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드 브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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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드 브리엔은 12세기 후반에 태어나 샹파뉴 백작령의 제상과 예루살렘 왕국의 왕을 거쳐 라틴 제국의 황제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제5차 십자군에 참여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서는 프리드리히 2세와 갈등을 겪었다. 1229년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했지만, 니케아 제국과 불가리아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237년 사망했으며,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여러 자녀를 두었다.
장 드 브리엔은 프랑스 샹파뉴 출신의 기사였으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명령으로 60세에 십자군에 참전하여 시리아에서 활약하였다. 그 공로로 1210년 9월 14일 예루살렘 왕국의 공주 마리 드 몽페라(콘라트 1세의 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마리가 이자벨 2세를 낳고 사망하자,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레봉 1세의 딸 스테파니와 재혼하였다.
장 드 브리엔은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아내는 마리아 드 몽페라로,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몬페라토의 콘라드의 외동딸이었다. 마리아는 1205년 어머니로부터 예루살렘을 상속받았다. 장과 마리아 사이에는 외동딸 이사벨라(욜란다)가 1212년 말에 태어났다.
[1]
서적
The History
2. 생애
즉위 후 예루살렘 왕국 재건에 힘썼으며, 1218년부터 1221년까지 제5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 교환을 제안했으나, 교황 특사 펠라요 추기경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220년 2월, 장은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문제로 일시 귀국했으나, 아내와 아들의 사망으로 왕위를 포기하고 십자군에 복귀했다. 1221년, 알 카밀은 나일 강 제방을 터뜨려 십자군을 고립시켰고, 결국 다미에타 반환 조건으로 화의를 맺고 철수하였다.
십자군 실패 후, 장은 딸 이자벨의 남편감을 찾기 위해 서유럽으로 갔다.[2] 호노리우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제안했고, 이 결혼으로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 참전을 확정하려 했다.[3] 프리드리히 2세는 장의 종신 왕위를 약속했으나,[4] 결혼식 후 예루살렘 왕을 자칭하며 장을 퇴위시켰다.[2]
1228년, 그레고리우스 9세의 지지로 교황군을 이끌고 프리드리히 2세의 남이탈리아 영토를 침공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귀환하자 라틴 제국으로 망명했다.
1229년,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딸 마리 드 브리엔을 보두앵 2세와 결혼시켰다. 1231년, 보두앵 2세가 어렸기 때문에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정치를 총괄했다.
1235년부터 1236년, 니케아 제국과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연합군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위기에 처했으나, 방어에 성공하여 라틴 제국을 구했다. 1237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장 드 브리엔은 에라르 2세 드 브리엔 백작과 몽포콩의 아그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네 아들 중 막내였다.12 1231년, 14세의 조르주 아크로폴리테스는 그를 "80세 정도로 매우 늙어 보였다"고 묘사했는데,[1]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은 약 1150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다.13 그러나 13세기의 다른 저술가들은 장을 노인으로 묘사하지 않았다.1 그의 아버지는 1177년 장의 형들을 "아이들"이라고 언급했고, 1184년에는 장의 큰형인 발터 3세 드 브리엔 백작의 가정교사를 언급했는데, 이는 장의 형들이 1160년대 후반에 태어났음을 시사한다.12 현대 역사가들은 장이 1168년 이후, 아마도 1170년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12
