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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섭정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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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섭정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로부터 점령한 폴란드 영토에 세운 괴뢰국이었다. 독일은 완충국을 만들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이 왕국을 구상했다. 1916년 11월 5일 선언을 통해 폴란드 국가 창설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의 통제를 받았다. 섭정 평의회가 임시 정부 역할을 했으나, 독일 총독의 간섭으로 실질적인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1918년 독일의 패배가 가까워지면서 섭정왕국은 붕괴되었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권력을 장악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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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섭정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폴란드 왕국
현지 명칭
다른 표기
지위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 제국의 괴뢰 국가
수도바르샤바
공용어폴란드어, 독일어
통화폴란드 마르카
제정 러시아 루블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네
국가(정보 없음)
지도
폴란드 1918
폴란드 섭정 왕국의 위치 (1918년)
국기 및 국장
폴란드 왕국 국기
국기
폴란드 왕국 국장
국장
정치
정치 체제단일 입헌 군주국 (섭정 통치)
국왕공석 (1917년–1918년)
국가 원수국가 평의회a (1917년)
섭정 평의회a (1917년–1918년)
총리얀 쿠하제프스키 (1917년–1918년)
안토니 포니코프스키 (1918년)
얀 칸티 스테치코프스키 (1918년)
유제프 시비에진스키 (1918년)
브와디스와프 브루블레프스키 (1918년)
비고a. 집단 국가 원수로 통치
역사
시대제1차 세계 대전
이전바르샤바 총독부
러시아 제국
사건11월 5일 선언 (1916년 11월 5일)
건국 (1917년 1월 14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18년 3월 3일)
휴전 협정 (1918년 11월 11일)
이후폴란드 제2공화국
기타
현재
인구(정보 없음)
면적(정보 없음)

2. 역사적 배경

폴란드 분할 이후 1세기 만에 폴란드를 복원하려는 결정은, 점령 지역에서 추가적인 제국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러시아와의 미래 전쟁을 막기 위한 완충국을 만들려는 독일 정책 입안자들의 시도였다. 1915년 독일군은 폴란드인들에게 해방자로 도착했다는 선전 팜플렛을 전달했다.[2] 그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 휘하의 독일 고위 사령부는 콩그레스 폴란드 영토 약 30000km2를 병합하고, 최대 300만 명의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추방하여 독일 식민주의자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3][4][5][6][7] 독일 정부는 발트 국가의 폴란드 지주들이 폴란드로 입국하는 대가로 발트 재산을 독일에 매각하도록 강요했고, 프로이센 분할의 폴란드 영토에서 폴란드인들을 제거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었다.[8]

독일과 오스트리아 황제는 폴란드 섭정 평의회(폴란드어: Rada Regencyjna) 설치를 인정하고, 독일 점령 러시아령 폴란드 지역의 제한적인 행정권과 국왕 선출 권한을 부여했다. 초기 국왕 후보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슈테판 대공이었다. 그는 폴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지비에츠에 거주했고, 두 딸을 폴란드 대귀족에게 시집보냈다. 대공은 왕관 획득에 의욕을 보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는 자신이 폴란드 왕위에 오를 생각이었기에 허락을 망설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독일에 종속되면서 오스트리아 후보의 폴란드 왕위 획득 가능성은 사라졌다. 독일은 괴뢰 국가를 자국 황자 중 한 명이 지배할 것을 요구했다.

과거 러시아령 폴란드 입헌 왕국 지역에서는 러시아어 대신 독일어가 행정과 사법에 도입되었다. 1863년 1월 봉기 이후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어 사용을 금지했지만, 새로운 왕국에서는 폴란드어 사용이 허용되었다. 동맹국의 지원 부대인 Polnische Wehrmachtde(사령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총력전 지원을 위해 설치되었지만, 폴란드인은 거의 부대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섭정 왕국 말기에 부대원은 5000명뿐이었다. 섭정 왕국은 폴란드 마르크 (폴란드어: Marka polska)를 발행했다. 1917년 9월 12일 헌법 초안이 작성되어 양원제 입헌 군주제를 선택했지만, 행정 최고 책임자는 미정이었다.

