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편강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편강렬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892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의병 부대에 투신하여 항일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후 숭실학교 재학 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3·1 운동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만주로 건너가 의성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24년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시도했으나, 1925년 체포되어 옥중에서 병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20여 년간 의병 활동,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독립운동 단체 통합 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연안군 출신 - 김진표 (정치인)
    김진표는 재무부 관료 출신으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고, 17대 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5선 국회의원과 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연안군 출신 - 유필우
    유필우는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인천광역시 부시장과 제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인천광역시 산업국장, 북구청장,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등을 지냈다.
  •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1928년 사망 - 노구치 히데요
    노구치 히데요는 1876년 일본에서 태어나 2살 때 화상을 입었지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에서 매독과 황열병 연구를 수행하며 매독 스피로헤타를 발견하는 등 업적을 남겼지만 황열병으로 사망한 세균학자이다.
  • 1928년 사망 - 알바로 오브레곤
    알바로 오브레곤은 멕시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 신장을 위한 정책을 펼쳤으나, 1928년 대통령 재선 직후 암살당했다.
편강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편강렬 선생
편강렬 선생
이름편강렬
원어 이름片康烈
출생일1892년 2월 28일
출생지조선 황해도 연백군
사망일1929년 1월 16일
사망 원인알 수 없음
거주지알 수 없음
국적조선 → 대한제국
별명알 수 없음
학력알 수 없음
종교알 수 없음
직업알 수 없음
부모편상훈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관련 활동독립운동
서명알 수 없음
웹사이트편강렬(독립유공자 공훈록)
훈장 정보
상훈[[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2. 생애

편강렬은 1892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나 을사늑약 체결 이후 항일 의병 투쟁에 뛰어들었다.[1] 1907년 이강년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나, 1908년 한성부 진격 작전에서 패퇴하고 큰 부상을 입었다.[2]

1910년 숭실학교에 입학했으나, 105인 사건과 구월산주비대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신민회와 대한광복회 등에서 활동하며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1919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1923년 만주 창춘(長春)에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3][4] 의성단은 일본 영사관 습격, 일본군 군수품 조달 열차 공격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3][4]

1924년부터는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노력하여, 1925년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1. 출생과 성장

편강렬은 1892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아버지 편상훈과 어머니 선산 김씨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1]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힘이 세서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말릴 정도였으며 용맹하고 강직했다고 전해진다.[1]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 및 침략당한 조국과 민족의 고통을 전해 듣고는, 식사도 하지 않고 며칠을 고민하다가 "왜놈들을 자기들 섬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1]

2. 2. 의병 투신과 항일 무장 투쟁

을사조약 체결 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16세에 부모님 허락을 받고 영남 지역 의병장으로 당시 강원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이강년의 부대에 입대했다. 편강렬은 이강년에게 발탁되어 의병 선봉장이 되어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공적을 세웠다.[2]

1908년 한성부 진격을 위해 이강년과 허위, 신돌석의 의병 부대가 양주에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3일간 잠도 자지 못하고 결사항전했지만 일본군 대군의 공격에 중과부적으로 패퇴했다. 편강렬은 선두에서 싸우다가 몸에 여러 군데 총상을 입고, 독립운동으로 혹독한 옥고를 치러 병든 몸이 되어 돌아왔지만, 가족과 친척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죽거나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었고, 가문의 모든 재산은 빼앗긴 상태였다.

2. 3. 학업과 국권회복운동

1910년 평양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 재학 중 안명근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체포된 105인 사건(1911년)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고, 1919년 3·1운동 무렵에는 황해도 지역에 항일유격대를 건설하려 한 구월산주비대 사건으로 또다시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국권회복운동에 몸 바치기로 하여, 선친이 경영하던 양진의숙에서 교편을 잡아 청소년들을 규합하여 독립사상을 가르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안창호, 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신민회는 중앙에 총감독, 총서기, 회계가 있고 의사원이 있어 각 도의 인사를 선임했다. 각 도에는 총감, 군에는 군감을 두었다. 위 아래로는 연결되나, 옆으로는 서로 알 수 없는 비밀결사 단체이다. 1919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황해도 군사주비단은 안악군(안악 삼일운동과 안악의거를 통해서 많이 알려진 곳이다), 해주군(이승준), 장연군(장규황), 은율군(백상순), 서흥군(권순옥), 재령군(윤응념)의 대표들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과 독립신문을 비롯한 항일문서 배포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지원을 목표로 하는 단체였다. 영남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2. 4. 의성단 활동과 독립운동 단체 통합 노력

