕들의 조상이 페이돈의 또 다른 아들인 카라노스라는 계보를 인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이돈은 코린토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매년 1,000명의 젊은 코린토스 병사를 아르고스로 보낼 것을 요청했지만, 그 젊은이들은 일부러 전사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페이돈이 "태생이 불평등하더라도, 모든 시민은 평등해야 한다"고 설파했다고 기록했다. 평등은 팔랑크스 전술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페이돈은 왕으로 시작하여, 참주로 막을 내렸다"고 말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왕과 참주의 구분은 매우 모호했다고 덧붙였다.
3. 1. 아르고스의 부흥
페이돈은 전설적인 테메노스의 후손으로, 도리아인 아르고스 통치 왕조에 속했다. 그는 분열된 아르고스 왕국을 재통일하고, 아르고스 지역 전체로 통치를 확장했다.에포루스는 페이돈을 테메노스 이후 10대손으로 보았으며, 그의 통치 시기는 아르고스 세력의 절정기였다.[2] 아르고스의 팽창은 펠로폰네소스에서 팽창하던 스파르타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리처드 톰린슨은 아르고스가 스파르타의 메세니아 정복에 대한 반발로 반 스파르타 동맹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기원전 669/8년에 아르고스인들은 히시아이에서 스파르타인들을 격파하고 티레아 평원을 장악했다.
일부 학자들은 페이돈이 팔랑크스를 처음 사용한 통치자 중 한 명이며, 이것이 아르고스가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추측한다.[2]
3. 2. 군사적 업적
페이돈은 팔랑크스 전술을 처음 사용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669/8년, 히시아이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대를 격파하고 티레아 평원을 장악했다. 이 승리로 아르고스는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르고스 군대는 아이기나 침략 후 아테네인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라파엘 실리는 페이돈이 펠로폰네소스 북동부에 아르고스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를 코린토스, 메가라, 아이기나의 사건과 연결하는 증거는 강력하지 않다고 보았다.
3. 3. 올림픽 경기 개입
페이돈은 기원전 668년경 올림픽 축제에 개입하여, 경기를 주관하던 엘리스 관리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주관하였다. 이는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피사타인들이 엘리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얻도록 돕는 정치적 행위였다. 엘리스인들은 이에 격렬히 항의했고, 페이돈 주최의 올림픽을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엘리스는 아르고스의 움직임을 경계하던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고, 스파르타는 엘리스를 지원하여 페이돈과 피사를 물리치고 올림픽 임원 자리를 되찾았다.3. 4. 도량형 제정
페이돈은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무게와 측정을 만들거나 표준화했다. 아르고스의 헤라이온(헤라 신전) 발굴 과정에서 짧은 철제 꼬챙이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표준 측정을 확립할 때 페이돈이 봉헌했을 수 있다. 나중에 펠로폰네소스에서 사용된 일반적인 무게와 측정 시스템은 '페이도니안'이라고 불렸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이돈은 펠로폰네소스 전역에 도량형을 제정했다. 이 도량형은 아테네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이는 솔론이 개혁을 일으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3. 5. 기타
페이돈은 메가라와 코린토스 간의 국경 분쟁에서 메가라를 지원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 (기원전 1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페이돈은 코린토스의 내전에 개입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4. 유산과 평가
헤로도토스는 페이돈에 대해 "모든 그리스인 중 가장 오만한 자"라고 기록했다.[1]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페이돈을 왕에서 참주로 변모한 인물로 언급하며, "태생이 불평등하더라도, 모든 시민은 평등해야 한다"고 설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Early Sparta
[2]
서적
A History of Argos to 500 B.C.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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