아버지는 장을 성직자로 만들려고 했지만, 13세기 후반의 《랭스 음유시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원하지 않았다".2 음유시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장은 외가 쪽 삼촌이 있는 클레르보 수도원으로 도망쳤다.2 동료들의 격려를 받아 기사가 된 그는 무술대회와 전투에서 명성을 얻었다.2 《랭스 음유시인의 이야기》의 일부 내용은 허구로 보이지만(예를 들어, 장에게 클레르보에 삼촌이 있었던 기록은 없다), 역사가 가이 페리는 이 이야기가 장의 삶의 세부 사항을 보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2 12세기 프랑스 귀족들의 막내아들이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장을 수도원에 보냈다면 그는 수도 서원을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떠났을 것이다.2 13세기 자료에서 아크로폴리테스와 살림베네 디 아담이 장의 체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젊은 시절 "잘 싸우는 데 필요한 체격을 분명히 발달시켰다".2
에라르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1191년 성지에서 사망했다.2 그의 장남 발터 3세가 브리엔 백작위를 계승했다.2 장은 1192년(또는 1194년) 형이 발행한 칙령에 처음 언급되었는데, 이는 그가 발터의 궁정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나타낸다.12 에르눌의 연대기 한 편에 따르면, 장은 피터 2세 드 쿠르트네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했다.2 《랭스 음유시인의 이야기》는 그를 "무지한 존"이라고 불렀지만, 당시 칙령에 따르면 장은 1200년경 샹파뉴 백작령의 제상, 온종, 트란과 다른 두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다.2 1201년, 테오발드 3세 드 샹파뉴 백작은 그에게 마콩, 롱솔 등 다른 영지를 하사했다.2 테오발드의 미망인인 나바라의 블랑슈 백작 부인은 이것이 그녀의 지참금이라며 장에게 마콩의 영지를 팔도록 설득했다.2
발터 3세 드 브리엔은 1205년 6월 이탈리아 남부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2 그의 미망인인 시칠리아의 엘비라는 사후에 아들 발터 4세 드 브리엔을 낳았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자랐다.2 장은 브리엔 백작 작위를 계승하고 1205년 또는 1206년부터 조카를 대신하여 백작령을 다스리기 시작했다.2 샹파뉴 백작의 중요한 봉신으로서, 장은 아들 테오발드 4세 드 샹파뉴의 미성년 시절 샹파뉴를 통치한 나바라의 블랑슈의 궁정에 자주 드나들었다.2 에르눌의 연대기 한 편에 따르면, 그녀는 "세상의 어떤 남자보다" 장을 사랑했고, 이것은 필리프 2세 왕을 짜증나게 했다.32
2. 2. 예루살렘의 왕
장 드 브리엔은 1210년 9월 13일 아크레(Acre, Israel)에 상륙했다. 다음 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알베르토 아보가드로(Albert of Vercelli)는 그와 마리아 드 몽페라(예루살렘 왕 콘라트 1세(Conrad I)의 딸) 왕비의 결혼을 주례했다. 장과 마리아는 10월 3일 티레 대성당(Crusader Cathedral of Tyre)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마리아의 전임자인 아메리 드 시프르(Aimery of Cyprus)와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의 술탄 알 아딜 1세(Al-Adil I)가 체결했던 휴전은 장이 도착하면서 종료되었다.[1] 알-아딜은 휴전을 갱신할 의향이 있었지만, 예루살렘의 영주들은 장의 동의 없이 새로운 조약에 서명하고 싶어하지 않았다.[1] 장과 마리아의 대관식 기간 동안, 알-아딜의 아들 알 무아잠 이사(Al-Mu'azzam Isa)는 아크레 주변 지역을 약탈했지만 도시는 공격하지 않았다.[1] 아크레로 돌아온 후, 장은 보복으로 근처 무슬림 정착지를 습격했다.[2]
약 300명의 프랑스 기사들이 그와 함께 성지로 왔지만,[3] 영향력 있는 귀족들은 그와 동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알비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에 참여하는 것을 선호했거나, 그를 충분히 중요한 인물로 여기지 않았다.[4] 장의 사촌인 몽벨리아르의 월터(Walter of Montbéliard)는 키프로스에서 추방된 후에야 그에게 합류했다.[4] 몽벨리아르는 나일 삼각주(Nile Delta)를 약탈하기 위해 해상 원정을 이끌었다.[2] 대부분의 프랑스 십자군이 성지를 떠난 후, 장은 1211년 중반까지 알-아딜과 새로운 휴전을 맺었고,[2][1]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하도록 교황 인노켄티우스에게 사절을 보냈다.[1]
마리아는 1212년 말 딸인 이사벨라를 낳은 직후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법적 분쟁을 야기했고, 이벨린의 존(존의 즉위 전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인물)은 미망인인 국왕의 통치권에 의문을 제기했다. 국왕은 메랑쿠르의 라울, 시돈 주교를 로마로 보내 교황청의 지원을 요청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13년 초 이벨린의 존을 성지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교회의 제재를 통해 그를 지지할 것을 고위 성직자들에게 촉구했다.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영주들은 국왕에게 충성을 유지하며, 그의 어린 딸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할 그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벨린의 존은 성지를 떠나 키프로스에 정착했다.