2. 1.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초기 계획

폴란드를 분할된 지 1세기 만에 복원하려는 결정은, 점령지에서 추가적인 제국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러시아와의 미래 전쟁을 막기 위한 완충국을 만들려는 시도로 독일 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1915년 독일군은 러시아 제국에 의한 폴란드의 예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해방자로서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독일 선전 팜플렛 캠페인이 폴란드인들에게 전달되었다.[2] 그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 휘하의 독일 고위 사령부는 콩그레스 폴란드 영토 약 30000km2를 병합하고, 소위 폴란드 변경 지대 계획에 따라 최대 300만 명의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추방하여 독일 식민주의자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3][4][5][6][7] 독일 정부는 독일이 점령한 발트 국가에 거주하는 폴란드 지주들이 폴란드로 입국하는 대가로 발트 재산을 독일에 매각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처벌 위협을 가했다. 프로이센 분할의 폴란드 영토에서 폴란드인들을 제거하려는 병행 노력도 이루어졌다.[8]

1914년 전쟁 발발과 함께 독일은 러시아 제국군에 대한 동부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독일 재상)은 나중에 폴란드 변경 지대로 알려진 콩그레스 폴란드에서 특정 지역을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폴란드 인구를 독일 제국 인구에 추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폴란드인들을 동쪽으로 더 떨어진 새로운 폴란드 국가로 민족 청소하고, 그 지역에는 독일인들을 재정착시키는 방안이 제안되었다.[9][10]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러시아로부터 정복한 영토를 바탕으로 종속적인 폴란드 국가를 건설할 생각을 했다. 이 새로운 자치 폴란드 왕국은 독일의 왕자가 통치하고 군사, 교통, 경제는 독일이 통제할 예정이었다. 군대와 철도망은 프로이센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었다.[1]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보낸 여러 각서에서, 독일이 통제하는 폴란드 지역의 총독인 한스 하르트비히 폰 베셀러는 독립 폴란드 국가 설립을 제안했다. 당시 독일의 동유럽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의 영향으로, 이 제안에는 독일, 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상당한 양의 토지를 합병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베셀러의 본부에서 외무성의 대표이자 베트만 홀베크 재상의 사촌인 게르하르트 폰 무티우스는 합병의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며, "군사적 이익이 허용한다면 분열과 분리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러한 정책이 "새로운 폴란드에 대한 반러시아적 성향"을 확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1]

유력한 독일 지식인들도 전쟁 초기 몇 년 동안 비슷한 계획을 추진했다. 한스 델브뤼크, 프리드리히 나우만, 파울 로르바흐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폴란드 민족주의와 폴란드 사회가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독일이 폴란드에서 대규모 영토를 합병하려 한다면 심각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독일이 독일 보호령으로서 자치 폴란드 국가를 설립함으로써 폴란드에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11]

1917년 카를 슈테판 대공(카를 슈테판)


이 "자치" 폴란드의 국경은 소위 "폴란드 변경 지대"를 합병하여 독일에게 유리하게 변경될 예정이었으며, 이는 러시아의 폴란드 분할의 일부였던 폴란드 영토의 상당 부분을 합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1916년 말까지 독일은 거의 30000km2의 폴란드 영토를 합병하려 했다. 이 지역은 민족 독일인들이 정착하게 될 예정이었고, 폴란드인과 유대인 인구는 제거될 예정이었다.[26]

예상되는 승리 이후 폴란드 경제는 독일이 지배하게 될 예정이었고, 비스툴라의 폴란드 철도 시스템, 동브로바 분지, 라돔키엘체의 산업 지역에 대한 독일 통제를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12]

이러한 계획은 로지 지역의 폴란드 내 독일 소수 민족 구성원들도 제안했으며, 그들은 11월 5일 법에 항의하고 독일 정부에 서부 폴란드의 독일 합병과 그 지역의 독일인 정착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13][14]