1923년 교육 계몽 등의 평화적 방법으로는 국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만주 창춘(長春)에서 단원 7명으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3][4] 의성단은 일본 영사관 습격, 일본군 군수품 조달 열차 공격, 펑톈(奉天) 시가전, 지린(吉林) 일본 기관 습격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3][4] 당시 이주 한인들은 농기구와 농사지을 땅이 없었고, 소작을 하더라도 지주들과 마적 패들에게 피해를 보고 있었다. 편강렬은 절망에 빠진 한인들을 규합하고 자치 기관과 금융 기관을 설치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문맹을 퇴치하며, 의료 약품조차도 없는 농민들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활동을 하였다.(출처는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회지, 이상향을 찾아서 양정필, 역사문제연구 29 2013 202쪽)

"단장 편강렬은 의성단의 확장을 위하야 중동선 연안과 합장선 디방에 단원을 파송하야 디방 인사들은 매우 환영한다"는 시대일보의 보도를 보면, 의성단이 일제의 탄압으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호응이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편강렬은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이주 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으며, 실제로 성과가 있었다고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여러 무장 항쟁 조직이 산재하고 있었으므로, 편강렬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그 실행 방법과 활동 방법이 다르고, 일반 동포들이 곤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독립운동 전선이 약화됨을 깨닫고 통합 운동에 나섰다. 1924년 7월 지린(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주도하여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대한광정단, 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 노동민족회의 대표들과 독립군 통합을 논의하고, 하얼빈에서 각 독립 단체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統一會)로 하나로 뭉칠 것을 의논했다. 1925년 남만주 지역을 통합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체포와 죽음

1925년 하얼빈에서 주요 업무를 마치고 지린에 갔다가 밀정의 밀고로 장시간 총격전 끝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밀고자는 이범석 광복군장의 추적으로 사살되었다.[1] 1925년 1월 17일자 시대일보와 조선일보에는 편강렬 의사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를 경성의 양정의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 일제의 "독립운동에서 손 떼면 도지사 벼슬을 주겠다"는 제안을 "왜놈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말로 거절했다.[1] 1925년 10월 20일 열린 공판에서 편강렬은 최후 진술로 "나는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고 말하였다.[1] 통합논의 진술 편강렬의사의 독립운동이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유명 변호사들이 자처해서 변호를 하였으나 편강렬 의사의 최후변론으로 형기를 줄이려는 변호사의 변론과 증거 제출은 모두 기각되고 편강렬은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1]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한 뒤 만주 안둥에서 병사했다.[1]

4.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5] 김천 남산공원에 할아버지대까지 살았던 연고를 기념하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고,[5] 강화도 평화전망대에는 이북 실향민들이 주축이 되어 그의 뜻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편강렬 의사 추모비

5. 평가

편강렬은 20여 년간 의병 활동, 애국계몽운동, 무장 투쟁, 의열 투쟁, 독립운동 단체 통합 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 일제의 고문과 잦은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던 민족의 귀감으로 여겨진다.[2] 특히 김구, 김규식, 김좌진, 지청천 등과 함께 만주,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3]

6. 의성단의 주요 활동

의성단은 교육, 계몽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국권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조직된 항일 무장 단체였다.[3][4] 이들은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군경 200여 명과 7시간여 동안 시가전을 벌여 일본 군경 60여 명을 사상케 했다(일본 측 기록에는 17명 사망, 나머지는 부상).[3][4] 또한 장춘선(長春線) 일본군 군수품 조달 열차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3][4]

의성단이 우상화되면서 청소년들과 잡범들이 가짜 의성단을 조직하는 일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2008년 12월 보훈처가 입수한 일본 외무성 사료관의 마이크로필름 자료인 `만주지역 한인 독립운동 동정보고 자료`에 따르면, 편강렬과 의성단에 대한 자료가 특별히 많았다. 이는 편강렬이 의병장 시절부터 일제의 중요 감시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6]

의성단과 편강렬에 대한 자료로는 <의성단장 편강열의 처분에 관한 보고의 건>40권, <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후에 있어서의 동단의 근황에 관한 건 정보>40권, <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에 관한 보고의 건>40권, <의성단 잔당의 동정>40권, <의성단 잔당의 동정에 대하여>40권, <의성단의 동정>40권, <의성단의 상황에 관한 건>40권 등이 있다.[6]