존 드 브리엔과 키프로스의 휴 1세 사이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다. 휴는 키프로스에서 존의 지지자들을 투옥하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명령에 따라서야 석방했다. 안티오키아 계승 전쟁 동안 존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4세와 템플 기사단과 함께 안티오키아의 레이몽-루팽과 휴와 요한 기사단의 지원을 받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 레오 1세에 맞섰다. 하지만 존은 1213년 안티오키아에서 아르메니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기사 50명만 보냈다. 레오 1세는 그 해 말 템플 기사단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그와 존은 화해했다. 존은 1214년 레오의 장녀인 스테파니(리타라고도 알려짐)와 결혼했고, 스테파니는 3만 베잔트의 지참금을 받았다. 존, 레오 1세, 휴 1세, 보에몽 4세 사이의 불화는 제5차 십자군이 성지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의 불화를 해결하도록 촉구하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제5차 십자군이 "엄청나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끝난 후, 장 드 브리엔은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왔다. 곧 제노바와 피사의 상인들이 아크레에서 서로 공격하여 도시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제노바 연대기에 따르면, 장은 피사를 지원했고 제노바인들은 아크르를 떠나 베이루트로 갔다.
장은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예루살렘 국왕이었고, 이집트에서 돌아오기 전에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한 성지에서 기독교 통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딸에게 적합한 남편을 찾고자 했다. 장은 자신의 부재 중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몽벨리아르의 오도를 바이유(bailli)로 임명했다.
장은 1222년 10월 새로운 십자군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장의 요청에 따라 호노리우스 교황은 십자군 중에 정복한 모든 땅을 예루살렘 왕국과 통합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군사 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3년 3월 페렌티노에서 만났다. 장은 이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황제가 장이 여생 동안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약속한 후 딸을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시키기로 동의했다.
장은 프랑스로 갔지만, 필리프 2세는 이사벨라의 결혼 결정에서 제외된 것에 불쾌해했다. 네베르 백작 마틸다 1세, 샤세네의 에라르 2세, 알베르트, 보뤼상 수도원장 및 기타 지역 유력자들은 장에게 그들의 분쟁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는 그가 고국에서 존경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장은 7월 생드니 대성당에서 필리프 2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필리프는 성지 방어를 위해 15만 마르크 이상을 유산으로 남겼다. 장은 그 후 프랑스로 돌아온 후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장은 1224년 3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갔다. ''카스티야 왕들의 라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레온 왕국으로 가서 알폰소 9세의 장녀 중 한 명 (산차 또는 둘체)와 결혼하려고 했다. 알폰소는 그에게 "그녀와 함께" 왕국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결혼은 산차와 둘체의 이복동생인 페르난도 3세의 레온 왕위 계승권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아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페르난도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베렌가리아는 딸(레온의 베렌가리아)을 장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장이 산차나 둘체와 결혼하려는 계획에 대한 연대기의 기록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프랑스의 왕비(카스티야의 베렌가리아의 여동생인 카스티야의 블랑슈)가 조카와 장의 결혼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는 동의한다. 장과 베렌가리아의 결혼식은 1224년 5월 부르고스에서 거행되었다.