독일의 왕위 후보들은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바이에른 왕국의 왕가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15] 바이에른은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 최고 사령관인 레오폴트 왕자가 새로운 군주가 되기를 요구했다.[16] 뷔르템베르크의 후보 알브레히트 공작은 가톨릭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 왕위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17] 작센의 베틴 가문이 폴란드 왕위를 주장하는 근거는 이전의 작센 통치자 셋 -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2세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 - 이전에 폴란드를 통치했기 때문이었다.[18]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폴란드 임시 정부인 최고 국민 위원회의 결성을 허용했으며, 폴란드에 대해 세 가지 다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폴란드 해결책"은 다른 칭호와 함께 이미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왕이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아래 폴란드 왕국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과 헝가리인 세력은 주로 슬라브족 지역이 만들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달리, 1916년에 합스부르크 왕위에 즉위한 카를 1세는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다. 나머지 두 가지 구상은 옛 의회 폴란드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그리고 1795년에 해체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잔재로 구성된 국가 사이에서 분할하여 새로운 버전을 만드는 것이었다.[19]

폴란드 역사가 야누시 파예프스키에 따르면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독일의 욕망을 과소평가했다".[20] 카를 폰 슈튀르크 총리에 따르면 그들은 "폴란드인은 폴란드인으로 남을 것이다 [...] 갈리치아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된 지 150년이 지나도 폴란드인들은 여전히 오스트리아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21]

새로운 폴란드 왕위 후보 중 오스트리아의 카를 슈테판 대공(Karol Stefanpl)과 그의 아들 카를 알베르트가 유력한 후보였다. 둘 다 갈리치아의 자이버스 (현재 지비에츠)에 거주하며 폴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카를 슈테판의 딸들은 폴란드 귀족인 차르토리스키 공과 라지비우 공과 결혼했다.

1916년 초가 되면서 "오스트리아-폴란드 해결책"은 가설이 되었다. 독일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1월에 이 아이디어를 거부했고, 2월에는 베트만 홀베크가 뒤를 이었다. 베트만 홀베크는 독일이 폴란드 경제, 자원,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한 새로운 폴란드 왕위에 오스트리아 후보가 오르는 것을 기꺼이 보려고 했다.[22]

2. 2. 11월 5일 선언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실패하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게 군사적 패배를 겪은 후, 최고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의 지휘관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는 폴란드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 이전에는 폴란드를 러시아와의 별도 강화 조약 체결 시 협상 카드로 여겼지만, 이제는 독일의 종속국을 수립하여 폴란드 군대를 창설하고 동맹국의 손실을 대체하고자 했다. 1916년 10월, 프스치나에서 열린 공동 회의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도부는 미래에 폴란드 국가 창설을 약속하는 선언을 가속화하기로 합의했다.[27]

1916년의 총독 베셀러 (왼쪽에서 첫 번째)와 쿠크 (왼쪽에서 두 번째)


그동안, 베셀러 장군은 친오스트리아 폴란드인들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가 민주주의 정당 (파리에 본부를 둠)은 동맹국과의 어떠한 협력도 거부했다. 독일 황제와 총리가 유제프 브루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대표단을 만난 후, 최종 세부 사항이 조정되었다. 1916년 11월 5일, 바르샤바의 베셀러 총독은 11월 5일 선언을 발표하여 폴란드 국가를 창설할 것을 약속했지만, 미래의 폴란드 통치자, 폴란드 국경 또는 통치 체제를 명시하지 않았고, 1831년 이후 처음으로 바르샤바 왕궁을 폴란드 국기로 장식했다. 오스트리아 총독 쿠크는 루블린에서 유사한 선언을 발표했다. 브와디스와프 스투드니츠키가 이끄는 친독일 파벌이 존재했지만, 폴란드 인구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3. 섭정 통치 체제

섭정 회의는 독일인 총독 한스 하르트비히 폰 베셀러의 통제를 받았으며, 신왕을 선출하지 못하고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1918년 11월 11일, 섭정 회의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3일 뒤인 11월 14일에는 피우수트스키를 국가 원수로 임명한 후 해산했다.