의성단은 군자금 모집 활동도 전개했는데, 그 대상은 주로 악독한 일본인 부자들과 매국노, 친일파 부자들이었다고 한다. 105인 사건 공판 기록(영문판 번역본)에는 편강렬이 김구 등과 함께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 모집을 했던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6. 1. 만주 및 국내에서의 무장 투쟁

1919년 화이더현(懷德縣)의 우자쯔(五家子)에서 양기탁, 남정과 함께 항일 무장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3][4] 교육 계몽 등의 평화적 방법으로는 국권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성단은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군경 200여 명과 7시간여 동안 시가전을 벌여 일본 군경 60여 명을 사상했다(일본 측 기록에는 17명 사망, 나머지는 부상).[3][4] 또한, 장춘선(長春線) 일본군 군수품 조달 열차를 공격했다.[3][4] 당시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농기구와 농사지을 땅이 없었고, 소작을 하더라도 지주와 마적 패들에게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의성단은 절망에 빠진 한인들을 규합하고 자치기관과 금융기관을 설치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교육기관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며, 의약품조차 없는 농민들을 외부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단장 편강렬은 의성단의 확장을 위하여 중동선 연안과 합장선 지방에 단원을 파송하여 지방 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시대일보의 보도를 보면, 의성단이 일제의 탄압으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호응이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편강렬은 만주 지역 거주 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으며, 실제로 성과가 있었다고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다.

의성단은 만주에서 창춘(長春)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하고, 펑톈(奉天)에서 시가전을 벌였으며, 지린(吉林)의 일본 기관을 습격했다. 약 250명의 회원을 보유한 의성단은 훈련 기관을 갖추고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등 일본군과 직접 시가전을 벌였다. "의열단의 침입에 전후하여 의성단의 침입 정보가 도달하였으므로 경무 당국은 대경실색하여 어쩔 줄 모르는 판인데..."라는 신문의 보도는 당시 일제의 공포감을 보여준다.

의성단원들은 경상도와 평안도 등에서도 일경들과 직접 교전했다.[6]

  • 1924년 6월 9일 김홍진(金洪鎭)과 김창진(金昌鎭)은 영덕 장사리 일경주재소에서 검문에 불응하고 자동 연발총을 난사하며 일경들과 교전, 수적 열세로 순사 3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순국하였다. 오른손에 총탄을 맞자 왼손으로 사격하며 세 번이나 장전하여 40발을 응사한 의성단원의 사격술에 일제 당국은 “상당한 병식 훈련을 받은 것 같다”며 경탄하였다.[7] 이들에게는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8]
  • 1923년 6월 박일훈(朴日勳)은 의주 영산적경주재소에서 4곳의 총상을 입고도 주재소를 파괴하고, 또 다른 교전으로 총 9곳에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2014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9][10]
  • 1923년 음력 11월 12일 김명제(金明濟)는 장춘에서 무기를 수령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발각되어 교전 끝에 다수의 일경을 사살하였지만,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924년 2월 의성단장 편강렬은 중국 길림에서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의성단원들은 서울 등에도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모집 대상은 악독한 일본인 부자들과 매국노 친일파 부자들이었다고 한다.

6. 2. 만주 이주 한인 지원 활동

1919년 화이더현(懷德縣) 우자쯔(五家子)에서 양기탁, 남정 등과 함께 항일 무장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은 편강렬은,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였다.[3][4] 당시 이주 한인들은 농기구와 농사지을 땅이 없었고, 소작을 하더라도 지주와 마적 패들에게 피해를 보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3][4]

편강렬은 이러한 한인들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활동을 펼쳤다.

  • 한인 자치기관 및 금융기관 설치 지원: 한인들을 규합하여 자치기관과 금융기관을 설치하고 자금을 마련하도록 지원하였다.
  • 한인 대상 교육기관 설립 및 문맹 퇴치 운동 지원: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 의료 지원 등 생활 개선 활동: 의료 약품조차도 없는 농민들을 위해 의료 지원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은 실제로 성과를 거두어, 당시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다. 시대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의성단이 일제의 탄압으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호응이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6] 박환).