약 석 달 후, 그는 메츠에서 황제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를 만나고 그의 후견인인 엔겔베르트, 쾰른 대주교를 방문했다. 독일에서 장은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호노리우스 교황을 설득하여 황제 프리드리히가 십자군을 2년 연기하도록 허락했다.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의 왕비로 즉위한) 장의 딸 이자벨라와 1225년 11월 9일에 결혼했다. 장과 프리드리히의 관계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에르눌 연대기의 한 판본에 따르면, 장은 프리드리히가 이자벨라의 시녀인 이자벨라의 조카를 유혹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위와 의견이 충돌했다. 연대기의 다른 판본에서는 장이 종종 사위를 "꾸짖고 질책"했는데, 프리드리히는 장이 조카인 발터 4세를 위해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하려고 했고 장을 살해하려고 시도했다고 결론지었다(장은 로마로 도망쳤다). 프리드리히는 이자벨라가 자신과 결혼했을 때 장이 예루살렘 왕국의 권리를 상실했다고 선언했으며, 1225년 12월 처음으로 예루살렘 왕이라고 자칭했다. 시돈의 발리앙, 모가스텔의 시몽, 티레 대주교 및 이탈리아로 이자벨라를 호위했던 다른 예루살렘 영주들은 프리드리히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2. 3. 제5차 십자군
1213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지 해방"(예루살렘 탈환)을 주요 목표로 하는 제5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였다.[1] 레오폴트 6세가 이끄는 첫 번째 십자군 부대는 1217년 9월 초 아크레에 상륙하였다.[1] 헝가리의 안드라시 2세와 그의 군대는 같은 달에 합류하였고,[1] 휴 1세와 보에몽 4세도 곧 십자군에 합세하였다.[1] 그러나 전년도 흉작으로 인한 기근으로 수백 명의 십자군이 곧 유럽으로 돌아갔다.[1] 십자군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여기던 안드라시 2세의 천막에서 전쟁 회의가 열렸다.[1] 특히 장 드 브리엔을 포함한 다른 지도자들은 안드라시의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1] 십자군은 식량과 사료를 구하기 위해 알-아딜 1세가 통치하는 인근 지역을 습격하여, 술탄이 1217년 11월에 후퇴하게 만들었다.[1] 12월, 장 드 브리엔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4세만이 합류한 가운데 타보르 산에 있는 아이유브 왕조의 요새를 포위 공격하였다.[1] 그는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했고, 당대의 자크 드 비트리에 따르면 "이교도들을 고무시켰다".[1]
1218년 초, 안드라시 2세는 휴 1세와 보에몽 4세를 남겨둔 채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1] 그들이 출발한 후 군사 행동은 중단되었지만, 십자군은 카이사레아와 샤토 펠르랭의 방어 시설을 복구하였다.[1] 4월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새로운 부대가 도착한 후, 그들은 이집트 침공을 결정했다.[1] 그들은 장 드 브리엔을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하여 그가 정복할 땅을 통치할 권리를 부여했다.[1] 그의 지도력은 주로 명목상이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군대에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1]
십자군은 1218년 5월 나일 강변의 다미에타를 포위 공격하였다.[1] 8월 24일에 인근 섬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탑을 점령했지만,[1] 알-아딜 1세의 뒤를 이은 알-카밀은 나일 강의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1] 9월에 호노리우스 3세의 특사인 펠라기우스 추기경(그는 자신을 십자군 원정의 최고 사령관으로 여겼다)이 이끄는 증원군이 이탈리아에서 도착했다.[1]
10월 9일, 이집트군은 십자군 진영을 기습 공격하려 했지만, 장 드 브리엔이 그들의 움직임을 발견했다.[1] 그와 그의 수행원들은 이집트 선봉대를 공격하여 궤멸시켜 주력 부대의 진격을 저지했다.[1] 십자군은 다미에타 근처 나일 강에 부유식 요새를 건설했지만, 폭풍으로 이집트 진영 근처로 밀려갔다.[1] 이집트군은 요새를 점령하여 수비대 대부분을 사살했다.[1] 공격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두 명뿐이었는데, 그들은 겁쟁이로 고발되었고 장 드 브리엔은 그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 새로운 이탈리아군을 이용하여 펠라기우스 추기경은 전략적 결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1] 그와 장 드 브리엔의 논쟁은 그들의 군대를 분노케 했다.[1] 병사들은 1219년 8월 29일 명령 없이 이집트 진영으로 돌격했지만, 곧 패배하여 거의 궤멸당했다.[1] 뒤이은 혼란 속에서 장 드 브리엔,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그리고 귀족 십자군의 협력만이 이집트군이 그들의 진영을 파괴하는 것을 막았다.[1]