섭정 회의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 알렉산데르 카코프스키 추기경: 바르샤바 대주교이자 폴란드 왕국 수석 대주교
  • 즈지스와프 루보미르스키 공: 대지주, 바르샤바 시장 (1915년 - 1917년)
  • 유제프 오스트로프스키 백작: 대지주, 러시아 제국 의회의 폴란드 파 전 대표


섭정 회의 기간 동안 총리직을 역임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기간총리
1917년 11월 20일 - 1918년 2월 27일얀 쿠하제프스키
1918년 2월 27일 - 1918년 4월 3일안토니 포니코프스키
1918년 4월 4일 - 1918년 11월 5일얀 칸티 스테추코프스키
1918년 11월 5일 - 1918년 11월 11일브와디스와프 부르블레프스키


3. 1. 섭정 위원회 구성

섭정 위원회. 왼쪽부터: 오스트로프스키, 카코프스키, 루보미르스키


11월 5일 선언에 언급된 두 기구는 섭정 위원회 (1917년 10월 15일 – 1918년 11월 14일)가 구성된 후 해산되었으며, 대주교 알렉산데르 카코프스키, 즈지스와프 루보미르스키 공작, 유제프 오스트로프스키로 구성되었다.[24] 1917년에 헌법 초안이 제안되었다.[25] 임시 국가 위원회 임시 위원회(Komisja Przejściowa Tymczasowej Rady Stanupl)의 중단 이후, 동맹국들은 1917년 9월 12일에 임시 헌법인 '특허장(patent)'을 도입했다. '특허장'은 양원제 의회를 갖지만 각료 책임제가 없는 입헌 군주제를 고안했다. 학교와 법원만이 폴란드 당국에 이관되었지만, 폴란드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독일 소수 민족에게 별도의 학교 시스템이 제공되었다. 폴란드 국왕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섭정 위원회(Rada Regencyjnapl)가 임시 정부로 설치되었다. 9월 18일, 위원회의 다음 구성원이 지명되었다: 알렉산데르 카코프스키, 바르샤바 대주교; 1916/17년에 바르샤바 시장을 역임한 귀족 즈지스와프 루보미르스키 공작; 그리고 러시아 두마에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주요 정치인이었던 대지주 유제프 오스트로프스키(Józef Ostrowski).[1]

폴란드 군 장교와 함께 있는 섭정 위원회 위원들


섭정 위원회는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사망 기념일인 10월 15일에 공식적으로 설치되었고, 11월 26일에 6월부터 정부에서 일해 온 변호사 얀 쿠차르제프스키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행정은 엄격하게 독일 당국, 현재 오토 폰 슈타인마이스터가 이끌었다.

3. 2. 임시 국가 평의회

1917년 1월 14일, 임시 국가 평의회(폴란드어: Tymczasowa Rada Stanu)가 임시 정부로 설립되었다. 독일 당국이 선출한 15명과 오스트리아 당국이 선출한 10명으로 구성되었다. 귀족 바츠와프 니에모요프스키가 원수로 임명되었고, 유제프 미쿠우워프스키-포모르스키가 부원수로 활동했다. 프란치셰크 피우스 라지비우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군사 위원회를 담당했다.

임시 국가 평의회는 군주제 정부, 동쪽으로의 폴란드 확장을 지지하며 자원 군대를 지원하는 첫 번째 선언을 발표했다. '국가 평의회'는 임시 의회 역할을 했다. 평의원들은 폴란드 자치권을 주장했고, 4월 21일에는 교육, 법원 및 선전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치권 정도에 불만을 품고 5월 3일에 파업을 조직하여 모든 대학교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

임시 국가 평의회 (1917년 1월 14일 – 1917년 8월 15일)의 국가 당국은 다음과 같았다.