6. 3. 일본 기관 공격의 배경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

의성단이 만철(滿鐵)을 공격한 이유는 만철이 일제의 거대한 정보 수집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불태우지 못한 문서(비밀, 기밀, 극비로 구분)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관동도독부, 관동군, 만철(滿鐵)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위한 3대 기구였다.[3]

만철(滿鐵)은 노점상, 의사 등으로 위장해 활동했고 전화·전신 감청을 통해 각종 정보를 빼냈다. 만철 산하 조직은 중국과 일본에 널리 퍼져 있었고 핵심 조사원은 2,500여 명이었다. 만철 수석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다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던 인물이다. 만철 병원은 저격당한 이토를 입관하였다.[3] (출처는 2014/05/05 연합신문, YTN, SBS 뉴스, 아주경제, 칭다오도서관).

중국 각지의 일본군 병원에서는 ‘수술 연습’을 명목으로 중국군, 독립군 등에게 마취를 하여 생체 해부를 하고 살해하는 일이 행해졌다.[3](출처는 WAR AND MEDICAL ETHICS<전쟁과 의사의 윤리>) 호주군 일본어 통역자 프레드릭 아르블래스터가 여성들이 누구냐고 묻자, 일본군 장교는 적십자 간호사라고 둘러댔다. 일본군은 위안부들에게 적십자 완장을 나눠줬다.[3](출처는 코리아 헤럴드, 2016-02-17).

일본군은 적십자 병원을 점령하고 포로 부상병들에게 음식 제공을 중지하였으며, 대부분의 포로 부상병들을 처형하였다.[3] 일본군은 커다란 적십자가 지붕에 그려진 난징 중앙병원에 천 파운드 폭탄 2개를 투하했다.[3](출처: 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일본은 제네바 협약에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국제 표준인 적십자 사용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군수품, 군인들은 적십자(녹십자) 마크를 사용해서 보호했다.[3](미디어오늘, 2004-01-05).

세균, 독가스, 생체 실험을 자행한 일본 군대(731, 100, 1644, 1855, 8604 부대) 사진에도 ‘적십자’ 표식이 있는 대량의 물자와 일본 군복을 입고 밖에는 흰 가운을 걸친 남자들이 등장한다.[3](출처: 인민망 한국어판/중국광파망, 2014-06-08, 번역·감수: 조미경)

의성단의 일본군 전용 만철 병원 백주(대낮) 공격을 적십자 병원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3]

의성단이 영사관을 공격한 이유는 일제 영사관이 조선총독부에 배속되어 직원들과 경찰들 모두 총독부 파견이었으며, 치외법권을 악용하여 한국인은 일본 국민이 되었으니 자기들이 관리한다면서 무자비한 탄압(감금, 고문, 감시)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김동삼, 남자현, 이육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던 곳이다.[3](출처: 박환, 만주 지역 한인 유적 답사기,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애국지사들은 고문으로 중병을 얻고 회생 불가능 상태에서 석방되어 객사하는 경우도 있었다.[3](출처: Korea Daily, 2016.09.17).

7.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아버지편상훈1860년 ~ 1900년
어머니선산 김씨1858년 ~ 1922년
양자편재충1937년 ~
손녀편지숙1969년 ~



1925년 편강렬 체포 후 기록된 일제 자료에 의하면 그의 부인은 '한국의 마더 테레사', '전쟁고아의 어머니' 등으로 불린 황온순 여사라고 한다.[1] 이화 역사 문제 연구소 소장에 의하면 그의 아들이 한국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1]

참조

[1]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편강렬
[2] 웹사이트 국가보훈처 - 이달의 독립운동가 - 편강렬 http://www.mpva.go.k[...] 2016-04-07
[3] 문서
[4] 논문 片康烈의 국권 회복운동과 의열투쟁 National Rights Recovery Movement and Heroic Struggle of Pyun Kangryul http://www.earticle.[...] 2016-10-12
[5] 웹사이트 크레존 - 편강렬 순국기념비 http://www.crezone.n[...]
[6] 웹인용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https://web.archive.[...] 2016-10-11
[7] 웹사이트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 현충시설.사적지 http://www.815gb.or.[...]
[8]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http://sajeok.i815.o[...]
[9] 뉴스 독립신문(1923.7.21) 보훈처 보도자료 http://www.mpva.go.k[...] 1923-07-21
[10] 웹인용 공훈전자사료관 https://web.archive.[...] 2017-05-25
[11] 웹사이트 경북을 빛낸 인물 - 편강렬 http://www.gb.go.k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