10월 말, 알-카밀은 사자를 십자군에게 보내 이집트에서 철수하면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자렛을 십자군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1] 장 드 브리엔과 세속적인 영주들은 술탄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펠라기우스와 군사 수도회 수장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무슬림들이 세 도시를 쉽게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1] 결국 십자군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1] 알-카밀은 십자군 진영을 가로질러 다미에타에 식량을 보내려고 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11월 3일에 사로잡혔다.[1] 이틀 후,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급습하여 도시를 점령했다.[1] 펠라기우스는 그것을 교회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장 드 브리엔이 십자군 진영을 떠나겠다고 위협하자 그의 통치권(적어도 일시적으로)을 인정해야 했다.[1] 장 드 주앙빌에 따르면, 장 드 브리엔은 다미에타 전리품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그 후 몇 달 동안 그곳에서 주조된 동전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1] 알-카밀의 형제이자 다마스쿠스의 아미르였던 알-무아잠은 1219년 말 이전에 예루살렘 왕국을 침략하여 카이사레아를 약탈했다.[1]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점령하기 몇 달 전, 장 드 브리엔의 장인 레오 1세가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어린 딸 이사벨라에게 물려주었다.[1] 장 드 브리엔과 레오의 조카인 레이몽-루팽은 유언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각각 자신이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220년 2월 서한에서 호노리우스 교황은 장 드 브리엔을 레오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선포했다.[1] 키리키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장 드 브리엔은 1220년 부활절 무렵 다미에타를 떠나 예루살렘 왕국으로 갔다.[1] 전년도 알-무아잠의 성공적인 원정도 장 드 브리엔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압박했지만, 자크 드 비트리와 다른 제5차 십자군 원정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십자군을 버렸다고 적었다.[1]
장 드 브리엔이 도착한 직후 스테파니가 사망했다.[1] 당대 자료들은 장 드 브리엔이 딸 이사벨라 2세를 독살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심하게 구타하여 갑작스러운 죽음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1] 그들의 외아들은 몇 주 후 사망하여 장 드 브리엔의 키리키아에 대한 주장은 끝났다.[1] 호노리우스 교황이 스테파니와 그녀의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직후, 그는 레이몽-루팽을 키리키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선포하고, 장 드 브리엔이 고인이 된 아내의 상속 재산을 위해 싸우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1]
장 드 브리엔은 몇 달 동안 이집트의 십자군에게 돌아오지 않았다.[1] 성지의 고위 성직자들이 필리프 2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자금 부족으로 장 드 브리엔이 그의 왕국을 떠나지 못했다.[1] 그의 조카인 발터 4세가 성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장 드 브리엔은 1221년 브리엔 백작령을 포기했다.[1] 장 드 브리엔이 이집트에 없는 동안 알-카밀은 1221년 6월에 다시 성지를 예루살렘 왕국에 돌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펠라기우스는 거절했다.[1] 장 드 브리엔은 이집트로 돌아와 호노리우스 교황의 명령에 따라 1221년 7월 6일 십자군에 다시 합류했다.[1]
십자군 군대의 사령관들은 필리프 도비니에 따르면 장 드 브리엔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침공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1] 십자군은 만수라에 접근했지만, 이집트군은 그들의 진영을 봉쇄했다.[1] 수적으로 열세인 펠라기우스는 8월 28일 알-카밀과 다미에타를 맞바꾸는 대신 8년간의 휴전에 동의했다.[1] 장 드 브리엔은 9월 8일 십자군이 다미에타에서 철수할 때까지 알-카밀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십자군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1] 제5차 십자군이 "엄청나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끝난 후, 장 드 브리엔은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왔다.[1]
2. 4. 라틴 제국의 황제
제5차 십자군이 실패로 끝난 후, 장 드 브리엔은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왔다.[2] 곧 제노바와 피사의 상인들이 아크레에서 서로 공격하여 도시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2] 제노바 연대기에 따르면, 장은 피사를 지원했고 제노바인들은 아크레를 떠나 베이루트로 갔다.[2]