  • 원수: 바츠와프 니에모요프스키 (1917년 1월 14일 – 1917년 8월 6일)
  • 부원수: 유제프 미쿠우워프스키-포모르스키

3. 3. 헌법 제정

알렉산데르 카코프스키, 즈지스와프 루보미르스키, 유제프 오스트로프스키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가 구성된 후 1917년에 헌법 초안이 제안되었다.[25] 동맹국들은 1917년 9월 12일에 임시 헌법인 '특허장(patent)'을 도입했는데, 이 특허장은 양원제 의회를 갖지만 각료 책임제가 없는 입헌 군주제를 고안했다.[1]

3. 4. 폴란드 군대 창설 시도와 선서 위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통일되고 독립적인 폴란드를 지지하는 선언(1917년 1월 22일)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2월 혁명으로 몰락하면서 중립적이거나 친협상국 입장을 선호하는 폴란드 세력이 강화되었다.

1917년 4월 21일, 국무원은 폴란드군(Polnische Wehrmachtde)을 지지하는 선언을 통과시키고 식고르스키 대령을 징병을 감독하도록 임명했다. 중앙 강대국과 폴란드 군단의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졌는데, 특히 강대국들이 오스트리아 국민의 군단(현재는 폴란드 보조 군단, ''Polski Korpus Posilkowy'') 참가를 금지하고 정규 오스트리아군으로 전환하려 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정부에서 복무하는 데 동의하고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군의 선서 투표에서 기권했으며, 7월 2일에는 좌익 국무원 의원 2명과 함께 사임했다. 총독이 초안을 작성하고 국무원이 통과시킨 새로운 군대 선서는 특히 특정되지 않은 "미래의 왕"에게 맹세하고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강조했기 때문에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여러 군단병이 선서를 거부하고 체포되자 베셀러 장군은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동료 Kazimierz Sosnkowski를 체포하여 독일로 감금했다. 8월에 군단의 잔여 병력, 약 1만 명의 병사가 동부 전선으로 이송되었다. 8월 6일 니에모요프스키 원수가 사임했고, 국무원은 8월 25일에 해산되었다. 1917년의 선서 위기 이후, 폴란드 군에 대한 징병은 미미한 지원을 받았고 결과도 거의 없었으며, 5,000명에 불과했다. 1918년 5월, 전 차르 군대에서 모인 유제프 도브르무슈니츠키 장군이 자신의 폴란드 군단을 폴란드로 이동시키면서 전력이 강화되었다. 8월에는 선서 거부로 체포된 군단병들이 석방되었고, 일부는 다시 폴란드 군에 자원했다.[13]

4. 섭정왕국의 붕괴와 폴란드 독립

1918년 11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마그데부르크에서 풀려나 바르샤바로 돌아오면서 섭정왕국은 종말을 맞이했다. 독일군은 폴란드 반군에게 발포를 거부하며 무장 해제되었고, 섭정 평의회는 피우수트스키에게 군사 권한을 넘겼다.[31] 11월 14일, 섭정 평의회는 자신들의 남은 권한마저 피우수트스키에게 넘기고 해산했다.[31]

섭정 회의는 독일 총독 한스 하르트비히 폰 베셀러의 억압을 받았고, 새 왕을 선출하지도 못해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11월 16일, 피우수트스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독일 등 각국 정부에 무선 전보를 보내 폴란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독립 폴란드 국가 수립을 알렸다.[33]

11월 17일, 이그나치 다시친스키 총리와 브루블레프스키 임시 정부는 모두 사임하고, 새롭게 구성된 모라체프스키 정부를 지지하면서 정부의 이원 체제가 종식되었다. 따라서 11월 14일 또는 11월 17일 모두 섭정왕국의 마지막 날로 간주될 수 있다. 1918년 11월 22일, 폴란드 공화국의 최고 대표 권한에 관한 법령을 통해 피우수트스키가 국가 원수 임시 직책을 맡게 되면서 공화국으로의 전환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다.[34]