장은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예루살렘 국왕이었고,[3] 이집트에서 돌아오기 전에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구하기로 결정했다.[2] 그는 또한 성지에서 기독교 통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딸에게 적합한 남편을 찾고자 했다.[2] 장은 자신의 부재 중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몽벨리아르의 오도를 바이유(bailli)로 임명했다.[2]
장은 1222년 10월 새로운 십자군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2] 장의 요청에 따라 호노리우스 교황은 십자군 중에 정복한 모든 땅을 예루살렘 왕국과 통합해야 한다고 선포했다.[2] 군사 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3년 3월 페렌티노에서 만났다.[3] 장은 이 회의에 참석했다.[4] 그는 황제가 장이 여생 동안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약속한 후 딸을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시키기로 동의했다.[4]
장은 1224년 3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갔다.[4] 약 석 달 후, 그는 메츠에서 황제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를 만나고 그의 후견인인 엔겔베르트, 쾰른 대주교를 방문했다.[4] 독일에서 장은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호노리우스 교황을 설득하여 황제 프리드리히가 십자군을 2년 연기하도록 허락했다.[4]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의 왕비로 즉위한) 장의 딸 이자벨라와 1225년 11월 9일에 결혼했다.[3] 장과 프리드리히의 관계는 긴장되기 시작했다.[4] 프리드리히는 이자벨라가 자신과 결혼했을 때 장이 예루살렘 왕국의 권리를 상실했다고 선언했으며, 1225년 12월 처음으로 예루살렘 왕이라고 자칭했다.[4] 시돈의 발리앙, 모가스텔의 시몽, 티레 대주교 및 이탈리아로 이자벨라를 호위했던 다른 예루살렘 영주들은 프리드리히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4]
호노리우스 교황은 프레드릭의 일방적인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한을 예루살렘의 정당한 왕으로 여겼다.[4] 롬바르드 동맹(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동맹)을 이용하려는 시도로, 요한은 볼로냐로 갔다.[4] 요한은 6개월 이상 볼로냐에 머물렀다.[4] 임종을 앞둔 호노리우스 교황은 1227년 1월 27일에 요한을 토스카나(교황령의 일부)에 있는 성 베드로의 재산의 수장으로 임명했고,[4] 프레드릭 2세에게 그를 예루살렘 왕국의 왕좌로 복위시킬 것을 촉구했다.[4] 호노리우스의 후계자 그레고리우스 9세는 4월 5일에 교황령 내에서 요한의 지위를 확인했고,[4] 페루자 시민들에게 그를 그들의 ''포데스타''로 선출하라고 명령했다.[4]
그레고리우스는 1227년 9월 29일에 프레드릭 2세를 파문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성지로 십자군을 이끌겠다는 맹세를 어겼다는 것이었다.[3] 황제는 시리아로 두 개의 함대를 파견했지만, 역병으로 인해 돌아와야 했다.[3] 그의 아내 이사벨라는 1228년 5월 아들 콘라트를 낳은 후 사망했다.[4] 이사벨라의 미성년 시절 요한이 설정한 선례에 따라 프레드릭은 자신을 예루살렘의 왕으로 여기는 것을 계속했다.[4]
우르슬링겐의 라이날드의 지휘 아래 제국군이 1228년 10월에 교황령을 침략하여 소위 열쇠 전쟁이 시작되었다.[4] 요한은 일련의 전투에서 침입자들을 물리쳤지만,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다른 교황군의 역침략이 라이날드를 술모나로 몰아내는 데 필요했다.[4] 요한은 포위 공격을 한 후 1229년 초 페루자로 돌아와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의 사절들과 협상을 마무리했는데, 그들은 그에게 황제의 왕관을 제안했다.[4]
1228년 1월, 라틴 황제 로베르 1세가 사망했다. 그의 동생인 발두인 2세가 계승했지만, 발두인이 열 살이었기 때문에 라틴 제국의 통치를 위한 섭정이 필요했다. 이반 아센 2세는 섭정직을 수락할 의향이 있었지만,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그가 라틴 제국을 불가리아와 통합하려는 것을 의심했다.[4] 그들은 대신 교황청의 동맹국인 장에게 황제의 왕관을 제안했다.[4]
수 개월간의 협상 끝에, 장과 라틴 제국 사절들은 페루자에서 조약에 서명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29년 4월 9일에 이를 승인했다. 장은 발두인 2세와 함께 종신 라틴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으며, 발두인 2세는 장의 딸인 마리와 결혼했다. 이 조약은 또한 발두인이 20세가 되면 소아시아의 라틴 영토를 통치할 것이지만, 장의 사망 후에야 비로소 단독 황제가 될 것이라고 규정했다. 장은 또한 그의 아들들이 에피루스와 마케도니아를 상속받을 것이라고 명시했지만, 이 두 지역은 여전히 테살로니카 황제 테오도로스 두카스에게 속해 있었다.
조약 체결 후, 장은 술모나로 돌아갔다.[4] 장은 1229년 초에 카푸아에 대한 원정을 시작한 펠라기우스 추기경에 합류하기 위해 술모나 포위 공격을 해제했다.[4] 프리드리히 2세 (성묘 교회에서 예루살렘 왕으로 스스로 대관했던)가 이탈리아로 돌아와 교황군의 철수를 강요했다.[4]
장은 콘스탄티노플로 함께 갈 전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4]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장의 라틴 제국 원정을 십자군으로 선포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합류한 사람들에게 십자군에게 주어지는 교황 특권을 약속했다.[4] 그는 1230년 말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4] 장의 사절들은 베네치아 도제 자코포 티에폴로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는 장이 라틴 제국에서 베네치아의 소유지와 특권을 확인해주는 대가로 그와 그의 수행원 500명의 기사와 5,000명의 일반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플로 수송하는 데 동의했다.[4] 장이 8월에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직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주장을 인정했다.[4]
1231년 가을, 요한은 아이야 소피아 성당에서 황제로 즉위했다.[4] 당시 그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인들은 그에게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한 3세 바타체스에 대한 전쟁을 촉구했다. 바타체스는 크레타에서 베네치아의 지배에 대한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다.[4] 필리프 무스케의 ''운율 연대기''에 따르면, 요한은 "전쟁도 평화도 할 수 없었습니다".[4] 그가 니케아 제국을 침략하지 않았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그와 함께 온 대부분의 프랑스 기사들은 즉위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4] 라틴 제국의 재정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요한의 가장 강력한 봉신인 아카이아의 제프리 2세는 즉위 후 그에게 매년 3만 개의 ''히페르피라''를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요한 3세 바타체스가 로드스를 침략한 것을 이용하여, 요한은 1233년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제국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4] 그의 3~4개월간의 원정은 "거의 또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라틴인들은 오직 페가이 (현재 터키의 비가))만 점령했다.[4] 요한의 승인을 얻어, 두 명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와 두 명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사는 1234년 라틴 제국과 니케아 제국 간의 휴전을 중재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결코 체결되지 않았다.[4] 그들의 협상을 묘사하는 편지에서, 수사들은 요한을 용병들에게 버려진 "빈곤자"로 묘사했다.[4]
요한 3세 바타체스와 이반 아센 2세는 1235년 초 라틴 제국을 분할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바타체스는 곧 소아시아와 갈리폴리에 있는 제국의 마지막 전초 기지를 장악했고, 아센은 트라키아의 라틴 영토를 점령했다. 다른 곳을 침략하기 위한 방편으로, 방어자들을 한 곳에 모으도록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되었다.[4] 포위자들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도시 성벽에 대한 모든 공격을 격퇴했다.[4] 무스케는 그의 ''운율 연대기''에서 그를 헥토르, 롤랑, 오지에르와 유다 막카베우스에 비유하며 그의 용기를 강조했다.[4]
베네치아 함대는 바타체스의 해군을 철수하게 만들었지만, 베네치아인들이 귀환한 후 그리스인들과 불가리아인들은 1235년 11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4] 요한은 유럽 군주들과 교황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4] 라틴 제국의 생존이 위태로워짐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는 십자군에게 성지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할 것을 촉구했다.[4]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아카이아의 제프리 2세의 연합 해군이 봉쇄를 돌파했다.[4] 아센은 곧 바타체스와의 동맹을 포기했고, 바타체스는 1236년 포위를 해제해야 했다.[4]
2. 5. 죽음
13세기 저술가 매슈 패리스, 살림베네 디 아담, 베르나르 드 베스에 따르면, 장 드 브리엔은 사망하기 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가 되었다. 이들은 장의 건강 악화가 그의 개종에 기여했다는 데 동의하지만, 베르나르는 늙은 황제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라는 반복되는 환영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13세기 자료는 장이 1237년 3월 19일에서 23일 사이에 사망했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한 유일한 라틴 황제였다고 제시한다.
《랭스의 음유시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묻혔다. 페리는 프란치스코회 수사로 사망한 장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갈라타에 세워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된 프란치스코회 교회에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 주세페 제롤라가 제안한 세 번째 이론에 따르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하층 성당에 라틴 제국의 문장으로 장식된 묘비는 발터 6세가 장을 위해 세웠을 수 있다.
3. 가족
1214년, 장은 아르메니아의 레오 2세의 딸 아르메니아의 스테파니와 두 번째 결혼했다. 스테파니는 1220년에 아들을 낳았지만, 그 해에 아들과 함께 사망했다.
1224년, 장은 레온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의 베렌가리아의 딸 레온의 베렌가리아와 세 번째 결혼했다. 장과 베렌가리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이름 출생-사망 비고 브리엔의 마리 1224년 ~ 1275년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와 결혼 알퐁스 1220년대 후반 ~ 1270년 프랑스의 대 궁내장, 외(County of Eu) 획득 브리엔의 루이 1230년경 ~ 1263년 이후 장 1230년대 초 ~ 1296년 프랑스의 대 숙수
참조
[2]
서적
十字軍全史
[3]
서적
(제목 없음)
[4]
서적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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