4. 1. 중앙 강국의 통제력 상실

1918년 독일의 봄 공세가 실패한 후, 9월에 루덴도르프 장군은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계획을 바탕으로 평화를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이 계획은 폴란드와 관련하여 "국제 조약에 의해 보장되는 독립 폴란드 국가"를 창설하고 "자유롭고 안전한 바다 접근"을 요구했다.[1] 10월 3일, 새로운 독일 총리 바덴 공자 막스는 윌슨의 계획을 독일이 수용하고 독일이 점령한 국가의 군사 행정을 즉시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사흘 뒤 바르샤바의 섭정 평의회 역시 폴란드 국가 창설의 기초로서 윌슨의 제안을 채택했다.[1]

10월 1일, 베젤러 장군은 베를린에서 힌덴부르크와 회담을 갖고 암울한 군사 상황을 통보받고 병들고 낙담한 채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10월 6일, 그는 행정권을 폴란드 공무원에게 넘겼다. 섭정 평의회는 1918년 10월 7일에 독립을 선언했다.[30] 10월 23일, 섭정 평의회는 시에비진스키 정부를 세웠고, 베젤러는 폴란드군(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폴란드 연대 포함)에 대한 지휘권을 섭정 평의회로 넘겼다. 11월 4일, 섭정 평의회를 폐위시키려는 쿠데타 시도 후 정부는 해산되었고, 브와디스와프 브루블레프스키의 임시 정부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섭정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루블린에 또 다른 폴란드 정부가 등장했다. 11월 6일 이그나치 다시친스키는 다치친스키(사회주의 정치인이자 전 오스트리아 의회 의원)를 총리로, 에드바르드 리츠-시미그위 대령을 군 사령관으로 하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다. 당시 마그데부르크에 여전히 구금되어 있던 피우수트스키 장군의 귀환을 기대했던 바르샤바의 온건파들은 섭정을 폐위하고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루블린의 선언을 부인했다. 이미 10월에 섭정 평의회는 피우수트스키의 석방을 요청했고, 해리 그라프 케슬러를 통해 협상한 후 장군은 11월 10일 바르샤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날 독일은 휴전에 서명했고, 바르샤바의 독일군은 폴란드 반군에게 발포를 거부하면서 무장 해제되었다. 같은 날 다치친스키 정부는 모든 권한을 피우수트스키에게 넘기고 사임했으며, 섭정 평의회는 그에게 군사 권한을 넘겨주었다. 11월 14일, 섭정 평의회는 또한 나머지 권한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게 넘기고 스스로 해산했다.[31] 같은 날, 피우수트스키는 다치친스키 폴란드 공화국 정부를 재임명하는 법령을 발표했다.[32] 이는 왕국의 브루블레프스키 임시 정부가 여전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1918년 11월 16일, 피우수트스키는 "미국 대통령, 영국 왕립 정부, 프랑스 공화국 정부, 이탈리아 왕립 정부, 일본 제국 정부, 독일 공화국 정부, 그리고 모든 교전국 또는 중립국의 정부"에 무선 전보를 보내 폴란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독립 폴란드 국가의 수립을 알렸다.[33]

11월 17일, 새로 임명된 다치친스키 총리와 브루블레프스키 임시 정부는 모두 새로운 모라체프스키 정부를 지지하며 사임하여 마침내 정부의 이원 체제를 종식시켰다. 따라서 11월 14일 또는 11월 17일 모두 왕국의 마지막 날로 간주될 수 있다. 공화국 정부로의 전환은 1918년 11월 22일 폴란드 공화국의 최고 대표 권한에 관한 법령을 통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으며, 이 법령은 피우수트스키가 국가 원수 임시 직책을 맡도록 규정했다.[34]

4. 2. 폴란드 제2공화국 수립

독일의 1918년 봄 공세가 실패한 후, 독일은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계획을 바탕으로 평화를 모색했다. 10월 3일, 독일 총리 바덴 공자 막스는 윌슨의 계획을 수용하고 독일 점령 지역의 군정 폐지를 발표했다. 10월 6일, 바르샤바의 섭정 평의회 역시 윌슨의 제안을 채택했다.[1] 10월 7일, 섭정 평의회는 독립을 선언했다.[30]

그러나 11월 6일, 루블린에서 이그나치 다시친스키를 총리로 하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바르샤바의 온건파들은 섭정을 폐위하려는 루블린의 선언을 부인하고, 마그데부르크에 구금되어 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귀환을 기대했다. 10월에 섭정 평의회는 피우수트스키의 석방을 요청했고, 협상 후 11월 10일 피우수트스키는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다음 날 독일은 휴전에 서명했고, 바르샤바의 독일군은 무장 해제되었다. 같은 날 다시친스키 정부는 모든 권한을 피우수트스키에게 넘기고 사임했으며, 섭정 평의회는 그에게 군사 권한을 넘겨주었다. 11월 14일, 섭정 평의회는 나머지 권한도 피우수트스키에게 넘기고 해산했다.[31]

11월 17일, 다시친스키 총리와 브루블레프스키 임시 정부는 모두 사임하고 모라체프스키 정부를 지지하며 정부의 이원 체제가 종식되었다. 1918년 11월 22일, 폴란드 공화국의 최고 대표 권한에 관한 법령을 통해 피우수트스키가 국가 원수 임시 직책을 맡게 되면서 공화국으로의 전환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다.[34]

1918년 11월 11일, 섭정 회의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3일 뒤인 11월 14일에는 피우수트스키를 국가 원수로 임명한 후 회의를 해산했다.

참조

[1] 서적 Europe: A history https://archive.org/[...]
[2] 서적 Ethnic Nationalism and the Fall of Empires: Central Europe, the Middle East and Russia, 1914-23 Routledge
[3] 서적 Tzw. polski pas graniczny 1914-1918 Warszawa
[4] 서적 Elusive Alliance: The German Occupation of Poland in World War I
[5] 서적 Military Occupations in First World War Europe Routledge
[6] 서적 The Great and Holy War: How World War I Changed Religion For Ever Lion
[7] 서적 A State of Nations: Empire and Nation-Making in the Age of Lenin and Stalin Ox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Impossible Border: Germany and the East, 1914-1922 Cornell University
[9] 문서
[10] 서적 Ideology and the Rationality of Domination: Nazi Germanization Policies in Poland Indiana University Press
[11] 간행물 Designing Empire for the Civilized East: Colonialism, Polish Nationhood, and German War Aims in the First World War https://www.cambridg[...] 2019-11
[12] 서적 Armies of occupation https://archive.org/[...] 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13] 서적 Warszawa podczas okupacji niemieckiej 1915–1918 http://www.bibliotek[...] Lwów
[14] 서적 Elusive Alliance: The German Occupation of Poland in World War I
[15] 서적 A History of Modern Germany Since 1815
[16] 간행물 Przegląd historyczny Polskie Towarzystwo Historyczne (Polish Historical Society)
[17] 서적 The European Powers in the First World War: An Encyclopedia
[18] 서적 Germany: 1866–1945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Primary Documents: Speech by Polish Member of Prussian Legislature Regarding German Rule in Poland, 1917 https://web.archive.[...]
[24] 문서 Monitor Polski https://www.european[...] 1918-10-07
[25] 서적 Europe 1880-1945
[26] 서적 Germany and Eastern Europe: Cultural Identity and Cultural Differences https://books.google[...] Rodopi
[27] 서적 War and Punishment: The Causes of War Termination and the First World War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8] 문서
[29] 문서
[30] 웹사이트 Message of the Regency Council to the Polish Nation https://isap.sejm.go[...] 1918-10-07
[31] 웹사이트 Orędzie Rady Regencyjnej w przedmiocie rozwiązania Rady Regencyjnej i przekazania Najwyższej Władzy Państwowej naczelnemu dowódcy wojsk polskich Józefowi Piłsudskiemu https://isap.sejm.go[...] Rada Regencyjna Królestwa Polskiego 1918-11-14
[32] 웹사이트 40. Dekret https://isap.sejm.go[...] 2024-06-20
[33] 웹사이트 Depesza Józefa Piłsudskiego z 16 listopada 1918 R https://dziennikurze[...] 1918-11-16
[34] 웹사이트 41. Dekret https://isap.sejm.go[...] 202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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